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박사, 미국농부 되다(8) LA, 30년만의 눈…농부는 속이 탄다
폭우ㆍ강풍에 농장들 초비상
집에서 쉬다 CCTV 확인하니
딸기 온실문 뜯겨나가 발동동
진흙길에 스키타듯 트럭 운전
비쏟아지는데 직접 문 만들어
전기톱은 위대한 발명품 실감
주변 농장들 몇백만불씩 손실
'몇십년만의' 천재지변 이어져
이상 기후 대응이 미래 경쟁력
지난 2월23일, 1989년 이후 34년 만에 처음으로 LA지역에 블리자드(눈보라) 경보가 내렸다. 할리우드 사인이 눈송이에 가리고, LA 카운티의 산들에 폭설이 내렸다. 멀리서 눈 덮인 산들을 바라보면 정말 장관이다. 그러나 눈과 추위로 인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LA에서 건물 관리를 하는 친구는 종일 비가 샌다는 등 테넌트(입주자)들의 전화를 받아야 했고, 정전이 되어 거처를 호텔로 옮긴다는 지인의 소식도 들렸다. 날씨가 좋아서 축복받은 땅이라 불리는 이곳 남가주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LA에 살면서 이런 날씨는 30년 만에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실감을 하지 못했다.
직격탄을 맞은 농장
이상 기후로 폭설, 폭우, 강풍이 오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초비상 상태가 된다.
농사란 하늘과 짜고 하는 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날씨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비가 많이 오면 많이 와서 걱정, 안 오면 안 와서 걱정, 추우면 추워서 더우면 더워서 항상 날씨로 속을 태우는 것이 농부들이다.
남가주 지역은 날씨가 좋기로 손꼽히는 농사의 명당이고 이상 기후라고 해도 어느 정도 예측이나 대응할 수 있는 범위이다. 강풍이 불어도 매년 그 시기가 유사하기에 미리 대응을 할 수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농장으로 들어가는 길은 길이 아니다. 넓은 농지에 고랑을 만들고 그 사이에 길을 낸 것이다. 그러니 도로라고 해도 비포장이고 작물을 심은 밭과 똑같은 흙이다. 그래서 비가 오면 농장의 길은 마치 보령 머드축제를 연상케 한다. 이 진흙탕에 차가 빠져서 혼자 고생을 한 적도 있기에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 하고는 전기 담요를 켜고 따뜻한 이불 속에 느긋이 묻혀 있었다. 그러다 혹시하는 생각에 농장의 CCTV를 켜니 그린 하우스의 문은 거의 뜯겨지고 박스와 의자는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OMG!! T.T
농장에서 5분 거리에 사는 직원 앙헬에게 전화를 했다. 이 친구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해서 의사소통에 항상 어려움이 많다. 앙헬도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불어서 일찍 집에 들어와 있었고, 지금 농장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나의 브로큰(Broken) 스패니시로는 의사 전달이 잘 되지 않아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 문자를 보냈다. 당장 농장으로 가서 나무 판자 등으로 입구를 다 봉쇄하고 내일 문을 새로 만들어 달자고 했다.
목수일에 재능을 발견하다
토요일이고 비는 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침 일찍 빗길을 달려서 앙헬과 만나기로 한 까마리오(Camarillo)의 홈디포에 도착해 전화를 하니 출발도 안 했다는 것이다. 혼자 사서 갈 테니 농장에 가서 준비하고 있으라 시키고 간만에 쇼핑을 했다. Plywood(합판)과 목재, Hinge(경첩), 목재용 전기 톱 등의 자재들을 혼자서 낑낑대며 카트에 싣고는 계산을 하고 나왔다.
비는 주룩주룩 오는데, 아뿔싸! 나의 SUV에 들어갈 사이즈들이 아니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 박스 트럭을 빌렸다.
비가 와서 진흙탕이 된 농로를 스키를 타듯 트럭을 몰아 무사히 그린하우스에 도착했다. 어제 임시로 폐쇄를 한 나무들을 떼어내는데, 너무 튼튼하게 박아 놓았다. 한 군데 나사를 열 개 이상씩 박아 놔서 그걸 뽑는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튼튼하게 하라고 수차례 강조한 내 잘못이다. 아니 한군데 나사를 5개만 박으라고 꼭 집어서 얘기를 했어야 했다.
문틀을 달고 합판을 사이즈에 맞게 잘라야 하는데, 전기 톱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앞에 레이저가 나와서 줄을 그어 둔 대로 순식간에 잘리는 것이었다. 역시 모든 일은 '장비빨'이다. 교수 시절에는 워드의 스펠링 체크가 인류가 만든 위대한 발명품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전기 드릴 등 전동 공구가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같다. 실제로 집으로 돌아와 밤 늦게까지 인터넷에서 전동 공구들을 찾아보면서 구매의 충동을 느꼈다.
비가 쏟아지는 중에도 급히 사온 자재들로 문을 만드는데 스스로 대견했다. 깊이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도면을 보면서 만들듯이 순식간에 문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전기 톱의 힘이 컸지만, 오차 없이 거의 정확하게 합판을 자르는 나를 보고 앙헬은 엄지척을 했다. 나는 누가 조금만 칭찬해도 죽을 힘을 다하는 아주 단순하고 쉬운 남자이다. 목수의 재능을 발견한 하루였다.
이상기후, 남의 얘기 아니다
전날 비를 맞으면서 문을 만드느라 감기에 걸린 것 같아 집에서 쉬는데, 앙헬이 사진을 보내 왔다. 노지에 심어 놓은 딸기들이 냉해를 입어서 모두 뽑아내야 할 것 같다는 거다. 우리 딸기도 문제지만, 그 농장에 함께 있는 미국 딸기들은 어떠냐고 물어보니 상당수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우리 딸기야 테스트용이라 얼마 되지 않지만, 미국 농장들은 몇백만 주 단위이다. 10~20%만 손실을 보아도 몇백만불이 날아가는 것이다. 옥스나드 전체나 캘리포니아 전역을 따지면 그 피해액수는 상상이상일 것이다.
요사이 매스컴에서 몇십 년 만의 추위, 관측이래 최고의 폭설 같은 단어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지구상 곳곳에서 이상 기후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너무 끔찍해 뉴스에서 사진조차 보고 싶지 않은 튀르키예의 지진 피해만 해도 그렇다. 사상자의 수도 엄청나지만, 경제적 피해가 GDP의 60%에 달한다고 한다. 한 번의 지진으로 한 국가가 송두리째 무너진 것이다. 이러한 이상 기후와 천재지변은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그 빈도도 점점 높아질 것이다. 이제 지구상의 어느 곳도 예외가 아니라고 본다.
세계경제포럼(WEF)에서는 작년 1월 124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 전문가 100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22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Global Risk Report 2022)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향후 10년간 세계가 당면할 10대 리스크로 '기후 대응 실패'를 1 순위로 꼽았다. WEF의 분석에 따르면, 전세계 44조달러 규모의 경제적 가치 창출 활동이 자연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 국내 총생산(GDP)의 절반이 넘는다. 즉 인간의 경제활동에 자연이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파괴한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인간의 삶에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농업에서 이상 기후에 대한 대응이 미래의 경쟁력이자 생존의 필수전략이다. 이번 이상 기후로 인하여 필자가 경험한 것은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덕분에 앞으로 그린 하우스의 설치와 설계에 대한 방향을 설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경험이라 생각하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겪은 피해가 너무도 크다.
문종범
보스턴대학을 나와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1년간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한국의 IT 업체 '와이즈와이어즈' 글로벌사업본부장으로 미국에와서 딸기 농부가 됐다.
문종범 농부ㆍ경영학박사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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