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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이후부터 '코리안-아메리칸' 정체성 갖게 돼

"폭동은 한인사회 정체성 인식의 전환점"
'한흑문제' 연구 전문가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
한흑 갈등이 원인 아니라 사회구조적 모순의 표출
타인종 역사·문화 존중, 다인종 사회 삶의 기본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는 미래의 한인사회를 위해 다인종 문화와 역사를 포용하는 자세와 차세대들이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뿌리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상진 기자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는 미래의 한인사회를 위해 다인종 문화와 역사를 포용하는 자세와 차세대들이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뿌리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상진 기자

"LA폭동은 우발적 사태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조짐이 있었다. 곪아온 것이 터진 것이다."
 
LA폭동에 대한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소수인종학)의 분석이다. 장 교수는 한인을 포함한 미국 내 소수계 연구의 권위자다. 그는 UC버클리에서 '한흑갈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 교수에게 그날의 기억을 물었다. 그때의 기억은 30년이 지난 지금 한인사회에 의미를 남긴다.
 
공교롭게도 그날 오후 6시 장 교수는 LA한인타운에 일정이 있었다. 당시 웨스턴 애비뉴에 있던 우래옥 식당에서 안젤라 오 변호사와 함께 유대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흑갈등에 대한 특강을 진행했다. 식당 내에 있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때 또 한 번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1992년 4월 29일 발행한 LA중앙일보 1면. 당시 한인타운의 처참한 상황을 잘 드러낸다.

1992년 4월 29일 발행한 LA중앙일보 1면. 당시 한인타운의 처참한 상황을 잘 드러낸다.

 
-뭐라고 하던가.


 
“저녁 8시 정도였다. LA파커센터(LAPD 본부)가 공격당하고 있으니 집에 빨리 돌아오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10번, 101번 프리웨이가 이미 모두 차단된 상태였다. 로컬 도로를 통해 샌게이브리얼까지 가서 집으로 왔다. 그날 밤새 라이브 뉴스를 봤다. 새벽녘에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그때부터 약탈당하는 한인타운의 모습이 TV 화면을 통해 나왔다.”
 
-당시 어떠한 조짐이 있었나.
 
“이미 80년대 뉴욕 지역 신문기사에 ‘Korean Invasion(한인의 침략)’이라는 제목이 나올 정도였다. 80년대 초중반 흑인 사회에서는 한인 상점 거부 운동도 자주 일어났다. LA, 뉴욕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분위기가 다 그랬다. 흑인 사회 역사를 보면 항상 외부인이 들어와서 상권을 장악해왔다. 그러다 1965년 와츠폭동 이후 유대인이 다 나가고 공백이 생겼는데 한인 이민자들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왔다.”
 
-공존이 왜 어려웠나.
 
“한인들은 흑인사회의 역사, 문화도 전혀 모른 채 그 지역으로 무작정 들어가서 사업부터 했다. 영어도 안 되고, 그들의 배경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럴만한 여력도 없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고 일터에서 12시간 이상 열심히 일만 했었다.”
 
(흑인사회에서는 흑백 간 경제적 불균형, 오랜 시간 이어진 높은 실업률, 질 낮은 교육, 고질적인 경찰의 과잉진압 문제 등으로 분노와 설움이 쌓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로드니 킹, 두순자 사건이 터졌다. 당시 언론 매체들은 계속해서 두 사건의 영상을 지속해서 노출하며 흑인사회를 자극했다. 장 교수는 흑인들의 분노가 그런 사건들과 연결되면서 불똥이 한인사회에 튄 것이라고 했다.)
 
-갈등이 핵심 원인인가.
 
“엄밀히 말하면 LA폭동의 원인은 ‘한흑갈등’이 아니다. 예를 들면 1986년 LA에는 한흑연맹이 있었다. 물론 LA폭동 직후 해체됐지만 한인사회와 흑인사회가 문화 교류 등을 통해 꾸준히 소통했었다. LA폭동은 사회 구조적 모순에 의해 오랜 시간 쌓여온 흑인사회의 분노가 하나의 시대적 현상으로 표출됐다고 봐야 한다.”  
 
-해빙의 분위기는 어떻게 마련됐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인사회 곳곳에서 조금씩 자각의 목소리가 나왔다. 한 예로 당시 가주한미식품상총연합회(KAGRO)에서는 내가 흑인 사회에 관해 쓴 책을 대량 사서 회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한인 언론들도 기사, 오피니언 등을 통해 흑인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민역사에서 LA폭동이 갖는 의미는.
 
“한마디로 ‘전환점’이다. 이전에는 한인 이민자들이 자신을 ‘한국인’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LA폭동 이후부터 ‘코리안-아메리칸’의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폭동을 경험하면서 ‘이게 아니구나.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려면 주인의식부터 가져야 하는구나’라고 말이다. 그때부터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주장했다. 차세대를 위한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또 하나는  단일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다문화 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법, 이 부분을 자각한 게 바로 폭동 이후다.”
 
-30년이 지났다. 개선점은.
 
“한인사회는 엄청난 양적, 질적 성장을 했다. 정치력 역시 주류사회가 무시 못 할 정도는 됐다. 학계에서 젊은 학자들도 많아졌다. 다만, 1세대는 여전히 교회 중심의 커뮤니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인 교회들이 인종 간 교류와 화합, 정치 참여 등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주면 좋겠다. 2세들은 인종 간 교류 등 그런 부분에서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한다.”
 
-한인사회의 지향점은.
 
“1세대 이민자가 본국 지향적 성향을 보인다면 차세대는 그렇지 않다. 한국 이슈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LA폭동과 같은 ‘코리안 아메리칸’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이로 인해 한인사회에 대한 이해,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다. ‘내가 왜 한인사회 이슈에 참여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갖는다. 단순히 한국 문화, 언어를 가르치라는 게 아니다. 뿌리 교육을 통해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심어줘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생긴다. 그 부분에 중점을 둬야 한다.”  
 
-한인사회에 하고 싶은 말은.
 
“그날 있었던 일은 동화가 아니다. 우리 한인 이민사회의 역사다. 한국사회를 보자. ‘다문화’라는 표현이 은연중에 하나의 차별적 용어가 됐다. 다른 것만 강조하면 안 된다.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는 외부에서 온 사람을 무조건 한국사회로 동화시키려 한다. 진정한 다인종 사회라면 그들이 가진 역사, 문화를 지키면서 그 사회의 일원으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LA폭동이 남긴 의미도 그렇다.”

장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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