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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정부 출범] 74년 '영욕의 세월' 뒤로 하고…靑, 역사 속으로

[尹정부 출범] 74년 '영욕의 세월' 뒤로 하고…靑, 역사 속으로 <이 기사는 2022년 05월 10일 00시 00분부터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고객사의 제작 편의를 위해 미리 송고하는 것으로, 그 이전에는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엠바고 파기시 전적으로 귀사에 책임이 있습니다.> 김신조 사건에서 10·26까지…'권력의 심장' 정권명멸 지켜봐 문화재 등 볼거리…북악산 등산객 몰려 '시민공원' 기대감도       (서울=연합뉴스) 임형섭 기자 = 10일 오전 0시를 기해 윤석열 정부가 공식 출범하면서 그동안 70년 넘게 이어진 '권부의 심장'으로서 청와대의 역할도 그 수명을 다하게 됐다. 새 정부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함에 따라 이제 청와대는 대통령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이 아닌 시민들에게 휴식을 주는 공간으로 활용될 전망이다.       ◇ 대한민국 권력의 핵심…권력의 명멸 바로 곁에서 지켜봐 현재의 청와대 자리(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는 조선 태조 4년(1395년) 경복궁이 창건되며 궁궐의 후원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을 청사 건물로 사용하면서 지금의 청와대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했다. 83년 전인 1939년에는 조선총독부는 이 곳에 건물을 짓고 총독관사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며 이승만 전 대통령이 '경무대'라는 이름을 짓고 관저 및 대통령 집무실로 이 건물을 사용하게 된 것이 지금 청와대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푸른 기와 집'을 뜻하는 청와대(靑瓦臺)의 명칭을 가장 먼저 사용한 것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다. 윤 전 대통령은 1960년 당시 4·19 혁명 분위기 속에 경무대가 지닌 부정적 인식을 고려해 이름을 바꿨다. 이후 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62년의 세월 동안 청와대는 곧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통했다. 특히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청와대는 주요 무대로 활용됐다. 우선 1968년 1월 12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대원 31명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부요인 살해를 목표로 청와대 뒷산으로 침투한 이른바 '1·21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무장대원들이 침투한 이른바 '김신조 루트'는 최근 북악산 개방 결정을 통해 일반 시민들도 방문할 수 있는 곳이 됐다. 1979년 10월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청와대 부지 내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고 숨지는 '10·26 사태'가 벌어졌다. 다만 이처럼 최고권력의 바로 곁에 위치하다보니 국민들에게 청와대는 무언가 내밀하고 위압감있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여기에 국가원수에 대한 철저한 경호 등이 겹치며 대통령과 시민들의 접점은 점차 줄어들었고, 결국 정권이 반복될 때마다 청와대는 '구중궁궐 논란'에 휩싸여야만 했다.       ◇ 문화재 등 볼거리 풍성…등산객 몰리는 '시민공원' 될까 윤석열 정부에서는 이런 '구중궁궐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청와대를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대통령 집무실은 용산으로 옮기는 '대공사'를 단행했다. 이에 따라 이날부터 청와대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여가를 즐기는 공원이 될 전망이다. 시민들이 청와대에 입장하면 그동안 대통령과 참모들이 사용했던 청와대 본관과 영빈관, 녹지원, 상춘재 등을 둘러볼 수 있다. 그동안 경호와 보안 문제로 잠겨 있었던 청와대 뒤편 대통문이 개방되면서 한양도성 성곽까지 연결되는 북악산 등산로도 새롭게 열리게 된다. 춘추관 뒷길에서 출발하는 청와대 동편 코스와 칠궁 뒷길로 시작하는 서편 코스를 이용할 수 있다. 등산 코스는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개방되며, 봄을 맞아 다수의 관광객들이 새로 열리는 이 코스를 찾을 것으로 정치권에서는 전망하고 있다. 청와대 내의 다양한 문화유적도 시민들을 기다리고 있다. 우선 청와대 경내 대통령 관저 뒤편에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1977호로 지정된 석불좌상이 있다. 지정 명칭은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다. 이 불상은 본래 경주에 있었으나 1913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에이 이를 서울 남산 총독관저가 있던 왜성대로 옮겨왔다. 특히 데라우치 총독이 일본으로 이 불상을 일본으로 가져가려 했으나 당시 언론이 비판여론을 일으켜 보물을 지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인근에는 청와대 내 정자인 오운정도 자리하고 있다. 오운정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시에 함께 건립한 정자로, 이 현판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청와대 내부 서남쪽에는 조선시대 왕을 낳은 후궁의 위패를 모신 '칠궁'이 있다. 수궁(守宮)터는 과거 일제가 세웠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김영삼 전 대통령이 허물면서 옛 경복궁 후원의 모습을 재현해 조성한 곳이다. 이같은 유적을 중심으로 한 '역사탐방'이 북악산 등산코스와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청와대가 역사와 자연이 함께하는 시민공원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는 게 윤석열 정부의 기대다. hysup@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尹정부 출범 영욕 세월 대통령 집무실 시민공원 기대감 청와대 부지

2022-05-09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42] 50년 승승장구 현대그룹의 '핵' 됐지만···

문화의 차이는 크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부다처제도 문화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슬람에서는 부인을 4명까지 가질 수 있게 돼 있다. 그러나 일부다처가 쾌락하고는 의미가 다르다. 종족보존이라는 국가적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상의 하나였기도 했지만 모하메드 시절만 해도 양육강식 시대였던 만큼 전쟁이 많아 남자들은 싸움하고 미망인과 고아들이 많이 생겼다. 이슬람교의 이론으로는 전쟁 미망인을 구원해줘야 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일부다처제가 정착됐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림없는 얘기다. 가령 4명의 부인을 둔다면 똑같이 해줘야 하기 때문에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아예 허리가 고장 났다고 공공연히 얘기한다. 50대 이상에서 돈 많은 사람이 2명을 두고 있는 것도 그나마 드물다고 했다. 현대건설은 분명 주베일 산업항 공사로 살이 찌고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견이 없다. 다만 변화도 모색해야 했다. 주베일 사건으로 다른 프로젝트 수주가 어렵게 되면서 리비아 진출을 추진한 것이 그것이었다. 전갑원 부사장의 회고. "리비아는 처음에 정인영 회장께서 추진을 했어요. 리비아 시장이 었거든요. 근데 밑에 있는 기술자들이 내용을 모르고 덤볐어요. 공사의 규모도 컸지만 특수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걸 모른 겁니다. 대수로 공사 뿐 아니라 다른 공사 대부분이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 현대건설은 사우디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단 말이죠. 그 때문에 시장을 더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고요. 그래서 사실 고민이 컸는데 한라건설에서 못하게 되니까 그럼 우리(현대)가 하자 내가 들어가서 전부 조사를 다시 하고 모든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서 리비아 진출을 결심했던 겁니다." 이춘림 전 회장은 현대건설의 급성장이 중동 진출이 시작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정주영 회장의 장기적인 안목을 무엇보다 높게 평가했다. "가만 보면 정 회장님은 내다보시는 게 참 대단합니다. 원자력은 1호기부터 내가 건축을 했지만 진작부터 감천 삼척 영월 군산 인천발전소…. 그렇게 엄청난 공사를 하지 않았어요? 그게 본격적인 플랜트 공사라고요. 그걸 해오지 않았으면 충청댐 소양강댐 그런 다목적댐과 수력발전소도 하지 못했을 거고 주베일 공사는 엄두도 못냈을 거란 말입니다. 그때 했던 사람들이 중공업에도 가 있고 건설에도 남았고 그랬지만 어쨌든 플랜트 경험과 기술이 주베일 공사로 이어졌고 그게 현대조선(현대중공업)까지 급성장시켰다 이거죠. 물론 산업항 하나로 끝난 것도 아니지요. 주변에 2 3억 달러짜리 플랜트 공사가 상당히 많았잖아요." 현대건설은 이처럼 급성장을 하면서 현대그룹의 중심기업이 됐다.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산실이라는 점에서도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식들 중에 현대건설을 맡는 사람이 현대그룹의 총수가 될 것이라고 점쳤다. 현대건설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룹이 백화점처럼 온갖 계열사를 다 거느리고 있을 때 방만한 경영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가식과 허영을 부리지 않으면 기업은 쓰러지지 않는다'는 평소의 신념으로 밀어붙였다. 정 회장은 아무리 거대한 기업이라도 사람이 하는 만큼 기업주가 가식적인 행동과 허영을 부리지 않으면 그 기업에 투자해도 좋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그런 점에서도 '정 회장의 기업'은 정도경영을 하는 한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정 회장은 이런 얘기를 했다. "나는 거짓말과 위선을 제일 싫어해. 그래서 평생 주례를 한 번도 안 섰어요. 나는 30대에 내 아내 아닌 다른 여자도 좋다고 생각해본 일이 있기 때문에 주례를 선다는 것은 위선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지요. 자기가 표본이 되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바탕으로 교훈이 될 수 있는 얘기를 해주어야 하는데 주례를 선다면 그건 위선이지." 정 회장의 정신은 비록 주례를 서는 문제로 얘기하고 있지만 기업가 정신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일깨우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업인은 검소한 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도 자신의 생활과 비교하면서 얘기했다. "나는 2층이지만 옛날에 블록으로 지은 집에서 그대로 살고 있잖아요? 비만 새지 않으면 되지요. 그리고 뭐 의자도 25년 전에 구입한 건데 그대로 다 쓰고 있고. 왜냐하면 자꾸 변화하는데 그때마다 바꿀 수 있어? 가구든 뭐든 사치를 하려면 한이 없잖아요. 그리고 그 나름대로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은 오래 가지고 있는 대로 아주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는 고장이 안 났으면 쓰던 게 좋다 그렇게 생각을 하지요." 대마불사라는 말이 현대건설을 두고 한 말인 것처럼 50여 년 세월을 승승장구했지만 대선 출마 이후 200억원이 넘는 청와대 공사비를 포기하겠다고 했음에도 흔히 말하는 정치보복과 외환대란이 급습하듯 밀려들었고 거기에 이라크 공사대금 1조703억원의 미수금과 국내외 공사대금 미수금이 누적되고 급기야 부채가 5조원을 넘어서면서 현대건설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현대건설의 위기는 부채 때문만이 아니었다. 2000년 3월 14일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당시)의 경질로 촉발된 이른바 '왕자의 난'이 원흉이었다. 정몽구.몽헌 공동회장의 경영권 다툼으로 시작된 왕자의 난은 결과적으로 현대그룹 전체의 대외 신인도를 수직하강시켰고 그렇게 되자 가뜩이나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현대건설에 외국계 금융기관부터 채권 회수조치에 들어가면서 2000년 10월 끝내 부도라는 불명예를 목에 걸어야 했던 것이다. 자식들이 부친의 영광을 초라한 패장의 모습으로 추락시킨 셈이 됐다. 사회는 그렇게 평가한다. 그 후 2006년 4월 채권단의 품에서 워크아웃을 졸업한 현대건설은 2년여가 흐르는 동안 부채비율 290%(워크아웃 졸업 시점)가 되지 않는 건설사로 다시 태어났음에도 여전히 새 주인을 찾지 못해 망부석처럼 눈만 두리번거리고 있는 상태다. 3200억원이 넘는 순이익을 냈기 때문에 채권단의 품을 떠날 수 있었지만 중매쟁이도 창업주의 핏줄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기 때문인지 선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재혼의 팡파르가 언제쯤 어느 집안에서 울릴지는 아직 안개 속이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2-19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41] '주동자 처벌 제발 한국에 맡겨달라'

검은 황금이 분출하는 거대한 나라 사우디를 놀라게 했던 현대건설의 주베일 대 폭동사건은 사우디 비밀경찰이 겨누고 있던 총구를 스스로 거두고 근로자들이 불타던 소요 현장을 스스로 정리하면서 질서정연하게 현장으로 떠나는 순간 수습의 길로 들어섰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료 5명이 구속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근로자들은 반사적으로 속았다는 기분으로 반전되는 분위기. 유양수 대사는 다시 수습해야 할 과제를 안고 뛰어야 했다. - 구속자가 있었다는 것을 처음에는 대사관에서도 몰랐다는데 그만큼 정보에 어둡거나 양국이 근로자 신원문제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지 않았다는 얘기 아닙니까. "공사를 진행하는 업체에서 모든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었지요. 그때만 해도 수천 명씩 데리고 갔으니까 개인들이 독자적으로 취업비자를 받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사항까지 논의할 수 있는 건설시장이 아니었다고요. 중동 진출 초기 아닙니까. 사우디가 인력을 수입하는 그런 입장이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구속자는 없었어요." - 구속자가 없었다니요. 사우디 정보 당국이 적발한 주동자 20명 중에 5명이 구속되지 않았습니까? "처음 특별위원회에 구속된 거는 조사를 해야 하니까 일시 구속을 시킨 거지요. 재판을 받아서 구속된 게 아니고. 물론 그것도 잘못되면 법정에 서야 되고 중형을 받을 텐데 그걸 면하게 하려고 정신 없이 쫓아다니고 동부지구의 주지사가 왕자인데 그 사람한테 부탁을 하고 내부치안이니까 내무차관 만나서 부탁하고 황태자한테 부탁하고. 제발 이 문제는 용서해 달라 확대하지 말아 달라 관련자 문제는 한국 정부에 일임해 달라 사우디의 경제발전을 위해 이역만리까지 왔는데 사우디 법도 알지 못했지만 우발적인 사건 아니냐 전부 반성하고 곧바로 현장으로 돌아가는 걸 보지 않았느냐 정말 속 태우면서 교섭을 했어요. 정식으로 구속되면 진짜 큰일 납니다. 도둑질만 해도 사우디 율법에 따라 양손이 잘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걸 교섭하느라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다 만나고…. 처음엔 상당히 강경하게 나왔어요. 집단 소요는 사우디 국법에서 일절 금지 돼 있고 사건이 워낙 크다 사우디가 조사를 해서 응분의 처벌을 할 수밖에 없다 이래 나왔다고요. 더구나 76년 12월 독일 회사가 터키 사람들을 고용해 일하다가 터키 사람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적이 있었거든요. 전부 추방당하고 벌금도 내고 그랬는데 현대는 더 엄청나다 이거죠. 할 말이 없죠. 그랬지만 결국 전부 우리한테 넘겨줬어요. 일단 구속한 사람도 내주고." - 형을 산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까? "없습니다. 다행히 훈방을 해줬고 다만 교섭하면서 관련자들을 한국 정부에 맡겨달라고 했기 때문에 몇 사람이 조기 출국은 했죠. 그땐 정보부에서도 나와 있었던 만큼 본부 훈령에 따라 처리를 했을 겁니다." - 근로조건 협상은 순조로웠습니까? "그 문제는 조건이 많아서 긴장을 좀 했는데 근로자 대표가 내놓은 조건이 20여 가지예요. 그걸 16가지로 합의를 보는데 참 어려웠습니다. 내가 근로자 입장이 돼서 해결을 하겠다고는 했지 현대는 현대대로 입장이 있지 양측이 워낙 팽팽했고 더구나 근로자들은 그동안 쌓인 불만이 있으니까 상당히 옥신각신했지만 결국 원만하게 타결이 됐어요. 보너스 600%를 달라 인간대접을 해 달라 지금 노사분규하고 똑같습니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전부 열이 올라 험악한 분위기도 나오고 그랬는데 정 회장은 열흘쯤 뒤에야 협상장에 얼굴을 보였다고요. 내가 막 화를 냈어요. 그랬더니 '다 보고 받고 있어요. 얼굴마담이 손님방에 들어가면 흥정이 깨지잖아요?'이러면서 웃잖아요 나 참. 허허. 하여간 정 회장도 될 수 있으면 모든 걸 들어주겠다는 자세로 나왔어요. 그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 어떡하든 공사는 예정대로 마무리를 잘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때만 해도 근로자들이 참 순박했죠. 머리에 뻘건 띠를 두른 것도 아니고." 소요 사태 수습 후 보름을 넘기지 않고 모든 것이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라는 곳이 살아있었을 때니까 주동자 문제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조기 출국자가 있었다는 것이 처벌을 의미했다. 그리고 사우디 정부도 주동자들을 한국 정부가 조속히 귀국시키는 것을 확인하면서 신뢰를 가졌을 것이다. 유 대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진노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고요. 그러니 자기들이 처벌하지 않아도 적절히 처리할 거라고 믿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주동자를 한국에 일임한 것은 양국 사이를 가깝게 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했을 거라고요. 그건 외교적으로나 양국 국민들이 느끼게 되는 정서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우디가 아량을 베풀었다는 걸 보여준 셈 아닙니까? 실제로 사우디 국민성은 상대를 배려하는데 인색하지가 않아요. 한 가지 대표적인 걸로 얘기를 하자면 잘되든 못되든 '인샬라'라고 합니다. 신의 뜻이다 이거지요. 그래서 거절하기 거북한 일이 있어도 '인샬라' 해버린다고요. 잘 돼도 '인샬라'라고 해요. 그게 국민성이고 문화죠. 상대방이 어떤 요구를 하더라도 '노'라고 못합니다. 그건 상대방 인격을 정면으로 모독하고 면박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노'대신 '인샬라'라고 하는 거지요. 소요사태 후속조치도 그런 배려와 아량이 있었기 때문에 원만하게 해결됐다고 봅니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2-12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40] 즉결처리 하려면 나부터 쏴라

"정말 피가 끓어요. 즉각 작전에 들어가겠다는 건 해산을 명령하고 듣지 않으면 사격을 하겠다는 얘깁니다. 피를 토하듯이 내가 그랬어요. 대사가 왔다는 건 사태를 해결하려고 온 거지 당신들을 위해서 정치적으로 온 게 아니다 말이지 당신들이 사격하겠다는데 입회하러 온 줄 아느냐고 즉결처리 하겠다면 나부터 쏴라 그랬어요.(잠시 말이 없었다) 핏발을 세우고 워낙 강하게 그러니까 둘러섰던 30여 명이 전부 굳어요. 비밀경찰 사령관도 주춤하고. 내가 진정을 하면서 미안하다 내가 들어가겠다 나를 믿고 기다려 달라고 아주 절실하게 그랬어요. 그런데도 비밀경찰 사령관은 굽히지를 않아요. 거기서 실랑이를 30분 이상 했을 겁니다. 내용을 알아야 되고 내용을 알면 내가 해결할 방안이 있다고 설득을 해도 사우디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다른 현장으로 파급되는 걸 막기 위해서도 강경한 진압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나와요." - 실제로 해결 방안은 가지고 가셨던 겁니까? "내용도 모르는데 어떻게 방안이 있겠어요. 만나서 들어보면 나오겠지요. 노사분규의 대부분이 처우 때문에 일어나는 거 아닙니까. 나중에 파악이 됐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모든 근로자가 어려운 환경에서 일을 하면서 자기들끼리는 통하니까 동아나 극동건설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비교를 해보지 않았겠어요? 그게 발단의 하나예요. 노임 얼마 받아? 오버타임은 얼마냐? 반찬은 닭고기냐 쇠고기냐 이거거든. 제일 민감하죠. 그걸 비교해보니까 현대가 임금도 좀 싸고 부식까지도 조금 뒤떨어지니까 불만이 쌓였는데 얻어맞은 운전수가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원인을 알았으니 해결이 안 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도 사령관들은 이미 한계를 넘었다는 거고 시장은 전원 연행해서 구속시킬 수박에 없는데 저항하면 사살할 수밖에 없다고 나오는 겁니다. 그걸 설득하는 데 정말 힘들었어요. 제발 나한테 맡겨 달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반신반의하면서도 내 체면을 세워주고 그대신 나를 경호하겠다고 나왔어요. 경호하겠다는 건 사우디의 의무예요. 거기서 또 언쟁을 했어요. 고맙지만 혼자 들어간다고 말이죠." - 그 상황에서 대사님 혼자 맞서겠다는 생각을 하셨단 말씀입니까? "솔직히 비장한 각오를 했어요. 그러나 대사가 자기 국민 문제를 해결하러 들어가겠다면서 자국 국민을 믿지 못해 제3국의 경호대에 둘러싸여 들어간다는 게 말이 됩니까. 사우디 사람들이 그런 광경을 보고 뭐라고 하겠어요. 대사 신변을 보호하는 건 사우디 정부의 책임이 맞지만 나는 우리 국민을 믿는다고 했어용. 그게 그 사람들에게 수습을 할 수 있겠구나 기대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고요. 만약 내가 생명을 잃는다 해도 그 상황에서 사우디 보호를 받는다는 건 대사의 자세가 아닌 겁니다. 결국 내 뜻을 받아줘서 그 당시는 허재영 건설관(나중에 건설부장관)이지 그 사람하고 한진희 노무관(나중에 노동부차관)을 대동하고 들어가는데 그 시각이 일출 전 새벽 5시인가?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세 사람만 긴 그림자를 달고서 말 한마디 없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 광경은 정말 뭐라 표현하기 어려워요. 광활한 모래와 시커먼 바다 거기에 여명이 밝아오고 새벽이 점점 걷히면서 아수라장이 된 현장이 드러나는데이건 정말…. 처절하게 절규했던 근로자들이 전부 지치고 늘어져 있고 말이죠. 말은 산업전사라고 불러주고 국가발전의 역군이라고 치켜세우고 그랬지만 본인들한테는 그런 말들이 사치스러울 뿐이라고요. 잘살아보겠다는 소망 내일에 대한 꿈 그것때문에 사랑하는 처자식 놔두고 이름도 생소했던 열사의 땅 사우디까지 온 것 아닙니까. 눈물이 나더라고요 솔직히 정 회장이 옆에 있었으면 '당신 자식들이라면 저렇게 되도록 하겠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어요." - 정 회장은 그때까지 오지 않았습니가? "모르지요. 나는 연락 받고 미군 군용기로 다급히 현장에 왔으니까. 나중에 보니까 지휘본부에 날아와 있더구먼. 그 분도 고생은 많이 했어요." - 대사가 왔다는 걸 알았을 때 그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나도 그렇게 유순한 사람들이라고는 상상을 못했어요. 대사가 왔다니까 전부 지쳐 있다가 반가움 반 경계 반 그런 심정들인데 그것도 잠깐이고 내가 첫마디부터 이번 문제를 당신네 편에서 해결하겠다 이게 가장 중요했어요 대사가 당신들 편에서 얘기할 테니 나를 믿고 소요를 중단하자 그랬더니 박수가 터져 나오고 막 울고 그래요. 그 말이 터닝 포인트가 된 겁니다. 당신들 편에서 해결하겠다고 한 게. 그렇게 되니까 현대 간부들이라고는 다 도망가고 숨고 그랬는데 박규직(나중에 현대엘리베이터 사장)이라고 이사였나 상무였나. 아주 착한 사람인데 그 사람만 피를 흘리면서도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사무실에서 나와요. 그때부터 실마리가 잡힌 겁니다. 박수를 치고 울고 그러기에 내가 그랬어요. 여러분들 조건은 대표를 뽑아 협의를 하도록 하겠다 그 전에 이렇게 추한 모습을 외국인들한테 보여서 되겠느냐 절대 보이지 말자 전부 청소하고 어지러워진 주변부터 정리하자 그랬더니 알겠습니다! 얼마나 우렁차게 대답을 하는지 태양이 벌겋게 떠오르는데 나중에는 대한민국 만세까지 부르고 말이죠. 그걸로 수습이 된 겁니다." 주변을 경계하며 바리케이드까지 쳐 놓은 채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던 비밀경찰들도 근로자들의 외침과 청소하는 모습에 어리둥절했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30여 명의 사우디 주요 요인은 희한한 광경을 본다는 듯이 자진해 바리케이드를 치우도록 명령하고 있었다. 현장을 청소하고 200여 대의 트럭이 마치 사열 받듯 질서정연하게 정문을 떠나 공사현장으로 출발할 때는 시장과 사령관들이 근로자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기까지 했다. 아랍인들로서는 평생 처음 보는 감동을 경험했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요는 끝이 아니었다. 유 대사가 사건 수습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사이에 사우디 정보기관의 정보수집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우리 대사관에서도 파악하지 못했던 주동자들을 이미 파악하고 20명 중에 5명을 주베일 특별위원회에 념겨 구속시키고 현대 간부 5명도 소환해 조사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가 3월 15일.〈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2-05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39] 박대통령 폭동소식 듣고 진노

박정희 대통령의 진노는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사태의 심각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 즉각 김재규 정보부장이 호출되고 마침 그는 현대건설이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할 때 건설부 장관이었기 때문에 더 혼쭐이 나는 것이다. "주동자들이 몇 놈이야! 그런 놈들을 신원 분석도 하지 않고 내보냈다는 것이야? 폭동 원인이 뭐야! 정부가 총동원되다시피 해서 그토록 중동시장을 어렵게 확보해 놓고 과실도 따보기 전에 허물겠다는 건가! 사우디에 누가 나가 있어! 원만히 수습하지 못하면 각오하시오!" 유양수 대사가 본부로부터 긴급 훈령을 받고 사후에 전하는 회고는 이보다 더 심한 내용까지 담고 있었다. 핫라인을 통해 날아온 김재규 중정부장의 목소리는 살기를 느낄 정도라고도 했다. 더구나 이무렵에는 건국 후 박 대통령이 처음으로 중동 방문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어른이 중동을 방문한다는 계획까지 추진하고 있었다고요. 생각을 해보세요 70년대에 국가원수의 중동지역 방문이라는 건 정말 특별한 외교 현안이 없으면 스케줄을 잡지 않습니다. 2차 오일쇼크 때도 엄청난 국가적 위기 아니었어요? 그때도 최규하 총리가 나갔잖아요. 더구나 이건 내가 직접 박 대통령한테 들은 얘기인데 박 대통령이 68년인가 해외 나가신 후 일절 움직이지 않았다고요. 그래서 한번은 해외에 나가시자고 했더니 단번에 '우리가 해외를 도와줄 입장이 될 때까지 난 안 나가!' 딱 잘라 끊었어요. 그랬는데 중동 방문을 추진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속된 말로 조르다시피 하기도 했지만 '이젠 근 10만 근로자들이 나가 있는데 각하께서 격려를 해주셔야 합니다' 부탁을 드렸더니 이 어른이 중동에서 뭔가 큰 것을 얻어야 겠다는 강력한 뜻이 있었어요. 그건 어떻게든지 중동을 지원해서 국가적으로 큰 경제적 이득을 얻어야겠다 뿐만 아니라 중동 진출을 확대하면서 이북과 외교적인 밸런스를 뒤집어야겠다 그런 의욕을 갖고 계신거예요. 정상외교라는 게 그런 겁니다. '나가지!' 그러시더라고요. 대단한 각오를 하신 겁니다. 그래가지고 예정대로라면 주베일 산업항 공사 완공이 79년 12월까지로 돼 있었지만 정주영 회장이 그 전에 반드시 끝낸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완공에 맞춰 79년 12월 8일부터 3박 4일로 사우디를 방문하고 그 후 쿠웨이트를 방문한다는 스케줄까지 나왔어요. 그게 너무 안타깝게 10.26사건으로 무산됐지만 어쨌든 대규모 폭동사건이 터졌으니 박 대통령 심정이 어땠겠어요.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은 비상대책반까지 만들어 24시간 근무했던 것도 그때가 처음일 겁니다." 정보부장만 호출을 당한 게 아니었다. 정주영 회장도 불려가 호되게 당했다고 했다. 정회장은 주베일 현장에서 현대건설 지휘본부가 있는 '알코바'까지 110km밖에 되지 않는데도 극심한 소요 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뭣 했느냐고 혼나고 심지어 알코바에서 현대건설 본사로 위성전화가 되고 있었다는 걸 박 대통령이 알고 있더라면서 그것 때문에 더 혼이 났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워낙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손바닥 보듯이 보고 있더라는 얘기였다. "우리 대사관보다도 더 좋은 여건에서 수시로 보고를 받는 위성전화까지 설치해놓고 있었으면서 그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정 회장은 뭣 하고 있었다는 거요! 아 이렇게 호통을 치시는데 내가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 숨도 크게 못 쉬고 그저 죄송하다고 최대한 신속히 수습하겠다고 그런 말씀밖에. 그러면서 속으로 빨리 현장 가라는 말씀만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당장 날아가라고 당장! 이러시잖아. 얼른 나오는 거지 재떨이 안 날아온 것만도 많이 봐주신 거야 하하항. 야…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건 첨이었던 것 같아." - 현지 대사관에서는 전화 때문에 속이 뒤집어질 정도로 업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위성전화가 현대에 설치돼 있었다니 너무 뜻밖인데 그게 사우디 보안 당국에 걸리지 않았습니까? "그걸 전갑원이가 한 짓이야 하하항. 그게 원칙은 배에 설치를 하는 거래요. 그것도 주베일 항에 띄워놓은 배에 설치를 해서 본사하고 공사에 필요한 긴급사항이 있을 때 인공위성을 통해 연결하는 걸로 돼있었는데 그쪽(사우디)도 위성을 연결해주는 본부 담당이 있을거 아니에요? 그 친구를 구워삶아서 제한적으로 하겠다 해놓고는 전갑원이가 지휘본부 설계를 하면서 배에 설치할 장비를 숨겨가지고 지휘본부 숙소 안에 다 삭 해놓은 거야. 서류상은 배에 있는걸로 해놓고 실제 장비는 싹 돌린 거지. 그걸 우리 정보부가 어떻게 알았는지 박 대통령이 알아가지고 내가 혼이 났잖아 하하항." 현장 상황은 아비규환. 200대가 넘는 트럭이 담을 치듯 외부인사 출입을 차단시켰고 일부 차량은 불길이 치솟았다. 불을 보면 흥분의 정도는 더 심해진다. 모든 근로자가 모여 중역 나오라 외치고 대사 오라고 소리쳤다. 이미 저만큼 외곽은 사우디 비밀경찰이 기관총을 걸어놓고 포위하고 있었다. 근로자들은 쏠 테면 쏘라는 듯이 자기들끼리 뭉쳐 있었지만 그럴수록 공포감은 더했고 떨고 있는 근로자들도 분명 많았다. 더구나 3월의 밤은 매우 춥다. 기름을 쏟아 부어 모닥불을 피워 놔도 추워서 모피를 둘러싸고 있기도 했다. 우는 근로자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양수 대사가 미 군용기로 활주로에 도착한 것이 새벽 2시30분. 해군사령관 시장 서장 COE사령관 비밀경찰 사령관 주베일 지역사령관 방위군 사령관 정보국장까지 30여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한국 정부를 대신하는 대사가 도착했으니 즉각 작전에 들어가겠다는 것이 그들의 강경한 입장 표명이었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1-29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37] 3000여 근로자 폭동 '사우디가 발칵'

현대건설로서는 최초이면서 최대의 노사분규라 할 수 있는 77년의 이른바 3.13 대폭동 사건은 현대의 사령탑만 놀라게 한 것이 아니었다. 사우디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우리 정부에도 비상이 걸릴 정도였다. 데모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사우디에서 근로자들이 집단행동에 들어가고 차량과 기물이 불타고 파괴됐을 뿐 아니라 수습하러 현장에 긴급 투입된 중역(박규직 당시 상무)이 피투성이가 되어 실려 나가는가 하면 협상을 시도하려던 중역(전갑원 당시 상무)이 돌진하는 대형 덤프트럭과 부딪혀 피투성이가 되고 실신했다. 분노한 근로자들이 짓밟는 현장을 목격한 사우디 비밀경찰(보안군)은 실탄을 장전하고 3000명이 넘는 시위 근로자를 전부 현장에서 즉결처리 하겠다며 강경하게 진압하려는 상황까지 갔던 것이다. 주베일 산업항을 수주했을 때만 해도 현대는 세계적인 건설사들의 부러움을 샀던 업체였고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스타로 떠오른 기업이었다. 결과론이지만 76년 6월부터 79년 12월까지 42개월로 되어 있는 공사기간을 10개월이나 단축하면서 79년 2월 완공했을 때는 세계적인 건설사들이 세 번이나 놀랐다면서 감탄했다. 빠른 공사수행 기상천외한 아이디어 한국인의 근면성 이것은 유럽 어느 나라 업체에서도 볼 수 없는 감동적인 광경이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소장을 맡았던 김용재 이사는 사우디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문화적 차이의 어려움에도 유럽 업체들의 텃세 발주처와 감독청의 끊임없는 불신 기술적인 미경험 등 온갖 불리한 환경과 조건들을 모두 극복하면서 완벽한 공사를 했다는 것에 자부심까지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공사 준비에 들어간 후 9개월 본 공사에 돌입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상상도 경험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소요사태가 일어날 줄은 누구도 예상 못한 것이다. "그날이 일요일입니다." 사건이 터지고 유양수 대사가 현장으로부터 긴급 전화를 받으면서 사태 파악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진 후였다. 더구나 촌각을 다투는 긴급한 현장을 멀리 두고서도 열악한 통신 사정은 사태 파악도 긴급한 지시도 내릴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면 휴일인데도 대사가 대사관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북한에서도 주변 곳곳에 나와 있었어요. 그 당시는 우리와 이북이 상당히 긴장돼 있을 때 아닙니까. 그 친구들이 공작을 하려는 위험도 있기 때문에 휴일이라도 한국의 휴일하고는 같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늘 긴장상태로 지내는데 그날은 특별히 기분 좋은 일이 있었어요. 현대건설이 사우디 동부 '라스알가르' 부두공사를 2억6000만 달러에 수주했고 동아건설이 서해안 '알카디마' 부두공사를 1억 7000만 달러에 수주해 한꺼번에 국내 업체가 두 공사를 같은 날 차지해 대통령의 축전을 받을 만큼 기분이 좋았던 거죠. 그래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보통은 한숨을 자야 건강 유지를 하지만 산보를 겸해서 사무실로 나갔어요. 대사관저하고 사무실까지 거리가 한 400m 됩니다. 조금 있으니까 통신사가 급히 찾아요. 그때가 오후 4시쯤 됐을 겁니다. 알코바에 있는 현대건설 사무실에서 뭔가 다급한 전화가 왔으니 받아보라는 겁니다. 받으니까 감이 워낙 좋지 않고 '대사님입니까? 큰일났습니다! 주베일인데 난동이 벌어져서 사상자까지 나고 있습니다. 빨리 와 주셔야겠습니다!' 누군냐고 물어도 손으로 전화기를 가리고 있는지 다급히 와 달라는 소리만 하고 금방 끊어져 버려요. 전화 사정이 참 어렵고 속을 뒤집어 놔요. 직감적으로 이거 뭔가 잘못됐구나. 근데 더 이상 알아볼 방법이 있어야지요. 주베일 공사 현장과 알코바 현대사무소는 100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거기도 전화가 안 되고 대사관에서 알코바까지는 1300km나 떨어져 있는데 암만 걸어도 역시 전화가 안 돼요." 다른 비상수단을 가동해야 해다. 대사관에 파견 나와 있던 노무관 건설관 중앙정보부 파견관을 비상소집 했지만 그들도 사건이 발생할 만한 징조나 원인 같은 것을 사전에 입수한 게 없었다. '라스타누라'에 있는 대림산업과 동아건설에 연락을 취해도 허사였다. 급기야 리야드에 있는 COE(미 육군지중해공병단) 본부에 정보 확인을 요청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인근의 SNEP(해상육상기지 확장공사) 현장의 근로자들까지 산업항 근로자들과 합세해 전원이 소요사태에 가담했고 사태가 심각해 COE도 비상상태에 돌입했으며 사령관 그레이 대령까지 현장으로 이미 날아갔다는 것이다. "대사인 나만 뒤늦게 알았고 꼼짝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COE 본부의 얘기를 들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려요. 폭동이 일어난 현장하고 10km 지점에 미 공병단 군사시설 공사현장이 있는데 그 SNEP도 현대가 수주해 함께 공사를 하고 있었단 말이죠. 사우디의 모든 군사시설은 미국과 사우디가 군사원조협정을 맺어 전부 COE에서 발주하고 전담하기 때문에 거긴 거기대로 강력한 진압권이 있다고요. 그런데도 SNEP 근로자들까지 가담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정말 큰일 났구나 싶고 당혹스러운 건 말로 다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에요. 전 직원을 비상소집하고 혹시 동요할지 모르니까 사우디 22개 공사장 근로자들한테는 소요사태 소식이 전해지지 않도록 차단 조치를 취하고 우리 정부에도 긴급 타전을 하라고 지시했어요. 그렇지만 정말 눈 앞이 깜깜해지고 모처럼 진출해 중동에 대한 우리 꿈이 있는데 하루아침에 다 무너지는 것 같고 말이지요. 그러니 당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 어떻게 해서라도 더 이상 사건이 확대되지 않도록 빨리 수습해야겠고 외교적인 사건으로 확대가 안 되게 해야겠다 그런 생각부터 들어요. 사우디 국법대로라면 전원 추방이거나 전원 구속이거나 최악의 경우 현장 발포도 가능하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닙니까. 피가 말라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1-15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36] 엄청난 달러···'울산 현대왕국' 초석

-최저가로 낙찰이 되고서도 공사계약서에 서명하기까지 발주처에서는 몇 달을 끌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산업항 공사의 가장 핵심이고 아주 난공사라고 하는 OSTT(해상유조선 정박시설)공사에 우리가 경험이 없다고 해서 그랬는데 그것 때문에 권기태가 입찰했다가 떨어진 브라운 앤 루트사를 만나서 우리 하청 기술사로 참여시킨다는 협약서를 만들어 발주처에 밀어 넣었는데도 트집이야. 발주처에서는 이상하다 그거지. 브라운 앤 루트사는 OSTT공사에만 9억400만 달러를 써냈거든? 사실 그만큼 힘든 공사예요. 근데 현대보다 훨씬 더 비싸게 써낸 세계적인 업체가 어떻게 훨씬 적게 써낸 현대의 하청사가 되느냐고 시비를 거니 말이야. 그건 우리 문제지 저들 문제야? 협약서를 내보이는데도 그래. 결국 방해공작이 막 들어갔다는 얘기야. 그때 무기수출 상인인데 중동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이 있던 카쇼기(애드난 카쇼기)라고 있어. 우리나라에도 여러 번 와서 경호실장 박종규씨도 만나고 무기 많이 팔아먹은 친구 아니야? 그이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현대가 산업항을 수주하면 자기 팔을 자르겠다고 아주 고약하게 굴면서 다녔거든? 그래 놓고 우리가 낙찰되니까 한일개발 부사장을 했다는 친구를 자기가 데리고 있었던지 그이를 내세워서 자기네하고 에이전트 계약을 맺자고 말이야. 얼마나 야비해? 그런 소릴 하려면 카쇼기가 팔을 자르고 나서 하자고 해야 되는 거 아니냐? 하여간 별일 다 있었는데 온갖 방해공작 때문에 자꾸 시간을 끌었던 거야." 모두의 승리였다. 정부 기업 심지어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까지도 현대의 낙찰을 위해 애를 썼다. 동아는 산업항보다 남쪽에 위치한 상업항 공사를 원청사인 네덜란드 업체로부터 수주해 이미 상당부분 진척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훗날 동아에서 일하는 노무자들과 근로조건을 비교한 현대건설 노무자들이 자신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결국 대폭동을 일으킨 동기의 하나가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최 회장도 현대건설의 기적 같은 승리였고 자랑스러운 수주전의 결과였다고 회고했다. "기업 하는 입장에서는 외교적인 문제까지도 상당히 고려를 하고 신경을 쓰게 되는데 현대가 수주한 것은 총체적인 승리였다고 봐요. 크든 작든 사우디에 미리 나갔던 우리 기업들도 경쟁 차원이 아니라 진심으로 현대가 잘되기를 바라면서 지원을 했으니까요. 그 당시 현대는 사우디로 보면 후발 진출업체지요. 그런데도 정말 최선을 다했고 어떡하든 수주하려고 정주영 회장님이 직접 나를 찾아오셨어요. 그런 어른이 직접 오셨으니 아버지하고도 가깝게 지내셨지만 내가 단가에서부터 모든 정보를 아낌없이 드리면서 그랬지요. 꼭 수주하시라고 그래서 동아하고 현대가 사우디에서 좋은 이미지를 꼭 심어놓자고. 결국 수주를 하셨는데 그게 그 당시 우리 정부를 살린 셈이요. 물론 현대뿐 아니라 큰일이 있을 땐 절대 내 배만 채울 생각하지 않고 전부 나서는 게 기업들이지만 2차 오일쇼크 터졌을 때도 국가에 달러는 없지 기름도 없지 기업인들이 나서 헌신적으로 정부를 도운 거 아니오? 그런 맥락에서도 산업항 수주는 의미가 컸어요." 사우디 왕족을 에이전트로 계약했다가 사례비 문제로 법정까지 가기도 했고 공사가 시작되면서 이춘림 당시 사장이 현지에서 억류당하기도 하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현대건설이지만 결과적으로 주베일 산업항부터 현대는 실질적인 급성장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춘림 전 회장의 얘기도 들었다. "우리가 결국은 주베일 근처 공사를 다 '도리'하다시피 했었는데 전갑원씨와 김광명씨도 인터뷰해서 들었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조선소라든가 월남에서 준설한 경험 또 조선소를 지으면서 암벽이나 도크에서 벌인 물과의 싸움 이런 일을 해오면서 굉장히 귀중한 경험을 얻었거든요. 나는 그 경험의 결과라고 봅니다. 그때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놓고 세계적인 건설업체들이 마치 소집 명령을 받고 몰려든 것처럼 전부 달려들다시피 했는데 견적을 내고 입찰을 할 때 숨 막히는 정보전 같은 걸 전부 얘기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겠고 입찰가만 가지고 말하자면 세계적인 유수 업체들이 컨소시엄까지 하면서 15억 달러 정도 냈는데 우리가 이겼단 말이지요. 그게 현대건설의 미래를 밝혀주는 시그널이었다고 보는 겁니다. 물론 9억4000만 달러를 써냈을 때 전부 우리보고 망한다 그랬습니다. 결과론이지만 우리는 엄청나게 이익을 냈거든요. 잘 아시겠지만 그때까지 현대가 경험하지 못했던 굉장한 일(근로자 대폭동이 터져 사우디 보안부대가 전부 즉결처리 하겠다고 출동을 하고 한국에서는 정보부에서 요원들이 긴급 파견될 정도였다)들이 있긴 했어도 산업항 수주로 현대가 탄탄해졌잖아요." -울산의 현대왕국을 건설했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까? "왕국은 무슨 그렇게 말할 건 아니고 좌우간 주베일 반경 30km 이내의 4 5개 공사가 무려 17억 달러 규모였는데 나중엔 그것까지 수주했고 산업항 공사로만 매달 8000만 달러에서 1억 달러가 들어왔어요. 2년 정도 기간 내내. 그러니 그게 얼마입니까. 엄청난 달러로 정부의 외환 부도도 막았지만 울산에 중전기 공장이다 엔진 공장이다 기계 자동화다 중공업이다 전부 그 돈으로 충실하게 키울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게 지금 한국의 수출주도산업이라는 걸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문제는 곪아가고 있었다. 77년 1월부터 본 공사에 들어간 이후 현대건설 현장에서 엄청난 폭동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른바 '주베일 대폭동사건'이 그것이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1-08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육-35] '대사도···왕 회장도 다 울었어요'

홍순길 건설관은 외교관 신분이면서도 현대건설에 입찰 자격을 얻어주기 위해 독사라는 별명을 가진 발주처 만서리 차관의 비위를 맞추느라 별 '더러운 짓'을 다 했다며 담아두고 있던 분기를 털어놨다. "대통령의 특명이 아니면 외교관으로서 절대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짓을 한 겁니다. 자존심 다 버렸어요. 국가가 위기에 처했고 건설업체가 입찰을 해야겠다고 환갑이 넘은 양반이 그 무더운 열사의 땅까지 와서 교통편도 마땅찮은 데도 불구하고 뛰어다니고 그런 저런 생각이 떠오르니까 정말 몇 번씩 구역질을 하면서도 차관 비위를 맞추면서 포기를 못하고 헤쳐나간 겁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장관이 수차 얘기하면 차관이 장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모른 척하고서 들어줄 것 아닙니까? 거긴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서광이 보인 건 언제쯤입니까? "그게 몇 달은 걸렸을 거예요. 수없이 찾아다녔으니까요. 경우에 따라선 유 대사님을 모시고 장관을 같이 만나기도 했고. 장관도 계속해서 대사와 건설관이 통사정을 하니까 독사 같은 차관이지만 작심하고 그 친구를 부른 것 같아요. '입찰자격을 주는 건 공사를 주는 게 아니잖느냐 한 번 줘보는 게 좋겠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것도 좋은 아이디어죠. 그렇다고 장관이 말수가 많은 사람은 아니에요. 자기자랑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하여간 그랬는데 하루는 뱀처럼 쌀쌀하던 차관이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더라고요. '내일 좀 올라오시오.' 기분이 이상해요. 그래서 만사 제치고 가니까 종이 한 장을 탁 던져주는데 거기에 입찰초청 대상자 10개사가 있고 한국 현대건설이 맨 끝에 10번째 들어 있잖아요. 이건 정말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차관이 입찰 초청장을 현대 측에 주지 않고 건설관님에게 전달했다는 건 외교적인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좌우간 받았으면 됐지 뭐. 잘은 모르지만 현대도 나름대로는 노력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사우디라는 나라는 로비에 강한 왕족들이 많고 에이전트들의 힘이 큽니다. 어쨌든 즉각 대사님에게 보고를 했어요. 유 대사님도 깜짝 놀라시죠. 그때까지 대사님도 얘기를 안 해서 그렇지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니셨는데 모르겠습니까? 현대는 불가능하다 그랬으니까요. 하여간 대사관이 온통 축제 같고 마치 공사를 따낸 것처럼 흥분하고 그랬습니다 하하. 당장 현대에 연락을 했는데 직원들도 되리라고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아요. 오진영 과장이라고 얼굴이 하얗고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만날 우리 대사관에 쫓아다녔어요. 그 사람 보고 '입찰자격서 받아가시오' 그랬더니 깜짝 기절을 했어요. 진짜 기절했습니다. 얼마나 시달리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그랬겠어요. 그런 정도였다고요. 그때부터 이제 입찰 전쟁이 시작되는 겁니다." -입찰 내막에 대해서나 그 후에 특별히 정 회장님 얘기가 기억나는 건 없습니까? "입찰에 대해서는 대부분 현대가 쭉 했고 우린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답사나 견적도 전갑원씨 김광명씨 같은 중역들이 나와서 전부 현대 독자적으로 했으니까요. 정 회장님은 입찰 마지막 단계 때 다시 대사님하고 우리 집에 왔는데 '수고 했습니다' 딱 한마디만 합디다. 그러고는 아직 발표는커녕 입찰 마감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뭐라고 합디까. 아버지가 꿈에 보였기 때문에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래요. 아버지 꿈 때문에 됐다는데 참 섭섭하기도 하고 기업 하는 사람들은 전부 자기 덕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모양이구나 싶기도 하고…. 근데 솔직히 나는 속으로 저건 불가능한 일이다 입찰서를 얻어냈으니까 내 임무는 다했지만 저게 되겠느냐 도저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봤어요. 아마 주베일 산업항이 어떤 거다 하는 걸 아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저게 어떤 공사인데 현대건설에 떨어지겠느냐 전부 그렇게 생각하고 정 회장이 헛고생한다고 했으니까요."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외교적인 노력이 없었으면 입찰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은 정 회장도 인정했다. 그러면서 현대건설이 수주하지 못한다면 그동안의 외교적 노력과 대통령의 체면이 어떻게 되었겠느냐 그것까지 생각해서 열심히 뛰었다면서 정 회장은 너스레를 떨고 한껏 웃었다. "그 양반들이 수고를 많이 했지. 그렇지만 허사가 되지 않도록 하는 건 더 힘든 일 아니에요? 그걸 내가 해줬단 말이야. 우리가 먹었으니까 하하항." 정 회장은 당시 리야드에 있는 알리아마마 호텔에 투숙하고 있으면서 전갑원 상무 김광명 이사 그리고 정문도 사장과 문인구 변호사까지 불러 협의하면서 입찰서류를 직접 챙겼다. 입찰이 있던 날 오전 10시 정각에 입찰서를 제출하고 그날 오후에 현장에서 발표를 했을 때 종합 평점에서 현대는 3위였고 입찰가는 가장 낮았다. 그때부터는 전부 다 미쳐버리는 거라고 했다. "서울과 사우디가 동시에 난리가 난 거야. 10억 달러가 넘는다는 공사를 대한민국이 언제 구경이라도 해봤어? 그걸 현대건설이 9억4000만 달러 최저가로 낙찰을 봤으니 말이야. 유양수 대사하고 그때 사장이 조성근씨야 건설부 장관을 했지(기억의 착오로 보인다. 조성근씨는 당시 현대건설 국내담당 사장을 거쳐 현대건설 고문이었고 경제기획원 차관보 출신인 정문도씨가 현대중공업 사장으로서 산업항 입찰에 참여했다). 권기태가 그때 부사장인가?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홍 국장도 부르고 해서 컵에 물을 채워가지고 건배를 했어. 내가 술을 안 하는데 지들만 술로 하면 안 되잖아 하하항. 사우디에서는 금주니까 물을 채워서 했는데 그것도 대사관이 생기고 첨이래. 중역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그땐 전부 '거지 도사'들이야. 입찰 발표 때까지 목욕하고 머리 깎고 하면 복이 떨어진다고 면도까지 안 했으니 그 더운데 냄새는 나고 수염은 잔뜩 길고 완전히 거지 도사들이지 뭐야 하하항. 하여간 축배를 드는데 대뜸 유 대사가 통신사 빨리 부르라고 말이야. 대통령 각하 앞으로 전문을 보내야 한다는 거야. 흥분이 돼서 통신사가 달려오니까 그 자리에서 불러대고 적고 말이지. '대통령 각하 오늘 몇 월 며칠 현대가 주베일 산업항공사 계약을 했습니다. 이로써 사우디 계약 건은 얼마가 됐습니다. 대한민국 전권대사 유양수' 탁 이러면서 통신사한테 불러대니까 그때부터 통신사는 그걸 가지고 코트라로 들고 뛰는데 울어요 울어 하하항. 그랬는데 30분도 안 돼서 바로 축하전문이 들어와요. 각하지. 정말 고생했다고 말이야. 그러니까 전부 또 울어. 대사도 울고 나도 눈물이 좀 나오고. 이게 드라마야 아주 진짜 감동적인 드라마였어." 〈계속>

2008-12-24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육-33] 1차 오일쇼크 '국가위기를 막아라'

주베일 산업항 수주를 놓고 현대건설을 돕기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은 하루하루가 전투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반드시 현대건설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특정 기업을 위해 정부가 나선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넘보기도 어려운 대형 프로젝트에 현대가 도전하고 있었기에 성공만 한다면 국가의 위기를 해소할 수도 있겠다고 보았던 것이다. 유양수 당시 주 사우디아라비아 대사도 한국 건설사들이 중동시장으로 진출한 배경이 1차 오일쇼크와 결코 무관하지 않고 고유가로 전 산업이 휘청거리다시피 하는 가운데 외화 고갈에 따른 정부의 위기와 주베일 산업항은 직결됐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부터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이명박 전 현대건설 회장도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은 국가적인 위기상황이었다고 회고 했다. "결과론이지만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는 한국으로 보면 외환위기도 막고 국내 건설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계기가 됐죠. 1차 오일쇼크 이후 정말 옛날 얘기지만 기름값이 1달러 20센트 하던 것이 3달러 됐다가 30달러까지 올라가는 위기였으니까 대한민국 경제가 굉장히 어려웠을 때인데 어마어마한 수주를 해내면서 숨통이 트인 거예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산업항 공사 하나가 국가의 외환 위기를 막았을 정도였지요. 요즘으로 말하면 민간회사도 몇 억 달러를 갖고 있는데 우리 정부의 전체 외환 잔고가 당시 3000만 달러 정도였어요. 정부가 외환난으로 전 대사관에 돈을 빌리라고 훈령을 내리고 그랬을 때라고. 그런 위기에 처해 있었을 때 10억 달러짜리 산업항을 따내서 현대도 급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고 국가 위기도 넘기게 됐던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때 사우디 진출을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하는데 첫 번째가 현대라는 그룹을 비롯해서 한국의 건설업을 육성시켰다 외환위기도 막았지만 그때 산업항 공사 수주를 계기로 국내 건설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고요. 그 다음에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했다 3차 5개년 계획을 전부 우리 건설업자들 힘으로 했잖아요. 외국 어떤 나라도 근대화를 시작했을 때 자기네 힘으로 다 해낸 나라가 없었어요. 일본 정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일본도 건설은 미국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동남아도 다 외국인들이 들어가서 했고. 근데 우리는 초기 때만 예를 들어 당인리 발전소 불과 몇 만kW짜리 벡텔이 와서 했고 인천 도크 만들 때 미국 공병단 기술진이 와서 했지만 진짜 몇 십만kW짜리 원자력 발전소 종합제철소 이런 것을 전부 우리 힘으로 했단 말이에요. 중동 나가서 외국기술 배워온 걸로 끄떡없이 우리가 다 지었다고. 얼마든지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준 거지 허허헝." 유양수 전 장관은 중동 진출의 배경부터 짚었다. 그리고 정부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던가를 회고했다. 1차 오일쇼크 전후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사회간접시설들 형편이 어느 정도로 열악했던가에 대해서도 얘기했지만 홍순길 건설관이 첫 고비였던 입찰자격 획득을 위한 노력을 얘기할 때는 눈 밑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유 전 장관의 회고부터 들었다. "중동 진출이 갑자기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월남 진출의 연장이라고 봐야죠. 그러니까 71~73년에 걸쳐 미국의 대 월남 정책이 바뀌면서 73년 1월에 휴전협정이 체결됩니다만 그때까지 월남에 진출한 우리 업체들 대부분이 이젠 해외 진출이 끝났다고 낙담했어요. 그 무렵 중동에 눈을 뜨기 시작한 업체들이 대림산업.삼환기업.현대건설.한일개발 등인데 그게 또 마침 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산유국들이 오일달러를 가지고 국가개발을 해야겠다는 시기와 맞았어요. 7, 8년에 걸쳐 대규모로 진출을 하게 됐는데 그때부터 사실상 우리 건설업체들이 급격히 중동시장을 확대했고 수주 물량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해냈던 거지만 어쨌든 내가 75년 9월 말에 사우디에 부임하니까 제일 먼저 훈령이 날아드는 게 박 대통령 당부 말씀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비슷한 내용인데도 매일 옵니다. '현대건설을 격려해서 꼭 입찰할 수 있도록 하시오.' 나중에 입찰해서 되고 안되고를 떠나 1단계가 입찰자격 확보니까 이건 국력 경쟁 차원에서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는 거죠. 외교 교섭에 관한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김재규 건설장관은 불이 났다고 할 정도로 다급하게 텔렉스를 칩디다. 그 양반 성격이 좀 급해요. 대통령 특명이니까 죽어도 해내야 한다 이거지요 하하." - 대사관에 텔렉스가 없었다는건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땐 사우디가 그랬어요. 대사관에서 한참 떨어진 코트라 사무실 텔렉스를 썼는데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입니다. 우리 대사관 직원이 한 10명 됐지? 전화가 있는 집이 대사관저하고 공사 집하고 홍 건설관 집 정도? 홍 국장은 아예 전화가 있는 아파트에 들어갔기 때문에 전화도 쓴겁니다. 그 당시에는 제다에서 전화교환원을 통해 리야드를 부르면 사흘 후에 연결해주겠다고 그럽니다. 사흘 후면 그나마 잘 연결해주는 거예요. 상상이 됩니까? 사우디 통신이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니 초대 대사가 윤경도씨인데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그러던 것이 오일 달러가 막 들어오고 하니까 갑자기 76년부터 조금씩 좋아졌어요. 사우디 정부에서 외교사절이 있는 지역을 통신조차 안 되게 해놓은 건 이해하기 어렵죠. 그땐 정부가 리야드에 있었고 리야드가 아랍 반도의 한복판 사막 가운데 아닙니까? 외교단은 전부 항구 도시 제다에 몰려 있게 해놓고는 일절 다른 곳으로도 못 가게 했다고요. 83년부터 리야드로 옮겨준 겁니다. 그러니 대사가 정부 청사라도 방문하려고 하면 비행기 타고 리야드로 가야 돼요. 대형 프로젝트를 따려면 외교 노력도 이만저만이 아닌데 아주 어려웠지요." <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8-12-11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32] '반드시 입찰 따라' 전 국가적으로 지원

계속되는 사우디 주재 한국대사관 홍순길 건설관의 증언. 정 회장은 은행에 가기 전부터 마치 보증서를 받아 놓기라도 한 것처럼 확신에 찬 얘기도 하더라고 했다. "입찰 전날 우리 집에서 밥을 먹었는데 우리 집사람이 오이지에다 김치랑 해서 드리니까 밥을 물에 말아 오이지하고 다 들어요. 그 당시에 환갑이 지났다고 그럽디다. 그러면서 밥 먹을 때 들은 얘기입니다만 자기는 인생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아버지 꿈을 꾼다고 말이죠. 내가 이번에도 입찰 보러 오면서 아버지 꿈을 꿨다고 그래서 반드시 된다 이겁니다. 내가 듣기엔 황당하죠. 그러면서 올라갔던 거예요. 대사관하고 발주처는 제다(Jidda)에 있고 주베일은 페르시아만 남쪽이고 은행은 리야드에 있으니까 한국으로 보면 부산에서 저 북쪽 신의주까지 가는 건데 동네 다니듯이 다니면서 지칠 줄 모르고 무조건 받아낼 수 있다고 말이죠." 물론 정 회장의 욕심에는 10억 달러라는 공사금액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건설인으로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것도 동기부여가 됐겠지만 주베일 산업항은 공사의 모든 업종이 망라된 종합공사였고 특히 산업항만 수주하면 그때까지 극소수 선진국 건설사들만 독점해 온 해양구조물의 시공기술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다는 계산이 무엇보다 강하게 정 회장을 끌어당겼을 것이다. 당연히 해양구조물 시공기술은 국내 건설사에는 꿈도 꿀 수 없던 분야였고 무한대 자산이라 할 만큼 시장성도 좋았다. 특히 공사기간 42개월이라는 대규모 산업시설 공사라는 것도 있지만 육상과 해상에서 펼쳐지는 토목부문 공사를 포함해 건축.전기.설비 부문과 함께 30만t 유조선 4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해상 탱커터미널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해상 탱커터미널을 건설하자면 구조물 제작에서부터 수송 하역 설치까지 완벽하게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총체적인 건설 백과사전을 마스터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규모 면에서도 그때까지 세계 건설시장에 나온 프로젝트 중에서는 단연 압도적으로 컸다. 숫자만으로는 시각적인 감이 잡히지 않겠지만 콘크리트 작업량만 2년동안 하루에 1500~2000㎥씩 타설해야 하니까 8t트럭 500대 분량이고 해상 철구조물이 10만t이나 설치되는 공사였다. 일반 적으로 굉장하다는 항만공사가 5000~2만t 정도의 철구조물이 들어간다. 그리고 주베일항에는 돌까지 400만㎥가 투입돼야 했다. 국내 최대 규모였던 부산항 건설 때도 34만㎥가 투입됐을 뿐이었다. 그러나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한 건설업체의 수주실적이나 기술습득 같은 목표에 포인트를 맞추기에는 차원이 다른 한국 정부 전체의 관심 사안이었다. 당시 한국 경제의 시대적 상황이 검은 황금이 폭발하듯 분출하는 중동에서 대형 공사로 시장을 확보하지 못하면 다른 건설시장은 희망이 없다는 판단이 정부 분위기를 압박했고 그런 만큼 주베일 항만공사 수주는 국운을 건 절실한 프로젝트였다는 것이 관계짜들의 공통된 기억이었다. 현대건설과 정 회장의 성취욕이나 노력만으로 성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홍순길 건설관과 유양수 당시 사우디 대사의 회고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지만 주베일 산업항을 수주하기 위한 총력전은 민관이 따로 없었고 마치 생사를 건 전쟁을 치르듯 했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좌담회를 하면 그 당시 있었던 사람들이 다들 꿈같은 얘기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도 흘리고 어떤 사람들은 참 기막힌 얘기여서 말도 다 하지 못할 겁니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도 있고 박 대통령의 해내야 되겠다는 그런 집념 또 하명을 받고 현지 대사가 뛰는 모습 물론 현대 직원들도 처절할 정도로 매달렸지만 그런 건 말로 다 못해요. 지나고 보면 나라가 운이 있었던 것 같다는 말밖에…."(홍순길) 당시 주 사우디 한국 대사는 유양수 전 장관이었다. 유 대사는 소장으로 예편했지만 월남전을 비롯해 한국이 외교적으로 곤경에 처할 때마다 현지 대사로 부임 명령을 받아 그의 외교 경력은 '구원투수'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화려하면서도 숱한 역경을 헤쳐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사우디에서도 그랬다고 했다. "내가 부임한 것이 75년 9월 말인데 주베일 산업항 문제로 그 전까지 홍순길 건설관이 굉장히 애를 쓰고 있었어요. 사우디라는 나라가 그런(공사 관련) 문제에 대해 비밀이 없는 나라예요. 대형 공사가 나오면 와자라든가 장관이라든가 실무 공무원을 통해 누구나 다 아는 얘기가 돼요. 당시 우리 건설부 장관은 김재규씨였는데 부임하면서부터 박 대통령 지시사항이라면서 전문이 쏟아져 들어왔어요. 참 옛날 얘기지만 그때는 전문이 대사관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코트라로 옵니다. 그 나라가 재외공관을 홍해 연안 제다에만 두도록 해놔서 외교 사절이 모여 있는 곳인데도 통신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어요. 하여간 코트라를 통해 받아보면 모든 노력을 다해 현대건설이 공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입찰자격을 획득하도록 적극 노력해라 이게 매일 왔어요." - 전문 내용에 현대라는 말이 들어 있었습니까? "그래요. 이미 현대도 발주처 정보를 입수하고 처음에는 입찰 자격부터 얻는 게 관건이니까 정 회장이 박 대통령한테 부탁을 드렸겠지요. 우리 정부도 꼭 수주를 해야만 한다는 게 당시엔 지상명령이었으니까. 그 당시 중동에 대한 관심은 월남전 이후 최대였고 사실 월남전이 끝나면서 이제는 중동밖에 없다는 것이 정부 판단이었으니까 대통령부터 대단한 관심을 가지셨지요. 그랬는데 내가 월남 대사를 끝으로 한국에 들어와서 잠시 다른 일을 하고 있으니까 대통령께서 빨리 사우디로 나가라고 말이야 나가서 보니까 그런 엄청난 프로젝트하고 전쟁을 하다시피 하고 있는 겁니다." 〈계속>

2008-12-04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29] 정주영-정인영 '형제의 싸움'

현대건설이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태풍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필리핀 해역을 거쳐 걸프만까지 1억 달러가 넘는 대형 재킷들을 19번이나 바지선으로 운반하는 대모험을 시도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만큼 주 공사인 주베일의 산업항 신항 건설이 규모에서나 내용면에서 대형 재킷들을 바지선으로 운반했다는 전무후무한 뉴스까지 덮을 정도로 엄청났던 것이다. 77년 3월의 사우디아라비아 '라스 알가르' 항만과 77년 6월의 쿠웨이트 '슈아이바' 항만 규모 면에서 다소 작긴 하지만 78년 1월의 '두바이 발전소' 수주까지 중동지역의 대형 공사를 연거푸 따내게 되는 것도 현대건설이 세계적인 선진 건설사들을 제치고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75년 중동에 진출한 이후 79년까지 현대건설이라는 하나의 회사가 무려 51억6400만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었던 것도 성공적인 주베일 산업항 수주로 기업의 브랜드를 높이지 못했다면 살벌하기까지 하다는 중동 시장에서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음은 고(故) 정주영 회장의 회고. "주베일이 사우디 동부 쪽 유전지대 아니에요? 거기에 산업항을 건설하겠다고 한 거는 주베일 지역에서 나오는 원유 수송하고 그 지역 산업시설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원유 수송 때문만이 아니고 갖가지 산업을 발전시켜야겠다는 주베일의 야심이 담겨 있는 거라서 단순히 항만 공사로만 생각할 게 아니다 그거지. 거대한 산업도시를 건설하는 셈이에요. 그래가지고 사우디 항만청에서 발주를 했거든? 그게 입찰은 76년 2월에 했는데 우리가 발주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건 불과 7개월 전이었단 말이야. 75년 7월께 알았으니까. 그러니 생각해 봐요 세계적인 공사라고 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7개월 정도밖에 안 남은 시간을 가지고 덤벼들었으니 얼마나 정신없이 뛰어다녔겠어. 뛰어다니기만 해서 되는 일이라면 막 달리지 하하항." -시간적으로 촉박했다는 것 외에도 어려움이 많았다는 말씀입니까?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 당시 우리 건설이라는 건 그런 엄청난 항만공사를 해 본 적도 없지만 끼어들 자격조차도 안 된 거예요. 현대가 그때 바레인에서 아랍수리조선소를 건설하고 사우디에서 해군기지 확장공사도 하고 있었지만 우리까지도 산업항 공사에는 아예 입찰 초청 대상에 끼지도 못했던 거지. 그럴 정도로 인지도나 평가가 낮았던 거야. 그뿐 아니고 어떡하든 초청을 받는다 해도 막상 입찰하려면 보증이 또 있어야 해요. 근데 대한민국 정부가 보증을 한다고 해도 안 된다고 했어. 대한민국도 믿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나머진 말할 것도 없잖아요. 하나에서 열까지 안 된다는 것뿐이고 전부 우리 힘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길이 없으니까 정말 힘들었어요. 내가 해외공사를 한없이 했는데 주베일 공사만큼 사력을 다하고 애를 먹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 공사 자체 때문이 아니고. 저걸(산업항) 먹긴 먹어야 되겠는데 처음에는 도무지 뚫을 구멍이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런데 결국 우리가 수주했거든? 참 엄청난 도전을 한 거야 하하항. 그걸 모르고 회사 안에서는 사장부터 될 일이 아니라고 어떡하든 일심동체가 돼서 덤벼들어도 시원찮을 텐데 자꾸 회사 망한다는 소리만 하고. 그땐 전부 그러지 않았어? 시원찮은 것들이 말이야." 정주영 회장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비록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그때 일이 잊히지 않는지 불편했던 심정을 몇 번씩 되풀이했다. 사실 그 당시 사장은 정인영 전 한라그룹 회장이었지만 그는 공사 규모에서나 경험과 공법에서나 현대건설이 도전을 하는 그 자체가 회사의 사망 선고라면서 끝까지 반대했다. 실제로 76년 그 시점의 현대건설이 산업항을 수주하려면 경쟁력이 떨어지는 만큼 덤핑이 불가피하고 결과적으로는 회사 문을 닫게 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 보니 정작 사우디로 날아가 정보를 입수하고 수주활동을 했던 전갑원 전 부사장이나 김광명 전 사장 같은 중역들은 정주영 회장과 정인영 사장 사이에 끼여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여간 갈등하고 고생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솔직히 정주영 회장님하고 정인영 회장님(당시 사장)이 산업항 입찰 문제를 놓고 매일 회의하고 전략 짜고 지금 생각하면 TF팀인데 입찰 초청을 받으려고 사무실까지 만들어놓고 정신없이 덤벼들었는데 그때부터 두 양반은 이미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수주를 해야 한다는 건 정주영 회장님이고 하면 안 된다는 게 정인영 회장님이었으니까 사이가 좋을 리 없죠. 회장님이 회의를 주재하실 땐 정 사장님이 침묵하고 정 사장님이 회의하면 '현대 망하는 거 보려고 그래?' 이러면서 짜증내시고. 그런데 사실은 수주를 하고 나서도 열 명한테 물어보면 아홉 명은 현대건설 망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정인영 사장님도 아주 잘못 본 시각은 아니었지요. 하여간 발주정보를 듣고 현장답사를 갔는데 그때 김광명 이사(후 현대건설 사장)하고 같이 갔어요. 나는 바레인 수리조선소를 따고서 진급이 상당히 빨랐어요. 그때 내가 상무였을 겁니다. 좌우간 사우디에 나가 있는데 정인영 사장께서 부르시는 겁니다. 나는 수첩에 메모를 하니까 지금 얘기 그대로예요. 당장 귀국하라는 거지요."(전갑원) -정인영 회장이 직접 호출한 겁니까? "그분이 그때 사장님이지만 실질적으로 명예회장님 못지않게 회사에서는 카리스마도 있고 거의 모든 걸 결정하셨던 분 아닙니까. 그러니 일단 귀국을 해야죠. 귀국보고를 하니까 참 무섭게 쳐다봐요. '네가 회사 망쳐 놓으려고 그 짓 하고 있어?' 긴 말씀도 없어요. 그래서 자료를 쭈욱 펼쳐 놓고 설명을 드렸지요. 이 산업항만 따내면 35% 수익은 충분히 된다고 말이죠. '네가 뭘 근거로 해서 그런 장담을 하는 거야. 네가 언제 사우디에 가서 일을 해 봤어? 입찰이고 뭐고 당장 집어치우고 정리해서 들어와!' 반대가 굉장히 심했어요. 그렇지만 명예회장님 명령으로 나가 있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들어옵니까. 일단 알겠습니다 해 놓고는 다시 출국해서 그땐 싼 데만 골라 다녔으니까 삼류호텔에 있는데 텔렉스가 계속 들어와요. 정인영 사장님 명의로 몇 장씩 날아드는 거지요. 절대 입찰하지 말고 돌아오라고 말이지. 근데 정주영 회장님은 입찰 붙어서 따낼 때까지 돌아오지 말라고 그러시고."(전갑원)〈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8-11-13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28] 주베일 항만공사로 중동신화 시작

-정 회장님과 오랫동안 여러 프로젝트를 해 오셨는데 인간적으로 특이한 분이라고 느낀 일화가 있으면 한 가지만 소개해 주시지요. "다른 건 모르겠고 내가 서산에 모시고 다닐 때인데 참 놀라운 것은 흔히 우리가 손님을 모시고 가게에 갈 경우 현금이 없으면 10만원짜리 수표 하나 내잖아요? 그러면 거스름돈을 받고 그냥 주머니에 넣는다고요. 손님 모시고 있으면서 돈을 세어 보기는 어렵잖아요. 그런데 명예회장님은 꼭 세어 봅니다. 그 정도로 철저해요. 엄청난 대기업 총수지만 지방에 가면 아무 곰탕집이나 들어가서 곰탕을 드세요. 지나다가 기사식당에 가서도 잡숴요.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하시는 법이 없어요. 그런 건 특히 배울 점이에요. 그래서 회장님을 따라간다? 잘 얻어먹겠구나 생각하면 말짱 헛거고 그림의 떡이지 하하하." 현대건설의 부흥기라고 한다면 단연 중동 진출 시점을 꼽을 것이고 그중에서도 주베일 항만공사를 수주했을 때가 절정이었다는 것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1976년에 발주한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결과적으로 현대그룹의 급성장을 견인한 동시에 내부적으로 보면 정씨 형제가 분가를 함으로써 한국의 건설시장이 새로운 경쟁구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근로자 해외 파견에서 첫 대형 스트라이크를 경험하면서 노무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배운 것도 비록 오점을 남긴 기록의 역사가 되기도 했지만 길게 보면 좋은 수확이 되는 셈이었다. 주베일 항만공사 수주는 무엇보다 국가적으로 오일쇼크와 외환 위기에서 탈출하는 기회가 됐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는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정주영 회장은 주베일 산업항 프로젝트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에 담아두고 있지는 않았지만 수주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총체적인 문제점이 보였고 그게 도전정신 결여였다면서 당시를 정리했다. "주베일 항만공사? 그거 우리 (현대건설)내부에서는 전부 반대했어.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어떻게 하든 극복하는 저력이 있고 요령도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도전 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아주 주춤거리고 두려워해. 사장부터 전부 그랬어. 해 보지도 않고 말이야. 기업을 해 보면 말이지 영원한 1등도 없고 영원한 불황도 없다는 말을 수차례 하게 되는데 그건 반드시 도전을 하고 시련을 경험해야 느낄 수 있는 거예요. 가령 1차든 2차든 오일쇼크 이후를 한번 보세요. 거기서 우리가 많은 걸 배워야 돼요. 영원한 불황이 없다는 것도 거기서 답이 나와요. 전 세계가 에너지를 절약하고 대체에너지를 개발해야 한다고 온통 소동을 벌이다시피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석유 의존도를 줄이는 노력을 아주 열심히 했지요. 그런데 오펙(OPEC)회원국들은 고유가 시대가 왔다고 유전개발을 더 열심히 했어요. 말하자면 석유수출국기구가 산유량을 막 늘렸다 그거지요. 그렇게 되니까 한쪽에서는 대체에너지다 절약이다 열심히 노력하는데 한쪽에서는 열심히 퍼내니 이게 어떻게 되겠어요. 공급과잉 상태가 되는 거야. 간단히 말하면 그런 구조가 된 거야. 그러니 세계 석유시장이 구매자 시장으로 바뀌게 되고 기존의 유가 구조가 붕괴하는 단계까지 가는 거지요. 그니까 오펙이 영원한 황제도 아니고 비산유국이라고 영원히 불황에서 허덕거리는 게 아니다 그 말이야. 감히 비산유국이 어떻게 오펙에 도전한다는 생각을 해요. 근데 도전하니까 20달러 이하로 막 떨어지던 때가 있었잖아요. 결국 뭐냐 사우디에서 우리가 주베일 항만공사를 먹어야 한다고 했던 것도 그런 걸 내다봤기 때문에 모든 노력을 쏟았던 거야." 훗날의 기록이 보여주고 있듯이 현대건설이 급성장의 그래프를 보여주는 것은 모두 위기를 극복하고 도전으로 얻은 성취였다. 태국 진출에서는 다소 손해를 봤지만 결과적으로는 고속도로 공사에 대한 국제 규정이라는 것을 터득해 경부고속도로 성공으로 이어졌고 조선 산업에 뛰어든 후 중동으로 진출할 때는 그야말로 위기와 맞붙은 최대의 결단이었다. 아끼던 동생 정인영 회장(전 한라그룹)과 갈라서게 되는 것도 주베일 항만공사를 놓고 도전이냐 위기냐에 대한 선택의 마찰 때문이었지만 결국은 도전으로 그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이면서 현대는 급성장의 돌파구를 열었던 것이다. 이른바 중동신화의 서막을 열었다고 했던 주베일 항만공사는 공사금액만으로도 당시 우리나라 예산액의 25%에 달하는 9억3114만 달러로 '20세기 최대의 역사'라고 했던 프로젝트였다. 물론 수주에 성공한 이후 철 구조물 재킷 하나에 1억 달러가 넘고 모든 기자재와 콘크리트 슬래브를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해 가져가지 않으면 공기단축을 포함해 수익을 낼 수 없다는 현실 문제에 직면하자 급기야 필리핀 해양을 지나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으로 운반하는 '정주영 결단'을 만들어낸 것도 건설사에 남아 있는 놀라운 도전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런 모든 것이 '주베일 항만공사'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정주영)그때 산업항 주 공사만 10억 달러에 가까운 세계적인 공사였고 모든 건설사가 현대가 해낼 수 있겠느냐고 주시했어요. 재킷 하나가 1억 달러라서 화제가 된 게 아니고 그걸 우리 중공업에서 제작했는데 울산에서 주베일까지 배로 끌고 가면서 보험을 한 푼도 들지 말라고 했거든? 그게 화제가 됐던 거예요. 보험에 들면 보험을 믿고 정신상태가 해이해지고 긴장을 풀 거란 말이야. 그냥 떠나라고 소리를 질렀지 하하항. 그게 성공을 했는데 결국은 정신을 어떻게 가지느냐에서 모든 사업의 성패가 갈린다는 것을 일깨워주려고 그랬던 거지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8-11-06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27] '강남 구간 공사 고위층 때문에 지연'

박정희 대통령의 현장 독려나 관심은 철저하고 절대적이었다. 공화당 시절 박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김용태 전 장관에 의하면 대통령은 침실 머리맡에 공사 진척 상황표를 붙여놓고 매일 전화를 하거나 직접 현장을 둘려보며 점검한 결과를 그 상황표에 표시했다고 한다. 그만큼 경제개발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넣겠다는 각오였다는 얘기다. 양봉웅 회장이 전하는 에피소드는 당시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번은 평택에서 공사를 하는데 대통령이 순시를 오셨다가 안산까지 내려가셨어요. 그때 안산경찰서장이 하는 말이 자기가 경찰 생활 삼십 몇 년을 했대요. 그런데 오늘처럼 혼나 본 적이 없다 이거예요. 오실 때는 예고 없이 오셨지만 갈 때는 안내를 해 드렸는데 현장에서는 작업차 위주잖아요? 작업차가 달려오면 소장 차든 중역 차든 옆으로 다 피해 주고 우리 명예회장님이 오셔도 작업차가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런데 트럭 운전사들이 대통령 차인지 어찌 압니까? 대통령 지프가 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오니까 서장으로서는 굉장히 당황하지요. 다급히 덤프 앞으로 뛰어나가 옆으로 비켜서 서행하라고 수신호를 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트럭 운전사들이 오히려 웬 미친 놈이 길을 막느냐고 삿대질을 하고 더 험악하게 몰아대더라는 거죠. 그러니 서장이 어땠겠어요. 근데 그걸 보고 박 대통령 차가 옆으로 피해 주고 덤프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주면서 더 흐뭇해 하시더라는 겁니다. 돌멩이들은 마구 날아오는데. 그만큼 대통령께서 관심을 보이니 공사가 제대로 안 될 리가 있습니까? 서장으로서는 혼이 났겠지만 하하." 물론 박 대통령의 경제 살리기가 고속도로 건설로서만 조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궁금해지는 것은 국가 경영자가 아닌 정주영 회장의 경우다. 박 대통령의 간곡한 당부가 아니었어도 '주판을 엎어놓고 한다'고 했을 정도로 고속도로에 전사적으로 덤볐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그랬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는 게 정 회장 측근들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기업인으로서 산업의 발전을 위해 절대 필요하다는 소신이 확고하고 사명의식이 동하면 고속도로 건설뿐 아니라 어떤 일이라도 주판을 엎어놓고 그야말로 불도저처럼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비화지만 92년 대선에 출마한 것도 국가 경제를 위해서였다고 했다. 핏줄이라는 핏줄은 모두 반대를 하고 특히 지근에서 끝까지 정 회장을 지켰던 형제들까지 반대할 때도 "반대하려고 왔으면 돌아가라"고 했을 만큼 고집을 꺾지 않았다. 대선 그 무렵에 정 회장이 했던 말이 있다. 다소 격정적으로 거침없는 내용들을 토해 냈지만 그 속에는 기업인으로서 경제를 우려하는 심각한 심정이 녹아 있다고 느껴졌다. "내가 김동조 장관(전 외무부 장관)을 만나서 들어봤어. 나하고 사돈 아니야? 원로 정치인들도 만나고 여러 분야 전문가들도 만나서 들어봤는데 정부가 해야 할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경제를 생각해 보면 '외교경제'가 전혀 안 되고 있는 거예요. 외교경제도 예를 들어서 말하는 거지만 정부가 볼 때 경제성장이 이대로는 지속성장이 어렵다는 단계에 왔고 내수만 가지고는 더 이상 한계가 있다는 판단이 섰단 말이야. 그러면 두 가지예요. 무엇보다 기업하기 좋게 과감한 정책이 뒷받침되도록 정치를 잘해야 되고 세계를 무대로 외교경제를 하지 않으면 볼륨이 클 수가 없어. 그건 뭐 선진국이 된 나라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소련도 가고 중국도 가고 북한도 가면서 나라를 안정시키고 기업을 잘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어. 근데 기업하는 사람 힘으로 될 일은 한계가 있는 거야. 그런 얘기를 공산권 다녀와서 무수히 했어. 안 돼. 못 알아듣는지 모르는지 꼼짝도 안 해. 정책도 안 바뀌고 법도 안 고쳐지고. 내가 돈을 엄청나게 벌었는데 엄청나게 정치하는 것들한테 바쳤어. 노태우한테만 200억원을 줬어. 국회의원들한테는 얼마가 갔는지 기억에 담아두지도 않았지만 그렇게나 주면서 돈이 없어서 못하는 일이라면 내가 뒷받침해 줄 테니 정책 제대로 세우고 정치를 좀 잘해 달라고 신신 부탁했단 말이야. 기업인이 아무리 잘해도 한계가 있고 정치가 뒷받침을 안 하고 잘못하면 경제가 일어설 수가 없게 돼 있다 기업을 키우기가 정말 어려운 지경이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지 기업가들 다 데리고 나갈 테니 얘기 좀 듣고 정말 좀 잘해 달라 수십 번도 더 부탁했어. 근데 이 자식들이 한 일이 뭐야. 이래서는 나라가 안 돼. 나는 돈 안 먹고 깨끗한 정치 해서 이 나라를 확 고치고 기업 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 자신이 있단 말이야. 이번에 총선(14대 국회) 출마한 사람들한테 어디 가서 손 내밀지 말라고 전부 2억6000만원씩 줬어요." 정 회장은 기업을 못할 정도로 썩어서 출마를 결심했다 했고 창당 4개월 만에 지역구 26명과 전국구를 합해 30명을 당선시켰지만 본인의 얘기대로 대선 출마를 결심했을 때는 기업가의 사명감이 아니었다면 도전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봉웅 회장이 남기는 인상적인 기록들이 어쩌면 2000년대와 70년대 정치적인 분위기를 비교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제3한강교를 끝으로 경부고속도로는 완전 개통됐지만 이 무렵의 각료나 정치인들은 사심을 버렸던 것 같다고 했다. -제3한강교는 처음부터 공사를 하기로 계획에 잡혔다가 중단되고 가장 늦게 시공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연결되지 않으면 말 그대로 '경부고속'이 안 되는데 왜 공사를 중단했습니까? 항간에 떠돌았던 고위층 부동산과 관계가 있었습니까? "사실 고위층 때문에 중단됐죠. 중단이 아니라 공사 뒷순위가 된 거지요. 그 당시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는데 그때 장기영씨가 부총리였습니다. 그분이 강남에 땅이 상당히 있었고 마침 3차 공사를 해야 하는 그 지역에 장 부총리의 땅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3차 공사로 강남이 개발되고 땅값이 폭등하면 오해를 받을 것 아닙니까? 그래가지고 당초엔 강남부터 밀고 나가려 했는데 오해 받기 싫다고 자기가 공직에 있는 동안에는 안 한다 그 바람에 계획을 미룬 셈이지요. 노선은 누구 땅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대통령하고 정 회장님이 사실상 확정했던 거니까 부총리는 전혀 몰랐거든요. 그래도 오해가 있을 수 있다고 미뤄놨다가 수원~오산 간 도로를 완공해 나가면서 맨 나중에 제3한강교도 완공했어요. 한강교가 완공이 안 되면 고속도로 개통이 안 되잖습니까." 장 부총리는 공직에 있는 동안 주변 정리를 누구보다 깨끗이 하려 했고 특히 기자 경영인으로서도 기인에 가까운 행적을 남겼지만 5.16 직후 박정희 의장의 경제 가정교사로서 조언을 하면서부터는 대범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청탁과 부동산을 멀리했던 일화가 있기도 하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8-10-30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26] '공기 꼭 맞춘다' 청와대에 큰소리

단양에서 옥천까지는 무려 190여km에 이른다. 특정인을 치켜세우는 것이 아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니까 포장된 길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비포장 190여km를 달려 단양에서 공사현장까지 육로수송을 하도록 했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강시멘트로 효과는 나타났습니까? "12시간 만에 발파하고 진척이 빨라진 거지요. 나 역시 조마조마했던 건 사실이지만 낙반사고 한 번 없이 해낸 겁니다. 조강을 치지 않았으면 절대 공기 내에 할 수도 없었고 개통식을 연기해야만 했을 겁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 터널이 안전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그때 금전적인 손해는 계산도 못해 봤어요. 하여간 그렇게 힘들고 주판까지 엎어놓고 하고 있는데 계속 건설부에서는 초조하니까 감사실장 보내고 기획실장 보내고 건설국장 보내고 전부 내려 보내서 묻는 거예요. 그 당시에 김용석씨라고 도로국장이 있었는데 찾아왔어요. '어떻게 되는 거냐 각하 스케줄 때문에 죽을 노릇이다.' 공무원들은 개통보다 솔직히 자기 목이 더 걱정이지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안전하게 끝낸다. 끝내는데 6월 30일을 D-데이로 해서 다른 공사 구간보다 단 하루라도 먼저 끝낸다. 그러니 예정 공기 안에 끝난다고 보고해라.' 그랬더니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정말이냐는 거지요. 근데 내가 어째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느냐 기업주가 주판을 엎어놓고 한다고 할 땐 안 될 게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6월 28일 새벽 1시에 끝냈으니까요. 그러니까 3일을 앞당긴 겁니다. 그래가지고 개통식이 7월 7일인데 6일 저녁에 보니까 대구에서 왜간 구간은 그때까지도 일이 덜 끝나가지고 기름 방망이 들고 야간작업 한다고 난리를 치고 있어요 하하하." -훗날이지만 정 회장께서도 사실은 초조했고 며칠씩 밤을 새웠다고 하던데 그럴 땐 중역들도 전부 같이 현장을 지킵니까? "어휴…. 누구 눈치 봐서 일하는 게 아니었어요.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명을 걸고 했다는 게 맞습니다. 경부고속도로? 즐겁게 타고 달리지만 그냥 태어난 게 아니에요. 정 회장님뿐입니까? 김영주 회장님은 아예 십장처럼 악을 쓰시면서 다그치고 그랬지요. 완전히 전쟁이었고 계급장이 다 날아갔다고 그랬을 정도로 일손을 보탰습니다. 명예회장님은 스케줄이 워낙 빡빡한 분이니까 서울 가시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도 '내가 안 보이면 이놈들이 요령 피운다'고 밤늦게까지 계시다가 올라가세요. 이건 에피소드지만 하루는 비가 왔어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우의 입고 장화 신고 다닙니다. 명예회장님은 우의를 드려도 안 입을 분이고. 그날은 서울에서 운동화를 신고 오셨는데 그 엄청난 비에 운동화가 젖어 계속 터덕거리고 다니시는 겁니다. 그러니 보기에도 안 됐잖아요? 그래서 운전수 시켜 대전 나가면 시장이 있을 테니 하나 사오라고 했어요. 발이 어찌나 큰지 최소 12문 반 이상은 돼야 합니다. 근데 대전에서 11문 반짜리는 있는데 12문 반짜리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내 돌아다니다가 결국 못 사고 그냥 왔어요. 그러니 어떡해요. 하루 종일 젖은 운동화 신고 다니시다가 나중에 올라가실 때 보니까 차 안에서 신발도 벗어 던지고 양말도 벗어 던지고 맨발로 타고 가시더라고요. 그 정도로 온몸으로 했습니다." 물론 현대건설만 전사적으로 매달린 건 아닐 것이다. 옥천에 세워진 위령탑에는 순직한 삼환기업 공구 소장 이름이 올라 있다. 그 공구 소장은 밤 10시가 넘어서 작업을 끝내고 서울에 갔다가 다음날 눈이 내리자 다시 현장으로 급히 내려오다 수원~오산 사이의 중앙분리대에서 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눈이 오면 사실상 현장은 작업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눈이 쌓이니까 가 봐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황급히 오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양 회장도 그 소장을 알고 있었다. "참 안타까웠고 인명은 재천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해가 떠오르고 낮에만 내려왔어도 불행을 면했을지 모르는데 눈이 오니까 일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현장 걱정이 돼서 내려오는 거예요. 정말 사명감이 아니면 그럴 수가 없는 거지요." 모두가 명을 걸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고속도로 공사현장에서만 77명이 순직했다. 그만큼 거대한 역사(役事)였고 몸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물론 경부고속도로를 내용적으로 봤을 때 국제시방서 규정에 맞는 완벽한 공사였던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는 시각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규정대로라면 표층을 2.5cm 중간층을 5cm로 해서 7.5cm 두께의 아스팔트 포장층을 형성하고 기층을 15cm로 해야 했지만 정부의 재정 문제로 아스팔트콘크리트 기층을 7cm 정도로 덮었으니까 국제규격에 미달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개통 후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경부고속도로는 건설비보다 보수 유지비가 더 들어간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공사현장을 수시로 방문하고 독려하지 않았습니까? "아이구 죽는 줄 알았습니다. 시공하는 도중에 박 대통령이 직접 지프를 타고 경호원도 없이 현장에 여러 번 다녀가셨는데 한번은 덤프트럭 때문에 식은땀을 흘렸어요. 현장에서는 내가 소장이지만 소장 차건 중역 차건 따질 것 없이 현장 작업차가 최우선입니다. 작업차가 오면 다 피해 줘요. 그렇게 작업차를 최우선으로 해야 공사가 빠릅니다. 그래서 작업차들은 막 달려요. 근데 대통령이 지프로 오셨다 이겁니다. 기사들이 그게 현장 차인지 뭔지 압니까? 대통령 차가 올라오는데 흙을 잔뜩 싣고 막 달려오던 덤프가 빨리 비키라고 빵빵 울려대면서 손가락질에 욕까지 막 하네? 아이구…. 숨이 콱 막히데요. 정말 식은땀이 흐릅디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자

2008-10-23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25] '이미 주판은 엎어놓고 시작한 게지'

양봉웅 전 고려산업개발 회장은 대형 교량건설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건설업계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들은 저마다 각 분야에서 특별한 노하우와 흉내 낼 수 없는 기술로 대접받는데 그는 교량공사 분야의 정상급이었다. 그러나 건설부 과장에서 현대건설 현장소장으로 스카우트되어 당장 시급한 당재터널 공사에 투입됐으면 터널공사에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 '건설쟁이'의 숙명 같은 것이었다. 훗날 정주영 회장의 4남(당시) 정몽우 회장 자살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자신의 집(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괴한에게 피습 당한 사건이 발생해 여러 가지 풍문으로 시달리기도 했지만 건설인으로서 맡은 일만큼은 몸을 혹사시킬 정도로 철저히 했던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항상 정 회장처럼 헐렁한 옷차림으로 현장에 나타나는 양 회장이 고려산업개발 재직 때 고속도로공사 시절을 회고한 내용은 그가 얼마나 혹독하게 일과 싸웠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나 같은 경우는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인데 지금도 이렇게 마른 체구입니다만 이런 체구 가지고 하루 4시간도 채 못 잤어요. 그러고도 공기를 맞췄다는 걸 생각하면 정신 '깡다구'로 버틴 거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몸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매일 현장을 독려하면서도 결재 도장 찍어야지 아무리 적은 날도 하루 사오백 개씩 도장을 찍어야 됩니다. 그것도 현장 때문에 심야에 혼자 남아서 도장 찍고. 그때 사무실 뒤에 숙소를 지어놨는데 저녁에는 사무실에 사람들이 많아 복잡합니다. 그러면 숙소에 들어가서 자다가 12시 지나면 조용하니까 그때 사무실로 나와서 밤을 새우며 결재 서류를 보지요. 그러면서 다시 현장 다 돌아다니고.현장은 24시간 떠날 수 없어요. 기능직들이 24시간 일하는데 책임자들이 얼굴을 안 보이면 됩니까. 자다가도 일어나서 현장 돌아다니고 그러는 거죠. 지금 같으면 어림없는 얘기일 겁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근로 조건이 어떻다느니 복지가 어떻다느니 심지어 가정이 직장보다 우선이다 어쩌고 하는데 기막힌 얘기입니다. 그래가지고 이 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을 해요? 세계 어느 선진국이 선진국 되기 전에 복지 따지고 근로조건 따졌습니까? 선진국은 멀었는데 최고 선진국 대우부터 요구하고 있으니 정신상태부터 글렀어요. 우리 세대에 선진국 되기는 틀린 것 같아." 양 회장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선진국은 상대적인 것이다. 한국이 선진국 된다면 다른 선진국들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상대평가를 한다면 생산성부터 이대로는 어림없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얘기다. -당재터널이 관통되지 않으면 고속도로 전체 구간 개통이 되지 않고 날짜는 잡혀 있고 정 회장께는 어떤 방법을 건의했습니까? "그것도 암반이 제대로 안 나와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과가 없으니까 건의를 드렸는데 이 상태로 가다가는 공기 내에 끝내지 못한다고 그랬죠. 암질이 나빠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말이지요. 별짓 다 해봤거든요. 그걸 명예회장님도 보셨으니까 알고 계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끝을 보려면 조강(早强)시멘트를 쓰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그랬어요. 조강시멘트를 써야지 일반시멘트 가지고는 콘크리트를 쳐봐야 마르기 전에 또 무너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도저히 공기 내에 끝낼 수가 없다고 그랬죠." 대개 일반 콘크리트는 타설을 하고 일주일 정도는 지나야 굳기 때문에 다음 단계인 발파를 하자면 물리적으로 1주일은 필요했다. 그러나 조강시멘트는 12시간 만에 발파를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시멘트의 질이 달랐다. 입자가 곱고 굽는 온도가 높아서 강도도 일반시멘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문제는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고 생산량이 제한적이라는 데 있었다. -건의를 받고 정 회장께서는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한참을 생각하시더라고요. 그때 느낌이 명예회장님도 조강시멘트로 승부를 낼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 오신 것 같아요. 근데 워낙 당재터널에서 낙반사고가 많으니까 그것도 확신이 안 서고 시멘트 가격도 장난이 아니니까 고민을 좀 하셨는데 건의를 드리니까 탁 그러시는 겁니다. '조강(시멘트)을 갖다 주면 사고 없이 공기 내에 끝낼 자신 있어?' 네가 그렇게 판단을 하느냐는 말씀이지요. 그 말씀 들으니까 그 다음엔 내가 겁이 덜컥 나고 식은땀이 솟습디다. 현장소장이 뱉은 말은 신용을 잃으면 아무것도 못하거든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개통 전에 끝내겠습니다.' '그럼 진작 얘기했어야지!' 됐다 싶었는지 웃으시더라고요. 근데 그 다음 말씀이 정말 극적이었고 나도 감동했었는데 '고속도로 시작할 때 이미 주판은 엎어놓고 한 거야. 중단할 수는 없잖아. 타산을 못 맞출 바에는 공기라도 맞춰야 되겠어. 단양시멘트 공장장 당장 불러!' 야 그때 표정이 너무 결연하고 강해요. 공장장 세워놓고 명예회장님이 직접 지시를 하는 겁니다. '현재 생산하는 시멘트는 중단하고 당장 조강시멘트 생산 체제로 돌려!' 그 소릴 듣는데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고 말이죠 그게 생명수였어요." -현대시멘트가 단양시멘트에서 상호를 바꾼 건데 난데없이 단양시멘트 공장도 비상이 걸렸겠군요. "단양에선 난리가 났지요. 생산 중단하고 조강체제로 바꿔야 하니까 오죽했겠어요? 그런데 조강시멘트를 생산하라는 것까지는 좋았죠. 생각지도 않게 공장장이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감히 명예회장님 앞에서는 누구도 다른 얘기를 못하는데 공장장이 당차게 나오더라고. '저희는 생산만 하면 됩니까?' 이 소리를 한 거예요. 공장장 말이 맞지. 명예회장님도 잠시 멍해지고 나도 멍해지고. 수송을 생각 못한 겁니다. 그래가지고 그 당시는 철도 화차를 배당 받아야 되잖아요? 그걸 알아봤더니 그게 또 안 된다 이거죠. 회장님이 성질이 났어요. '화차 배당이 안 되면 육로로 해!' 어차피 주판을 엎어놓고 시작했다 하더라도 이건 엄청난 겁니다. 돈으로는 환산을 못할 정도예요. 시멘트를 수송하는 차가 어디 놀고 있나요? 다른 공사장에 가야 할 차들이 전부 동원돼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공사장은 어떻게 됩니까? 올 스톱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 그 손해가 얼맙니까. 그런데도 육로로 하라는 거지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8-10-16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24] '도로 뚫으면 달릴 자동차 생긴다'

서빙고 중기공장 시절에 대한 이명박 전 회장과의 최신장비 도입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현대건설은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장비 구입을 서둘렀다지만 신생 건설사도 참여했었는데 그런 회사들도 장비에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되십니까? "솔직히 다른 회사들 형편까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보면 많은 회사가 쓰러지고 합병을 하고 그랬는데 장비에 신경을 쓸 형편이 됐겠어요? 그때 난다 긴다 했던 삼안산업도 합병되고 사라진 회사가 내 기억에만 두셋 되는데. 그때 솔직히 말하면 현대건설이 전체 고속도로 구간 반 정도를 했다고요. 그것도 공식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중간에 제대로 못 따라주고 하니까 우리가 기술 지원을 다 해주고 마감까지 해준 구간도 있었다고. 언양 구간도 그랬던 거 아니에요? 요즘 같으면 턱도 없는 얘기지만 박 대통령이 내려오신다는데 포장은 엉망이고 그래가지고 우리가 허겁지겁 아스팔트를 깔고 곧바로 대통령 행사 차량이 지나갈 정도로 급했으니 어떡해. 뒤에 보니까 자동차 타이어 자국이 찍혔더라고. 그러니까 그때 군 출신 장군 출신들이 건설회사를 만들어가지고 어떻게 해서 몇 개 구간을 맡았는데 그런 회사들이 되겠어요? 권력 가지고 새로 생겼던 회사들은 다 망했다고요. 그러니 그런 회사들이 장비 구입을 했을 리도 없지 뭐." -당시 분위기를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정치권 특히 야당에서는 상당한 반대를 하지 않았습니까. "야당은 그 당시 서울서 부산까지 하루에 자동차가 10대도 안 다닐 때인데 무슨 고속도로가 필요하냐 해서 반대를 했어요. 그리고 또 세계은행에서 타당성 조사를 했는데 도로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하면서도 그 돈 있으면 다른 일을 해라 그렇게 말했다고요. 우선순위가 있다는 얘기야. 이건 아마 엔지니어들은 잘 모르고 있었을 거야. 그니까 야당은 그런 리포트를 보고 더 반대를 한 거예요. 근데 내가 볼 때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거라고. 과거에는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는 논리였거든? 그걸 나는 반대로 본 거지. 잘 만들어 놓으면 필요 없던 사람도 물건을 사가잖아요. 그게 소위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논리인데 내가 볼 때 당장은 자동차가 있어야 달릴 도로가 필요한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고속도로를 잘 만들어 놓으면 달릴 자동차가 생긴다 그거지. 실제로 그렇게 해 놓으니까 자동차 공장이 생기고 산업이 발전했잖아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논리가 맞는 거야. 내가 정권적 차원에서 그때 집권당 사람들이 옳았다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산업사회 경제가 오늘날 이렇게 근대화될 수 있었던 획기적인 계기가 고속도로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고속도로 주변에도 공장들이 막 생겼으니까." 문제의 당재터널 공사는 불이 붙고 있었다. 김영주 회장의 회고처럼 건설부 장관이 '단 하루라도 개통식 날짜가 늦어지게 되면 회사 문 닫아야 돼!'라고 했을 정도로 압박감이 현장을 짓누르고 있는 상황에서 현대건설은 전사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총동원령이 내려졌고 정 회장까지 상주하다시피 했다. 당시 전 구간을 총괄적으로 감독했던 양봉웅 전 고려산업개발 회장도 당재터널 때문에 '내 침실은 현장이다'는 글을 써 붙여놓고 아예 집과 이혼했다고 실토할 정도였다. 개통 때까지 단 하루도 집에서 잠을 자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려산업개발이 훗날 현대그룹의 계열사로서 한쪽 날개 역할을 하게 되지만 양 회장은 공채가 아니라 외인부대로 날아든 인물이면서 최고의 신임을 얻었던 사람이다. 정 회장의 친인척이 아니면서도 회장까지 오르게 됐다는 것은 그만큼 정 회장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겠지만 그는 타 들어가는 속을 끄는 방법은 조속한 완공 외에 지름길 자체가 없었다고 했다. "감독과 십장의 차이가 뭐냐 십장은 현장에서 작업복에 장화 신고 시키는 일만 잘하도록 다그치면 되지만 감독은 일단 일이 끝난 다음에 고치고 뜯고 해봐야 요지부동이니까 일을 하기 전에 죄다 체크해 놓고 일을 딱 시켜야 된단 말이죠. 근데 당재터널은 뭐부터 준비를 해야 할지를 모를 정도였어요. 그때는 정태섭 부회장하고 김영주 회장님도 직접 나와서 고속도로를 감독했고 그분들이 경험도 있고 해서 미리 계획을 다 짜가지고 차질 없게 시작을 한다고 하는데도 당재만 통하지를 않는 겁니다. 그게 대전 구간인데 설계도 늦게 됐지만 69년 3월 1일에 시작해서 언제 끝났느냐 고속도로 개통 직전에 끝냈어요. 그러니 얼마나 초조하고 염려가 됐겠어요. 서울~오산 구간도 끝났고 오산~대전도 끝났고 대구~부산도 끝났는데 단지 중간에 낀 대전~대구만 남았단 말이죠. 명예회장님(정주영)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장소장들도 자꾸 늦어지니까 초조해지는 건 말로 다 못하죠. 조속한 완공은 고사하고 작업한다는 게 겁이 나요. 건설부에서는 매일 언제 끝나느냐고 아우성입니다. 좌우간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데 터널 공사에서는 암(岩)이 나와야지 흙이 나오면 아주 고생하잖아요. 당재에서는 흙이 나오고 어쩌다 암이 나와도 그게 시쳇말로 물렁뼈다 그거예요. 그러니 자꾸 낙반을 하게 되고 환장할 노릇이죠. 진척이 안 돼요." -건설부의 아우성이라는 것이 박 대통령의 관심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야 말할 필요도 없죠. 고속도로 만드는 돈이면 철도를 두 개 놓겠다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으니까 '모르면 잠자코 있으라고! 철도를 이용하면 공장에서 역까지 운반해야 하고 역에서 다시 수요지까지 운반하자면 이중 삼중으로 실었다 내렸다 하는데 그 불편과 시간은 생각 안 하느냐고 도로로 운반하면 공장에서 바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을 왜 안 하느냐고' 막 호통을 쳤던 어른이니까 고속도로에 대한 기대는 대단하신 거죠." -그런데도 터널 때문에 개통에 차질이 예상되니 어떻게 했습니까. "환장하겠두만요. 결국은 명예회장님한테 건의했어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8-10-09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22] '1분1초가 아까워 소변 바지에 지려'

68년 8월 19일 착공할 때만 해도 옥천구간을 제외한 대전공구는 대림산업 아주토건 삼부토건이 시공에 참여했지만 2년도 안 돼 현대가 달라붙은 당재터널을 보고는 아예 그들 3사는 녹다운 되다시피 하고 육군 1202건설공병단까지 동원됐지만 난공사를 당해 낼 재간이 없었던 셈이다. 현대도 숙명이다 하고 덤볐지만 현장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소장까지 퍽퍽 나가떨어질 정도였다는 것이 김영주 당시 부사장의 회고였다. "그때 이한림 장관이 명령을 내려가지고 대한민국의 건설국장이라는 국장은 다 모였습니다.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각도에 있는 국장들 건설업체 이사급들 전부 다 모였어요. 그만큼 개통일자를 맞추려니까 피가 마르고 다급했고 어려운 공사였다는 얘기지요. 하여간 한 달 정도 남았는데 우리 직원 중에 성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시피 했어요. 말단은 말할 것도 없고 소장이 맥을 못 춰요. 원체 피로가 겹치니까. 말단들도 다 대학 출신이고 최고학부 나온 귀한 자식들인데 그냥 쓰러져요. 도저히 안 돼서 목욕탕에 집어넣고 몸 좀 풀라고 하니까 첨에는 옷을 못 벗어요. 창피하다고. '이 자식들아 다 똑같아!' 소리를 지르니까 옷을 벗는데 보니 차마 눈뜨고는 못 보겠어. 옷 색깔하고 몸뚱이 색깔이 땀으로 더러워져서 악취까지 풍기고 똑같아. 발가락이 다 붙었어요. 신을 벗을 새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땀이 나도 작업화를 벗을 새가 없으니까 발가락 사이가 다 붙은 거예요." -그렇게나 상황이 다급했군요. "당재터널 공사가 그랬어요. 물론 다른 구간도 여유는 다 없었고 건설쟁이들 생활이 그때는 그럴 정도였어요. 콘크리트 쏟아 붓고 단 1초가 아까웠으니까. 운전수가 소변을 못 보고 바지에 싸고 그랬어요. 공구소장이 퍽퍽 나자빠졌다면 말 다한 거 아닙니까. 워낙 죽게 생겨서 대전에 사람을 보내가지고 의사를 데려오고 주사를 맞으라니까 나 혼자만 어떻게 맞느냐고 소장이 도망가요. 그걸 호통 쳐서 링겔(링거)을 맞히는데 사무실에서는 못 맞겠다고 그래요. 구석방에 집어넣고 주사를 꽂으니까 1분도 안 돼서 쓰러져 잡디다. 원체 피로해서 그랬겠지만 구석방에서 맞겠다는 것도 이유가 있었어요. 명색이 소장이고 이사인데 몸을 봤더니 때가 더덕더덕 붙었어. 먼지가 꽉 차 있는 터널 속에서 24시간 왔다 갔다 했으니 오죽했겠어요?" 당시만 해도 박 대통령의 최대 치적으로 추진된 프로젝트였고 일부에서는 차기 선거를 앞둔 선거용 공사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2차 5개년 계획의 성공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정치성을 떠나 고속도로 건설은 사실상 경제의 생명선이라는 데 이견을 달 수가 없었다. 세계적인 경제 분석 전문 기관들도 같은 견해였고 66년에 경제기획원이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한국의 교통조사를 의뢰했을 때 IBRD 조사단이 내한해 조사한 조사보고서(66년 6월)를 보면 '물동량에 비해 도로의 시설용량은 턱없이 부족하다. 현대적 도로 개발 없이는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정주영 회장은 정치적 논쟁에 휘말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공사는 막판까지 왔고 현대건설의 조직을 확대하면서까지 고속도로 공사에 모든 것을 쏟아 넣는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68년 말 주주총회에서 이미 조직 확대를 선언하고 69년 1월부로 자신이 회장으로 정인영 부사장을 사장으로 이춘림을 건축담당 부사장 정순영을 관리담당 부사장 김영주를 중기담당 부사장으로 승진시키면서 대대적으로 조직개편을 단행했고 김준식과 이명박을 비롯한 새로운 이사 승진은 준공식을 앞둔 70년 4월에 단행하는 것이다. 물론 이 시점에서 정 회장은 특별한 안목을 보이기도 했다. 고속도로 공사가 시작되고 인천항 증설과 각 지역의 댐 공사 등이 계속되고 도로포장과 건설경기 활성화가 예견되자 70년 1월 단양시멘트를 현대시멘트주식회사로 분리해 독립시키고 정순영 부사장을 사장으로 만들어 내보내는 것이다. 시멘트 생산량이 수요에 비해 불필요할 정도로 많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도 오히려 증산해야 한다고 그렇게 했다. 결과는 갈수록 시멘트 수요가 늘었고 심할 때는 웃돈을 주고도 구입하지 못할 만큼 절대량이 부족해 결국 정부의 당초 예측이 빗나간 셈이 됐다. 당재터널도 시멘트공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 예정된 공기를 맞추지 못했을 거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또 하나가 중장비기계공장의 대대적인 증설이었다. 이것이 훗날 현대중공업의 중장비 제작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정 회장은 원효로에 있던 중기공장을 서빙고로 확장해 옮기고 그때부터 새로운 장비들을 대거 도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때 장비 도입이 바로 이명박 이사의 역할이었다. 태국 현장에서 막 돌아왔을 때는 과장이었지만 쾌속승진을 하면서 불과 몇 달 사이에 부장을 거쳐 이사로 만들어 놓고는 현대건설 자산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입해 장비를 구입하라고 특명을 내린 것이다. 이명박 전 회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너무 엄청난 일을 맡으니까 오히려 웃음이 나더라고 했다. "어마어마한 거야. 최신 장비를 그 당시 현대건설만 500만 달러어치를 수입했으니까 현대건설 총 자산이 500만 달러가 안 될 때라는 걸 생각해 보세요. 그 장비가 얼마나 되겠는지. 그걸 내가 맡아가지고 수입을 해서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 사방에 깔아놓는 건데 그때는 잠도 못 자는 거고 그걸 나보고 하라니까 기가 콱 차고 웃음이 나더라고요 그냥 허허헝. 그럴 거 아니에요. 그게 한두 푼짜리도 아니고 최신식인데. 그런데다가 만의 하나 잘못 구입된 장비가 고속도로 현장에 투입돼서 말썽이라도 생겨 보세요 그 후에 닥칠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요. 식은땀이 나는 거지. 그전에는 장비라는 게 미8군에서 불하 받은 걸 썼는데 소위 말하면 최신 유압식이라는 거. 그러니 명령을 받았으니까 하긴 하는데 기가 막히는 거지요." -그 엄청난 일을 다른 중역도 많이 있고 장비기술자들도 있었을 텐데 왜 회장님한테 맡겼을까요? "그건 정주영 회장한테 물어봐야지 뭐 정 회장 만나거든 한번 물어봐 허허헝."〈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8-09-25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21] '날짜 못 맞추면 회사 문 닫을줄 알아!'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하면서 사실상 시공업체인 현대건설이 막판에 가장 고통을 느낀 것은 장비 때문도 인력 때문도 아니었다. 정부의 협박으로 반쯤 죽었다고 했다. 정해 놓은 개통일자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가적 물류 인프라 공사라고는 했지만 건국 후 최대의 고속도로 개통식이 될 것인 만큼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다는 것이었고 청와대로부터 확정일자를 받게 되면 하늘이 두 쪽 나도 변경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김영주 회장의 얘기다. "문제는 경부고속도로 전체를 수원공구 천안공구 영천공구 등 7개 구간으로 나눠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건설업체 16개가 덤벼들었는데 맨 마지막 언양공구는 어느 업체라고 할 건 없지만 결국 중간에 나자빠지다시피 해서 현대건설이 마무리를 짓느라고 고생했어요. 그보다 더 절박했던 곳이 대전공구 중에 옥천구간에 있는 당재터널이 제일 난코스였단 말이죠. 거기만 뚫으면 경부고속도로는 다 끝났다고 할 정도로 힘들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어요. 근데 대전공구가 얼마나 힘들었느냐 한마디로 전체 공구 중에 제일 길고 경부고속도로에 대형 다리(長大橋)가 전부 32개인데 그중 최고 높고 긴 장대교 6개가 대전공구에 들어 있어요. 장대교 전체 길이를 합치면 8km가 조금 넘는데 우리가 건설한 다리 길이만 1480m예요. 그러니까 현대가 공사비는 km당 똑같이 받으면서 완전히 대박이 아니라 피박을 썼다고 했을 정도예요. 다들 그렇게 말했다고요. 전체 토공량(土工量)을 100으로 볼 때 37%를 우리 현대가 해야 했다면 말 다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 중장비들을 거의 집결시키고 인력도 대부분 옥천에 투입할 정도로 전부가 매달린 겁니다. 그럴 정도로 난코스고 현장 조건이 안 좋아요." -대전공구가 영천공구보다 더 길었습니까? "더 길지요. 영천공구에 비해 1㎞ 정도 더 깁니다. 좌우간 청원군 옥산면에서 옥천군 청성면까지 74.4km가 대전공구인데 거길 지역 연고가 있는 동아건설에 안 맡기고 현대에 맡긴 이유를 나중에 보니까 알겠어. 최고로 험준한 지역이고 우리처럼 태국 같은 열악한 조건에서 고속도로 공사를 해 보지 않은 동아건설 가지고는 어림없는 구간이에요. 풍부한 경험도 중요했지만 잘라내야 하는 바위 덩어리만 해도 보고를 받아 보니까 254만㎡가 넘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중에 상하행선을 합쳐 1120m나 되는 문제의 당재터널이 이게 또 짝짝이 터널입니다. 상행선과 하행선의 터널 길이가 달라요. 터널이 휘어 있는데 60m나 차이가 납니다. 상행선 터널이 더 긴 겁니다. 터널 길이가 다르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터널을 빠져나오면 바로 강이니까 연결되는 대교가 또 '장애 다리'가 돼요. 한쪽은 길고 한쪽은 짧고. 그런데다가 터널이 길면 길수록 돌출 악재가 많이 나타나게 마련인데 터널의 항문 쪽에 배수가 잘 안 돼요. 그럼 물이 고인다는 얘기죠. 하여간 악조건이라는 악조건은 다 갖췄고 그런 중에서도 제일 이상한 것이 대부분 터널공사를 해 보면 연한 암석에서 점차 강한 암석이 나타나거든요?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에 6개 터널이 있지만 5개 터널은 전부 연암에서 강암으로 이어져요. 당재터널만 잡석층이 나와요. 그러니까 암반의 맥이 편마암에서부터 가지각색의 암반 맥이 형성돼 있더라 그거죠. 그러니 뚫어 놓으면 무너져 내리고 뚫다가도 무너져 내리고 좌우간 뚫는 도중에 13번이나 낙반사고가 발생했으니 말이지요." -전혀 모르고 공사에 들어갔다는 말씀 아닙니까. "60년대에 뭘로 암반 측정을 합니까. 그런 장비나 기술이 있어요? 그때 전체 공구소장을 당시 이사였던 양봉웅 회장(전 고려산업개발 회장)이 맡았고 건설사무소장을 지영만 소장이 맡았나 그랬는데 전부 예정했던 공기 안에는 어림없겠다는 겁니다. 그 당시 국내에서 터널만큼은 자타가 인정했고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유명했던 이가 공영토건에 있던 이문옥씨예요. 그이도 와서 보고는 완공 예정일로 잡은 게 6월30일인데 그때까지는 턱도 없고 12월이나 돼야 가능하겠다는 겁니다. 아주 빨리 몰아대도 9월 전에는 어림없다는 거지요. 국내 최고의 터널 전문가라는 사람이 그렇게 얘기를 하니 죽을 노릇 아닙니까? 개통일자는 이미 7월 7일로 잡아놨는데 말이요. 그건 대통령이 참석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잡은 것도 아니고 청와대와 건설부가 협의해서 잡는데 한 번 결정해 놓으면 바꿀 수가 없는 걸로 돼 있단 말이죠."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는 천재지변이 아닌 한 변경이 있을 수 없겠지요. 권위도 권위지만 시간을 쪼개서 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그게 사람을 잡는 일이에요. 감히 대통령 스케줄을 건설업자가 바꾼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우리도 그걸 안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때 건설부장관이 이한림 장관인데 늦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를 받았을 것 아닙니까? 이문옥이라는 사람도 이 장관이 가 보라고 해서 왔었거든. 얼굴이 상기돼가지고 언성이 높아지는데 이 장관이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당신들 분명히 각오해. 일정 변경은 절대 있을 수가 없어. 정주영 회장도 가능하다고 해서 잡았는데 단 하루라도 개통식 날짜가 늦어지면 각하 모시고 하늘에서 헬기로 준공식을 할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 줄 알지? 너희 회사 문 닫아야 돼!' 명예회장님이 언제 가능하다고 했어요? 자기네들이 잡아 놓고. 그렇지만 막 공갈을 치고 그러니 명예회장님인들 아무리 배짱 좋고 유들유들해도 개통을 늦출 수가 있어요? 굉장히 당황했지요. 그래가지고 아예 공사현장에서 살다시피 하셨어요. 그렇게 되니까 나한테 만사 제치고 상행선 맡으라고 말이야. 하행선은 지 소장인가 이 소장인가 맡고. 그때부터 전쟁입니다." 14개 국내 기술용역업체가 실시설계를 16개 건설업체와 3개 군 공병단이 참여하고 기술지원은 미국 디루케인 인터내셔널이 했지만 1차 서울~수원 구간 완공에 이어 최종 대전~대구 구간만 완성되면 완전 개통인데 완공 한 달여를 남기고 '당재 귀신'한테 발목이 잡혔다는 것이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8-09-18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20] 'km당 1억원, 지금은 생각도 못해'

이춘림 전 회장도 성장기의 인적자산과 그들의 경험이 사실상 현대건설의 총체적인 자산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현대가 공사한 것은 주로 미8군 공사하고 미 제5공군 공사였는데 그런 공사를 통해 새로운 장비도 투입하고 그러면서 기술자들은 영어를 하게 되고 관리자는 관리능력이 늘고 그랬던 게 사실이지요. 내가 요전에 어떤 분을 만났더니 '정주영 회장은 행운아다' 그렇게 전제하고 얘기를 하던데 사업하는 사람이 운 없이 돼요? 그러나 국제화된 인력이 없었던들 그 엄청난 공사들을 소화하지 못했을 겁니다. 태국 공사도 마찬가지고. 그 전에는 국제 시방서를 해석하려면 영문과 나온 사람들을 시켜서 이렇게(15cm정도) 두꺼운 걸 며칠씩 걸려 밤새도록 번역했어요. 그런데 영문과 출신들이 번역해도 무슨 얘긴지 몰라요. 기술자가 번역한 게 아니니까. 전부 기술용어고 전문용어투성인데 그걸 봐야 무슨 얘긴지 아나. 그러니까 기술자들이 다시 하나하나 사전을 찾아가면서 그걸 공부하기 시작한 겁니다. 바로 거기서 국제화된 인력들이 배출되는 거예요. 전에 있던 사람 가지고는 도면부터 해석이 안 되니까 말이지. 가령 오산.수원.군산.대구 비행장 탄약고 여러 가지 PLO 시스템 등의 공사를 할 때마다 회사 안에 '외국공사부'라고 있었지만 거기선 자금 신청하는 일만 하고 기술자들이 전부 영어를 하면서 공사를 진행했던 겁니다. 그랬으니까 65년에 태국 월남 괌 그렇게 동시다발적으로 공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자꾸 해외공사를 넘볼 수 있었던 거지요. 그걸 인적자원 외에 다른 뭘로 설명할 겁니까." 어쨌든 태국에서의 경험은 곧바로 한국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한다고 할 때는 견적을 또 '짜게' 냈다. 태국에서 그만큼 비싼 수업료를 내고 견적이란 이런 거다 하는 걸 배우고 터득했으면 충분히 이익이 나게 견적을 뽑아 제출해야 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물론 박 대통령의 집념과 당시의 국가 재정 형편 때문에 최저가로 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문제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건설 업계에서 엉뚱하게 욕을 먹기도 했다. 현대건설의 견적가 때문에 참여했던 다른 건설업체들이 숱하게 도산했다는 것이다. 김영주 한국프랜지 명예회장은 당시 얘기를 하면서 오히려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는 얘기였다. "하하하 쓰러진 회사가 하나 둘이 아니었으니까요. 우리가 일답게 한 게 고속도로공사고 태국에서 배운 걸로 박 대통령이 고속도로를 해야 된다고 했을 때 제대로 써먹었는데 그게 또 우리로서는 욕 바가지를 얻어먹은 공사가 됐으니 말이지요 하하. 일을 해 보면 실력이 있거나 많이 아는 사람이 고생하게 돼 있다는 말이 딱 맞아. 바로 경부고속 할 때 그랬단 말이오. 그게 68년 2월에 착공을 해 70년 7월에 완공해가지고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빠른 공기에 완공했다는 기록을 세운 거지만 그걸 맡을 당시에는 공개입찰이 아니고 지금으로 보면 수의계약입니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이 우리한테 고속도로를 좀 만들어라 할 때 이미 건설비가 km당 1억원이다 하는 게 대충 책정이 됐거든요. 그렇게 되니까 공구를 쪼개서 들어온 다른 건설업자들은 현대가 1억원에 하기로 했다는데 얼마나 요구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수지가 맞지 않아서 죽어나고 공기를 맞출 수 없어서 죽어나고 그래가지고 우리한테 욕을 얼마나 퍼부어대는지 말이야 하하하. 결국 나중에는 현대가 다 맡게 되고 그때부터는 우리가 또 죽을 고생을 하는 겁니다." -고속도로를 km당 1억원에 공사했다는 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는 견적이 됐겠지요? "아마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불가능할 겁니다. 모르지 북한에서는 인력을 전부 동원해 인건비를 하나도 안 들이면 가능할지. 그렇지만 거긴 장비나 기술이 없어 국제규격으로는 어림없을 겁니다. 그게 처음에는 328km로 설계했다가 인터체인지가 들어가고 코스가 조금 변경되고 논과 논 사이를 지나 다닐 수 있게 농지 터널을 만들어주고 교량이 생기고 하면서 나중에 보니 428km가 됐던 것 아닙니까? 그걸 429억원에 했으니까 km당 1억원인데 하여간 그걸 만들자고 했던 건 그 당시 박 대통령하고 서독을 방문했던 김용태 전 장관이 제안했다고 그래요. 다음 선거에도 써먹자고 말이지. 입이 있는 사람은 다 반대했어도 밀고 가는데 그것도 처음에 건설부에서 낸 견적은 km당 7억원입니다. 박 대통령 생각으로는 꿈에서도 불가능한 돈이지요. 그 다음에 육군 공병단에서 건설부보다는 적게 써내야 미움을 안 받는다 생각하고 km당 5억원을 제시했어요. 어째서 2억씩이나 차이가 나느냐 알아보니 설계능력이 없어서 설계만 해 준다면 그렇다 그거지. 혼났지 대통령한테 하하하. 설계 능력도 없는 놈들이 견적은 어떻게 냈느냐고 말이야. 그래가지고 박 대통령이 태국 고속도로 했다는 걸 기억하시고 명예회장님을 부른 거예요. 그때 권기태 부사장이 같이 들어갔어." 경부고속도로 공사비가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대로 총 길이 428km 중 교량 281개소 터널 6개소 공기 2년 5개월 등은 숫자적 의미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장비 기술 경험 여러 가지 열악한 여건에서 많은 건설 역군이 희생됐고 그런 가운데서도 정 회장과 현대건설이 산업의 동맥이라고 불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희생에 가까운 열정과 집념을 보였던 것이 오히려 이 시점에서는 더 중요하게 부각되어야겠다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하기가 어렵겠지만 공사 도중에 희생자가 많았잖습니까. 회장(김영주)님께서 당시 총감독을 맡으셨는데 사고가 났을 때 현장 분위기라든가 인식들이 어땠습니까. "송장하고 같이 잠을 자야 됩니다. 내가 그때 상무였는데 그 무렵만 해도 계산적이거나 이기적이라는 건 참 없었다고 할 수 있고 모두가 건설역군이라는 긍지로 울면서도 극복했어요. 사람이 죽었는데 시신을 옆에 놓고 같이 술 먹고 자고 그랬습니다. 요즘이라면 그게 상상이 됩니까? 당장 공사 중단하고 사고 조사반이 달려오고 유가족들이 팔촌까지 달려와 난리가 나겠지요. 참 순수하고 열정으로 극복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고 그래서 나중에 희생자들을 기리는 충혼비를 세워주고 그랬지요. 근데 제일 난코스고 희생자가 많았던 곳이 당제터널입니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8-09-11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19] "공채로 유능한 인재 뽑길 잘했지"

태국 고속도로는 현대건설에 많은 교육을 시킨 셈이었다. 금전적으로 적자를 봤다는 것은 교육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98km의 고속도로를 공사하면서 장비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배웠고 국제 시방법이 어떻다는 것도 깨달았고 견적을 어떻게 내야 하는가를 터득한 것도 중요한 교육이었지만 무엇보다 인적자원이 얼마나 주요한 자산이 되는가를 그때 절실하게 느꼈다고 정주영 회장은 회고했다. "현장에 풀어놓으니까 그때까지 국내에서 큰소리치던 놈들이 전부 벙어리가 되는 거야. 지들이 전부 1급이고 어떤 난공사도 해낼 수 있고 감당하지 못할 공사가 없다고 큰소리쳤던 놈들이 말이야. 국제 시방서라고 미국 감독관이 턱 밑에 내미니까 하나도 몰라 하하항." -회장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그런 걸 알면 십장 하지 회장 해? 하하항. 나도 해외공사가 그때 첨이어서 그놈들 얘기를 신뢰했는데 속았지 뭐야. 그럴 정도로 모두가 부족했다는 거예요. 근데 뭐 모두가 열성적으로 덤볐고 특히 젊은 신입사원들이 아주 유능했어요. 그 두꺼운 시방서를 다 번역하고 이해했으니까 말이지. 근데 사실 태국 고속도로 공사는 우리가 감독관 그 친구 때문에 억울하게 손해를 보고 고생했다는 점이 있어요. 태국에 진출하기 전까지 1957년부터 국내에서 미군 공사를 아주 많이 했어요. 그 당시에 삼환도 있고 경향기업이라는 건설사도 있고 경일기업도 있고 그런 회사들이 주로 미군 공사만 전문으로 했는데 그쪽은 대다수가 규모가 크지 않은 건축을 했고 우리는 들어가면서부터 건축은 건축대로 하면서 비행장 활주로 격납고 이런 대규모 공사를 했거든? 그러고 그게 몇 년이야 미군에서 증강 계획(1957년 7월)이 있지 않았어요? 그게 반영구적인 군사시설을 만드는 계획인데 그걸 거의 우리 현대가 맡아서 했어요. 활주로 격납고 거기다 59년에 미 극동 공병단(KCA)이 발주한 인천 제1도크 복구공사까지. 그 많은 공사를 우리 현대가 '싹쓸이'했다고 할 정도로 했어. 이게 무슨 얘기냐 그런 대형공사를 할 때마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공법 그리고 미군 연방 시방서에 맞춰 공사를 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이미 국제 시방서는 경험을 하고 나가셨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래서 억울하게 당한 것도 있다는 거예요. 태국 가서 보니까 그게 경험했던 거하고 조금 다르긴 해요. 국제 시방서하고 미군이 제시했던 연방 시방서가 약간 다르다는 건 틀림없는데 따지고 보면 그것도 결국은 어떤 공사냐에 따라 규정이 조금 다르다는 것이지 근본은 같고 요는 우리가 이해를 했다 그거지. 그러고 기계도 새로 도입했고 포장도 옛날식으로 해서는 어림없다는 걸 알고 말이야. 콘크리트의 슬럼프 컨트롤이라든가 기층부 다짐 밀도라든가 그레이드 컨트롤 같은 게 엄격한 품질관리 기준이 있어요. 그걸 전부 미국 연방 규격에 맞춰서 하고 미군 감독관이 테스트를 하고 우리는 철저하게 검사를 받는단 말이에요. 그렇게 해 왔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우리가 태국 나가기 전에 기술적 노하우는 쌓였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그 많은 미군 공사를 했으면 상당한 경험과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겠죠. "근 7~8년 했으니까 사실 웬만한 공사는 다 해 본 셈이야. 예를 들어 자동차가 시속100km 140km로 달릴 때 털털 거리면 불쾌감이 나고 안 좋잖아요. 근데 거기에 비해서 비행기는 속력이 얼마야 그래서 비행장 활주로는 노면 오차가 굉장히 적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 것까지 맞추자면 콘크리트로 대형 포장을 하는데 그건 응결이 아니고 수축을 하니까 수축도 막아야 하고 콘크리트를 양생할 때는 또 갈라지거나 강도가 약해져서 그것도 약품처리를 하고 이게 하루에 몇 천 평씩 포장해 나가야 하니까 절대 경험 없이는 못하는 거지요. 그걸 우리가 미군들한테 배워가면서 다 익히고 나갔다 그거예요. 그런데도 태국에서는 애를 먹인 거야. 규정 외에 국제법이든 연방법이든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 공사를 할 때는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그 놈 감독관이 포장을 다 덮으면 무조건 뜯으라고 하니 말이야." -그런 경험이 있었으니까 뜯어라 할 때 못 뜯는다고 버텼군요. "하하항 눈에서 불이 나는데 어떻게 뜯어. 결국은 뜯었지만 나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겠더란 말이야. 물론 경험보다 소중한 스승이 없어요. 많이 배웠어요. 그러고 50년대하고 60년대 건설 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달라져 있었다는 것도 사실 인정을 해야 했고. 막상 가 보니까 벌써 건설산업이 엄청 앞서나가고 있었어. 그렇더라도 내 심정은 발주처나 감독관이 공사 전에 국제 시방서가 어떻게 달라졌고 우리가 어떤 공사를 해 왔는지 리스트도 제출했으니까 고속도로공사는 활주로 공사하고 어떤 차이가 있으니 유념해서 하라고 가르쳐줘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 것도 없이 아주 고약하게 애를 먹일 작정을 한 거야. 정말 수업료 많이 내고(손실을 많이 보았다는 뜻) 무척 고생을 했어요. 근데 내 얘기는 그때 보니까 신입사원들이 얼마나 기특한지 말이야 그 복잡하고 전문적인 시방서를 전부 번역하면서 결국은 해내더라 그거야. 그걸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이 역시 공채를 해서 유능한 인재를 참 잘 선발했다 그런 걸 많이 느낀 거예요." 정 회장은 우수한 기술력을 갖춘 이춘림 권기태 이연술 같은 인적자원이 있었다는 것이 행운이었다면서도 국제화된 인력을 양성했다는 것이 가장 큰 현대의 자산이 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실 현대건설이 60년 세월을 걸어오는 동안 건설회사이면서도 창업주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치적인 부침에 휩쓸려 건설 외적인 문제로 홍역을 앓았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는 게 희한한 노릇이지만 한편으로 보면 그런 악몽 같은 세월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유능한 인적 구성이 버팀목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계속>

200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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