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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육-33] 1차 오일쇼크 '국가위기를 막아라'

'입찰 꼭 따라' 박대통령 훈령 날마다 날아와
산업항 수주계기로 한국 건설업 비약적 발전

주베일 산업항 수주를 놓고 현대건설을 돕기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은 하루하루가 전투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반드시 현대건설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특정 기업을 위해 정부가 나선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넘보기도 어려운 대형 프로젝트에 현대가 도전하고 있었기에 성공만 한다면 국가의 위기를 해소할 수도 있겠다고 보았던 것이다.

유양수 당시 주 사우디아라비아 대사도 한국 건설사들이 중동시장으로 진출한 배경이 1차 오일쇼크와 결코 무관하지 않고 고유가로 전 산업이 휘청거리다시피 하는 가운데 외화 고갈에 따른 정부의 위기와 주베일 산업항은 직결됐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부터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이명박 전 현대건설 회장도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은 국가적인 위기상황이었다고 회고 했다.

"결과론이지만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는 한국으로 보면 외환위기도 막고 국내 건설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계기가 됐죠.

1차 오일쇼크 이후 정말 옛날 얘기지만 기름값이 1달러 20센트 하던 것이 3달러 됐다가 30달러까지 올라가는 위기였으니까 대한민국 경제가 굉장히 어려웠을 때인데 어마어마한 수주를 해내면서 숨통이 트인 거예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산업항 공사 하나가 국가의 외환 위기를 막았을 정도였지요. 요즘으로 말하면 민간회사도 몇 억 달러를 갖고 있는데 우리 정부의 전체 외환 잔고가 당시 3000만 달러 정도였어요. 정부가 외환난으로 전 대사관에 돈을 빌리라고 훈령을 내리고 그랬을 때라고. 그런 위기에 처해 있었을 때 10억 달러짜리 산업항을 따내서 현대도 급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고 국가 위기도 넘기게 됐던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때 사우디 진출을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하는데 첫 번째가 현대라는 그룹을 비롯해서 한국의 건설업을 육성시켰다 외환위기도 막았지만 그때 산업항 공사 수주를 계기로 국내 건설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고요.

그 다음에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했다 3차 5개년 계획을 전부 우리 건설업자들 힘으로 했잖아요. 외국 어떤 나라도 근대화를 시작했을 때 자기네 힘으로 다 해낸 나라가 없었어요.

일본 정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일본도 건설은 미국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동남아도 다 외국인들이 들어가서 했고.

근데 우리는 초기 때만 예를 들어 당인리 발전소 불과 몇 만kW짜리 벡텔이 와서 했고 인천 도크 만들 때 미국 공병단 기술진이 와서 했지만 진짜 몇 십만kW짜리 원자력 발전소 종합제철소 이런 것을 전부 우리 힘으로 했단 말이에요.

중동 나가서 외국기술 배워온 걸로 끄떡없이 우리가 다 지었다고. 얼마든지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준 거지 허허헝."

유양수 전 장관은 중동 진출의 배경부터 짚었다. 그리고 정부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던가를 회고했다. 1차 오일쇼크 전후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사회간접시설들 형편이 어느 정도로 열악했던가에 대해서도 얘기했지만 홍순길 건설관이 첫 고비였던 입찰자격 획득을 위한 노력을 얘기할 때는 눈 밑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유 전 장관의 회고부터 들었다.

"중동 진출이 갑자기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월남 진출의 연장이라고 봐야죠. 그러니까 71~73년에 걸쳐 미국의 대 월남 정책이 바뀌면서 73년 1월에 휴전협정이 체결됩니다만 그때까지 월남에 진출한 우리 업체들 대부분이 이젠 해외 진출이 끝났다고 낙담했어요.

그 무렵 중동에 눈을 뜨기 시작한 업체들이 대림산업.삼환기업.현대건설.한일개발 등인데 그게 또 마침 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산유국들이 오일달러를 가지고 국가개발을 해야겠다는 시기와 맞았어요.

7, 8년에 걸쳐 대규모로 진출을 하게 됐는데 그때부터 사실상 우리 건설업체들이 급격히 중동시장을 확대했고 수주 물량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해냈던 거지만 어쨌든 내가 75년 9월 말에 사우디에 부임하니까 제일 먼저 훈령이 날아드는 게 박 대통령 당부 말씀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비슷한 내용인데도 매일 옵니다. '현대건설을 격려해서 꼭 입찰할 수 있도록 하시오.' 나중에 입찰해서 되고 안되고를 떠나 1단계가 입찰자격 확보니까 이건 국력 경쟁 차원에서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는 거죠.

외교 교섭에 관한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김재규 건설장관은 불이 났다고 할 정도로 다급하게 텔렉스를 칩디다. 그 양반 성격이 좀 급해요. 대통령 특명이니까 죽어도 해내야 한다 이거지요 하하."

- 대사관에 텔렉스가 없었다는건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땐 사우디가 그랬어요. 대사관에서 한참 떨어진 코트라 사무실 텔렉스를 썼는데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입니다. 우리 대사관 직원이 한 10명 됐지? 전화가 있는 집이 대사관저하고 공사 집하고 홍 건설관 집 정도? 홍 국장은 아예 전화가 있는 아파트에 들어갔기 때문에 전화도 쓴겁니다.

그 당시에는 제다에서 전화교환원을 통해 리야드를 부르면 사흘 후에 연결해주겠다고 그럽니다. 사흘 후면 그나마 잘 연결해주는 거예요. 상상이 됩니까? 사우디 통신이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니 초대 대사가 윤경도씨인데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그러던 것이 오일 달러가 막 들어오고 하니까 갑자기 76년부터 조금씩 좋아졌어요. 사우디 정부에서 외교사절이 있는 지역을 통신조차 안 되게 해놓은 건 이해하기 어렵죠.

그땐 정부가 리야드에 있었고 리야드가 아랍 반도의 한복판 사막 가운데 아닙니까? 외교단은 전부 항구 도시 제다에 몰려 있게 해놓고는 일절 다른 곳으로도 못 가게 했다고요. 83년부터 리야드로 옮겨준 겁니다.

그러니 대사가 정부 청사라도 방문하려고 하면 비행기 타고 리야드로 가야 돼요. 대형 프로젝트를 따려면 외교 노력도 이만저만이 아닌데 아주 어려웠지요." <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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