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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지휘부의 무책임이 한인업소 피해 키웠다

[LA폭동 30주년]
왜 한인 피해 많았나

대응지시 받지 못해 시간 허비
한인타운 무법지대로 방치
흑인 분풀이 대상으로 몰려
 
숫자로 본 LA폭동

숫자로 본 LA폭동

‘LA폭동’은 1903년 1월 13일 한인 이민이 시작된 이래 한인 이민사의 최대 비극으로 기록됐다. 이민 1세대 한인 대부분 가족 단위로 스왑밋, 편의점, 주유소 등을 꾸려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 나가던 시기였다. 폭동은 한순간에 많은 한인 가정의 전 재산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4·29 LA폭동(이하 LA폭동)은 1992년 4월 29일 교통 단속에 걸린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백인 경관 4명에게 (백인)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이 내려지자, 분노한 흑인들이 LA 도심으로 일제히 쏟아져 나와 폭력과 약탈, 방화를 저지른 사건이다.
 
흑인들의 분노는 약탈과 방화로 5월 3일까지 이어졌다. 이후 흑인 시위대에 이어 라틴계, 일부 한인까지 약탈에 가담했다. LA경찰국 지휘부는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결과 사우스LA와LA한인타운은 무법지대가 됐다. 이 폭동으로 사망자 55명(한인 1명 포함), 부상자 2300여 명의 인명피해가 났고 재산피해는 7억 달러 이상으로 기록됐다.
 
폭동 당시 LA한인타운 피해현황. [자료:한미교육원-한인역사박물관]

폭동 당시 LA한인타운 피해현황. [자료:한미교육원-한인역사박물관]

◆로드니 킹과 두순자 사건
 
LA폭동 최대 피해자는 한인 이민 1세대 자영업자와 한인사회였다. 약탈과 방화 피해를 본 한인 업소만 2300여 곳으로 재산피해가 당시 기준 3억5000만 달러나 발생했다. LA폭동으로 인한 전체 피해액의 40~50%에 달한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인 피해자는 LA시나 연방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배상도 받지 못했다.
 
당시 한인사회 피해는 왜 커질 수밖에 없었을까. LA폭동은 1965년 LA남부왓츠 지역에서 발생한 ‘왓츠폭동’과 시위대 주체가 비슷했다. 와츠폭동과 차이점은 흑인사회 분노가 1990년대 초 사우스LA 등에서 편의점과 리커스토어를 운영한 350개 이상 한인업소로 향했다는 사실이다.
 
LA폭동 시위는 로드니 킹 무죄 평결 직후 사우스LA에서 시작했다. 로드니 킹 무죄평결은 흑인사회가 겪어 온 인종차별과 빈곤 등 사회구조적 불평등이란 분노에 불을 지폈다. 반면 로드니 킹 무죄평결 직후 주류 미디어는 1991년 한인 업주 두순자씨가 15세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와 시비 끝에 총격을 가해 숨지게 한 사건을 반복적으로 부각했다. 주류 미디어가 흑인 주도 폭동을 한흑 갈등이 원인인 양 편파보도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흑인 시위는 곧 사우스LA 한인업소 약탈과 방화로 이어졌다. 이후 시위대는 LA한인타운까지 이동하며 닥치는 대로 약탈과 방화에 나섰다. 거리낌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군중심리 여파 등으로 라틴계와 일부 아시아계도 약탈에 동참했다.
 
결국 로드니 킹 사건과 두순자 사건이 겹쳐 흑인사회 분노가 표면적으로 한인업소와 한인타운을 향하게 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흑인사회의 백인과 미국 사회를 향한 정당한 문제제기는 뒷전이 된 셈이다.
 
◆LA 공권력 의무 외면
 
사우스LA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 곧이어 벌어진 무분별한 약탈과 방화를 막을 수는 없었을까.  
 
한미교육연구원과 한인역사박물관이 LA폭동 20주년 자료집으로 펴낸 ‘잊을 수 없는 그 날, 1992년 4월 29일-화합, 단결 그리고 미래로’는 윌리엄 웹스터 특별조사위원회(폭동 이후 웹스터 전 CIA·FBI 국장은 변호사 100명과 5개월 동안 연방정부 차원의 폭동 진상조사를 벌였다) 보고서를 바탕으로 “LA 경찰과 시 당국의 무능, 무관심, 무계획이 필요 이상의 시민 희생을 불러왔고 이민자 그룹인 한인사회가 시위대와 폭도의 분풀이 대상이 됐다”고 명시했다.
 
실제 1992년 4월 29일 오후 3시쯤 LA지역 미디어는 긴급뉴스로 사우스LA 흑인들이 거리로 뛰어나왔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LA경찰국(LAPD)은 제때 움직이지 않았다. 훗날 LAPD가 제대로 된 폭동대비 진압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웹스터 특별조사위원회 보고서는 폭동 당시 경찰병력 70% 이상이 사우스센트럴과 웨스트LA에 배치됐다고 지적했다. LA한인타운에는 경찰병력 10%가 배치됐고 이마저도 경찰서 건물과 공공건물 경비에 주력하도록 했다. 경찰이 상가 등 한인업소 보호에 손을 놓은 셈이다.
 
그 결과 폭동 둘째 날 오후 11시부터 다음날 자정까지 LA한인타운에서만 968건의 약탈과 방화가 자행됐다. 보고서는 경찰의 폭동진압 미숙 때문에 LA한인타운 피해가 더 컸다며 (소수계 커뮤니티 사이의) 인종적 편견 때문에 저질러진 일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실제 폭동 첫날 오후 7시쯤 당시 LAPD 데럴 게이츠 국장은 보고를 받고도 기금모금 파티에 참석해 논란을 일으켰다. 웹스터 보고서에 따르면 게이츠 국장은 LAPD 폭동지휘부에 30분~1시간만 머물렀고, 사우스 센트럴 경찰서 경관 수백 명은 상부로부터 아무런 지시가 없어 서성거렸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게이츠 LAPD 국장과 톰 브래들리 LA시장 간 이원화된 권력구도도 효율적인 폭동 진압을 어렵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해와 차별이 낳은 비극
 
한미교육연구원-한인역사박물관이 펴낸 LA폭동 20주년 자료집은 한인업소와 한인타운이 표적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세 가지로 꼽았다.
 
첫째 폭동 당시 흑인 거주지역에 한인업소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둘째 한흑 커뮤니티 사이 문화차이로 인한 양측의 무관심, 그로 인한 오해와 분풀이다. 셋째 LA한인타운 치안공백을 야기한 LAPD 폭동진압 지휘부의 무책임이다.
 
또한 자료집은 당시 한흑갈등이 약탈과 방화의 원인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웹스터 보고서 역시 폭동이 시작된 초반 흑인 시위대는 한인 업소를 표적으로 삼는 대신 경찰서 등 정부기관을 공격했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LA시 공권력이 시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보호라는 의무를 외면하면서 약탈과 방화가 LA한인타운까지 퍼지는 결과를 낳았다. 한인타운 방화는 흑인 갱단 등이 시작했지만, 약탈에 가담한 상당수에 당시 한인타운 거주 라틴계도 포함됐다고 한다. 

김형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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