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박사, 미국농부 되다(15) 그래, 딸기농사 오늘부터 1일째야
D-Day 하루 전날까지 초치기
100도 폭염속 전기 공사 마감
농사는 재배아닌 막노동 끝판
야밤에 모종 싣고 옥스나드로
모종 10주서 240주 키웠지만
그린하우스 공간 10%에 불과
샌버나디노 실패후 새 땅 첫날
필그림처럼 역사 만들자 다짐
난 대구에서 태어나 보스턴에서 유학을 하고 서울에서 교수를 하다 IT 기업에서 미국, 싱가포르, 베트남에 해외 법인을 만든 현대판 '노마드(Nomad: 유목민)'다. 그래서 이사 다니는데 익숙하지만 딸기의 경우는 달랐다.
샌버나디노 농장의 모종들을 옥스나드로 옮길 D-Day는 다가오고 있는데 준비는 완료되지 않아 일분 일초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매일 파이프와 자재들을 사서 나르면서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귀인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그린 하우스의 측창과 바닥은 마무리되었지만, 이사 이틀 전까지도 육묘 베드와 관수(작물 재배에 필요한 물을 주는 것), 환기 시설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관수와 환기 시설은 모두 전기를 필요로 하지만, 그린 하우스에는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다. 전봇대의 계전기에 전선을 연결하여 그린하우스까지 끌고 오는 작업을 해 줄 전기 업체를 알아보려는데, 수한형님(윤사장님)은 그걸 뭘 업체를 시키느냐며 직접 하면 된다고 아주 간단한 일인 것처럼 얘기했다.
공대 출신에 맥가이버인 형님과 필요한 자재를 구입하여 작업을 시작했다. 문과출신으로 집에서 전구 정도를 갈아본 경험밖에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다소 신이 났다. 하지만 그 작업은 대단한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막노동의 끝판이었다.
6월 중순의 옥스나드는 100도를 오르내렸다. 무더위 속에서 전선을 PVC파이프 속으로 통과시켜 계전기에서 그린 하우스까지 600피트를 끌고 오는 작업은 정말 극한 체험이었다. PVC 파이프에 전선 세 가닥을 집어넣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땀은 비 오듯 흐르고 저질 체력은 바닥을 드러냈지만,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땀 흘려 도와주는 수한 형님을 생각하면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반나절이 꼬박 걸려 그린 하우스까지 전기를 끌고 와 콘센트를 연결했다.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던 전기가 들어오니 그렇게 반갑고 신기할 수가 없었다.
모종을 이송하기 불과 하루 전에 전기 공사가 끝난 것이다. 농사는 직접 작물을 재배하는 것보다 노가다(막노동)의 비중이 더 크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사 날짜가 다음날로 다가왔지만, 그때까지도 준비는 끝나지 않았다. 계획한 날짜에 인력과 차량 등을 준비해 뒀기에 어떻게든 날짜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사 전날 필자는 LA에서 샌버나디노에 가서 필요한 자재를 싣고 모종을 옮기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동안 옥스나드의 박이사는 사우나 수준의 그린 하우스에서 혼자 천정에 환풍팬을 설치하는 작업을 해 주었다. 천정에 피스(철제용 나사못)를 박는 자체가 아주 힘든 일이기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늘어나는 빚처럼 부담스러웠지만, 성공해서 보답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모종은 해가 떠 있을 때 움직여서는 안 되기에 해가 지고 난 후에 트럭에 싣고 옥스나드로 출발을 하기로 했다.
샌버나디노에서 옥스나드까지는 150마일로 평소 3시간 30분 정도 걸리지만, 모종을 실은 트럭은 속력을 낼 수가 없었고, 소신이 강해 GPS의 안내를 따르지 않는 운전사 캐리 덕에 4시간 이상이 걸려 옥스나드에 도착했다.
무수히 많은 별들만 지켜 보는 가운데 깜깜한 옥스나드 그린 하우스에 모종을 내렸다. 약 240주의 모종이 드디어 새로운 보금자리 옥스나드에 도착한 것이다. 다음날 이 모종들을 본 미겔은 일주일 동안 그 난리를 친 것이 겨우 이 정도 숫자의 모종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냐며 어이없어 했다. 백만 주씩 키우는 농장 한가운데 달랑 240주의 모종을 요란하게 가지고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린 하우스 안 바닥에 모종들을 내려놓고, 저녁도 거르면서 샌버나디노 농장에서 온 친구들과 옥스나드의 한국식당으로 갔다.
그동안 샌버나디노에서 잘 도와줬고, 의리를 지켜 오늘 옥스나드까지 와 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이왕 도와 주는 거 내일까지 열심히 도와주고 가라며 소맥을 권했다. 소맥을 처음 마셔보는 친구들은 순하고 맛있다며 신나게 원샷을 했다. 소맥은 미국에서 딸기 농사를 지으며 외국인 친구들과 가까워지게 한 최고의 한국문화다.
소맥 숙취에 해장국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건 꿈도 꿀 수 없고 미국 식당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린 하우스로 돌아와 빡센 작업을 시작했다. 혼자서 아등바등하다 필자의 말을 잘 듣는 친구들이 오니 천군만마를 만난 것 같았다. 혼자 고생하지 말고 자기들이 있을 때 필요한 것을 다 하자는 말을 했을 때 정말 감동을 받았다. 샌버나디노에서 딸기 재배는 실패했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마음을 얻은 것이 큰 성과였다.
폭 30피트(9미터) 길이 250피트(75미터)의 작은 그린 하우스에 설치한 베드에 모종을 올리니 10%의 공간도 차지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가구도 없는 빈집에 이사와 이불 한 장 냄비 하나로 살림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10주를 가지고 와서 힘들게 여기까지 온 만큼 하나하나가 소중한 모종이었다. 이때까지는 모종 하나하나의 상태와 모습을 마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기억하듯이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속도 모르고 미겔은 이걸로 무슨 농사를 짓느냐면서 미국 딸기를 키우라는 등 초를 치기 시작했다. 힘들 때 놀리는 것이 친구라고 하니 미겔이 정말 친구가 된 것 같았다.
필자를 포함한 4명이 2인 1조가 되어 전동드릴을 들고 베드를 만들었다. 이미 파이프는 박아놓았지만, 피스를 박아 포트(화분)을 올릴 베드를 완성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곳에서는 일꾼의 숙련도를 따질 때 하루에 피스를 1000개를 박는 것이 기준이 된다. 긴 하루 동안 베드를 완성하고 호스를 연결하는 등 모종의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갖추니 마음이 놓였다.
해가 지자 샌버나디노에서 온 친구들은 떠나야 했고, 새로운 희망의 땅 옥스나드에는 240주의 모종과 필자만 남게 되었다. 귀인들이 도움을 주어 무사히 이사를 마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혼자서 이 모종들을 키워나가야만 했다. 그동안 고생하여 지쳐 보이는 모종들을 보면서 "그래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라고 혼자 말을 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온 102명의 필그림들이 미국의 역사를 만들었듯이 240주의 모종으로 한국 딸기의 미국 역사를 만들어갈 것이다.
문종범
보스턴대학을 나와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1년간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한국의 IT 업체 '와이즈와이어즈' 글로벌사업본부장으로 미국에와서 딸기 농부가 됐다.
문종범 농부·경영학박사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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