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박사, 미국농부 되다(6) 벼락치기로 육묘배워 사막행…시련의 시작
자체 육묘위해 기술자 수소문
한국 농장 다녀봤지만 불가능
산청 정만영 사장만나 의기투합
육묘 기술 직접 배워보자 결심
훗날 스승된 노대현 농부 조우
미국 돌아와 육묘 후보지 고심
샌버나디노 선택해 호된 시련
육묘 전문가를 찾아라
자체 육묘를 통하여 핵심기술을 확보하고 상업화 시간을 앞당겨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육묘 계획을 수립하고 육묘기술자를 시급하게 확보해야 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을 제대로 분석하여 계획을 수립하기에는 충분한 시간도 데이터도 없었다. 더군다나 육묘를 직접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않았기에 비용이나 인력, 시간 등이 얼마나 소요될지 감조차도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한국으로 나가 진주의 딸기 농가를 찾았다. 마침 겨울인데도 비닐 하우스 안에 또 터널을 만들고 차광(빛을 차단)한 채 삽목(가지나 뿌리의 일부를 잘라 땅에 꽂아서 뿌리를 내리게 하여 새로운 식물 개체를 만드는 번식 방식)을 하여 모종을 키우는 모습을 보고, 그다지 어렵지 않게 여겨져서 당장 삽목을 하여 육묘를 시작하기로 했다.
당시 딸기 재배에 필요한 매뉴얼은 만들어져 있었지만 육묘에 대한 내용은 없었고, 실제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경험이 있는 육묘 기술자가 필요했다. 게다가 그 기술자는 미국으로 가서 한국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육묘를 하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진주와 산청의 딸기 농장들을 부지런히 다녔지만, 미국까지 가서 육묘를 해 줄 기술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한국 딸기 농장은 대부분 기술자인 주인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두고 직접 농장을 운영하는 형태였다. 그러니 한국에 있는 자신의 농장을 두고 미국까지 가서 몇 달에서 몇 년간 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도 어느 정도 기술은 있지만 비자 등 미국에서 체류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특히 당시는 팬데믹이 아주 극에 달하던 시기로 출입국이 힘든 상황이어서 사실상 한국에서 육묘 기술자를 구하여 미국으로 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구를 구해도 전문가나 경험자는 없는 상황이고 당장 미국을 나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였기에 그 상황에서는 필자가 제일 적임자였다. 원래 겁이 없고 뭐든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의 소유자였으므로 직접 배워보자고 생각을 하였다. 급박한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한 선택으로 몇 년이 될지 몇십 년이 될지 모를 농사의 길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속성 과외를 시작하다
스스로가 육묘 기술자가 되겠노라고 선언을 하고 진주와 산청의 딸기 농가를 찾아가서 육묘를 배우기 시작했다. 첫 선생님은 "딸기는 풀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정만영 사장이었다. 정 사장은 산청에서 연동(여러 동의 비닐하우스를 연결한 형태)과 단동(단일 비닐하우스) 비닐하우스를 30여 동 운영하며 금실 딸기를 해외로 수출하는 분이다.
한국에서 딸기 농사를 짓는 분들은 다들 스타일이 다른데, 오랜 경험을 위주로 하는 분도 있고, 이론을 익히고 스스로 연구하여 최적의 재배 방식을 찾는 분도 있다. 그리고 규모에 따라서 한 땀 한 땀 명품을 만드는 분도 있고,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농장에서 직접 품질을 관리하며 상품성 높은 딸기를 생산하는 분도 있고, 직원을 많이 고용하여 대량 생산에 주력하는 분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아주 소량의 모종으로 시작하여 그 주수를 늘여 나가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몇백만 주 몇천만 주를 생산하여야 하는 입장이었고, 어떤 방식이 가장 적합한 지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가장 좋은 선생님이 어떤 선생님인지는 40년 동안 학교를 다닌 경험으로 알 수가 있었다.
어느 분야를 새로 공부할 때, 그 분야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선생님들은 다들 자신보다 많이 알고 뛰어난 분이다. 그분이 알고 있는 것만 제대로 배워도 1차적으로 성공이다. 그리고 처음 입문할 때는 자신과 코드가 맞고 의사소통이 잘 되고 인간적으로도 궁합이 잘 맞는 선생님을 골라야 한다. 가뜩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선생님과 궁합이 맞지 않고 잘 알아듣지 못한다면 흥미도 잃고 학습의 효과도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하는 사람과 잘 가르치는 사람은 다르다. 저명한 학자들 중에서도 연구와 집필은 잘하나 강의를 시작하면 10분 안에 모든 학생들을 다 재우는 사람이 있다.
그런 면에서 정 사장은 아주 좋은 선생님이었다. 딸기는 풀이라서 그냥 땅에 심어 놓으면 저절로 번식해서 나중에는 겁이 날 정도로 그 수가 무섭게 늘어날 것이라며 불 타오르는 겁 없는 도전에 휘발유를 뿌리며 자신을 북돋워 주었다. 그리고 방과 후에도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짧은 유학 기간 동안에 힘들지 않게 농사를 배울 수 있었다.
당시 정 사장은 몇십 주로 시작하더라도 제대로 육묘를 하면 이년 안에 십만 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 이후로 정 사장을 ‘십만 주 형님’이라 부르고 그 주장을 ‘십만육묘설’이라 칭하게 되었다.
진주에서 딸기 공부를 하는 동안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는 진주의 지인들이 많이 힘이 되어 주었기에 마치 여행을 온 기분으로 즐겁게 농사를 배웠다. 지금 생각하면 겨우 수박 겉핥기 정도의 공부를 하고는 육묘에 필요한 것은 다 배운 것처럼 착각을 하던 올챙이 시절이었다.
한참 진주에서 딸기 농사를 배우고 있을 때, 친한 후배가 대평 딸기 특화단지에서 농사를 잘하고 있다는 노대현이라는 친구를 한 명 소개시켜 주었었다.
둘은 첫 만남에서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자판기 커피를 한잔 마시며 잠시 인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이 친구가 훗날 미국 농부 생활에서 가장 큰 힘이 되고 딸기 농사의 A에서 Z까지를 모두 가르쳐 주는 스승이 된다. 사람에게 있어서 소중한 인연은 우연처럼 다가오는 것 같다.
기본적인 육묘 기술은 다 배웠고 문제가 생기면 영상통화 등을 통해서 자문을 받으면 된다고 자신하며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미국에 오기 전 육묘를 어디서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이미 재배 후보지로 생각했던 옥스나드가 아닌 엉뚱한 지역으로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금실 딸기 모종의 미국 수출 계약 뉴스가 보도된 이후, 캘리포니아 샌버나디노에 있는 어느 농장 사장님께서 한국 딸기에 관심이 있으시다며 연락을 주시어 그 농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 농장과 함께 무엇을 한다는 생각보다는 연락을 주셨으니 예의상 한번 방문을 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농장이라고는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던 필자에게 사막 한가운데 젖소도 있고 염소도 있고 개와 고양이가 뛰어 다니는 농장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당시는 종자보호권이 등록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딸기는 줄기로 무한 번식이 가능한 식물이기에 종자의 유출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최우선이었다. 그런 점에서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외딴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그 농장이 생각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농장에는 잘 지어놓은 그린하우스가 이미 6동이 있어서 육묘를 바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물론 그 지역의 기후에 대해서도 전문가들과 검토했다. 구글과 미국 기상청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 딸기의 재배와 육묘에 적합한 환경이고 그린하우스까지 있었기에 기후로 인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국에 오자마자 그 농장 사장님과 만나 NDA(Non-Disclosure Agreement, 기밀유지협약서)를 작성하고 육묘를 시작하기로 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고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필자가 거주하는 LA한인타운에서 12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낯선 사막의 농장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빅베어 마운틴의 눈 덮인 모습과 사막의 노을이 아름다운 그곳에서 병아리 농부는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문종범
보스턴대학을 나와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1년간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한국의 IT 업체 '와이즈와이어즈' 글로벌사업본부장으로 미국에와서 딸기 농부가 됐다.
문종범 농부ㆍ경영학박사 jmoon7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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