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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한 ‘무담보 대출’ 피해자들에 재기 발판

피해 한인업소에 금융지원 앞장 ‘한미은행’
당시 최대 규모의 한인은행
행장 등 피해업소 직접 방문
수혜자들 고마움 잊지 못해

LA폭동 후 한인타운 폭동 피해 장소를 둘러본 네이트 홀든 전 LA시의원(오른쪽에서 3번째)과 함께한 벤자민 홍 전 행장(오른쪽에서 4번째).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LA폭동 후 한인타운 폭동 피해 장소를 둘러본 네이트 홀든 전 LA시의원(오른쪽에서 3번째)과 함께한 벤자민 홍 전 행장(오른쪽에서 4번째).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LA폭동이 발생한 1992년, LA지역에는 6개의 한인은행이 영업 중이었다.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하면 5개 한인은행 (한미,나라,중앙,윌셔,새한)과 한국 외환은행의 미주법인(가주외환은행).  
 
당시 한인은행 가운데 가장 큰 은행은 한미였다. 한미는 최대 한인은행 답게 신속하게 한인 폭동피해자 지원에 나섰다. 졸지에 생활터전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업주들에게 한미의 신속한 금융 지원은 단비와도 같았다.    
 
한미는 폭동 발생 다음날인 4월 30일과 5월 1일 영업을 중단했다. 피해 예방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하지만 벤자민 홍 당시 한미 행장은 본점 앞 주유소가 불에 탔고, 버몬트 지점이 대출해 준 한 아파트에 화염병이 날아들었다는 소식 등을  접하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은행에 올 수 없는 형편인 고객들을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이어 은행 측은 폭동 피해 고객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홍 전 행장이 직원들과 함께  80여 곳에 이르는 피해 업소를 돌며 위로했다. 또 피해 상황이 파악되는 즉시 최대한의 지원책을 마련했다.  
 


 홍 전 행장은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역사’라는 책을 다시 읽었다고 한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 복구 자금이 절실했던 소상공인들을 도운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사실 당시 BofA는 없었고 전신인 이탈리아계 이민자 은행 뱅크오브이탈리아가 한 일이다. 이 은행의 설립자가 대지진 후 마차에 현금 1만 달러를 싣고 거리에서 소액대출을 해줬고 이 은행이 나중에  BofA가 된 것.    
 
한미는 홍 전 행장의 주도로 한인 비즈니스 지원 플랜을 바로 짰다. 빠른 복구가 가능한 업소를 대상으로 무담보로 자금을 빌려줬다. 피해 정도가 심하지 않아 금방 비즈니스를 복구할 수 있는 고객에게는 10만 달러까지 신용대출을 제공했다. 또 피해자들의 재해 복구 융자 신청을 도와주기 위해 대출담당 오피서들을 피해 업소들에 보냈다.  폭동 성금을 보탠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무담보 대출 결정’이 쉽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부실 위험을 이유로 일부 이사들이 반대 의견을 냈던 것. 이에 홍 전 행장을 중심으로 경영진은 한인 커뮤니티 은행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했고, 이에 반대하던 이사들도 금세 수긍했다.  
 

이렇게 도움 받았다

 
#이흥률씨
 
폭동으로 LA의 페어팩스와 애덤스가 만나는 곳에 있던 마켓을 잃은 이흥률씨는 지금도 한미은행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1988년부터 운영했던 어드밴스 푸드마켓이 전소된 것. 모두 불에 타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구나 2년 전 마켓이 있는 건물도 인수한 상태였다. 당시 한미에 상환해야 할 대출금이 절반쯤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씨에 따르면 한미는 요청하기도 전에 원금과 이자 상환을 연기해줬다. 이후 SBA 융자와 재해보상 융자를 신청할 때도 도움을 받았다. 이런 덕에 이씨는 재기 3년여 만에 융자금을 다 갚을 수 있었다.  
 
#김정일씨
 
김정일씨도 폭동 당시 사우스LA 지역 캄튼에서 그레이스 수퍼마켓이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1987년 한미에서 6만 달러를 담보 없이 융자해줘 시작한 비즈니스였다.  
 
억척스럽게 일한 김씨는 4년 만에 SBA 융자 38만 달러를 얻어 마켓이 입주해 있던 건물까지 구입했다. 하지만 1년 만에 폭동으로 모두 불타버린 것. 건물은 보험에 들어 있었지만, 인벤토리는 포함되지 않아 다시 장사를 할 길이 막연했다. 다행히 한미를 통해 20만 달러의 SBA 대출을 받아 폭동 1년 반만인 1993년 9월 1일 영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커뮤니티 은행 역할 강조하며 이사들 설득”  

 
벤자민 홍 당시 한미은행 행장


벤자민 홍 전 행장

벤자민 홍 전 행장

 
-피해자 ‘무담보 대출’에 일부 이사의 반대가 있었다던데.  
 
“전체 이사 12명 중 절반이 반대했다. 부실 위험이 크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한미은행은 한인 이민자들이 세운 은행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사례를 얘기했더니 부정적이던 이사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한인업소가 살아야 커뮤니티 은행도 함께 산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당시 한인 피해자들을 무조건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폭동 발생 5일만인 5월4일부터 대출을 시작했다. 다른 한인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못한 한인에게도 융자를 줬다. 약식으로 만든 1장짜리 서류에 서명한 분들에게 바로 대출했다. 한인은행의 뿌리는 한인사회다. 당시에는 우리가 한인 고객을 살렸다고 뿌듯해했지만, 2009년 금융위기 때는 한인 고객들이 은행을 살렸다. 당시 무담보 융자를 받은 고객 30여 명 중 채무 변제를 하지 못한 고객은 한 명도 없었다. 은행은 고객들이 성공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베풀어야 돌아온다.”
 
-당시 대출해 준 분들하고 지금도 연락하나.
 
“일부는 지금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 생일 때마다 선물을 챙겨주는 분도 계신다(웃음).”
 
-폭동 30주년을 맞았는데.  
 
“한인사회는 단기간에 성공한 이민 커뮤니티다. 이런 상황에서 백인들을 향했던 흑인들의 증오심은 한인사회로 번졌다. (박탈감에서 비롯된)모범 이민자들을 향한 분노였다. 지금의 아시안 증오범죄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그들은 성공하면 주류가 됐다고 생각한다. 유대인 친구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성공했기 때문에 증오받는 것’이라고. 폭동은 우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인사회는 다른 커뮤니티로부터 인정 받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봉사를 하려는 노력도 부족했다. 앞으로는 가시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정치적인 노력도 필수다.”
 
-한인사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성숙한 한인사회가 돼야 한다. 정치적인 이슈에 좀 더 신경 썼으면 한다. 우리 한인사회는 약점이 있다. 너무 개인플레이에 치중한다. 리더십이 부족하다. 성공한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원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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