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박사, 미국농부 되다(16) 낯선 한인에서 '멕시칸 인싸'로
이사 후 '번식 줄기' 맞을 준비
일손 구하기 어려워 골머리만
옥스나드 농장 주류는 멕시칸
함께 일하고 밥먹으며 식구로
친구 미겔 딸 결혼식 초대받아
비로소 커뮤니티 일원된 느낌
샌버나디노의 모종 240주는 야밤의 이송작전으로 무사히 옥스나드에 도착했다. 어미묘 포트를 베드 위에 올리고 호스를 깔아 물을 줄 수 있게까지는 했지만 이는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조치였다. 이사는 옮기는 것보다 정리하는 것이 더 힘들다. 본격적인 일은 이삿짐 센터가 가고 난 뒤에 시작된다.
환경이 좋은 곳으로 옮기고 날씨가 더워지니 러너(runner, 뿌리에서 뻗어 나가 번식하는 일종의 줄기)가 쑥쑥 나올 것이라 기대하고 아기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첫 아이를 출산할 때는 출산 준비에 필요한 것이 많다. 문제는 일을 함께할 사람을 구하고 필요한 자재와 도구들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한번 귀인은 영원한 귀인이다. 수한 형님은 혼자서 집도 지을 수 있는(실제 자격증도 보유) 수준의 기술과 장비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약하고 착해서 주변의 힘든 사람들을 잘 도와준다. 그런 면에서 필자와 형님은 비슷한 점이 많다. 필자도 오지랖이 넓고 남의 일에 잘 나서는 성격이라 주변에서 "너는 제발 자신의 일을 남의 일처럼 해봐라"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인간의 능력은 비슷하다
수한 형님은 지인의 농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친구들을 수소문하여 한 멕시칸 친구를 연결시켜 줬다. 덩치가 큰 젊은 친구인데 힘이 엄청나게 셌다. 육묘 준비 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인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 중 하나는 상토를 배합하고 화분에 넣는 과정이다. 당시는 물관리에 능숙하지 않던 시기라 배수가 잘되는 코코피트(Coco Peat.코코넛 과실에서 섬유, 유지, 과즙원료를 채취하고 난 과피의 부산물)의 비중이 가장 컸는데, 코코피트는 수분 20% 이하로 압축 가공한 것이라 물을 부어 불리고 으깨서 사용을 해야 했다.
배합기도 없이 바스켓에 코코피트 블록을 넣고 물을 부어 삽으로 으깨는 작업을 하는데, 이 친구는 힘이 어찌나 센지 삽질이 아니라 거의 포크레인 수준이었다. 환기를 위해서 그린 하우스 앞뒤로 설치하는 팬 하나의 무게는 150파운드가 넘는다. 두 사람이 들기도 어려운 팬을 이 친구는 혼자서 가뿐하게 들어올렸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 힘 세기로는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친구였다.
혼자서 두세 명의 역할을 할 것 같았고 정해진 일당의 두 배를 줘도 아까울 것 같지 않았다. 내일도 나올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 다음날 아침 7시까지 나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이 친구는 오지 않았고, 오전 내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이 친구가 나타나 오늘 일을 하게 해 달라고 했다. 어제 일은 따져봐야 의미도 없을 것 같아 일을 시키는데, 갑자기 여동생이 찾아왔다며 딱 7분만 만나러 갔다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정확히 1시간 7분 후 자기 여동생과 함께 나타나서 여동생도 같이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역시 핏줄은 못 속이는 건가? 여동생도 힘이 어지간한 남자만큼 좋았다. 하지만 역시 다음날도 나타나지 않았고 전화도 되지 않았다.
며칠 후 연락이 와서 일을 다시 하겠다고 했지만, 사람을 다 구했다며 거절했다. 그렇게 힘이 센 친구가 왜 안정된 일자리를 갖지 않고 파트타임으로 떠돌아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일을 한 양의 평균을 내어보면 힘이 엄청 센 그 친구보다 평범하지만 성실한 친구의 작업 성과가 더 좋았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공부하지 않은 것은 알 수가 없고,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일하지 않으면 성과를 낼 수 없다. 이 친구를 보면서 신은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고, 어찌 보면 세상은 공평하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옥스나드의 주류 멕시칸
샌버나디노의 농장에서도 남미 친구들과 일을 했지만, 모두 살바도르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같은 스패니시를 사용하지만 살바도르에서 온 친구들과 멕시코에서 온 친구들은 성향이 다소 달랐다. 옥스나드 농사의 중심에는 멕시칸들이 있고,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옥스나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미국 농장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실제 이 땅은 오래전 멕시코 땅이었다.
새로운 땅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러너가 나오기 시작했다. 기온이 좋아진 영향이지만 당시는 새로운 곳으로 잘 옮겼고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러너가 나오기 시작하니 하루하루가 분주하기만 했다. 마침 방학이 되어 미겔 아들들이 일을 도와 주었고, 미겔의 친구들도 필요할 때 일손을 거들어 주었다.
아침에 농장을 가면 중간에 점심을 먹으러 나가기가 애매하다. 위치도 그렇지만 스무 살 때부터 혼자 살아 '혼밥'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다. 그래서 인앤아웃 햄버거를 사서 차에서 먹거나 굶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는 미겔이 점심을 먹자고 불렀다. 지금은 맛있게 먹지만 비위가 약했던 당시에는 멕시칸 음식(멕시칸 레스토랑의 음식과는 다르다)을 먹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날 배려해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니 맛있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타고난 연기력의 소유자이자 오버를 하는 타입이라 정말 맛있다며 더 달라고 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그 후로 미겔의 와이프는 거의 매일 점심을 해 왔고 자신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 독거노인을 위해 포장도 해 주었다. 집에 가서 먹으라고….
함께 일을 하고 밥을 먹고 맥주를 마시면서 그 동네의 멕시칸들과 친분이 쌓이고, 그 사이 러너의 수도 늘어나고 그린 하우스도 모양을 갖추어 갔다.
6월의 옥스나드는 더웠고, 그린 하우스 안에서 일을 하면 땀범벅이 된다. 근무 중 음주를 금한다는 말이 적용될 수가 없는 지역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다 함께 그늘에서 맥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은 그 지역과 농사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들과 신뢰를 쌓아가는 또 하나의 근무시간이었다.
아사에서 인싸로
하루는 농장에 가니 미겔의 아들 딸들이 모두 있었다. 그의 딸 제니퍼가 결혼식을 한다며 청첩장을 주었다. 수한 형님과 함께 제니퍼의 결혼식에 갔다. 오후 4시에 시작한 결혼식은 그야말로 동네 잔치였다. 멕시칸 전통 결혼식은 30분이면 끝나는 한국의 예식장 결혼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짧은 예식을 마치고 나니 밴드가 멕시칸 곡을 연주하고 조명은 클럽 분위기를 연출했다.
신기한 것이 하객들은 줄을 서서 신부의 드레스에 핀으로 돈을 주렁주렁 매달아 주며 축하했다. 그리고 남성 하객들은 신부와, 여성 하객들은 신랑과 춤을 춘다. 드레스에 돈만 달아 주고 신부와 춤을 추지 않으니, 수한 형님은 춤도 같이 춰야 제대로 축하하는 것이라며 핀잔을 줬다. 자정이 지나도록 그들의 파티는 계속됐다.
미겔은 자신의 친구들을 계속 데려와 필자를 자신의 한국 친구인데 박사라며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드물게 박사학위의 덕을 본 날이었다. 멕시칸 친구들과 데킬라를 마시며 웃고 얘기하다 보니 나도 이제 그들의 커뮤니티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이 동네에 등장한 낯선 한국인이 아웃사이드에서 인싸(인사이더.insider)가 되는 기분이었다.
문종범
보스턴대학을 나와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1년간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한국의 IT 업체 '와이즈와이어즈' 글로벌사업본부장으로 미국에와서 딸기 농부가 됐다.
문종범 농부·경영학박사 jmoon7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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