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42] 50년 승승장구 현대그룹의 '핵' 됐지만···
'왕자의 난' 에 신인도 급락…2000년 10월에 끝내 부도
6년만에 워크아웃 졸업…3200억 남겨도 새 주인 못찾아
종족보존이라는 국가적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상의 하나였기도 했지만 모하메드 시절만 해도 양육강식 시대였던 만큼 전쟁이 많아 남자들은 싸움하고 미망인과 고아들이 많이 생겼다. 이슬람교의 이론으로는 전쟁 미망인을 구원해줘야 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일부다처제가 정착됐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림없는 얘기다. 가령 4명의 부인을 둔다면 똑같이 해줘야 하기 때문에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아예 허리가 고장 났다고 공공연히 얘기한다. 50대 이상에서 돈 많은 사람이 2명을 두고 있는 것도 그나마 드물다고 했다.
현대건설은 분명 주베일 산업항 공사로 살이 찌고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견이 없다. 다만 변화도 모색해야 했다. 주베일 사건으로 다른 프로젝트 수주가 어렵게 되면서 리비아 진출을 추진한 것이 그것이었다. 전갑원 부사장의 회고.
"리비아는 처음에 정인영 회장께서 추진을 했어요. 리비아 시장이 었거든요. 근데 밑에 있는 기술자들이 내용을 모르고 덤볐어요. 공사의 규모도 컸지만 특수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걸 모른 겁니다. 대수로 공사 뿐 아니라 다른 공사 대부분이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 현대건설은 사우디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단 말이죠. 그 때문에 시장을 더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고요. 그래서 사실 고민이 컸는데 한라건설에서 못하게 되니까 그럼 우리(현대)가 하자 내가 들어가서 전부 조사를 다시 하고 모든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서 리비아 진출을 결심했던 겁니다."
이춘림 전 회장은 현대건설의 급성장이 중동 진출이 시작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정주영 회장의 장기적인 안목을 무엇보다 높게 평가했다.
"가만 보면 정 회장님은 내다보시는 게 참 대단합니다. 원자력은 1호기부터 내가 건축을 했지만 진작부터 감천 삼척 영월 군산 인천발전소…. 그렇게 엄청난 공사를 하지 않았어요? 그게 본격적인 플랜트 공사라고요.
그걸 해오지 않았으면 충청댐 소양강댐 그런 다목적댐과 수력발전소도 하지 못했을 거고 주베일 공사는 엄두도 못냈을 거란 말입니다.
그때 했던 사람들이 중공업에도 가 있고 건설에도 남았고 그랬지만 어쨌든 플랜트 경험과 기술이 주베일 공사로 이어졌고 그게 현대조선(현대중공업)까지 급성장시켰다 이거죠. 물론 산업항 하나로 끝난 것도 아니지요. 주변에 2 3억 달러짜리 플랜트 공사가 상당히 많았잖아요."
현대건설은 이처럼 급성장을 하면서 현대그룹의 중심기업이 됐다.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산실이라는 점에서도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식들 중에 현대건설을 맡는 사람이 현대그룹의 총수가 될 것이라고 점쳤다.
현대건설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룹이 백화점처럼 온갖 계열사를 다 거느리고 있을 때 방만한 경영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가식과 허영을 부리지 않으면 기업은 쓰러지지 않는다'는 평소의 신념으로 밀어붙였다.
정 회장은 아무리 거대한 기업이라도 사람이 하는 만큼 기업주가 가식적인 행동과 허영을 부리지 않으면 그 기업에 투자해도 좋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그런 점에서도 '정 회장의 기업'은 정도경영을 하는 한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정 회장은 이런 얘기를 했다.
"나는 거짓말과 위선을 제일 싫어해. 그래서 평생 주례를 한 번도 안 섰어요. 나는 30대에 내 아내 아닌 다른 여자도 좋다고 생각해본 일이 있기 때문에 주례를 선다는 것은 위선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지요. 자기가 표본이 되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바탕으로 교훈이 될 수 있는 얘기를 해주어야 하는데 주례를 선다면 그건 위선이지."
정 회장의 정신은 비록 주례를 서는 문제로 얘기하고 있지만 기업가 정신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일깨우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업인은 검소한 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도 자신의 생활과 비교하면서 얘기했다.
"나는 2층이지만 옛날에 블록으로 지은 집에서 그대로 살고 있잖아요? 비만 새지 않으면 되지요. 그리고 뭐 의자도 25년 전에 구입한 건데 그대로 다 쓰고 있고. 왜냐하면 자꾸 변화하는데 그때마다 바꿀 수 있어? 가구든 뭐든 사치를 하려면 한이 없잖아요. 그리고 그 나름대로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은 오래 가지고 있는 대로 아주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는 고장이 안 났으면 쓰던 게 좋다 그렇게 생각을 하지요."
대마불사라는 말이 현대건설을 두고 한 말인 것처럼 50여 년 세월을 승승장구했지만 대선 출마 이후 200억원이 넘는 청와대 공사비를 포기하겠다고 했음에도 흔히 말하는 정치보복과 외환대란이 급습하듯 밀려들었고 거기에 이라크 공사대금 1조703억원의 미수금과 국내외 공사대금 미수금이 누적되고 급기야 부채가 5조원을 넘어서면서 현대건설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현대건설의 위기는 부채 때문만이 아니었다. 2000년 3월 14일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당시)의 경질로 촉발된 이른바 '왕자의 난'이 원흉이었다.
정몽구.몽헌 공동회장의 경영권 다툼으로 시작된 왕자의 난은 결과적으로 현대그룹 전체의 대외 신인도를 수직하강시켰고 그렇게 되자 가뜩이나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현대건설에 외국계 금융기관부터 채권 회수조치에 들어가면서 2000년 10월 끝내 부도라는 불명예를 목에 걸어야 했던 것이다.
자식들이 부친의 영광을 초라한 패장의 모습으로 추락시킨 셈이 됐다. 사회는 그렇게 평가한다.
그 후 2006년 4월 채권단의 품에서 워크아웃을 졸업한 현대건설은 2년여가 흐르는 동안 부채비율 290%(워크아웃 졸업 시점)가 되지 않는 건설사로 다시 태어났음에도 여전히 새 주인을 찾지 못해 망부석처럼 눈만 두리번거리고 있는 상태다.
3200억원이 넘는 순이익을 냈기 때문에 채권단의 품을 떠날 수 있었지만 중매쟁이도 창업주의 핏줄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기 때문인지 선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재혼의 팡파르가 언제쯤 어느 집안에서 울릴지는 아직 안개 속이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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