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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광기가 LA를 집어삼켰다

[LA폭동 30주년]
폭동의 기록

 '흑인폭동' 1992년 4월30일자 본지 1면 기사 제목이다. 사진과 당시 제목들이 4.29 사태의 심각함을 전달하고 있다.

'흑인폭동' 1992년 4월30일자 본지 1면 기사 제목이다. 사진과 당시 제목들이 4.29 사태의 심각함을 전달하고 있다.

1992년 5월5일자 미주중앙일보 신문 기록이다.
 
사진 속 정진무(당시 51세)씨는 산소 튜브를 낀 채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일주일 전(1992년 4월29일)이었다. 그날 정씨는 폭도들에게 "물건은 털어가도 좋으니 불만 지르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광기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씨는 4발의 총격을 받고 바닥에 쓰러졌다. 가슴과 배 등에 총알이 박혔다.
 


정진무씨의 기사는 LA폭동 기록의 단편이다. 그날의 사태는 30년이 지난 지금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수백 편에 달하는 신문 기사의 조각을 모았다. 그 단편들은 4ㆍ29의 처음과 끝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로드니킹 사건 평결로 폭발
LA전역 약탈·방화 무법천지
 
한인업소 피해 가장 많아
일부 언론 왜곡 보도로 상처
 
갈등과 분노가 누적되고 있었다. 이미 곳곳에서 조짐이 보였다.
 
봉합을 위한 노력의 흔적들이 당시 상황을 역설적으로 방증한다. 당시 한인커뮤니티자문위원회는 흑인 갱 선도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유명 흑인 프로풋볼 선수였던 짐 브라운에게 2900달러를 전달했다.  〈1992년 1월7일자〉
 
한미식품상협회, 남가주식품상협회 등 한인 업주들은 탐 브래들리 LA시장과 공동 기자회견까지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흑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10개 항이 발표됐다. 한인 업주와 흑인 고객 간 지켜야 할 매너가 담긴 수칙이었다. 〈1992년 1월25일자〉
 
당시 흑인사회에서는 사우스 LA에서 잇따라 벌어진 두 사건으로 인해 반한인 감정이 고조되고 있었다. 1991년 3월 리커스토어를 운영하던 두순자 씨가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를 강도로 오인해 총을 쏴 숨지게 한 사건, 1991년 6월 존스 마켓을 운영하던 박태삼 씨가 흑인 강도 용의자 리 아서 미첼을 총으로 쏴 숨지게 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격해진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게 필요했다. '한.흑 친선의 밤' 행사가 추진됐다. LA총영사관까지 나서 행사 지원 방안을 고민했다. 〈1992년 2월12일자〉
 
뉴욕에서도 이상기류가 흘렀다. 브루클린의 한인 밀집 상가를 중심으로 '흑인을 고용하지 않는 모든 한인 가게를 거부하라'는 전단지가 뿌려졌다. 흑인들은 확성기를 사용해 주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뉴욕지사=1992년 3월16일자〉
 
한인과 흑인 사이에서만 긴장이 감돈 게 아니다. 당시 사회 전반에 걸쳐 인종 간 골이 깊었다. 주류언론들은 흑인 사회를 계속해서 조명했다. 심지어 '흑인 말살설'이 나돌았다. 뉴스위크가 이 소문을 기획 기사로 다룰 정도였다. 본지 역시 이 기사를 번역 보도했다. 〈1992년 4월13일자〉
 
갈수록 격해지는 흑인 사회의 감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학계가 나섰다. 캘스테이트LA에서는 '소수계 인종의 긴장'이란 주제로 1차 학술 심포지엄이 개최됐다. 심지어 '한ㆍ흑 마찰'이란 주제로 보름 후 2차 심포지엄이 열리기로 예정됐다. 〈1992년 4월16일자〉
 
공교롭게도 2차 심포지엄이 예정됐던 그날은 바로 '1992년 4월29일'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심상치가 않았다. 세간의 관심인 로드니킹 사건 평결이 다가오면서 백인 경관들이 무죄 평결을 받을경우 폭동 발생 우려도 제기됐다. LA흑인감리성공회 시실 머레이 목사는 설교 도중 "평결이 진실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진실을 일깨워야 한다. 불을 지펴라. 형제들이여, 진실을 외면한 법과 부도덕한 자들에게 불을 지르자"고 선동하기도 했다. 〈1992년 4월28일자〉
 
결국 분노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1992년 4월29일, 로드니 킹 사건으로 기소된 경관들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졌다. 광기가 삽시간에 LA를 집어삼켰다. 걷잡을 수 없었다. 소요 사태는 롱비치, 카슨, 컬버시티, 호손, 잉글우드, 토런스 등 LA카운티 전역으로 확산됐다. '흑인 폭동'. 이날 본지 1면은 단 네 글자로 채워졌다. 곧바로 비상사태가 선포됐고, 주방위군이 출동했다. 곳곳에서 방화, 약탈이 이어졌다. 당시 2, 3, 4면도 모두 폭동 기사로 채워졌다. 〈1992년 4월30일자〉
 
무법천지였다. 당시 LA 흑인 사회의 양대 갱단으로 적대 관계에 있던 '크립스(crips)'와 '불러즈(bloods)'가 연합하기로 합의하고 LAPD 풋힐 경찰서를 공격했다. 풋힐 경찰서는 로드니 킹 사건에서 무죄 평결을 받은 경관들이 소속돼 있던 곳이다. 두 갱단은 이날 풋힐 경찰서를 완전히 장악했다. 〈1992년 5월1일자〉
 
급기야 폭동의 도화선이 됐던 로드니 킹이 1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흑인 사회에 폭력 행위 중단을 호소했다. 〈1992년 5월2일자〉
 
한인들은 아픔 속에서 결속했다. 잿더미 가운데 응집했다. 광기가 휩쓸고 간 직후 한인타운 한복판에서는 한인 수만 명이 모였다. 폭동 발생 직후 불과 나흘째 되던 날이다. 당시 아드모어공원(현 서울국제 공원)에서는 '한인타운 재건과 평화를 위한 대집회'가 열렸다. 거리로 몰려나온 한인들은 아리랑을 불렀다. 평화를 외쳤다. 주류 언론들은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이 광경을 전국에 알렸다. 〈1992년 5월3일자〉
 
주류언론들은 폭동 소식과 함께 두순자 사건 영상을 반복해서 방영했다. 당시 LA폭동 TV시청률은 무려 70%를 기록했다. 전국적으로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두순자 사건 영상을 반복적으로 방영하는 것은 폭동 원인을 한인사회로 돌리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한인들은 폭동과 관련해 왜곡보도를 일삼던 KABC-TV에 계속해서 항의 전화를 걸었다. 한인변호사협회 소속 변호사들이 짐 하텐도프 보도국장까지 찾아갔다. 당시 하텐도프 국장의 막말에 한인사회는 다시 한번 분개했다.
 
그는 "너희 같은 폭도들의 말을 따를 수 없다. 항의 전화는 오히려 한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1992년 5월4일자〉
 
공포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한인 은행들의 예금, 인출 업무가 중단되는 등 한인 사회 전반이 얼어 붙었다. 우체국의 업무 마비로 신문 배달마저 지연됐다. 그 와중에도 본지는 직원들이 밤을 지새우며 계속해서 호외를 발행했다. 〈1992년 5월4일자〉
 

한인들 흑인 갱단까지 만나며 수습 노력

 

한인 피해 업소 2280개 달해
경찰 늑장 대응 책임론 부각

"동포를 돕자" 한인들 기부
성금관리 법적 분쟁 오점도
 
팬데믹 사태 때만 통행 금지령이 내려진 게 아니다. 30년 전 폭동 때도 그랬다. LA카운티 전역에 학교 수업 중단은 물론 닷새간 야간 통행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후 진정국면에 접어들며 단계적으로 해제됐다. 〈1992년 5월4일자〉
 
본지 기자들은 피해 상황만 보도하지 않았다. 속보와 함께 한인 사회 복구를 위한 피해 보상 정보도 속속 전달했다. SBA 융자를 위한 업소 피해 보고서 작성 요령 LA시에 제출해야 할 피해 신고 서식 보험 피해 보상 정보 등을 세세하게 취합해 한인 사회에 제공했다. 〈1992년 5월4일자〉
 
폭동 조기 진압 실패에 따른 책임론이 대두했다. 경찰의 늑장 출동을 두고 비난이 거세졌다. LAPD 특수기동대 등이 폭동 초기에 출동하려 했으나 고위층의 지시로 무산된 사실이 드러났다. 폭동이 발발하자 경찰이 이를 방관하고 도피했다는 증언도 잇따랐다. 결국 LA경찰위원회가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1992년 5월5일자〉
 
한인 사회의 공분을 자아낸 사건도 있었다. 폭동 당시 약탈 행위에 가담한 혐의로 한인 5명이 구속 기소돼 인정신문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기소된 한인 중 2명은 무죄를 주장했다. 〈1992년 5월5일자〉
 
 
그때도 한인 교회는 이민 사회의 중심축이었다. 한인 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됐고 발전하던 상황이었다. 폭동 직후 교회들은 특별 헌금 등을 걷고 저마다 지원 대책 마련에 나섰다. 교인들은 쌀 라면 등 생필품을 기부하며 지원 활동에 적극 발 벗고 나섰다. 〈1992년 5월6일자〉
 
 
한인타운을 위한 명확한 구획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이때 처음 나왔다. 타운 구역이 산만하게 흩어져있기 때문에 법집행기관에서 치안 전략을 수립하는 게 쉽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1992년 5월9일자〉  
 
그 당시 한인들의 목소리가 현재 2.7 스퀘어 마일의 한인타운 공식 구획이 지정(2010년)되는데 시발점이 됐던 셈이다.    
 
한인 업소들의 피해 규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총 2280곳의 한인 업소가 피해를 입었다. 피해액은 약 3억9950만3755달러로 잠정 집계됐다. 연방노동부에서 공식 제공하는 인플레이션 환산 프로그램을 통해 당시 피해액을 오늘날 시세로 계산해봤다. 2022년 3월 기준으로 약 8억 달러에 해당한다.
 
당시 한인 피해업소 중 단일업체로 피해액이 가장 컸던 곳은 피코 피에스타 쇼핑센터(업주 김창휘.당시 주소 2048 W Pico Blvd)'였다. 이 업체의 피해액은 550만 달러로 보고됐다. 〈1992년 5월11일자〉 
 
 
코로나19가 확산할 때 중국계에 대한 적대적 분위기가 다른 아시안들에게도 우려를 낳았 듯 30년 전에도 그랬다. 당시 LA타임스의 중국계 일레인 우 기자는 폭동 관련 기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한인으로 오인받을까봐 두렵다. 폭도들이 우리의 다른 점을 구별할 수 있을까.' 〈1992년 5월12일자〉
 
흑인 사회의 분노는 그칠 줄 몰랐다. 폭동 당시 흑인 청년 4명이 백인 트럭 운전사인 레지널 데니를 구타했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이 사건은 로드니킹 사건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두 사건 모두 당시 현장 상황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가 증거로 제시됐다.  
 
단 로드니 킹 사건에서는 법원이 "경관에게 유죄를 내리는 데 있어 비디오테이프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없다"며 무죄 평결을 내렸다. 반면 흑인 사회는 "로드니 킹의 평결이 그대로 적용되는지 지켜보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자칫하면 더 극심한 폭동으로 번질 수 있는 위기였다. 〈1992년 5월13일자〉
 
흑인 사회는 한인 상권의 재조성을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LA시의회는 흑인 사회의 눈치를 봤다. 결국 전소된 건물을 재건할 경우 시 정부 코드를 엄격히 적용 업소 주변 500피트 이내 주민을 대상으로 반드시 공청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내용의 조례안이 통과됐다. 이 조례에는 신규 리커 라이선스 발급시에도 주민 공청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사실상 흑인 주민들이 반대할 경우 비즈니스 재건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1992년 5월14일자〉
 
화해를 위한 몸부림도 있었다. 전미식품상협회 남가주식품상협회 등이 '갱단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윌셔코리아나호텔(현 라인호텔)에서 풋힐 경찰서를 장악했던 블러즈와 크립스의 갱단 대표 4명을 만났다.  
 
이날 두 시간이 넘는 회동 끝에 갱단 대표들은 5개 조항의 한.흑 커뮤니티 공동협조방안을 제시했다. 제시안에는 ▶한인 업소의 흑인 고용 확대 ▶흑인 사회에 한인 은행 지점 신설 ▶흑인 갱단원 한인 업소 경비 담당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1992년 5월26일자〉
 
 
한인 업주들이 갱단과 회동을 갖자 비난 여론이 거세졌다. 한인사회의 위상을 떨어뜨린 섣부른 처사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당시 주류언론들도 이 내용을 앞다퉈 보도했다. 〈1992년 5월28일자〉
 
 
결국 양측은 다시 만나 "1차 회동에서 나눈 협의 사항은 한인 사회 전체 의견을 대변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에 합의했다.
 
한인사회는 스스로 타운 재건에 나섰다. 곳곳에서 성금이 모아졌다. 피해자복구성금관리위원회도 구성됐다. 당시 남가주공인회계사협회의 중간 감사 내역을 보면 총 475만2571달러의 성금이 걷혔다. 〈1992년 7월22일자〉
 
 
성금 때문에 한인 사회는 그늘진 모습도 보였다. 액수가 커지자 성금 관리를 두고 잡음이 일기 시작했다. 성금으로 은행 융자를 받으려 했던 성금관리위원회 측과 즉각적인 지급을 원했던 피해자협회가 갈등을 빚었다. 이는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졌다. 결국 법원 결정에 따라 성금은 결국 피해자협회로 넘겨졌다. 이후 성금 분배를 두고 갈등을 거듭하다가 피해자협회 역시 두 갈래로 찢어졌다. 〈1992년 10월29일자〉
 
폭동의 시간이 과거로 흘러갈수록 희망이 움트고 있었다. 흑인 사회 실업인들과 한인 경제인들이 LA 재건 방안을 모색하는 모임을 가졌다. 〈1992년 6월19일자〉
 
한인기독교교회협의회는 흑인 교계 지도자들과 함께 9월에 한.흑 교계 회의를 개최하기로 발표했다. 〈1992년 7월8일자〉
 
당시 나성영락교회 박희민 목사 등 한인 교계 관계자들은 갈등 해소를 목적으로 흑인 목사 방한 사업을 추진했다. 실제 LA 인근 흑인 교계 지도자 80여 명을 초청 두 번에 걸쳐 한국 방문 행사를 진행했다. 물론 모든 비용은 한인 교계가 지원했다. 〈1992년 11월4일자〉
 
상처는 시간을 품고 조금씩 아물어갔다. 서서히 새 살이 돋았다.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4.29의 기록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는 역사다.
 

장열ㆍ장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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