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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박사, 미국농부 되다(22) 지으려면 부숴야하고 부숴야 배운다

한국서 주문한 설비 도착전
20년 넘은 난농장 철거 돌입
지게차로 못뽑는 베드 1천개

고생스럽지만 절호의 기회
철거ㆍ시공ㆍ운영 모두 체험
인프라ㆍ경쟁력은 기초부터

지게차로 베드를 뽑아내는 모습.

지게차로 베드를 뽑아내는 모습.

기존 시설을 철거하고 바닥을 정리하는 모습.

기존 시설을 철거하고 바닥을 정리하는 모습.

20년 된 시설을 철거하라.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어릴 때 모래 장난을 하면서 부르던 노래다. 한국 금실 딸기 모종을 키울 육묘 그린하우스를 지을 땅에 새로운 그린하우스를 지어줄 테니 기존의 시설을 잘 철거하도록 도와달라는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노래 같다.
 
새로 그린하우스를 지을 공간은 기존에 난(Orchid)과 신비디움을 키우던 곳으로 20년 전에 시설을 설치한 곳이다. 새로운 그린하우스를 짓기 위해서는 이 시설들을 모두 철거하고 바닥을 평평하게 다진 후에 공사를 시작해야 한다.
 


난 농장의 성수기인 Mother’s Day가 끝난 후부터 시마 농장의 박이사가 농장 매니저까지 동원하여 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진척이 느렸다. 이 속도면 한국에서 컨테이너가 도착하기 전까지 바닥을 정리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러너가 나오는 속도가 빨라져 기존의 농장도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앙헬의 친구들을 임시로 고용해 투입했다.
 
사람이 한 집에서 20년을 살면 아무리 살림살이를 늘이지 않아도 이사를 할 때면 버릴 것들이 산더미처럼 나온다. 20년 동안 난을 재배한 곳이니, 뜯어낼 시설과 버릴 자재가 산더미 같았다. 비닐을 덮지 않고 차광막만 설치하여 재배한 곳이지만, 파이프와 베드 등은 새로 지을 그린하우스와 동일한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 이 면적에 새로 지을 그린하우스의 자재가 50톤이라면 기존에 설치된 자재도 50톤이라는 얘기다. 거기에다 관수시설에 화분과 작물들까지 정리해야 할 것들이 엄청났다.
 
이른 아침부터 정리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농장의 트랙터와 지게차 등 장비들을 총동원하고 인력도 지원받았지만, 20년의 세월을 걷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바닥의 방수포를 제거하려 해도 그 위에 엄청난 양의 흙들이 굳어져 있어 그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불도저로 모두 밀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폐기물의 분리 등 여러 이유로 단계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엔 일장일단이 있다
 
몇 트럭 분량의 차광막과 화분, 호스 등을 모두 버린 후, 베드와 파이프 철거작업을 시작했다. 옥스나드 지역의 흙은 사양토다. 이 흙은 입자가 가늘어 배수가 잘 되지만 땅이 물러서 파이프를 박을 때는 깊이 박아야 제대로 고정이 된다. 땅이 무르니 파이프를 박을 때는 쉽게 박히지만, 20년 동안 깊은 땅 속에 박혀있던 파이프를 뽑는 것은 쉽지가 않다. 아무리 힘이 센 사람이라도 손으로는 어림도 없고, 지게차로 끌어올려도 바퀴가 들릴 정도다. 지름 5인치(12.5센티미터)인 메인 기둥은 사람의 키만큼 박혀 있었다. 이 기둥들만큼 힘들지는 않지만 역시 지게차로도 쉽게 뽑히지 않는 베드가 1000개 이상이었다.
 
그래도 장비의 힘으로 이삼일만에 베드를 모두 뽑아내면서 장비의 위대함을 느꼈다. 철거 작업을 하고 귀가하는 길에 공사현장의 중장비들만 눈에 들어왔다. 지금 내게는 수퍼카보다 중장비가 더 탐이 나는 아이템이 됐다. 그리고 장비가 좋은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를 만든 사람들의 고초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흙먼지 속에 연일 작업하면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날씨가 덥지 않은 것이었다. 연중 온화한 캘리포니아의 6월이 이렇게 시원한, 아니 춥다고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이상 기후 탓인지 6월에도 섭씨 20도가 안 되는 날씨는 노가다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이다. 하지만 모종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햇볕도 좋고 온도도 높아야 한다. 하나가 좋으면 하나가 나쁘니, 모든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게 마련이다.
 
사서 고생하는 이유
 
흙먼지를 뒤집어 쓰며 종일 작업을 하고 집에 와서 샤워를 하면, 말 그대로 흙탕물이 흐른다. 팬데믹 이후 교통량이 늘어나 LA에서 옥스나드를 왕복하면 하루에 3~4시간이 걸린다. 아침 6시에 나가 일을 하고 저녁 8시가 넘어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다.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 썼기에 매일 세탁을 하고 청소를 해야 한다. 이런 모습을 보고 지인들은 그냥 사람들 시키고 감독만 하면 되지 왜 사서 고생을 하냐며 안타까워한다. 필자가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모르는 분야를 배우기 위해서다. 오늘날의 딸기 농사는 시설재배가 주류이고 시설재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는 딸기를 시설에서 재배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시설을 해주는 업체도 좋은 자재들도 많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는 아직도 노지 재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시설재배로 고품질의 딸기를 키우고, 이를 확대해 나가려면 시설에 대한 노하우와 미국 환경에 적합한 최적의 시설을 설계하고 시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지금 필자는 철거에서 시공, 그리고 운영까지 전 과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난 것이다.  
 
철거를 하면서 기존의 시설들이 어떻게 지어졌는지를 알게 되고, 여기에서 인사이트(통찰)도 얻게 됐다. 일종의 Reverse Engineering(역공학)인 셈이다.
 
그리고 본인이 알아야 판단을 하고 전략과 계획을 수립하고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새로 시작하는 벤처기업과 대기업의 경영자가 해야 하는 역할은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 단계에서는 스스로 배워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고, 규모와 단계가 달라지면 일하는 방식도 업무도 달라질 것이다.
 
둘째는 함께해야 시너지가 생긴다. 시너지라고 하면, 1+1이 2가 아니라 2 이상이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절감한 것이 있다. 직원들에게 시키고 놔두면 1주일이나 걸리는 일을 내가 함께하면 3일이면 끝나는 것을 많이 경험했다. 이는 직원들이 성실하지 않다거나 안 보면 일을 안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물론 옆에서 보고 함께해야 더 열심히 하는 효과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을 체계적으로 시키고 빠른 의사결정을 해 주어야 효율이 올라간다.  
 
필자의 물리적인 노동력은 멕시칸 직원의 절반 수준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절반의 노동력에 방향의 제시와 동기부여가 곁들여지면 상당한 시너지가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우연한 계기로 미국에서 한국 딸기를 키우게 되었지만, 이 일은 내 일이고 딸기 모종은 내 자식과 같다. 당사자가 곁에서 애정을 가지고 돌보고 열정적으로 일을 해야 함께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해준다. 무엇보다 머릿속에는 항상 어떻게 하면 시설을 잘 만들까 어떻게 하면 딸기를 잘 키울까 하는 생각뿐이라, 눈을 뜨면 농장을 가게 되고 가면 그냥 일을 하게 된다.
 
경쟁력은 보이지 않는 곳에
 
집을 지을 때나 사업을 할 때 기초가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그 기초는 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우리가 마트를 가면 진열대와 물건만 보이지만, 마트를 움직이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물류센터와 ERP등 고도의 물류시스템, AI와 빅데이터를 이용한 고객 분석까지 수많은 인프라와 노하우가 기초가 된다. 매장이 없는 온라인 상거래나 호텔 같은 서비스업에서도 경쟁력은 Back Office에서 나온다.
 
물과 비료만 주면 자랄 것 같은 딸기를 키우는데도 보이지 않는 인프라와 경쟁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핵심역량과 경쟁력을 더욱 키워야 한다. 이 보이지 않는 경쟁력으로 고객에게 맛있고 탐스러운 딸기를 보여주는 날까지 사서 고생은 계속될 것이다.
 
문종범
 
보스턴대학을 나와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1년간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한국의 IT 업체 '와이즈와이어즈' 글로벌사업본부장으로 미국에와서 딸기 농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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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범 농부·경영학박사 jmoon7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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