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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25] '이미 주판은 엎어놓고 시작한 게지'

당재터널 공기맞추려 비싼 조강 시멘트 사용

양봉웅 전 고려산업개발 회장은 대형 교량건설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건설업계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들은 저마다 각 분야에서 특별한 노하우와 흉내 낼 수 없는 기술로 대접받는데 그는 교량공사 분야의 정상급이었다.

그러나 건설부 과장에서 현대건설 현장소장으로 스카우트되어 당장 시급한 당재터널 공사에 투입됐으면 터널공사에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 '건설쟁이'의 숙명 같은 것이었다.

훗날 정주영 회장의 4남(당시) 정몽우 회장 자살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자신의 집(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괴한에게 피습 당한 사건이 발생해 여러 가지 풍문으로 시달리기도 했지만 건설인으로서 맡은 일만큼은 몸을 혹사시킬 정도로 철저히 했던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항상 정 회장처럼 헐렁한 옷차림으로 현장에 나타나는 양 회장이 고려산업개발 재직 때 고속도로공사 시절을 회고한 내용은 그가 얼마나 혹독하게 일과 싸웠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나 같은 경우는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인데 지금도 이렇게 마른 체구입니다만 이런 체구 가지고 하루 4시간도 채 못 잤어요. 그러고도 공기를 맞췄다는 걸 생각하면 정신 '깡다구'로 버틴 거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몸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매일 현장을 독려하면서도 결재 도장 찍어야지 아무리 적은 날도 하루 사오백 개씩 도장을 찍어야 됩니다. 그것도 현장 때문에 심야에 혼자 남아서 도장 찍고. 그때 사무실 뒤에 숙소를 지어놨는데 저녁에는 사무실에 사람들이 많아 복잡합니다.

그러면 숙소에 들어가서 자다가 12시 지나면 조용하니까 그때 사무실로 나와서 밤을 새우며 결재 서류를 보지요. 그러면서 다시 현장 다 돌아다니고.현장은 24시간 떠날 수 없어요. 기능직들이 24시간 일하는데 책임자들이 얼굴을 안 보이면 됩니까. 자다가도 일어나서 현장 돌아다니고 그러는 거죠. 지금 같으면 어림없는 얘기일 겁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근로 조건이 어떻다느니 복지가 어떻다느니 심지어 가정이 직장보다 우선이다 어쩌고 하는데 기막힌 얘기입니다. 그래가지고 이 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을 해요? 세계 어느 선진국이 선진국 되기 전에 복지 따지고 근로조건 따졌습니까?

선진국은 멀었는데 최고 선진국 대우부터 요구하고 있으니 정신상태부터 글렀어요. 우리 세대에 선진국 되기는 틀린 것 같아."

양 회장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선진국은 상대적인 것이다. 한국이 선진국 된다면 다른 선진국들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상대평가를 한다면 생산성부터 이대로는 어림없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얘기다.

-당재터널이 관통되지 않으면 고속도로 전체 구간 개통이 되지 않고 날짜는 잡혀 있고 정 회장께는 어떤 방법을 건의했습니까?

"그것도 암반이 제대로 안 나와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과가 없으니까 건의를 드렸는데 이 상태로 가다가는 공기 내에 끝내지 못한다고 그랬죠. 암질이 나빠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말이지요. 별짓 다 해봤거든요. 그걸 명예회장님도 보셨으니까 알고 계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끝을 보려면 조강(早强)시멘트를 쓰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그랬어요. 조강시멘트를 써야지 일반시멘트 가지고는 콘크리트를 쳐봐야 마르기 전에 또 무너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도저히 공기 내에 끝낼 수가 없다고 그랬죠."

대개 일반 콘크리트는 타설을 하고 일주일 정도는 지나야 굳기 때문에 다음 단계인 발파를 하자면 물리적으로 1주일은 필요했다.

그러나 조강시멘트는 12시간 만에 발파를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시멘트의 질이 달랐다. 입자가 곱고 굽는 온도가 높아서 강도도 일반시멘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문제는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고 생산량이 제한적이라는 데 있었다.

-건의를 받고 정 회장께서는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한참을 생각하시더라고요. 그때 느낌이 명예회장님도 조강시멘트로 승부를 낼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 오신 것 같아요. 근데 워낙 당재터널에서 낙반사고가 많으니까 그것도 확신이 안 서고 시멘트 가격도 장난이 아니니까 고민을 좀 하셨는데 건의를 드리니까 탁 그러시는 겁니다.

'조강(시멘트)을 갖다 주면 사고 없이 공기 내에 끝낼 자신 있어?' 네가 그렇게 판단을 하느냐는 말씀이지요. 그 말씀 들으니까 그 다음엔 내가 겁이 덜컥 나고 식은땀이 솟습디다. 현장소장이 뱉은 말은 신용을 잃으면 아무것도 못하거든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개통 전에 끝내겠습니다.'

'그럼 진작 얘기했어야지!'

됐다 싶었는지 웃으시더라고요. 근데 그 다음 말씀이 정말 극적이었고 나도 감동했었는데 '고속도로 시작할 때 이미 주판은 엎어놓고 한 거야. 중단할 수는 없잖아. 타산을 못 맞출 바에는 공기라도 맞춰야 되겠어. 단양시멘트 공장장 당장 불러!'

야 그때 표정이 너무 결연하고 강해요. 공장장 세워놓고 명예회장님이 직접 지시를 하는 겁니다.

'현재 생산하는 시멘트는 중단하고 당장 조강시멘트 생산 체제로 돌려!'

그 소릴 듣는데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고 말이죠 그게 생명수였어요."

-현대시멘트가 단양시멘트에서 상호를 바꾼 건데 난데없이 단양시멘트 공장도 비상이 걸렸겠군요.

"단양에선 난리가 났지요. 생산 중단하고 조강체제로 바꿔야 하니까 오죽했겠어요? 그런데 조강시멘트를 생산하라는 것까지는 좋았죠. 생각지도 않게 공장장이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감히 명예회장님 앞에서는 누구도 다른 얘기를 못하는데 공장장이 당차게 나오더라고. '저희는 생산만 하면 됩니까?' 이 소리를 한 거예요. 공장장 말이 맞지. 명예회장님도 잠시 멍해지고 나도 멍해지고. 수송을 생각 못한 겁니다. 그래가지고 그 당시는 철도 화차를 배당 받아야 되잖아요? 그걸 알아봤더니 그게 또 안 된다 이거죠. 회장님이 성질이 났어요.

'화차 배당이 안 되면 육로로 해!'

어차피 주판을 엎어놓고 시작했다 하더라도 이건 엄청난 겁니다. 돈으로는 환산을 못할 정도예요. 시멘트를 수송하는 차가 어디 놀고 있나요? 다른 공사장에 가야 할 차들이 전부 동원돼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공사장은 어떻게 됩니까? 올 스톱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 그 손해가 얼맙니까. 그런데도 육로로 하라는 거지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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