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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폭동은 한인사회 변화 분기점"…할리우드 한인들 30주년 행사

한인 영화배우 존 조와 윌 윤 리 등 다수의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1일 LA한인타운 인터크루에서 LA폭동 30주년 스토리 텔링 행사가 개최됐다.     ‘할리우드 한인 리더그룹(Korean Americans Leaders in Hollywood·KALH)’이 주최한 ‘LA폭동 30주년-LA스토리 사이구’에는 할리우드 영화배우들을 비롯해 정치인, 엔터테인먼트 업계 관계자 등 130여명이 참석했다.     기조연설자로 무대 위에선 이들은 LA폭동 당시 아픔을 되새기며 그간 한인사회의 변화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전했다.     영화 ‘007 어나더데이’ 등으로 알려진 윌 윤 리는 가주에서 소매업소를 운영하셨던 부모님 역시 폭동의 여파로 셀 수 없이 많은 피해와 불이익을 당했다고 전했다.     그는 태권도 사범이었던 아버지에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치셨지만, 가주로 이사를 오면서 다른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고 전했다.     리씨는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에게) 폭동을 알리고 교육하길 원하셨다”며 “지금 한인 커뮤니티가 같은 방향으로 가며 이러한 일에 힘써주어 기쁘다”고 전했다.     영화 ‘아메리칸 파이’, ‘서치’ 등으로 잘 알려진 존 조는 LA폭동을 주제로 발간한 저서 ‘트러블메이커(Troublemaker)’를 언급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이민 와서 외국인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던 한인들에게 폭동은 정체성에 관해 관심을 갖게 해주는 계기가 된 것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책을 위해 인터뷰를 하면서 이민 와서 외국인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던 한인들에게 폭동은 정체성에 관해 관심을 갖게 해주는 계기가 된 것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이어 “자녀들을 교육하랴, 사업을 운영하랴 바빴던 한인들은 폭동 이후 정치력 신장과 주류사회에 뛰어드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며 “그런 의미에서 폭동은 결정적 역할을 했고 한인사회는 오랜 기간 많은 변화를 거듭했다”고 폭동이 남긴 의미에 대해 평가했다.   장수아 기자429특집

2022-05-02

“책임 요구할 것” 한인 피해자들 모였다

4·29 LA폭동 당시 약탈과 방화 피해를 보고 정신 상담까지 받은 한인 피해자들이 정부의 사과를 받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한인 피해자 그룹은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 참여할 당시 피해자들을 찾는 캠페인을 진행하는 한편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활동 내용을 알리고 한인 커뮤니티의 지지를 받겠다는 입장이다.   지난달 29일 JJ그랜드호텔에 마련된 ‘4·29폭동 피해자 권익 모임’에 참여한 한인 피해자들은 이구동성으로 “LA폭동은 피해자는 많은데 가해자가 없다. 30년이 지나도 누구도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며 “지금이라도 당시 한인들이 입은 피해 사실을 주류 사회에 제대로 알리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모임에는 폭동 피해자 5명과 당시 피해자들을 상담한 카운슬러 2명, 정신과 전문의 2명 외에 법정 통역관까지 10여 명이 참석했다.     폭동 당시 6가와 알바라도 인근에서 잡화점을 운영했다가 방화로 가게가 전소했다는 김영철(80)·영애(78) 부부는 “폭동으로 비즈니스를 잃고 집도 잃었다”며 “자녀들은 잊고 살라고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우리가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돼 참석했다”고 말했다.     버몬트와 59가에서 운영하던 옷가게가 다 타버렸다는 방문석씨 역시 “당시 한인들을 향한 차별은 지금 아시안들에게 일어나는 증오범죄와 다르지 않다”며 “지금이라도 우리가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같은 일은 되풀이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참여한 정신과 전문의들과 카운슬러들도 같은 입장을 보였다.   당시 LA카운티가 운영하는 ‘아태카운슬링&치료센터(APCTC)’에 2주 동안 파견돼 한인 피해자들을 진료했다는 정병래 정신과 전문의(은퇴)는 “갑작스럽게 폭동 피해자가 된 한인들의 정신적인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진료를 받는 한인들이 너무 많아 약국마다 처방약이 부족했을 정도였다”며 “지금이라도 당시 피해에 대한 사과를 받는다면 피해자들에게 남아 있는 당시 상처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모임을 준비한 조만철 전 APCTC 디렉터이자 정신과 전문의는 “소송을 준비하는 이유는 보상금 때문이 아니다. 더 이상 한인 커뮤니티에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정부의 사과를 받아낼 수 있도록 한인 피해자들을 도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4·29폭동 피해자 권익 모임: (310)713-8382 장연화 기자429특집

2022-05-01

"LA는 우리 모두의 터전"

가세티 등 각계 120명 참석 차세대, 폭동 의의 되새겨야   “어디에서 왔는지, 부모 고향이 어디인지, 어느 언어를 사용하는지, 외모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상관없이 이곳은 우리 모두의 터전입니다.”   에릭 가세티 LA 시장은 지난달 30일 한미연합회(KAC)와 미주한인위원회(CKA)가 공동 주관한 ‘4·29 LA폭동 30주기 기념 차세대 리더십 콘퍼런스(SAIGU@30 Leadership Conference)’ 기조연설에서 LA시는 출생 신분과 출신 국가를 떠나 이곳에 살고 있는 모든 이의 터전이라면서 폭동 트라우마도 함께 치유해 나가자고 했다.   가세티 시장은 “리커스토어 운영은 가장 위험한 비즈니스였다. 아버지(길 가세티)가 시 검사장이 되기 전 일반 시민이었을 때, 한인타운을 할퀴고 간 폭동 잔해를 청소했던 장면을 기억한다”고 폭동을 회상하면서 “가족을 잃은 이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적인 것은 이후 여러 커뮤니티 간 관계가 깊숙해졌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낙원에 살고 있지만 이를 숨기려 하지 않는다. 아픔을 안고 전진해 나아가는 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이어 나가고 미래의 힘을 기르자(Reflect, Connect, Empower)’를 주제로 한 이날 콘퍼런스는 LA한인타운 라인호텔에서 진행됐으며 한인사회 각계각층 리더를 포함해 약 120명이 참석했다.   이어진 한인 정체성과 리더십 패널 토론에는 민주당 소속의 한인 연방 하원의원인 매릴린 스트릭랜드(워싱턴 10지구)와 앤디 김(뉴저지 3지구) 의원이 나왔다.     아버지가 흑인, 어머니가 한인인 스트릭랜드 의원은 “군인 가정 중 흑인과 아시안 부부가 많다. 내가 다니던 교회 교인 전원이 흑인 아버지와 한인 어머니 가정이었다”며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한인과 흑인이 잘 융화된 커뮤니티로만 여겼다. 그런데 LA폭동을 보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백인우월주의 시스템이 폭동을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앤디 김 의원은 “이렇게 많은 청중이 콘퍼런스에 참여했다는 게 화합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백인 85%, 한인 1%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먼저 친구로 다가가야 다른 커뮤니티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유니스 송 KAC 대표는 “미래 한인사회를 이끌어 갈 대학생, 갓 사회에 진출한 청년 리더, 젊은 전문가들과 함께 LA폭동의 의의를 되새기고 오늘날 한인 사회 및 한인 정체성 형성과 발전에 미친 영향에 관해 이야기하고, 비전과 도전 의식을 심어주고 싶다”고 행사 취지를 밝혔다.   한편 이날 콘퍼런스에는 ▶긱와이어(GeekWire) 공동창업자이자 아시안 엔터테인먼트 플랫폼 ‘조이소스(JoySauce)'를 최근 출범한 조나선 스포사토 CEO ▶푸드 블로거이자 '코리안 비건'의 저자 조앤 몰리나로 ▶CJ E&M 아메리카 대표 안젤라 킬로렌 ▶'헤로니모'와 '선택받은 자'를 제작한 전후석 영화감독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 데이비드 최 콘래드 N 힐튼 교수 ▶방사선 종양학 의사 폴 송 ▶할리우드에서 활약 중인 영화배우 이기홍 등이 패널로 참여했다.     원용석 기자429특집

2022-05-01

"벽화에는 갈등해소의 메시지 담겨"

30년 전 LA폭동으로 잿더미가 됐던 자리에 화합과 치유를 의미하는 벽화가 그려졌다.   LA폭동 30주년을 맞아 29일 오전 11시 잉글우드 지역 맨체스터 불러바드 인근 ‘S&H 리커스토어’ 주차장에서는 한·흑 우정의 벽화 제막식이 열렸다.   벽화의 주인공은 S&H 리커스토어 서성호·경옥 부부와 흑인 직원 리차드 힉스〈본지 4월29일자 A-1면〉로 이날 제막식에는 메릴린 스트릭랜드 워싱턴주 연방하원의원, 홀리 미첼 LA카운티수퍼바이저, 한인민주당협회 스티브 강 회장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메릴린 스트릭랜드 연방하원 의원은 “나는 한인과 흑인 혼혈로 두 인종을 모두 대표할 수 있다”며 “지난 과거를 잊지 말고 이제는 서로 화합하며 미래를 위해 고민하며 함께 나아가자”고 말했다.   이번 벽화 제작은 업주 서성호 씨의 장남 폴 서(가주 법무부 차관 검사)씨가 추진했다.   폴 서 씨는 이날 아버지를 대신해 “벽화가 그려진 이곳은 LA 사태 당시 전소됐다. 이후 재건을 통해 이제는 잉글우드 지역사회의 일부분으로 자리잡게 됐다”며 “이 벽화는 30년 전 폭동의 사실을 알리고 서로 의지하고 함께 할 때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제막식에는 S&H 리커스토어 단골 고객은 물론 잉글우드 지역 주민들도 일부 참석해 벽화 제작을 축하했다.   LA카운티 홀리 미첼 수퍼바이저는 “역사의 본질을 알아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며 “벽화에 있는 서씨 부부와 리차드 힉스와의 우정은 갈등 해소를 위한 평화의 메시지이며 이를 통해 우리의 또 다른 30년 후를 그려본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벽화는 한인민주당협회(KADC) 주최로 홀리 미첼 LA카운티 수퍼바이저, LA 한인회 등이 도왔다. 한인 2세인 애니 홍과 줄리아 전 아티스트가 벽화를 그렸다. 벽화는 LA카운티 예술 기금 2만 달러를 지원받아 1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제작됐다. 김예진 기자429특집

2022-04-29

"폭동 피해불구 한인사회 번영"…주류언론 30주년 집중조명

LA폭동 30주년을 맞아 주류 언론들도 역사적 의미 등을 집중 조명했다.   로드니킹재단의 로라 킹 대표는 29일 ABC7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늘 ‘우리가 모두 어울려서 잘 지낼 수 있을까’라고 말씀하셨다”며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것, 그것이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라고 말했다.   로라 킹은 LA폭동을 촉발했던 백인 경관 무죄 판결과 관련, 당시 경관에게 구타를 당했던 로드니 킹의 딸이다.   에릭 가세티 LA시장도 이날 “1992년은 LA의 트라우마(trauma)이자 전환점의 순간이었다”며 “파괴와 고통 속에 회복하고 더 강하게 거듭나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LA카운티셰리프 국장 선거에 나선 세림 램보 LA공항경찰국 국장은 NBC와의 인터뷰에서 “LA폭동과 같은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법 집행 기관이 흑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라며 “우리는 이제 부당한 일을 멈춰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을 대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일”이라고 전했다.   캐런 배스 LA시장 후보는 흑인 음악 전문 채널인 BET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사우스LA는 마약 판매도 심각했고 경찰의 과잉진압 문제 등 수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며 “참담했지만 1992년 이후 여러 공공 정책으로 인해 지역 사회가 변하기 시작했고 지금 LA는 다양성 측면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냈다”고 말했다.   유대계 신문 ‘쥬이시 저널’에서도 LA폭동 30주년을 조명했다. 에릭 가세티 LA시장의 아버지인 길 가세티 전 LA시 검사의 경우 한인 1세대 이민자를 극찬했다. 길 가세티 전 검사는 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인 1세대 이민자들과 그 다음 세대는 폭동으로 인한 피해에도 오늘날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며 “그들의 자녀들은 오늘날 미국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며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열 기자429특집

2022-04-29

[LA 폭동 30주년] 한흑 손잡고 앞으로 30년 화합 다짐

“이제 다음 30년을 내다봅시다. 우리는 아픔과 고통이 가득했던 과거를 통해 배운 교훈들로 다른 미래를 그릴 수 있습니다. 화합의 힘은 우릴 이끌 것입니다. 저와 함께하시겠습니까?”      흑인사회 대표적인 리더 중 한 명인 홀리 미첼 LA카운티 수퍼바이저 위원장의 물음에 수백 명이 박수갈채와 함성으로 화답했다.      1992년 4월 29일. 로드니 킹 구타 경관의 무죄 평결에 대한 흑인들의 분노 화살은 한인들에게 향했고, LA한인타운은 잿더미가 됐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픔이 됐던 그 날로부터 꼬박 30년이 흘렀다.  쓰라린 기억이 다시 한번 회고된 29일 LA한인타운 한복판에서 손을 맞잡은 한·흑 커뮤니티는 함께 나갈 미래를 꿈꿨다.     이날 오후 4시 LA한인타운 리버티 파크 잔디광장에서 진행된  ‘LA 폭동, 사이구(SAIGU·4·29) 평화 기원 행사’에는 500여명의 인파가 몰렸다.     무대에 선 한인 리더 1명이 마이크를 잡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Stop Asian Hate!(아시안 증오를 멈춰라).”     곧이어 잔디밭에 모인 수백 명이 이를 재창하며 크게 환호했다. 팬데믹 이후 촉발됐던 흑인과 아시안 인권 운동의 대표적인 구호를 외치며 서로의 권익을 위해 힘써야할 메시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날 행사 주최측인 LA한인회, 한인타운청소년회관(KYCC), 한미연합회(KAC), 아태정의진흥협회 LA지부, 흑인 대형교회인 퍼스트에이미처치(AME)와 흑인 인권단체 LA어번리그 관계자들은 함께 나란히 무대에 올랐다.     제임스 안 LA한인회장은 “오늘(29일)은 한인 이민 역사의 상처이자 아픔인 4.29폭동 30주년. 한인들은 버려졌다는 충격과 방화, 약탈의 피해로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안 회장은 “흑인, 라티노 그들 역시 우리처럼 힘든 이민 생활과 인종차별들을 겪어야 했다. 4·29폭동은 한흑 문제가 아니라 소수민족에 대한 구조적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 후세들을 교육하고 이웃 커뮤니티와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방의회에서 유일한 한흑 혼혈 여성인 메릴린 스트리클런드 연방 하원의원도 이날 행사에 참석해 무대에 섰다.     그는 “아시안들은 흑인을 위해, 흑인들은 아시안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강조하며 “그간 최고라는 (미국의) 시스템은 우리를 갈라놓으려 했고, 우리가 나누고 있는 것에 대해 집중할 기회가 적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한인과 흑인은 함께 서서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지역사회와 스몰 비즈니스 투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우리가 뭉친다면 더 큰 힘과 용기와 강한 목소리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 이날 광장에는 화합의 열기로 가득했다.     단순히 한인과 흑인들의 연대 행사가 아니었다. 아시안과 히스패닉계 등 다양한 인종과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한마음이 되어 그날의 아픔을 새겼고, 평화를 염원했다. 모두가 하나가 되는 화합의 잔치였다.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 폭동을 경험했다는 김모 할머니(70)는 이날 어린 손자와 함께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30년간 많이 변화했다. 하지만 우린 계속 한흑 간의 갈등은 끊고 연합을 위해 애써야 한다”며 “손자가 살아갈 세상에선 폭동 같은 일이 다신 없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아픔과 눈물이 묻힌 그 자리엔 어느새 ‘화합’이라는 한 떨기의 꽃이 피었다. 대해  집중할 기회가 적었다"고 말했다. 장수아 기자429특집

2022-04-29

한인 폭동 피해자 70%가 화병으로 고통

30년 전 발생한 LA폭동 당시 약탈과 방화를 경험한 한인 피해자 4명 중 1명은 정신과 진료가 필요할 만큼 정신적인 피해를 호소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피해자들의 70%는 화병을 경험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LA한인타운 6가와 놀만디에 위치한 LA카운티 ‘아태카운슬링&치료센터(APCTC)’ 디렉터였던 조만철 정신과 전문의가 27일 공개한 기록에 따르면 약 2000명이 재난 전문 카운슬러와 만나 상담받았으며, 이 중 70%가 화병을 경험했다.     전체 상담자 중 27%인 537명은 정신과 전문의에게 인계돼 진찰받았다. 특히 정신과로 넘겨진 환자 중 50%는 우울증 증세가 심각하다는 진단을 받아 처방약을 단기 복용했으며, 12%는 2개월 이상 장기 치료를 받았다.     당시 직접 경제적 피해를 본 1세 한인 부모 세대뿐만 아니라 청소년 시기였던 한인 1.5세~2세 자녀들도 함께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상담을 받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인 1세 피해자들이 호소한 화병 증세로는 ▶불면증 ▶무기력 ▶답답함 ▶분노 ▶식욕 감퇴 ▶건망증 등이다. 반면 자녀들의 경우 ‘불안하다’는 증세가 가장 컸던 것으로 드러났다.   진료를 받은 약 25%는 충격에서 회복돼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25%가량은 우울증이나 분노조절 장애 등이 심해지면서 간질이나 암에 걸리는 케이스도 보고됐으며, 이혼 또는 가정폭력으로 연결된 경우도 나왔다.       조 전문의가 갖고 있는 당시 기록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연방 재난관리청(FEMA)에도 남아 있다. FEMA가 당시 폭동 피해자를 위해 제공한 상담 서비스 보고서에 따르면 1992년 11월 18일 현재 4000여명이 상담을 요청했으며 총 1401건의 카운슬링 세션이 제공됐다. 상담받은 환자들은 모두 약탈과 방화 피해자였다.       조 전문의는 “당시 차트를 보면 정신과 전문의가 진찰한 환자 중 64%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다”며 “하지만 대부분의 환자가 영어 구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어를 구사하는 정신과 전문의 10명이 전담해 치료했지만 중간에 치료를 그만둔 한인들도 많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일반적으로 성인들이 받은 정신적 충격만 생각하지만 당시 피해자의 자녀들이 받은 정신적 충격도 매우 컸다”며 “당시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지금까지 치료를 받는 케이스도 있다”고 전했다.     조 전문의는 “한인들은 모두 피해자다. 화면에서 지켜본 이들도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며 “이러한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하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조 전문의는 LA폭동 30주년을 기해 시 정부를 대상으로 사과를 요구하는 소송을 진행 중이다. 조 전문의는 오늘(29일) 당시 피해자들과 만나 이들과 소송 진행 상황을 논의한다.  장연화 기자429특집

2022-04-28

오늘 LA 폭동 30주년…수십년 '한흑 우정' 벽화로 빛나다

LA폭동 30주년을 맞아 화합과 치유의 벽화가 그려졌다. 한인 업주와 흑인 직원 사이의 수십년 우정이 밑그림이 됐다.     잉글우드 지역 맨체스터 불러바드 인근에 있는 ‘S&H 리커스토어’ 벽면에는 미소 띤 얼굴들이 색을 입었다. 벽화 속 주인공들은 리커스토어 업주인 서성호. 경옥 부부와 흑인 직원 리차드 힉스.   서씨 부부는 지난 1987년부터 30년 넘게 이 업소를 운영해오고 있다.     가족같은 직원 리차드와의 만남은 LA폭동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폭동 이후 갱단원이었던 리차드를 서씨 부부가 직원으로 채용한 것.   서씨 부부와 리차드의 만남은 업주와 직원 관계로 시작됐지만 믿음으로 이어진 수십년의 시간은 인종을 초월한 우정으로 변화시켰다. 리차드는 건강 상 문제로 병원에 갔다고 한다.     서성호씨는 “그동안 이곳에서 리커스토어를 운영하며 별일 다 겪었다. 하지만 흑인들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하늘로 가면 우리는 원래 다 평등한 존재 아닌가.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씨는 폭동 당시 다른 업주들처럼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동네 주민들에게 ‘파파(papa)’로 불린다. 그만큼 고객들과 친근하다. 물론 두 사람의 우정도 지역 사회에서는 이미 유명하다. 이런 이유로 S&H 리커스토어는 진정한 ‘동네 가게’로 불린다.   이번 벽화 제작은 가주법무부 차관 검사(duputy attorney general)로 일하고 있는 장남 폴 서씨가 큰 역할을 했다. 서 검사는 LA폭동 30주년을 앞두고 업소의 휑한 벽면을 아버지와 리차드의 우정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채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폭동의 아픔을 씻고 양 커뮤니티가 미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소망에서다.   서 검사는 “주변에 ‘소파이(Sofi) 스타디움’이 세워진 이후 개발붐이 일면서 건물 매각 요청이 많았지만 아버지는 절대 팔지 않겠다고 하셨다”며 “세입자나 직원들의 생계를 지켜주기 위한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고 말했다.   벽화 제작은 한인민주당협회(KADC) 주최로 홀리 미첼 LA카운티 수퍼바이저, LA 한인회 등이 도왔다. 한인 2세인 애니 홍, 줄리아 전 아티스트가 직접 벽화를 그렸다. LA카운티 예술 기금(2만 달러)을 지원받아 1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쳤다.     벽화에는 서씨 부부, 리차드의 얼굴과 함께 ‘Roots(뿌리)’ ‘Hold(유지)’ ‘Stronger(강력한)’ ‘Entwined(얽혀있는)’ ‘Together(함께)’ 등 다섯 단어가 함께 새겨졌다.   애니 홍 작가는 “이 단어들은 한인 사회와 흑인 사회의 회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며 “마음과 시선을 넓히면 두 커뮤니티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벽화 제막식은 오늘(29일) 열린다.       ☞벽화 제막식은   29일(오늘) 오전 11시 잉글우드 지역 S&H리커스토어(3000 W Manchester Blvd) 주차장에서 열린다. 한인민주당협회 스티브 강 회장, LA한인회 관계자들을 비롯한 홀리 미첼 LA카운티수퍼바이저도 참석한다. 또, 첫 한국계 흑인 혼혈 정치인인 메릴린 스트릭랜드(워싱턴주 연방하원) 의원도 이번 제막식 참석을 위해 LA를 찾았다. 김예진 기자429특집

2022-04-28

4.29 이후부터 '코리안-아메리칸' 정체성 갖게 돼

"LA폭동은 우발적 사태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조짐이 있었다. 곪아온 것이 터진 것이다."   LA폭동에 대한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소수인종학)의 분석이다. 장 교수는 한인을 포함한 미국 내 소수계 연구의 권위자다. 그는 UC버클리에서 '한흑갈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 교수에게 그날의 기억을 물었다. 그때의 기억은 30년이 지난 지금 한인사회에 의미를 남긴다.   공교롭게도 그날 오후 6시 장 교수는 LA한인타운에 일정이 있었다. 당시 웨스턴 애비뉴에 있던 우래옥 식당에서 안젤라 오 변호사와 함께 유대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흑갈등에 대한 특강을 진행했다. 식당 내에 있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때 또 한 번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뭐라고 하던가.   “저녁 8시 정도였다. LA파커센터(LAPD 본부)가 공격당하고 있으니 집에 빨리 돌아오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10번, 101번 프리웨이가 이미 모두 차단된 상태였다. 로컬 도로를 통해 샌게이브리얼까지 가서 집으로 왔다. 그날 밤새 라이브 뉴스를 봤다. 새벽녘에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그때부터 약탈당하는 한인타운의 모습이 TV 화면을 통해 나왔다.”   -당시 어떠한 조짐이 있었나.   “이미 80년대 뉴욕 지역 신문기사에 ‘Korean Invasion(한인의 침략)’이라는 제목이 나올 정도였다. 80년대 초중반 흑인 사회에서는 한인 상점 거부 운동도 자주 일어났다. LA, 뉴욕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분위기가 다 그랬다. 흑인 사회 역사를 보면 항상 외부인이 들어와서 상권을 장악해왔다. 그러다 1965년 와츠폭동 이후 유대인이 다 나가고 공백이 생겼는데 한인 이민자들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왔다.”   -공존이 왜 어려웠나.   “한인들은 흑인사회의 역사, 문화도 전혀 모른 채 그 지역으로 무작정 들어가서 사업부터 했다. 영어도 안 되고, 그들의 배경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럴만한 여력도 없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고 일터에서 12시간 이상 열심히 일만 했었다.”   (흑인사회에서는 흑백 간 경제적 불균형, 오랜 시간 이어진 높은 실업률, 질 낮은 교육, 고질적인 경찰의 과잉진압 문제 등으로 분노와 설움이 쌓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로드니 킹, 두순자 사건이 터졌다. 당시 언론 매체들은 계속해서 두 사건의 영상을 지속해서 노출하며 흑인사회를 자극했다. 장 교수는 흑인들의 분노가 그런 사건들과 연결되면서 불똥이 한인사회에 튄 것이라고 했다.)   -갈등이 핵심 원인인가.   “엄밀히 말하면 LA폭동의 원인은 ‘한흑갈등’이 아니다. 예를 들면 1986년 LA에는 한흑연맹이 있었다. 물론 LA폭동 직후 해체됐지만 한인사회와 흑인사회가 문화 교류 등을 통해 꾸준히 소통했었다. LA폭동은 사회 구조적 모순에 의해 오랜 시간 쌓여온 흑인사회의 분노가 하나의 시대적 현상으로 표출됐다고 봐야 한다.”     -해빙의 분위기는 어떻게 마련됐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인사회 곳곳에서 조금씩 자각의 목소리가 나왔다. 한 예로 당시 가주한미식품상총연합회(KAGRO)에서는 내가 흑인 사회에 관해 쓴 책을 대량 사서 회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한인 언론들도 기사, 오피니언 등을 통해 흑인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민역사에서 LA폭동이 갖는 의미는.   “한마디로 ‘전환점’이다. 이전에는 한인 이민자들이 자신을 ‘한국인’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LA폭동 이후부터 ‘코리안-아메리칸’의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폭동을 경험하면서 ‘이게 아니구나.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려면 주인의식부터 가져야 하는구나’라고 말이다. 그때부터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주장했다. 차세대를 위한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또 하나는  단일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다문화 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법, 이 부분을 자각한 게 바로 폭동 이후다.”   -30년이 지났다. 개선점은.   “한인사회는 엄청난 양적, 질적 성장을 했다. 정치력 역시 주류사회가 무시 못 할 정도는 됐다. 학계에서 젊은 학자들도 많아졌다. 다만, 1세대는 여전히 교회 중심의 커뮤니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인 교회들이 인종 간 교류와 화합, 정치 참여 등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주면 좋겠다. 2세들은 인종 간 교류 등 그런 부분에서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한다.”   -한인사회의 지향점은.   “1세대 이민자가 본국 지향적 성향을 보인다면 차세대는 그렇지 않다. 한국 이슈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LA폭동과 같은 ‘코리안 아메리칸’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이로 인해 한인사회에 대한 이해,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다. ‘내가 왜 한인사회 이슈에 참여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갖는다. 단순히 한국 문화, 언어를 가르치라는 게 아니다. 뿌리 교육을 통해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심어줘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생긴다. 그 부분에 중점을 둬야 한다.”     -한인사회에 하고 싶은 말은.   “그날 있었던 일은 동화가 아니다. 우리 한인 이민사회의 역사다. 한국사회를 보자. ‘다문화’라는 표현이 은연중에 하나의 차별적 용어가 됐다. 다른 것만 강조하면 안 된다.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는 외부에서 온 사람을 무조건 한국사회로 동화시키려 한다. 진정한 다인종 사회라면 그들이 가진 역사, 문화를 지키면서 그 사회의 일원으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LA폭동이 남긴 의미도 그렇다.” 장열 기자429특집

2022-04-27

신속한 ‘무담보 대출’ 피해자들에 재기 발판

LA폭동이 발생한 1992년, LA지역에는 6개의 한인은행이 영업 중이었다.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하면 5개 한인은행 (한미,나라,중앙,윌셔,새한)과 한국 외환은행의 미주법인(가주외환은행).     당시 한인은행 가운데 가장 큰 은행은 한미였다. 한미는 최대 한인은행 답게 신속하게 한인 폭동피해자 지원에 나섰다. 졸지에 생활터전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업주들에게 한미의 신속한 금융 지원은 단비와도 같았다.       한미는 폭동 발생 다음날인 4월 30일과 5월 1일 영업을 중단했다. 피해 예방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하지만 벤자민 홍 당시 한미 행장은 본점 앞 주유소가 불에 탔고, 버몬트 지점이 대출해 준 한 아파트에 화염병이 날아들었다는 소식 등을  접하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은행에 올 수 없는 형편인 고객들을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이어 은행 측은 폭동 피해 고객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홍 전 행장이 직원들과 함께  80여 곳에 이르는 피해 업소를 돌며 위로했다. 또 피해 상황이 파악되는 즉시 최대한의 지원책을 마련했다.      홍 전 행장은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역사’라는 책을 다시 읽었다고 한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 복구 자금이 절실했던 소상공인들을 도운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사실 당시 BofA는 없었고 전신인 이탈리아계 이민자 은행 뱅크오브이탈리아가 한 일이다. 이 은행의 설립자가 대지진 후 마차에 현금 1만 달러를 싣고 거리에서 소액대출을 해줬고 이 은행이 나중에  BofA가 된 것.       한미는 홍 전 행장의 주도로 한인 비즈니스 지원 플랜을 바로 짰다. 빠른 복구가 가능한 업소를 대상으로 무담보로 자금을 빌려줬다. 피해 정도가 심하지 않아 금방 비즈니스를 복구할 수 있는 고객에게는 10만 달러까지 신용대출을 제공했다. 또 피해자들의 재해 복구 융자 신청을 도와주기 위해 대출담당 오피서들을 피해 업소들에 보냈다.  폭동 성금을 보탠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무담보 대출 결정’이 쉽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부실 위험을 이유로 일부 이사들이 반대 의견을 냈던 것. 이에 홍 전 행장을 중심으로 경영진은 한인 커뮤니티 은행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했고, 이에 반대하던 이사들도 금세 수긍했다.       ━   이렇게 도움 받았다     #이흥률씨   폭동으로 LA의 페어팩스와 애덤스가 만나는 곳에 있던 마켓을 잃은 이흥률씨는 지금도 한미은행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1988년부터 운영했던 어드밴스 푸드마켓이 전소된 것. 모두 불에 타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구나 2년 전 마켓이 있는 건물도 인수한 상태였다. 당시 한미에 상환해야 할 대출금이 절반쯤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씨에 따르면 한미는 요청하기도 전에 원금과 이자 상환을 연기해줬다. 이후 SBA 융자와 재해보상 융자를 신청할 때도 도움을 받았다. 이런 덕에 이씨는 재기 3년여 만에 융자금을 다 갚을 수 있었다.     #김정일씨   김정일씨도 폭동 당시 사우스LA 지역 캄튼에서 그레이스 수퍼마켓이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1987년 한미에서 6만 달러를 담보 없이 융자해줘 시작한 비즈니스였다.     억척스럽게 일한 김씨는 4년 만에 SBA 융자 38만 달러를 얻어 마켓이 입주해 있던 건물까지 구입했다. 하지만 1년 만에 폭동으로 모두 불타버린 것. 건물은 보험에 들어 있었지만, 인벤토리는 포함되지 않아 다시 장사를 할 길이 막연했다. 다행히 한미를 통해 20만 달러의 SBA 대출을 받아 폭동 1년 반만인 1993년 9월 1일 영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   “커뮤니티 은행 역할 강조하며 이사들 설득”       벤자민 홍 당시 한미은행 행장   -피해자 ‘무담보 대출’에 일부 이사의 반대가 있었다던데.     “전체 이사 12명 중 절반이 반대했다. 부실 위험이 크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한미은행은 한인 이민자들이 세운 은행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사례를 얘기했더니 부정적이던 이사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한인업소가 살아야 커뮤니티 은행도 함께 산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당시 한인 피해자들을 무조건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폭동 발생 5일만인 5월4일부터 대출을 시작했다. 다른 한인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못한 한인에게도 융자를 줬다. 약식으로 만든 1장짜리 서류에 서명한 분들에게 바로 대출했다. 한인은행의 뿌리는 한인사회다. 당시에는 우리가 한인 고객을 살렸다고 뿌듯해했지만, 2009년 금융위기 때는 한인 고객들이 은행을 살렸다. 당시 무담보 융자를 받은 고객 30여 명 중 채무 변제를 하지 못한 고객은 한 명도 없었다. 은행은 고객들이 성공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베풀어야 돌아온다.”   -당시 대출해 준 분들하고 지금도 연락하나.   “일부는 지금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 생일 때마다 선물을 챙겨주는 분도 계신다(웃음).”   -폭동 30주년을 맞았는데.     “한인사회는 단기간에 성공한 이민 커뮤니티다. 이런 상황에서 백인들을 향했던 흑인들의 증오심은 한인사회로 번졌다. (박탈감에서 비롯된)모범 이민자들을 향한 분노였다. 지금의 아시안 증오범죄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그들은 성공하면 주류가 됐다고 생각한다. 유대인 친구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성공했기 때문에 증오받는 것’이라고. 폭동은 우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인사회는 다른 커뮤니티로부터 인정 받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봉사를 하려는 노력도 부족했다. 앞으로는 가시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정치적인 노력도 필수다.”   -한인사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성숙한 한인사회가 돼야 한다. 정치적인 이슈에 좀 더 신경 썼으면 한다. 우리 한인사회는 약점이 있다. 너무 개인플레이에 치중한다. 리더십이 부족하다. 성공한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원용석 기자429특집

2022-04-25

LA폭동 첫 피해장소 '한·흑화합' 행사 연다

4·29 LA폭동 30주년을 맞아 한인단체가 재발방지를 기원하는 행사를 사우스LA에서 연다. 주최 측은 1992년 4월 29일 폭동의 시발점이 된 첫 방화 피해업소 자리에서 한흑 연합행사를 진행한다고 전했다.   4·29폭동 재발방지위원회(대표 존 김)는 30일 오전 11시 사우스LA 1350 웨스트 플로렌스 애비뉴(1350 W Florence Ave, LA) 주유소 주차장에서 한흑 화합 폭동 재발방지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한인 기독교단체, 문화단체, 청소년단체 등이 참여해 흑인 커뮤니티와 폭동의 역사와 아픔을 되새길 예정이다.  주최 측은 LA시 정치인과 올림픽 경찰서 포함 사우스LA 지역 등 4개 경찰서 관계자도 참석한다고 전했다.   존 김 대표는 “1996년부터 사우스LA 지역에서 폭동 알리기와 커뮤니티 화합 행사를 진행했다가 8년 전부터 LA한인타운에서 관련 행사를 열어 왔다”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폭동 재발방지 행사를 열게 됐다. 30주년을 맞아 당시 방화가 처음 시작된 곳에서 과거를 돌아보고자 한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김 대표는 “행사는 폭동 피해자를 기리는 추모기도, 폭동 원인과 현재에 관한 이야기, 재발방지를 위한 커뮤니티 노력을 강조한 뒤 태권도, 난타 등 문화공연으로 진행한다”고 덧붙였다.     주최 측에 따르면 행사가 열리는 장소는 폭동 당시 수퍼마켓이었다고 한다. 거리로 나온 시위대는 갑자기 약탈을 자행하기 시작, 해당 수퍼마켓에 불까지 질렀다.     이후 약탈과 방화는 북쪽 LA한인타운까지 퍼졌다. 이 과정에서 사우스LA에 자리잡았던 주유소, 리커스토어 한인업주도 피해를 봤다.   김 대표는 “요즘은 한인들이 사우스LA 지역을 방문하는 일이 별로 없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지금도 사우스LA에서 리커스토어, 치킨집, 생선구이집, 빨래방을 운영하는 한인 유입이 꾸준하다. 폭동 30주년을 맞아 한인 여러분이 방화가 시작된 곳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흑인 커뮤니티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4·29 LA폭동 재발방지 행사 참석을 희망하는 사람은 당일 행사장을 찾거나 문의(213-503-2007)하면 된다. 김형재 기자429특집

2022-04-25

LA폭동 생생한 경험담 전국으로 알린다

4·29 LA폭동 30주년을 기념해 한인 이민사와 폭동 전후 한-흑, 한-라티노 관계를 돌아보는 ‘제1회 미주 한인사 콘퍼런스’가 지난 23일 LA한인타운에 위치한 김영옥 아카데미에서 개최됐다.     UC리버사이드 산하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소장 장태한 교수)가 주최하고 ‘한인사인종학자문위원회’를 포함한 한인 교육 전문가들이 준비한 이날 행사는 LA폭동 역사에 대한 장태한 교수의 기조강연에 이어 안젤라 오 변호사, 김도형 변호사, 강형원 전 LA타임스 기자 등이 나와 생생한 경험담을 증언했다.     또한 박계영 UCLA 교수와 다넬 헌트 UCLA 사회과학 학장이 LA폭동 이후 한-흑, 한-라티노 관계를 분석한 내용을 발표했다.     오후에는 교육 관계자들이 모여 한인 이민사의 중요성을 토론하고 가주에서 도입한 인종학 커리큘럼에 포함된 7가지 한인사 주제에 대한 내용과 LA폭동 관련 수업자료, 주말 한국학교에서 도입할 수 있는 한인사 교육 강연 등도 공개됐다.     주최측은 앞으로 매년 한인사 콘퍼런스를 개최하고 점차 전미 지역 콘퍼런스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장태한 소장은 “코로나 19 팬데믹 등으로 올해는 전문가들과 학자들만 참석자를 제한한 학술대회로 진행됐지만 앞으로는 학생과 학부모들도 참석하고 한국에서도 참석해 현안을 나눌수 있는 행사로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장연화 기자429특집

2022-04-24

1992→2022 LA폭동 30주년…남겨야 할 기억…풀어야 할 과제

1992년 4월29일.     꼭 30년 전, LA한인사회는 큰 시련을 겪었다. 흑인들의 분노에서 비롯된 LA폭동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     발단은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백인 경관들에 대한 무죄 평결이었다. 흥분한 흑인들은 길거리로 나섰고 금세 시위대로 변했다.       무방비 상태의 한인 업소들이 약탈과 방화의 표적이 됐다. 2200여 개 업소가 피해를 봤고, 수억 달러의 재산 손실을 입었다.     한인사회의 중심인 LA한인타운도 폭도들에 의해 곳곳이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나 재산피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분노와 좌절감이었다. 경찰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인들은 ‘아메리칸 드림’이 무너져 내림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망연자실해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인들은 불에 탄 업소를 정리하며 다시 한번 어금니를 깨물었다.     폭동은 한인사회에 큰 아픔을 줬지만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커뮤니티 파워’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정치력 신장의 이유를, 타 커뮤니티와 협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올해는 LA폭동 30주년이다.     벌써 한 세대가 흘렀다. 하지만 LA폭동이 기억에만 남아있는 ‘과거의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중앙일보가 폭동의 시작과 끝을 살펴보고, 현재의 의미를 되새기고, 차세대의 이야기도 들어본 특별섹션을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목차 02-03 폭동의 기록 04 왜 한인피해 많았나 06 경험자들이 남기는 교훈 08 2세들이 말하는 LA폭동 10-11 사진으로 보는 그날의 기억 12 좌절을 딛고 - 성장하는 정치력 14좌절을 딛고 - 커지는 경제력 16 좌절을 딛고 - 꽃피는 K문화 중심지 18 통계로 본 전국 한인사회429특집

2022-04-24

그날…광기가 LA를 집어삼켰다

1992년 5월5일자 미주중앙일보 신문 기록이다.   사진 속 정진무(당시 51세)씨는 산소 튜브를 낀 채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일주일 전(1992년 4월29일)이었다. 그날 정씨는 폭도들에게 "물건은 털어가도 좋으니 불만 지르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광기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씨는 4발의 총격을 받고 바닥에 쓰러졌다. 가슴과 배 등에 총알이 박혔다.   정진무씨의 기사는 LA폭동 기록의 단편이다. 그날의 사태는 30년이 지난 지금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수백 편에 달하는 신문 기사의 조각을 모았다. 그 단편들은 4ㆍ29의 처음과 끝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로드니킹 사건 평결로 폭발 LA전역 약탈·방화 무법천지   한인업소 피해 가장 많아 일부 언론 왜곡 보도로 상처   갈등과 분노가 누적되고 있었다. 이미 곳곳에서 조짐이 보였다.   봉합을 위한 노력의 흔적들이 당시 상황을 역설적으로 방증한다. 당시 한인커뮤니티자문위원회는 흑인 갱 선도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유명 흑인 프로풋볼 선수였던 짐 브라운에게 2900달러를 전달했다.  〈1992년 1월7일자〉   한미식품상협회, 남가주식품상협회 등 한인 업주들은 탐 브래들리 LA시장과 공동 기자회견까지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흑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10개 항이 발표됐다. 한인 업주와 흑인 고객 간 지켜야 할 매너가 담긴 수칙이었다. 〈1992년 1월25일자〉   당시 흑인사회에서는 사우스 LA에서 잇따라 벌어진 두 사건으로 인해 반한인 감정이 고조되고 있었다. 1991년 3월 리커스토어를 운영하던 두순자 씨가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를 강도로 오인해 총을 쏴 숨지게 한 사건, 1991년 6월 존스 마켓을 운영하던 박태삼 씨가 흑인 강도 용의자 리 아서 미첼을 총으로 쏴 숨지게 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격해진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게 필요했다. '한.흑 친선의 밤' 행사가 추진됐다. LA총영사관까지 나서 행사 지원 방안을 고민했다. 〈1992년 2월12일자〉   뉴욕에서도 이상기류가 흘렀다. 브루클린의 한인 밀집 상가를 중심으로 '흑인을 고용하지 않는 모든 한인 가게를 거부하라'는 전단지가 뿌려졌다. 흑인들은 확성기를 사용해 주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뉴욕지사=1992년 3월16일자〉   한인과 흑인 사이에서만 긴장이 감돈 게 아니다. 당시 사회 전반에 걸쳐 인종 간 골이 깊었다. 주류언론들은 흑인 사회를 계속해서 조명했다. 심지어 '흑인 말살설'이 나돌았다. 뉴스위크가 이 소문을 기획 기사로 다룰 정도였다. 본지 역시 이 기사를 번역 보도했다. 〈1992년 4월13일자〉   갈수록 격해지는 흑인 사회의 감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학계가 나섰다. 캘스테이트LA에서는 '소수계 인종의 긴장'이란 주제로 1차 학술 심포지엄이 개최됐다. 심지어 '한ㆍ흑 마찰'이란 주제로 보름 후 2차 심포지엄이 열리기로 예정됐다. 〈1992년 4월16일자〉   공교롭게도 2차 심포지엄이 예정됐던 그날은 바로 '1992년 4월29일'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심상치가 않았다. 세간의 관심인 로드니킹 사건 평결이 다가오면서 백인 경관들이 무죄 평결을 받을경우 폭동 발생 우려도 제기됐다. LA흑인감리성공회 시실 머레이 목사는 설교 도중 "평결이 진실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진실을 일깨워야 한다. 불을 지펴라. 형제들이여, 진실을 외면한 법과 부도덕한 자들에게 불을 지르자"고 선동하기도 했다. 〈1992년 4월28일자〉   결국 분노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1992년 4월29일, 로드니 킹 사건으로 기소된 경관들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졌다. 광기가 삽시간에 LA를 집어삼켰다. 걷잡을 수 없었다. 소요 사태는 롱비치, 카슨, 컬버시티, 호손, 잉글우드, 토런스 등 LA카운티 전역으로 확산됐다. '흑인 폭동'. 이날 본지 1면은 단 네 글자로 채워졌다. 곧바로 비상사태가 선포됐고, 주방위군이 출동했다. 곳곳에서 방화, 약탈이 이어졌다. 당시 2, 3, 4면도 모두 폭동 기사로 채워졌다. 〈1992년 4월30일자〉   무법천지였다. 당시 LA 흑인 사회의 양대 갱단으로 적대 관계에 있던 '크립스(crips)'와 '불러즈(bloods)'가 연합하기로 합의하고 LAPD 풋힐 경찰서를 공격했다. 풋힐 경찰서는 로드니 킹 사건에서 무죄 평결을 받은 경관들이 소속돼 있던 곳이다. 두 갱단은 이날 풋힐 경찰서를 완전히 장악했다. 〈1992년 5월1일자〉   급기야 폭동의 도화선이 됐던 로드니 킹이 1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흑인 사회에 폭력 행위 중단을 호소했다. 〈1992년 5월2일자〉   한인들은 아픔 속에서 결속했다. 잿더미 가운데 응집했다. 광기가 휩쓸고 간 직후 한인타운 한복판에서는 한인 수만 명이 모였다. 폭동 발생 직후 불과 나흘째 되던 날이다. 당시 아드모어공원(현 서울국제 공원)에서는 '한인타운 재건과 평화를 위한 대집회'가 열렸다. 거리로 몰려나온 한인들은 아리랑을 불렀다. 평화를 외쳤다. 주류 언론들은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이 광경을 전국에 알렸다. 〈1992년 5월3일자〉   주류언론들은 폭동 소식과 함께 두순자 사건 영상을 반복해서 방영했다. 당시 LA폭동 TV시청률은 무려 70%를 기록했다. 전국적으로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두순자 사건 영상을 반복적으로 방영하는 것은 폭동 원인을 한인사회로 돌리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한인들은 폭동과 관련해 왜곡보도를 일삼던 KABC-TV에 계속해서 항의 전화를 걸었다. 한인변호사협회 소속 변호사들이 짐 하텐도프 보도국장까지 찾아갔다. 당시 하텐도프 국장의 막말에 한인사회는 다시 한번 분개했다.   그는 "너희 같은 폭도들의 말을 따를 수 없다. 항의 전화는 오히려 한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1992년 5월4일자〉   공포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한인 은행들의 예금, 인출 업무가 중단되는 등 한인 사회 전반이 얼어 붙었다. 우체국의 업무 마비로 신문 배달마저 지연됐다. 그 와중에도 본지는 직원들이 밤을 지새우며 계속해서 호외를 발행했다. 〈1992년 5월4일자〉     ━   한인들 흑인 갱단까지 만나며 수습 노력     한인 피해 업소 2280개 달해 경찰 늑장 대응 책임론 부각 "동포를 돕자" 한인들 기부 성금관리 법적 분쟁 오점도   팬데믹 사태 때만 통행 금지령이 내려진 게 아니다. 30년 전 폭동 때도 그랬다. LA카운티 전역에 학교 수업 중단은 물론 닷새간 야간 통행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후 진정국면에 접어들며 단계적으로 해제됐다. 〈1992년 5월4일자〉   본지 기자들은 피해 상황만 보도하지 않았다. 속보와 함께 한인 사회 복구를 위한 피해 보상 정보도 속속 전달했다. SBA 융자를 위한 업소 피해 보고서 작성 요령 LA시에 제출해야 할 피해 신고 서식 보험 피해 보상 정보 등을 세세하게 취합해 한인 사회에 제공했다. 〈1992년 5월4일자〉   폭동 조기 진압 실패에 따른 책임론이 대두했다. 경찰의 늑장 출동을 두고 비난이 거세졌다. LAPD 특수기동대 등이 폭동 초기에 출동하려 했으나 고위층의 지시로 무산된 사실이 드러났다. 폭동이 발발하자 경찰이 이를 방관하고 도피했다는 증언도 잇따랐다. 결국 LA경찰위원회가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1992년 5월5일자〉   한인 사회의 공분을 자아낸 사건도 있었다. 폭동 당시 약탈 행위에 가담한 혐의로 한인 5명이 구속 기소돼 인정신문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기소된 한인 중 2명은 무죄를 주장했다. 〈1992년 5월5일자〉     그때도 한인 교회는 이민 사회의 중심축이었다. 한인 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됐고 발전하던 상황이었다. 폭동 직후 교회들은 특별 헌금 등을 걷고 저마다 지원 대책 마련에 나섰다. 교인들은 쌀 라면 등 생필품을 기부하며 지원 활동에 적극 발 벗고 나섰다. 〈1992년 5월6일자〉     한인타운을 위한 명확한 구획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이때 처음 나왔다. 타운 구역이 산만하게 흩어져있기 때문에 법집행기관에서 치안 전략을 수립하는 게 쉽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1992년 5월9일자〉     그 당시 한인들의 목소리가 현재 2.7 스퀘어 마일의 한인타운 공식 구획이 지정(2010년)되는데 시발점이 됐던 셈이다.       한인 업소들의 피해 규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총 2280곳의 한인 업소가 피해를 입었다. 피해액은 약 3억9950만3755달러로 잠정 집계됐다. 연방노동부에서 공식 제공하는 인플레이션 환산 프로그램을 통해 당시 피해액을 오늘날 시세로 계산해봤다. 2022년 3월 기준으로 약 8억 달러에 해당한다.   당시 한인 피해업소 중 단일업체로 피해액이 가장 컸던 곳은 피코 피에스타 쇼핑센터(업주 김창휘.당시 주소 2048 W Pico Blvd)'였다. 이 업체의 피해액은 550만 달러로 보고됐다. 〈1992년 5월11일자〉      코로나19가 확산할 때 중국계에 대한 적대적 분위기가 다른 아시안들에게도 우려를 낳았 듯 30년 전에도 그랬다. 당시 LA타임스의 중국계 일레인 우 기자는 폭동 관련 기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한인으로 오인받을까봐 두렵다. 폭도들이 우리의 다른 점을 구별할 수 있을까.' 〈1992년 5월12일자〉   흑인 사회의 분노는 그칠 줄 몰랐다. 폭동 당시 흑인 청년 4명이 백인 트럭 운전사인 레지널 데니를 구타했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이 사건은 로드니킹 사건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두 사건 모두 당시 현장 상황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가 증거로 제시됐다.     단 로드니 킹 사건에서는 법원이 "경관에게 유죄를 내리는 데 있어 비디오테이프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없다"며 무죄 평결을 내렸다. 반면 흑인 사회는 "로드니 킹의 평결이 그대로 적용되는지 지켜보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자칫하면 더 극심한 폭동으로 번질 수 있는 위기였다. 〈1992년 5월13일자〉   흑인 사회는 한인 상권의 재조성을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LA시의회는 흑인 사회의 눈치를 봤다. 결국 전소된 건물을 재건할 경우 시 정부 코드를 엄격히 적용 업소 주변 500피트 이내 주민을 대상으로 반드시 공청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내용의 조례안이 통과됐다. 이 조례에는 신규 리커 라이선스 발급시에도 주민 공청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사실상 흑인 주민들이 반대할 경우 비즈니스 재건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1992년 5월14일자〉   화해를 위한 몸부림도 있었다. 전미식품상협회 남가주식품상협회 등이 '갱단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윌셔코리아나호텔(현 라인호텔)에서 풋힐 경찰서를 장악했던 블러즈와 크립스의 갱단 대표 4명을 만났다.     이날 두 시간이 넘는 회동 끝에 갱단 대표들은 5개 조항의 한.흑 커뮤니티 공동협조방안을 제시했다. 제시안에는 ▶한인 업소의 흑인 고용 확대 ▶흑인 사회에 한인 은행 지점 신설 ▶흑인 갱단원 한인 업소 경비 담당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1992년 5월26일자〉     한인 업주들이 갱단과 회동을 갖자 비난 여론이 거세졌다. 한인사회의 위상을 떨어뜨린 섣부른 처사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당시 주류언론들도 이 내용을 앞다퉈 보도했다. 〈1992년 5월28일자〉     결국 양측은 다시 만나 "1차 회동에서 나눈 협의 사항은 한인 사회 전체 의견을 대변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에 합의했다.   한인사회는 스스로 타운 재건에 나섰다. 곳곳에서 성금이 모아졌다. 피해자복구성금관리위원회도 구성됐다. 당시 남가주공인회계사협회의 중간 감사 내역을 보면 총 475만2571달러의 성금이 걷혔다. 〈1992년 7월22일자〉     성금 때문에 한인 사회는 그늘진 모습도 보였다. 액수가 커지자 성금 관리를 두고 잡음이 일기 시작했다. 성금으로 은행 융자를 받으려 했던 성금관리위원회 측과 즉각적인 지급을 원했던 피해자협회가 갈등을 빚었다. 이는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졌다. 결국 법원 결정에 따라 성금은 결국 피해자협회로 넘겨졌다. 이후 성금 분배를 두고 갈등을 거듭하다가 피해자협회 역시 두 갈래로 찢어졌다. 〈1992년 10월29일자〉   폭동의 시간이 과거로 흘러갈수록 희망이 움트고 있었다. 흑인 사회 실업인들과 한인 경제인들이 LA 재건 방안을 모색하는 모임을 가졌다. 〈1992년 6월19일자〉   한인기독교교회협의회는 흑인 교계 지도자들과 함께 9월에 한.흑 교계 회의를 개최하기로 발표했다. 〈1992년 7월8일자〉   당시 나성영락교회 박희민 목사 등 한인 교계 관계자들은 갈등 해소를 목적으로 흑인 목사 방한 사업을 추진했다. 실제 LA 인근 흑인 교계 지도자 80여 명을 초청 두 번에 걸쳐 한국 방문 행사를 진행했다. 물론 모든 비용은 한인 교계가 지원했다. 〈1992년 11월4일자〉   상처는 시간을 품고 조금씩 아물어갔다. 서서히 새 살이 돋았다.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4.29의 기록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는 역사다.   장열ㆍ장수아 기자429특집

2022-04-24

"LA폭동은 흑인과 백인경찰의 대치 아닌가요?"

"자세히 모른다" 응답 대부분 "학교서 배웠다" 극소수 불과 인종학·역사 수업 활용해야 SNS 활용한 자료 제작 필요   LA폭동의 원인이 흑인과 LA경찰국(LAPD) 소속 백인 경찰들의 인종차별 행위로 발생했지만 이로 인해 한인사회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걸 알고 있는 청소년은 많지 않아 우려를 낳고 있다. 특히 한인타운에 발생한 폭동에 대해 알고 있는 학생들은 거의 없는 것으로 확인돼 이와 관련된 역사교육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LA폭동 발생 30주기를 맞아 본지가 이경원리더십센터(대표 김도형)와 함께 남가주 거주 라틴계 및 한인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폭동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다. 폭동에 대해 알고 있다고 답한 학생들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또는 인터넷을 통해 접한 것으로 파악돼 청소년들에게 남가주 한인사를 구체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학교 대신 온라인서 배워   설문조사 결과 LA폭동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한 학생은 전체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24명(67%)이었다. '조금 안다'고 답한 학생들은 11명(26%)이었다.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 고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LA폭동에 대한 내용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인타운과 멀거나 한인 거주자가 많지 않은 지역이나 타주의 학생들은 모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몬태나주에 있는 클락포크고교 12학년생이라고 밝힌 에밀리(16)는 "리서치를 해서 알지만 그래도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른다"고 밝혔다.     뉴욕주 존제이칼리지에 재학중인 제시코 로치(19)는 "3년 전 넷플릭스 영화를 통해 본 게 전부"라고 설명했다.     주목할 만한 내용은 '조금 안다'고 답한 학생들의 대부분은 팟캐스트와 음악, 영화 등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 관련 내용을 배운 것이다. 이들이 LA폭동을 접한 계기는 지난 2020년 5월 백인 경찰에 의해 사망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었다. 그러다 보니 'LA폭동=흑인과 백인 경찰과의 대치'로 발생한 사건으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밀레니얼 세대 답게 이들은 온라인을 활용해 정보를 접했지만 그 깊이는 낮았다.     유니온고교에 재학중인 코너 존슨(19)이 "누군가의 추천으로 영상을 봤다"며 이후 관련 내용으로 만든 랩 등 음악도 들었다고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건 모른다"고 말한 것이 한 예다.     반면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학생들은 당시 폭동을 경험한 가족을 통해 듣고 배웠다.     사우스패서디나고교의 셸비(15)는 "다운타운 LA에서 비즈니스를 운영하던 할아버지께 들었다"며 "한인들이 차별을 당했고 이는 소수계를 향한 사회적 불평등"이라고 답했다.   알함브라고교의 줄리사 알바레즈(18)도 "엄마가 당시 폭동 발생 지역에 거주했다고 들었다. 방화를 직접 목격했는데 무서웠다고 말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글록고교의 멜라니아 에스피날(16)은 LA센트럴 지역에서 살았던 아버지의 경험을 듣고 직접 리서치해 학교에 관련 내용을 논문으로 제출하기도 했다.   ▶인종학 과목 중요성 커져   설문조사 결과 학교에서 LA폭동에 대해 배웠다고 응답한 학생은 2명에 그쳤다. 옥크몬트고교의 메들린 헤이먼(17)은 선택 과목인 인종학 수업을 통해 들었다고 밝혔다. 헤이먼은 당시 방화와 약탈이 일어난 것은 알았지만 폭동 발생 원인을 "자유를 위한 시위를 방치한 여파"라고 엉뚱하게 표현해 구체적인 내용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헤이먼의 케이스는 앞으로 한인 커뮤니티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가주는 오는 2026년부터 입학하는 고교생들부터 인종학 과목을 최소 한 학기동안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한 상태라 한인 커뮤니티가 지금부터 움직인다면 한인사를 가르치는 인종학 수업이 많이 생길 수 있다. 가주 교육위원회는 지난해 3월 한인 이민사를 담은 인종학 학습지도안을 채택했지만 실제 이 지도안들이 로컬 교육구를 통해 학교 수업에 반영되려면 학교와 학부모들의 요구가 필수다.     당시 승인받은 학습지도안에 포함된 한인사는 UC리버사이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인 장태한 박사가 작성한 '한인 경험과 인종간 관계'로, 이 안에는 LA폭동 전후의 한흑 갈등부터 한인 정치인들의 등장과 경제적 성장, 엔터테인먼트, 스포츠 분야에 대한 설명이 포함돼 있다. 한인사회 초창기 이민자이자 커뮤니티 리더였던 도산 안창호의 삶과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 올림픽영웅 새미 리 박사를 가르치는 학습지도안과 초창기 한인 이민사 및 1920~1945년 사이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사, 20세기 초의 한인사회상, 미국 내 K-팝 문화를 가르치는 내용은 교육자료로 포함돼 주 교육부가 운영하는 교육자 온라인 자료실에 등록돼 있어 이에 대한 홍보도 필요하다.     장태한 박사는 "인종학 과목이 다행히 졸업 필수과목으로 제정됐지만 한인 커뮤니티와 학부모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실제 교육현장에 반영될 수 없다"며 "지금이라도 로컬 교육구와 학교들을 상대로 한인사 교육에 대한 로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교육 만이 해답   또한 폭동 관련 내용을 알릴 수 있는 교재 제작 등도 시급하다. 학생들도 LA폭동 자료에 대한 필요성을 지적했다.   스펜서 니클라우스(17.버뱅크 고교)는 "역사를 알려야 한다. 시스템이 사람들을 갈라놨지만 서로 이해한다면 이를 막을 수 있고 다음 세대들은 그 갭을 좁힐 것"이라고 말했다.     크리스티안 권(17.브라보메디컬매그닛)은 "한인 사회는 더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은서(존마샬 고교) 역시 "한인 커뮤니티가 흑인 커뮤니티와 함께 겪은 이민사와 미국에서 구축한 삶의 이야기를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스토리텔링이 어떤 것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바꾸는 데 많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클로이 아이비-컬웬(리버사이드 고교)은 "모든 커뮤니티가 교육시키고 배울 수 있도록 관련 내용을 남은 교육 자재와 리소스를 배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들의 제안을 따른다면 오히려 좀 더 쉽고 정확하게 한인사를 알릴 수 있다. 이들 세대들이 이용하는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동영상이나 전자책 등의 자료를 만들어 배포한다면 더 많은 청소년들이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문조사 방식   이번 설문조사는 로컬 청소년들의 한인 이민사에 대한 지식을 파악하기 위해 시도했다. 지난 3월 15일부터 30일까지 온라인으로 진행했는데, 총 43명(고등학생 33명, 대학생 10명)이 참가해 주관식으로 된 설문조사 항목에 답을 적어 제출했다. 전체 참가자 중 37명은 미국에서 태어난 2세이며 나머지는 비시민권자다.     버뱅크고교, 크레센타밸리고교, 사우스패서디나고교 등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있지만, 유니온고교, 태피스트리고교, 러퍼스킹고교, 리버사이드폴리테크 등 흑인과 라틴계가 밀집해있는 지역의 학생들과 뉴욕, 켄터키, 펜실베이니아, 플로리다 등 타주 지역 학생들도 포함시켜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인식을 광범위하게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설문조사 방식은 이번 설문조사는 로컬 청소년들의 한인 이민사에 대한 지식을 파악하기위해 시도했다. 지난 3월 15일부터 30일까지 온라인으로 진행했는데, 총 43명(고등학생 33명, 대학생 10명)이 참가해 주관식으로 된 설문조사 항목에 답을 적어 제출했다. 전체 참가자 중 37명은 미국에서 태어난 2세이며 나머지는 비시민권자다.   버뱅크고교, 크레센타밸리고교, 사우스패서디나고교 등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있지만, 유니온고교, 태피스트리고교, 러퍼스킹고교, 리버사이드폴리테크 등 흑인과 라틴계가 밀집해있는 지역의 학생들과 뉴욕, 켄터키, 펜실베이니아, 플로리 다 등 타주 지역 학생들도 포함시켜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인식을 광범위하게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장연화 기자429특집

2022-04-24

'억울함'을 곧장 연방의원 배출 '쾌거'로 승화

'정치력 부재' 절실히 느껴 정계 진출 한인들 잇따라   가주 한인유권자 20만명 각종선거서 목소리 커져   1992년 LA폭동이 촉발된 이유 중 하나는 한인 정치력 부재였다. 한인사회는 정치력 신장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폭동이 일어난 해에 한인사회는 단단히 뭉쳐 최초의 연방하원의원을 탄생시켰다.     한인 정치력이 폭동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주류사회에 한인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 있는 정치인은 부족했다. 폭동 전·후 한인 정치력을 살펴봤다.   ◆출발지점은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1958년은 미주 한인사에 있어 역사적인 해다. 장원배씨와 필립 민씨가 하와이 주 하원의원에 나란히 당선됐다. 한인 이민사 반세기 만의 첫 주류 정계 진출이었다. 장 전 의원은 이후 하와이주 판사를 거쳐 한인 첫 연방 판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민주당의 알프레드 송(한국명 송호연) 변호사는 한인 정치사에 획기적인 인물이다. 1960년 캘리포니아 주의회에 진출한 최초의 한인이자 아시안인 그는 의정활동을 하며 아시안 이민자 커뮤니티 선구자로 떠올랐다. 1960년 변호사 사무실이 있던 몬터레이 파크에서 시의원에 당선됐고 이듬해 실시된 45지구 주 하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했다. 2년 뒤 28지구 주 상원의원 선거에 당선돼 1977년까지 16년간 의정활동을 했다. 그의 이름은 현재 LA 한인타운 윌셔-웨스턴 역에 새겨져 있다.     ◆폭동의 해 연방의회 입성했다   1992년 폭동으로 한인사회는 정치력 신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해 11월 미주 한인 이민 역사상 최초로 공화당 소속의 김창준씨가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는 쾌거를 일궈냈다. 앞서 1990년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에 당선된 그는 다이아몬드바 시장으로 올라서며 한인사회의 스타 정치인으로 주목받던 터였다.     김 전 의원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폭동은 한인사회의 참극이다. 그런데 이를 계기로 한인사회가 정치에 확 눈을 뜨면서 내가 반사이익을 받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당시 한인사회가 많은 힘을 실어줘 당선될 수 있었다”고 했다. 한인 정치사에 있어 혁신적인 인물이지만 그의 정치인생은 아쉽게도 조기 마감했다. 후배 양성에 신경 쓸 새도 없이 주류언론의 공격 속에 정치자금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3선을 끝으로 정계 은퇴했다.     오렌지카운티 가든그로브시에서는 한인 정호영 씨가 시의원에 당선됐다.     ◆강석희 어바인 시장 새 시대     폭동 당시 주류 전자 스토어에서 매니저로 일했던 강석희(민주) 전 어바인 시장도 LA 폭동에 충격을 받아 정치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한미민주당협회장과 오렌지카운티 한미연합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민주당을 중심으로 정계 인맥을 넓혀간 그는 2004년 27년간 거주하던 어바인에서 시의원에 도전해 당선됐다. 2006년 재선했고 2008년 한인 이민 1세 최초의 직선 시장이자 어바인시 사상 최초의 소수계 시장이 됐다. 이후 가주상원과 연방하원에 도전했지만 낙선했다.   ◆연방 하원: 미셸 박, 영 김 시대   미셸 박 스틸 의원(공화)은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베테랑 정치인이다. 한인 최초로 가주 조세형평국 위원으로 선출돼 위원장도 역임한 뒤 오렌지카운티 2지구 수퍼바이저에도 선출됐다. 지난 2020년에 민주당 현역 의원 할리 루다를 누르고 연방의회에 입성하며 불패 행진을 이어갔다. 올해 연방하원 45지구에서 재선에 성공하면 6연승이다.     에드 로이스 전 연방하원의원을 23년간 보좌했던 영 김(공화) 의원은 2014년 가주 하원 65지구에서 민주당 현역의원 셰런 쿼크-실바를 누르고 당선됐다. 2년 뒤 낙선했다가 2020년 연방 하원의원에 재도전, 현역의원 길 시스네로스를 상대로 신승을 거두며 박 의원과 함께 최초의 한인 여성 연방하원의원 대기록을 세웠다.     ◆주의회: 최석호와 데이브 민   어바인 교육위원을 거쳐 2004년 강석희씨와 함께 시의원으로 동반 당선된 최석호 의원(공화)은 2012년 어바인 시장에 당선됐다. 이후 가주하원(68지구)에 도전한 최 시장은 내리 3선에 성공했다. 선거구 재조정으로 올해 73지구에서 4선에 도전한다. 현재 최 의원은 가주의회 하원 80명 중 유일한 한인이다. 이후 데이브 민(민주) 변호사가 지난 2020년 가주 상원에 입성해 역시 유일한 한인 상원의원(37지구)으로 활약 중이다.     ◆LA시의회: 존 이와 데이비드 류   2015년 데이비드 류가 한인사회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최초의 한인 LA 시의원이 됐다. 또 LA 12지구 토박이 존 이가 지난 2019년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며 LA 시의회 역사상 처음으로 2명의 한인이자 아시안 시의원 시대를 열었다.     2020년 선거에서 류 의원이 재선에 실패했으나 이 의원은 박빙의 승부 끝에 로레인 런퀴스트 후보와 재대결서 다시 승리하며 재선에 성공한 최초의 LA 한인 시의원 기록을 세웠다. 원래 공화당원이었던 이 의원은 현재 15명 시의원 중 유일한 무소속으로 ‘아웃사이더’ 정치인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다. 나머지 14명은 모두 민주당원이다.     ◆가주 한인 유권자 20만 돌파   한인 정치인이 대거 배출될 수 있던 배경은 무엇보다 한인 유권자 증가에 있다. 캘리포니아 정치 분석 기관인 ‘폴리티컬 데이터’에 따르면 올 1월 현재 가주 전체 유권자 2194만1364명 중 0.93%인 20만4805명이 한인이다. 한인 유권자는 급속도로 늘고 있다. 2016년 조사에서는 8만5594명에 그쳤지만 2020년엔 2배가 넘는 18만2071명을 기록했다가 다시 2년 만에 12.5%(2만2734명)가 늘어나 20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한인 정치 참여의식이 높아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렇게 급성장하고 있는 한인 정치력은 지난해 한인타운 선거구를 단일화시키기도 했다. 10년 전 선거구 단일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경험을 갖고 있는 한인 커뮤니티는 지난해 영어권 1.5세와 2세 비영리 단체장들이 주축이 되어 한인타운 선거구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단일화 지도 초안을 작성해 홍보하는 한편 관계자들과 접촉해 설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지난 수십년간 4개 선거구로 나눠져 있던 한인타운은 올해부터 단일화된 선거구가 됐다.  원용석 기자429특집

2022-04-24

경찰 지휘부의 무책임이 한인업소 피해 키웠다

대응지시 받지 못해 시간 허비 한인타운 무법지대로 방치 흑인 분풀이 대상으로 몰려   ‘LA폭동’은 1903년 1월 13일 한인 이민이 시작된 이래 한인 이민사의 최대 비극으로 기록됐다. 이민 1세대 한인 대부분 가족 단위로 스왑밋, 편의점, 주유소 등을 꾸려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 나가던 시기였다. 폭동은 한순간에 많은 한인 가정의 전 재산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4·29 LA폭동(이하 LA폭동)은 1992년 4월 29일 교통 단속에 걸린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백인 경관 4명에게 (백인)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이 내려지자, 분노한 흑인들이 LA 도심으로 일제히 쏟아져 나와 폭력과 약탈, 방화를 저지른 사건이다.   흑인들의 분노는 약탈과 방화로 5월 3일까지 이어졌다. 이후 흑인 시위대에 이어 라틴계, 일부 한인까지 약탈에 가담했다. LA경찰국 지휘부는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결과 사우스LA와LA한인타운은 무법지대가 됐다. 이 폭동으로 사망자 55명(한인 1명 포함), 부상자 2300여 명의 인명피해가 났고 재산피해는 7억 달러 이상으로 기록됐다.   ◆로드니 킹과 두순자 사건   LA폭동 최대 피해자는 한인 이민 1세대 자영업자와 한인사회였다. 약탈과 방화 피해를 본 한인 업소만 2300여 곳으로 재산피해가 당시 기준 3억5000만 달러나 발생했다. LA폭동으로 인한 전체 피해액의 40~50%에 달한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인 피해자는 LA시나 연방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배상도 받지 못했다.   당시 한인사회 피해는 왜 커질 수밖에 없었을까. LA폭동은 1965년 LA남부왓츠 지역에서 발생한 ‘왓츠폭동’과 시위대 주체가 비슷했다. 와츠폭동과 차이점은 흑인사회 분노가 1990년대 초 사우스LA 등에서 편의점과 리커스토어를 운영한 350개 이상 한인업소로 향했다는 사실이다.   LA폭동 시위는 로드니 킹 무죄 평결 직후 사우스LA에서 시작했다. 로드니 킹 무죄평결은 흑인사회가 겪어 온 인종차별과 빈곤 등 사회구조적 불평등이란 분노에 불을 지폈다. 반면 로드니 킹 무죄평결 직후 주류 미디어는 1991년 한인 업주 두순자씨가 15세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와 시비 끝에 총격을 가해 숨지게 한 사건을 반복적으로 부각했다. 주류 미디어가 흑인 주도 폭동을 한흑 갈등이 원인인 양 편파보도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흑인 시위는 곧 사우스LA 한인업소 약탈과 방화로 이어졌다. 이후 시위대는 LA한인타운까지 이동하며 닥치는 대로 약탈과 방화에 나섰다. 거리낌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군중심리 여파 등으로 라틴계와 일부 아시아계도 약탈에 동참했다.   결국 로드니 킹 사건과 두순자 사건이 겹쳐 흑인사회 분노가 표면적으로 한인업소와 한인타운을 향하게 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흑인사회의 백인과 미국 사회를 향한 정당한 문제제기는 뒷전이 된 셈이다.   ◆LA 공권력 의무 외면   사우스LA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 곧이어 벌어진 무분별한 약탈과 방화를 막을 수는 없었을까.     한미교육연구원과 한인역사박물관이 LA폭동 20주년 자료집으로 펴낸 ‘잊을 수 없는 그 날, 1992년 4월 29일-화합, 단결 그리고 미래로’는 윌리엄 웹스터 특별조사위원회(폭동 이후 웹스터 전 CIA·FBI 국장은 변호사 100명과 5개월 동안 연방정부 차원의 폭동 진상조사를 벌였다) 보고서를 바탕으로 “LA 경찰과 시 당국의 무능, 무관심, 무계획이 필요 이상의 시민 희생을 불러왔고 이민자 그룹인 한인사회가 시위대와 폭도의 분풀이 대상이 됐다”고 명시했다.   실제 1992년 4월 29일 오후 3시쯤 LA지역 미디어는 긴급뉴스로 사우스LA 흑인들이 거리로 뛰어나왔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LA경찰국(LAPD)은 제때 움직이지 않았다. 훗날 LAPD가 제대로 된 폭동대비 진압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웹스터 특별조사위원회 보고서는 폭동 당시 경찰병력 70% 이상이 사우스센트럴과 웨스트LA에 배치됐다고 지적했다. LA한인타운에는 경찰병력 10%가 배치됐고 이마저도 경찰서 건물과 공공건물 경비에 주력하도록 했다. 경찰이 상가 등 한인업소 보호에 손을 놓은 셈이다.   그 결과 폭동 둘째 날 오후 11시부터 다음날 자정까지 LA한인타운에서만 968건의 약탈과 방화가 자행됐다. 보고서는 경찰의 폭동진압 미숙 때문에 LA한인타운 피해가 더 컸다며 (소수계 커뮤니티 사이의) 인종적 편견 때문에 저질러진 일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실제 폭동 첫날 오후 7시쯤 당시 LAPD 데럴 게이츠 국장은 보고를 받고도 기금모금 파티에 참석해 논란을 일으켰다. 웹스터 보고서에 따르면 게이츠 국장은 LAPD 폭동지휘부에 30분~1시간만 머물렀고, 사우스 센트럴 경찰서 경관 수백 명은 상부로부터 아무런 지시가 없어 서성거렸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게이츠 LAPD 국장과 톰 브래들리 LA시장 간 이원화된 권력구도도 효율적인 폭동 진압을 어렵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해와 차별이 낳은 비극   한미교육연구원-한인역사박물관이 펴낸 LA폭동 20주년 자료집은 한인업소와 한인타운이 표적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세 가지로 꼽았다.   첫째 폭동 당시 흑인 거주지역에 한인업소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둘째 한흑 커뮤니티 사이 문화차이로 인한 양측의 무관심, 그로 인한 오해와 분풀이다. 셋째 LA한인타운 치안공백을 야기한 LAPD 폭동진압 지휘부의 무책임이다.   또한 자료집은 당시 한흑갈등이 약탈과 방화의 원인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웹스터 보고서 역시 폭동이 시작된 초반 흑인 시위대는 한인 업소를 표적으로 삼는 대신 경찰서 등 정부기관을 공격했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LA시 공권력이 시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보호라는 의무를 외면하면서 약탈과 방화가 LA한인타운까지 퍼지는 결과를 낳았다. 한인타운 방화는 흑인 갱단 등이 시작했지만, 약탈에 가담한 상당수에 당시 한인타운 거주 라틴계도 포함됐다고 한다.  김형재 기자429특집

2022-04-24

가구 소득·업소 증가세 평균 훨씬 앞질러

20년간 총소득 210% 급증 업체수 10년간 45% 늘어 한인은행자산 2017% 성장 미주 한인 이민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참사로 기억되고 있는 LA폭동 이후 지난 30년간 한인 커뮤니티는 정치.경제. 문화적으로 큰 도약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제 부문에서의 성장 추이를 각종 데이터를 분석해 소개한다.   ▶한인 소득 증가   연방 센서스국의 아메리칸 커뮤니티 서베이(ACS) 데이터를 살펴본 결과 열람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가 1999년 통계였다. 이를 기준으로 2019년 통계와 비교해 20년간의 추이를 조사했다.   한인 가계 총소득을 살펴보면 가주 전체는 1999년 64억4239만5800달러에서 2019년 199억7499만3265달러(추정)로 210.1%나 급증했다. 20년간 가주 한인 인구 증가율이 35.1%인것을 감안하면 괄목할 만한 소득증가하고 할 수 있겠다.   11.1%의 한인 인구가 늘어난 LA카운티(이하 LA)의 경우 33억582만7400달러에서 79억8086만2233달러로 141.4%가 증가했다.  10억3961만8300달러였던 오렌지카운티(이하 OC)는 274.7%가 급등한 38억9582만451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71.6%라는 인구 증가율이 바탕이 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LA/OC의 가계 총소득 규모가 가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99년 67.5%에서 2019년 59.5%로 8%p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인 중간 가계 소득의 경우 가주 평균이 4만758달러에서 8만1838달러로 20년 만에 두배로 뛰었다. LA는 3만5292달러에서 6만1105달러로, OC는 4만7374달러에서 9만2871달러로 각각 73.1%, 96%가 증가했다.   가주 한인 인구 1명당 평균 소득에서도 두배 이상씩 증가했다. 가주 평균이 1만9642달러에서 4만5086달러로 129.5%가 늘어난 것을 비롯해 LA가 117.2% 증가한 3만9655달러, OC도 118.4%가 뛴 4만904달러를 기록했다.    ▶한인 업체 성장   보다 실질적인 남가주 한인업체들의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 본지가 발행한 한인업소록 데이터를 분석했다. 데이터로 보존되기 시작한 2011년판과 가장 최근의 2021년판을 비교해 본 결과 등록된 전체 업소수는 2011년 1만9285개, 2021년 2만7980개로 10년 만에 45.1%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등록 한인업체가 가장 많은 도시 톱 10을 살펴보면 OC지역 도시들의 한인 상권 성장이 두드러졌다. 2011년 508개 업체로 4위였던 부에나파크가 10년 만에 1137개로 123.8%의 신장률을 기록하며 전체 2위에 올라선 것을 비롯해 어바인이 72.5%가 증가하며 6위에서 3위로 뛰었다. 7위였던 풀러턴도 64.8%의 증가율로 5위에 올랐다.     LA는 22.4%가 증가한 9902개로 1위 자리를 고수했으며 3위였던 토런스는 19%의 성장을 기록했음에도 OC 도시들에 밀리며 6위로 내려앉았다. 5위였던 가데나도 1개 업체 증가에 그치며 7위로 하락했다.   애너하임, 세리토스, 로랜드하이츠 등은 6.1%~29.7%의 증가율을 보였으나 8위부터 10위까지 순위 변동은 없었다.     2011년 909개로 전체 2위를 기록했던 가든그로브는 770개로 22.2%가 급감하며 톱10 가운데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을 나타냈다.       ▶몸집 키운 한인 은행   한인 경제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한인 은행들의 몸집도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1994년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한미, 중앙, 나라, 윌셔, 새한, 가주외환, 글로벌, 가주 한인 등 8개 은행의 총자산 규모가 14억8246만 달러였다.     2021년 FDIC 실적보고서에 따르면 뱅크오프호프, 한미, 퍼시픽시티뱅크, CBB, 오픈뱅크, US메트로 등 6개 가주 한인은행의 총자산 규모가 313억9180만50000 달러로 27년 만에 2017.5%의 폭풍 성장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총예금액 규모도 13억102만 달러에서 267억6747만1000 달러로 1954.3%가 급등했으며 총대출 규모 역시 8억9758만 달러에서 245억6139만3000달러로 2636.4% 폭증했다.   1982년 올림픽 크렌셔에서 출발한 한미은행의 경우 1992년까지 버몬트, LA다운타운, 가든그로브, 웨스턴 등 5개 지점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35개로 600%의 지점망 성장률을 이뤄냈다.   한미은행 관계자는 “한인들의 성원에 힘입어 자산 규모가 1992년 2억8354만7000달러에서 2021년 68억5858만7000달러로 2319%의 신장률을 달성했다”며 감사와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했다.   ▶쾌속 질주 한국차   지난 30년간 이뤄낸 한국차들의 성과도 빼놓을 수 없다. 1986년 엑셀로 미국에 진출한 현대차는 가성비를 내세워 수출 첫해 각종 판매 신기록을 세우며 포천지로부터 미국 10대 상품에 선정된 바 있다.     미국내 현대차의 연간 판매실적을 살펴보면 1992년 10만8549대에서 2021년 73만8081대로 580%의 신장을 기록했다. 판매 차종도 엑셀, 엘란트라, 쏘나타, 스쿠프 등 4개 모델에서 현재는 13개 모델 31개 트림으로 대폭 늘었으며 전국에 829개 딜러망을 갖추게 됐다.   1992년 미국법인을 설립한 기아는 2년 후인 1994년 2월 현재 시판되고 있는 포르테의 전신인 세피아를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시판 첫해 판매량은 1만2329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기아는 12개 모델 21개 트림을 앞세워 지난해 미국 판매 사상 최초로 70만대를 돌파하며 역대 신기록을 수립했다. 시판 27년 만에 5589%의 폭풍 성장을 달성한 셈이다. 4개로 시작한 딜러도 이달 기준 775개로 늘었다.   수출 의존하던 한국차는 앨라배마와 조지아에 공장을 설립하고 현지 생산을 확대하며 지난해 처음으로 총판매량에서 혼다를 제친 바 있다. 박낙희 기자429특집

2022-04-24

BTS부터 샌드라 오까지 주류 문화·엔터계도 접수

할리우드에 한인 1.5~2세 진출 늘어 배우부터 감독·제작까지 역할 다양 영화계는 샌드라 오 독보적 존재 용재 오닐·이민진·정이삭 등 주목   “BTS(방탄소년단), 기생충, 오징어 게임은 문화가 경제, 외교에서도 강력한 도구라는 점을 입증했다”   프랑스의 플뢰르 펠르랭 전직 문화부 장관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한류 현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전례 없는 글로벌 수요를 바탕으로 급성장 중이다. 미국에서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 한류 열풍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K-팝을 선두로 K-드라마와 K-영화는 주류 문화로 올라섰다. 4·29 LA 폭동이 일어난 지 30년이 흐른 지금 한인 커뮤니티가 느끼는 한인 정치력과 경제적 성장 근저에는 이처럼 문화의 힘도 있다.     ▶K-팝 ‘차트인’ 봇물   미국 음악을 상징하는 빌보드 차트에 K-팝이 문을 두드린 것은 20여년 전이다.     미국 시장에 처음 진출한 가수는 보아·원더걸스였다. 이어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K-팝을 대중화했고 방탄소년단은 K-팝을 하나의 음악 장르로 각인시켰다.     K-팝의 주류사회 진출 바로미터는 빌보드 차트 순위다. 2008년 보아가 정규 1집으로 ‘빌보드 200’에 127위로 이름을 올리고 빌보드 싱글 차트인 ‘핫 100’에는 원더걸스가 2009년 처음 ‘노바디’로 76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미전역 대중들에게 K-팝을 알린 가수는 싸이다. ‘강남스타일’은  한국 가수 최초로 7주간 빌보드 100에 2위를 기록하며 K-팝 신드롬을 일으켰다. 지난 4월 초까지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는 43억 회를 돌파했다.     2012년에는 빅뱅, 지드래곤이, 2014∼2015년에는 투애니원(2NE1), 소녀시대, 태양, 엑소 등이 빌보드 200에 줄줄이 언급됐다. 2019년부터는 슈퍼엠, 몬스타엑스, NCT 127, 블랙핑크 등 거대한 팬덤을 갖춘 팀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K-팝을 주류 음악계에 하나의 장르로 만든 히로인은 BTS다. 2015년 ‘화양연화 파트 2’(171위)로 빌보드 200에 처음 입성한 뒤 2018년 ‘러브 유어 셀프 전 티어’로 한국 가수 중 최초로 빌보드 200에 1위 기록을 달성했다. 핫 100에서도 ‘다이너마이트’로 3주 동안 1위에 오른 이래 2021년에는 ‘버터’로 10주 연속 1위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고, 유명 밴드 콜드플레이와 협업한 ‘마이 유니버스’도 1위에 올렸다.     최근 라스베이거스에서 진행된 BTS 공연은 K-팝 신드롬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자리였다. 공연 기간 내내 11개 호텔이 BTS 테마 객실을 만들었고 벨라지오 호텔은 BTS 인기곡이 흐르는 다이내믹한 분수 쇼를 선보였다. 도시 전체가 BTS에 물든 시간이었다.   ▶K-콘텐트는 주류 문화 리드     또한 한국식 독특한 스토리텔링이 이끄는 영화와 드라마에 매료되는 미국인들은 더는 낯설지 않은 세상이 됐다.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흥행작 ‘킹덤’ ‘오징어 게임’ ‘지옥’, 애플TV 플러스의 파친코 등은 까다롭다는 아카데미 시상식장의 문을 활짝 열었다. 2020년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에서 감독·작품·각본·국제영화 4개 부문을 수상한 데 이어 한국계 정이삭 감독이 미국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투영해 만든 작품 ‘미나리’는 배우 윤여정에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겼다.     최근에는 애플TV 플러스에서 방영하고 있는 ‘파친코’가 단연 화제다.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1910~80년대까지 4세대에 걸친 자이니치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1.5세인 이민진 작가의 베스트셀러가 원작이다. 작품 역시 한국계 미국인 프로듀서와 감독, 배우가 주축이 됐다. 이 영화의 경우 미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제 강점기 한국의 역사를 보여줘 주류사회에 한인사를 알리기 위해 앞장서고 있는 한인 커뮤니티에도 힘이 된다.     K-콘텐츠를 대중적으로 알린 일등공신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다. 지난해 연초 ‘승리호’에 이어 ‘갯마을 차차차’, ‘오징어 게임’, ‘지옥’ 등을 잇달아 공개하며 K-콘텐츠 열풍을 일으켰는데 이는 미국에 한국어 교육 열풍을 일으키는데 적잖은 도움을 주고 있다.     LA한국교육원측은 “K-팝이나 K-드라마 등 한류 열풍으로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는 건 사실”이라며 “한국어를 배우는 인구가 늘어날수록 한국의 위상도 높아진다. 한인 학생뿐만 아니라 타인종 학생들도 제대로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한인 2세 할리우드 진출 러시   30년 전만 해도 한인들의 주류 문화계 진출 장벽은 높아 보였지만 한인 2세들은 클래식 음악, 대중음악, 영화, 문학계로 진출하면서 물꼬를 텄다.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지난해 그래미상 수상자이자  에이버리 피셔 그랜트 수상자인 세계적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대중 음악계에서는 앤더슨 팩이 활약했다.     영화계에서는 ‘로스트’, ‘CSI’의 대니얼 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오션스8’에 출연한 아콰피나, ‘워킹 데드’의 글렌 리, ‘미나리’의 제이콥 역을 소화한 스티븐 연, ‘프리미엄 러쉬’의 제이미 정, ‘행오버’, ‘행오버2’에서 중국계 갱보스 차오 역을 맡은 켄 정 등이 있다.     할리우드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한인 배우는 샌드라 오다. 2005년 영화 ‘사이드웨이’로 미국 배우 조합상 출연상 수상을 시작으로 같은 해 ‘그레이 아나토미’의 크리스티나 양 역으로 여우조연상을, ‘킬링 이브’를 통해서는 TV 드라마 시리즈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지난달에는 공포 영화인 한국어 제목 영화 ‘엄마(Umma)’의 주연 아만다 역으로 열연해 호평을 받았다.     최근 주류 문화계 최대 이슈인 애플 TV ‘파친코’는 2017년 출간돼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된 한인 2세 이민진 작가의 장편소설 ‘파친코’를 원작으로 제작했다. 이 소설은 내셔널 북 어워드 픽션에 지명된 바 있다. 이은영 기자429특집

2022-04-24

[LA폭동 30주년] 통계로 본 전국 한인사회 현주소

LA폭동 30주년을 맞아 통계로 본 한인 사회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연방센서스국이 5월 아시안 전통문화의 달을 맞아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한인 인구는 미전역에 192만6508명(혼혈 포함)이다. 이 통계는 2016-2020 아메리칸커뮤니티서베이(ACS) 통계를 토대로 취합됐다.     이 데이터에 따르면 한인 2명 중 1명은 미국에서 출생한 2세다. 전체 한인 인구 대비 한국 출생자 비율은 54.4%로 나타났다.     캘리포니아주에는 55만7491명(혼혈 제외 47만978명)이 거주해 최다 한인이 거주하고 있는 주라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그 뒤로 한인 인구가 가장 많은 뉴욕은 가주 한인 인구의 25.8%에 불과한 14만4002명이 거주했다. 특히 뉴욕주 한인 인구는 5년 전보다 2.3% 감소한 반면 텍사스는 무려 20% 증가해 10만9926명을 기록했다. 텍사스에 이어 뉴저지(10만5694명), 워싱턴(9만6671명), 버지니아(9만3825명) 순으로 나타났다.   LA카운티 한인은 23만1147명으로 최다 한인 거주 지역으로 파악됐지만 5년 전에 비해 한인 인구가 1.4%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LA시도 같은 기간 1% 줄어든 11만632명을 기록했다. 특히 LA카운티와 LA시에 거주하는 비혼혈 한인의 경우 각각 4.6%, 4%가 감소했다.   반면 오렌지카운티는 혼혈 포함 한인 인구가 7.2%, 비혼혈 한인 인구는 5.2% 늘어난 10만8693명, 9만8287명이었다.   LA시에 이어 교육 도시로 이름을 알린 어바인은 5년 전보다 무려 19.6% 증가한 2만3701명으로 집계됐으며, 풀러턴시도 5.8% 늘어난 1만8351명, 샌디에이고시는 1만8807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시민권자 증가 미국에서 출생한 비혼혈 한인 2세는 전체 한인의 31%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1세 한인은 65.8%였으며, 비시민권자는 34%로 파악됐다.   한인 이민사회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한인들의 미국 체류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1세 가운데 미국 체류 기간이 20년 이상 된 한인의 비율은 60%로 파악됐다. 2010년 이후 입국한 한인은 17.7%에 그쳤다.     ▶10명 중 2명은 다세대 가구 이번 보고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점은 다세대 가구의 비율이다. 할아버지·할머니와 부모, 자녀 등 3세대가 함께 거주하는 한인 가구의 비율은 전체의 2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세 가정 가운데는 22%가, 2세 가정은 17%가 3세대가 함께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3세대 거주 현상은 전체 아시안 커뮤니티에서도 나타났다. 통계에 따르면 전체 아시안 인구의 27%가 다세대 거주 가구였다.   전체 한인 가운데 결혼자의 비율은 52%로 나타났다. 한인 가구의 평균 수는 2.5명, 가족수는 3.1명이다.   ▶주택 보유율 1세가 높아 빈곤층은 1세가 더 많았다. 특히 65세 이상 노인층의 경우 1세의 19%가 빈곤층으로 파악됐다. 반면 2세는 12%로 낮다. 한인 평균 주택 보유율은 52%로, 미주 한인 2명 중 1명은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1세가 53%로 2세(48%)보다 좀 더 많다. 전체 아시안 인구의 주택 보유율은 59%로 한인 평균보다는 더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아시안 인구에서 5번째 차지 미국 거주 한인 인구는 전체 아시안 인구의 8%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신 국가별로는 중국계(539만9000명), 인도계(460만6000명), 필리핀계(421만1000명), 베트남계(218만2000명)에 이어 5번째로 많다. 보고서는 일본계(149만8000명)를 합친 이들 6개 국가 출신이 전체 아시안 인구의 절대다수인 85%를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시안 인구의 57%(성인의 71%)는 외국에서 출생한 이민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전체 인구의 14%가 이민자인 것과 비교하면 외국 출생자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장연화 기자429특집

2022-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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