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박사, 미국농부 되다(11) 요즘 농부 필수품은 스패니시·유튜브
현대 농업은 IT포함한 10차 산업
생물ㆍ기계ㆍ토목ㆍ경제 알아야
LA서 농장까지 왕복 6시간 거리
유튜브 듣고 농사 공부 기회로
농장에서는 영어보다 스패니시
단어 나열 '전투 스패니시' 구사
이젠 쌍방향 소통 필요한 단계
변화는 준비된 사람에겐 기회
농업은 종합 산업
명색이 박사고 미국 대학에서도 공부했지만, 비료와 농약의 성분을 읽고 겨우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비닐하우스의 문을 언제 어느 정도 열고 닫아야 하는지, 비료와 농약의 비율 등을 결정하는 데에도 엄청난 경험과 지식이 있어야 한다.
시설과 농기계를 사용하는 현대 농업에서는 토목과 건설, 기계와 전기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거나 고속도로를 달리며 무심코 보아온 비닐하우스를 직접 지어보면 얼마나 많은 노하우가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또 농업도 비즈니스이기에 수요와 공급 같은 기본적인 경제 개념을 알아야 하고, 경영학 지식도 있어야 한다. 선물거래와 같은 파생상품 거래가 가장 활발한 시장이 바로 농산물 시장이다.
여기에 어학도 수반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농사를 지어도 외국인 노동자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고, 미국에서는 영어는 기본이고 스패니시를 구사해야 인력을 운용할 수 있다.
농업을 1차, 2차, 3차 산업을 모두 합친 6차산업이라 부르지만, 이제는 스마트팜과 같은 첨단 기술까지 추가되어 4차 산업을 포함하는 10차 산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루 5시간의 공부 기회
작년 초겨울 사막 한가운데 비닐하우스에 모종을 심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모종이 걱정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 핸드폰으로 날씨를 확인하다 새벽같이 일어나 농장으로 향했다. LA 집에서 농장까지는 왕복 250마일 거리다. 아무리 땅이 넓고 도로가 좋은 미국이지만 하루 5시간 출퇴근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더욱이 농장은 LA에서 라스베이거스를 가는 길목에 있어서 주말이면 왕복 6시간 이상 걸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멀고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딸기를 잘 키울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딸기 농사와 육묘에 대해 이것저것 검색을 하다, 유튜브에 올라온 딸기 농사와 관련된 유익한 강의와 자료들을 찾았다. 깜깜한 세상에서 한 줄기 빛을 찾은 기분이었다. 저녁이면 유튜브 강의들을 검색하여 공부할 순서를 정하고, 미리 동영상을 다운로드 받아두었다. 그리고 농장으로 오가는 길에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왕복 5시간이 지루하지 않았고, 혼자 있는 차 안에서 어떤 방해도 없이 자연스럽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본인이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하는데 하루에 3시간만 투자하면 1년이면 그 분야에 대해서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었다. 하루 3시간 책을 읽으면 어지간한 책은 일주일이면 한 권을 읽을 수 있다. 1년이 52주이니 한 분야의 책을 50권을 읽는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한 분야의 책을 50권을 읽게 되면 전문가 수준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5시간의 출퇴근 길이 행운이었고, 딸기 농사에 대한 기본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이 정도만으로는 딸기를 키우기 위한 충분한 지식을 갖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니 한국의 전문가들에게 질문을 할 수 있고,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학교에 오래 있었던 사람으로서 아는 게 없으면 궁금한 것도 없고 질문할 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질문은 전혀 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농장 공용어 스패니시
딸아이가 초등학교 때 일이다. 영어 유치원을 다녔고 초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영어 학원을 다니던 중에 중국어 과외를 시켰다. 하루는 딸아이 방에 들어가니 중국어 공부를 하다가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아빠 저는 한국 사람인데 영어는 몰라도 왜 중국어까지 공부해야 하나요?"
초등학교 1학년생한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를 잠시 생각하다 책상 위의 물건들을 보았다. 필통을 뒤집어 보이며, 여기에 뭐라고 적혀 있니라고 하니, 'Made in China'요, 탁상 시계를 뒤집어서 보이니 또 'Made in China'요. 그렇게 몇 개를 보여 준 후, 왜 중국어를 공부해야 하는지 알겠느냐고 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딸아이가 다시, "아빠 그럼 중국어만 공부하면 되지 영어는 왜 해야 하나요" 라고 물었다. 그래서 'Made in Korea'가 어느 나라 말이니 하니, '영어요'라고 대답했다. 딸은 그제서야 내 의도를 이해했다.
필자가 느낀 것도 비슷했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여기는 미국인데, 농장을 가니 공용어가 스패니시였다. 지금 농장이 있는 옥스나드도 영어는 못해도 불편한 게 없지만, 스패니시를 못하면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이 오십 넘어 스패니시를 배우게 되었다. 원래 공부를 하던 사람이라 새로운 공부를 할 때는 기초부터 다지는 게 원칙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렇게 공부할 시간도 없었고, 노안이 와서 책을 읽는 것도 힘들었다.
전투 스패니시를 익히기로 했다. 어차피 질문을 해서 상대가 답을 해도 알아들을 수준이 아니었기에 하고 싶은 말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문법을 무시하고 문장이 아닌 단어 나열로 의사소통을 하기로 하였다. 딱 농장에서 필요한 단어들만 속성으로 암기한 것이다.
그렇게 무식하게 익힌 스패니시로 일을 시키며 지금까지 버텨왔지만 그 정도로 살아가는 데에는 한계가 왔다. 단순히 물을 주라 잎을 따라는 정도가 아니라 계약을 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교육을 하는 등 쌍방향 의사소통이 필요한 단계가 된 것이다.
몇 개 안 되는 단어로 엉터리 스패니시를 시작한 지가 이제 1년이 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영원히 이 수준일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영어를 제대로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공부하지만, 살다 보면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되고 생활할 수 있게 되어 영어 공부를 멈추게 된다. 노안 라식 수술을 하고서라도 스패니시를 제대로 배워야 할 때이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딸기 농사를 하면서 얻은 가장 값진 경험은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과 배움이다. 처음에는 막연히 농사를 위탁하고 브랜드를 만들어 유통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농업은 본인이 알지 못하면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농업혁명 이후 1만 년 동안의 발전보다 현재 더 큰 변화와 발전이 눈 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한다. 변화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위기가 되고 준비된 사람에게는 기회가 된다. 앞으로 닥칠 거대한 농업혁명을 기대하며 10차 산업으로서의 농업을 준비해 나가고자 한다.
문종범
보스턴대학을 나와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1년간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한국의 IT 업체 '와이즈와이어즈' 글로벌사업본부장으로 미국에와서 딸기 농부가 됐다.
문종범 농부·경영학박사 jmoon7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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