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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박사, 미국농부 되다(17) 인재 키우기가 농사보다 더 힘들다

우연히 딸기온실 찾아온 앙헬
딸기잎 벌레 발견해 처리 지적
알고 보니 백만주 농장 기술자

채용한 뒤부터 모종 빨리 늘어
이론 보강 교육위해 한국 연수
향수병 토로에 달래며 적응중

뿌리가 잘 자란 모종을 들어 보이는 앙헬.

뿌리가 잘 자란 모종을 들어 보이는 앙헬.

우연히 찾아온 백만주, 앙헬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경영의 정의는 Make Things Done through Other People(다른 사람을 시켜 일을 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어떤 사업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옥스나드로 이전을 하고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그린 하우스의 모습은 갖추었지만, 딸기 농사를 믿고 맡길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한국의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여 문제를 해결해 왔지만 한계가 있었다.  
 
한국에서 전문가를 미국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인 중에 딸기 전문가들은 대부분 자신의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고, 한국 딸기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비자 문제 등으로 미국을 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이제 갓 시작단계라서 선뜻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시설을 하고 상토를 채우는 일 등은 인력을 구해서 할 수 있지만, 딸기를 재배하는 일은 혼자서 하는 상황이었다.  
 
어느 날 농장을 가니 우리 그린 하우스 안에서 한 멕시칸 친구가 맥주병을 손에 들고 딸기 잎을 따서 살펴보고 있었다. 외부인 출입을 금하고 있었기 깜짝 놀라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농장 관리인 미겔의 친구인데 다른 딸기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라고 했다. 친구인 미겔의 농장에 놀러 왔다가 딸기가 있어서 보고 있는데, 잎에 벌레가 생겨서 그냥 두면 며칠 안에 죽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잎을 자세히 보니 정말로 벌레가 잔뜩 묻어있었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친구여서 미겔 아들에게 통역을 시켜 물어보니 자신이 일년에 100만주를 키우는 농장의 기술자라고 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백만주를 워낙 강조해서 그 친구를 백만주라고 불렀다. 한국의 십만 주 형님보다 스케일이 더 큰 셈이었다.
 
다음날 농약을 치고 다시 놀러 온 그 친구에서 육묘를 해 본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러너를 받아 육묘한 경험이 많다고 했다.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었다. 우리 농장으로 출근할 수 있느냐고 하니 지금 다른 큰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하루에 두 시간 정도는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다고 했다. 시간당 임금을 주기로 하고 다음날부터 농장에서 일하기로 한 이 친구의 이름은 앙헬이다.
 
몸으로 익힌 전문가
 
백만주를 키우는 전문가라고 하지만, 완전히 믿고 맡기기에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국에서 보고 배워 온 방식을 앙헬에게 가르치며 함께 일을 했지만, 이 친구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했다. 한국에서는 러너가 자라 뿌리가 움을 튼 후에 핀으로 고정해 유인하는 반면, 이 친구는 러너가 나오면 바로 휘묻이(가지를 휘어서 땅에 묻는 방식)를 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노대현 사장에게 이 친구가 하는 방식을 얘기하니 그렇게 해도 된다고 했다. 이 지역에서 앞으로 대량 재배를 하려면 이 지역 방식으로 현지화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에 앙헬이 자신의 방식으로 하도록 했다.
 
걱정하며 반신반의했지만, 러너는 뿌리를 잘 내리고 모종의 수도 기대한 수준으로 늘어났다. 가장 좋았던 것은 필자가 없을 때도 모종을 죽이지 않고 잘 키울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몇 달을 파트타임으로 일 하던 앙헬에게 정식 입사를 제안했지만, 앙헬은 규모도 작고 수익도 발생하지 않는 상황이라 안정된 직장으로 생각하지 않고 거절했다. 함께 일하면서 한국 딸기의 우수성과 성장 계획들을 설명하며 설득한 끝에 앙헬은 자신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정식으로 취직을 했다.
 
앙헬은 실험 정신이 있고 자신이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강한 친구다. 그래서 농장을 가면 필자가 없는 동안 자신이 한 일들과 새롭게 시도하는 방식들을 얘기하기 바쁘다. 아침에 출근하면 한동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칭찬을 해주는 것이 일과가 됐다. 비료를 주고 농약을 치는 일부터 그린 하우스를 제작하는 일까지 딸기 재배와 관련된 거의 모든 과정을 경험한 우수한 인재였다.
 
그런데 이 친구랑 함께 일을 하며 지켜본 결과, 경험은 풍부하지만 원리를 알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미국 딸기를 키우는 방식에 익숙하여 한국 딸기의 특성을 고려한 재배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아 일일이 설명을 하고 가르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일년 이상 미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앙헬만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친구를 교육하는데 투자하여 핵심인재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수차 한국에 간 앙헬이 진주 촉석루를 찾았다.

연수차 한국에 간 앙헬이 진주 촉석루를 찾았다.

앙헬 한국으로 가다
 
연초 딸기가 열매를 맺고 실제 맛을 보니 미국 딸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한 앙헬은 한국 딸기에 자부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한류 열풍으로 인해 유튜브와 방송에서 한국을 접하고 한국에 대한 동경이 생긴 것 같았다. 어느 날 앙헬이 한국에서 딸기를 어떻게 키우는지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앙헬은 영주권자로 한국 여행이 가능했다. 앙헬의 부인 마리아를 만나 앙헬이 한국에서 몇 달 동안 교육을 받고 한국 딸기 재배 전문가로 성장시키려는 계획을 얘기하니, 자신도 남편이 기술자고 커 나가기를 바란다며 기뻐했다.
 
한국의 딸기 선생님 노대현 사장에게 앙헬을 자신의 농장에서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했다. 노 사장은 러너를 유인하고 삽목을 하는 것까지 가르치려면 5월초에 들어와서 2개월 정도는 배워야 한다고 해서 앙헬과 그의 부인 마리아에게 얘기하니 좋다고 했다. 그날 이후 앙헬은 동네 친구들에게 한국에 간다며 자랑하기 시작했고, 유튜브에서 한국의 모습을 보며 아주 들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걱정이 시작됐다.  
 
앙헬은 강남의 화려한 거리와 드라마에서의 생활을 기대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앙헬이 갈 곳은 경남 진주의 농촌이었다. 앙헬에게 놀러 가는 것이 아니고 정말 빡세게 일하고 배워야 한다고 수차 강조했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가면 어쩔 수 없이라도 열심히 할거라 생각했다. 앙헬이 한국에 가 있는 동안 일할 사람을 뽑아 급히 교육하고 필자는 먼저 한국으로 나와 앙헬을 맞을 준비를 했다.
 
앙헬이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날 한국 시간으로 새벽 2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LAX에 왔는데 KETA(한국의 전자여행허가)가 승인되지 않아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틀을 기다려 KETA가 승인이 되고 앙헬은 무사히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원래 계획은 한국에 오면 이틀 정도 서울에서 관광을 시키고 진주로 보낼 예정이었는데, 비행기가 새벽 4시30분에 도착을 하고 이틀이 늦어진 관계로 바로 진주로 가기로 했다.  
 
새벽에 오는 비행기는 일찍 도착하는 경우가 많다. 출도착 정보를 확인하니 새벽 3시3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을 한다고 나왔다. 거의 밤을 새고 인천 공항에서 앙헬을 만나 곧바로 진주로 향했다. 4시간 반 만에 진주에 도착하니 앙헬은 한국이 참 크다고 했다. 끝에서 끝까지 온 셈이니 그런 생각이 들만도 했다.  
 
진주에 도착해서 농업기술원을 함께 방문하고 맛집도 가고 진주성도 보여주고는 오후 늦게 농장으로 갔다. 시내 관광을 할 때는 정신 없이 사진을 찍고 미국의 가족들에게 사진도 보내주며 신나 있던 친구가 농장을 가니 울상이 됐다. 도착한 지 십 분도 되지 않아 애들이 보고 싶다며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거다. 속된말로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노사장은 구글 번역기를 써서 앙헬을 달랬지만 큰 소용은 없었다. 진주로 데리고 나가 저녁을 먹으면서 얘기했다. 애들을 보고 싶어하는 아빠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 하지만 큰 꿈을 안고 한국까지 왔다 중간에 포기하는 나약한 아빠보다는 외로움을 참고 열심히 배워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그런 아빠가 되는 것이 더 나은 모습이 아니냐며 한참을 설득했다.  
 
다음날 앙헬을 보러 농장을 가는데, 미국을 간다고 그럴지 혼자 울고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가지라고 종일 혼자 놔둔 덕인지 앙헬은 미국에서 가지고 온 모자를 노사장에게 선물이라고 주었다. 그리고 육묘장에서 하나씩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앙헬이 안정을 찾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지만, 그래도 완전히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모종을 키우는 것보다 더 힘든 인재를 키우는 일이 시작됐다.
 
문종범 
보스턴대학을 나와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1년간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한국의 IT 업체 '와이즈와이어즈' 글로벌사업본부장으로 미국에와서 딸기 농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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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범 농부·경영학박사 jmoon7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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