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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19] "공채로 유능한 인재 뽑길 잘했지"

태국 고속도로는 현대건설에 많은 교육을 시킨 셈이었다. 금전적으로 적자를 봤다는 것은 교육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98km의 고속도로를 공사하면서 장비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배웠고 국제 시방법이 어떻다는 것도 깨달았고 견적을 어떻게 내야 하는가를 터득한 것도 중요한 교육이었지만 무엇보다 인적자원이 얼마나 주요한 자산이 되는가를 그때 절실하게 느꼈다고 정주영 회장은 회고했다.

"현장에 풀어놓으니까 그때까지 국내에서 큰소리치던 놈들이 전부 벙어리가 되는 거야. 지들이 전부 1급이고 어떤 난공사도 해낼 수 있고 감당하지 못할 공사가 없다고 큰소리쳤던 놈들이 말이야. 국제 시방서라고 미국 감독관이 턱 밑에 내미니까 하나도 몰라 하하항."

-회장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그런 걸 알면 십장 하지 회장 해? 하하항. 나도 해외공사가 그때 첨이어서 그놈들 얘기를 신뢰했는데 속았지 뭐야. 그럴 정도로 모두가 부족했다는 거예요.



근데 뭐 모두가 열성적으로 덤볐고 특히 젊은 신입사원들이 아주 유능했어요. 그 두꺼운 시방서를 다 번역하고 이해했으니까 말이지. 근데 사실 태국 고속도로 공사는 우리가 감독관 그 친구 때문에 억울하게 손해를 보고 고생했다는 점이 있어요.

태국에 진출하기 전까지 1957년부터 국내에서 미군 공사를 아주 많이 했어요. 그 당시에 삼환도 있고 경향기업이라는 건설사도 있고 경일기업도 있고 그런 회사들이 주로 미군 공사만 전문으로 했는데 그쪽은 대다수가 규모가 크지 않은 건축을 했고 우리는 들어가면서부터 건축은 건축대로 하면서 비행장 활주로 격납고 이런 대규모 공사를 했거든?

그러고 그게 몇 년이야 미군에서 증강 계획(1957년 7월)이 있지 않았어요? 그게 반영구적인 군사시설을 만드는 계획인데 그걸 거의 우리 현대가 맡아서 했어요. 활주로 격납고 거기다 59년에 미 극동 공병단(KCA)이 발주한 인천 제1도크 복구공사까지.

그 많은 공사를 우리 현대가 '싹쓸이'했다고 할 정도로 했어. 이게 무슨 얘기냐 그런 대형공사를 할 때마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공법 그리고 미군 연방 시방서에 맞춰 공사를 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이미 국제 시방서는 경험을 하고 나가셨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래서 억울하게 당한 것도 있다는 거예요. 태국 가서 보니까 그게 경험했던 거하고 조금 다르긴 해요. 국제 시방서하고 미군이 제시했던 연방 시방서가 약간 다르다는 건 틀림없는데 따지고 보면 그것도 결국은 어떤 공사냐에 따라 규정이 조금 다르다는 것이지 근본은 같고 요는 우리가 이해를 했다 그거지.

그러고 기계도 새로 도입했고 포장도 옛날식으로 해서는 어림없다는 걸 알고 말이야. 콘크리트의 슬럼프 컨트롤이라든가 기층부 다짐 밀도라든가 그레이드 컨트롤 같은 게 엄격한 품질관리 기준이 있어요.

그걸 전부 미국 연방 규격에 맞춰서 하고 미군 감독관이 테스트를 하고 우리는 철저하게 검사를 받는단 말이에요. 그렇게 해 왔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우리가 태국 나가기 전에 기술적 노하우는 쌓였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그 많은 미군 공사를 했으면 상당한 경험과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겠죠.
"근 7~8년 했으니까 사실 웬만한 공사는 다 해 본 셈이야. 예를 들어 자동차가 시속100km 140km로 달릴 때 털털 거리면 불쾌감이 나고 안 좋잖아요. 근데 거기에 비해서 비행기는 속력이 얼마야 그래서 비행장 활주로는 노면 오차가 굉장히 적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 것까지 맞추자면 콘크리트로 대형 포장을 하는데 그건 응결이 아니고 수축을 하니까 수축도 막아야 하고 콘크리트를 양생할 때는 또 갈라지거나 강도가 약해져서 그것도 약품처리를 하고 이게 하루에 몇 천 평씩 포장해 나가야 하니까 절대 경험 없이는 못하는 거지요. 그걸 우리가 미군들한테 배워가면서 다 익히고 나갔다 그거예요.

그런데도 태국에서는 애를 먹인 거야. 규정 외에 국제법이든 연방법이든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 공사를 할 때는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그 놈 감독관이 포장을 다 덮으면 무조건 뜯으라고 하니 말이야."

-그런 경험이 있었으니까 뜯어라 할 때 못 뜯는다고 버텼군요.
"하하항 눈에서 불이 나는데 어떻게 뜯어. 결국은 뜯었지만 나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겠더란 말이야. 물론 경험보다 소중한 스승이 없어요. 많이 배웠어요. 그러고 50년대하고 60년대 건설 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달라져 있었다는 것도 사실 인정을 해야 했고. 막상 가 보니까 벌써 건설산업이 엄청 앞서나가고 있었어.

그렇더라도 내 심정은 발주처나 감독관이 공사 전에 국제 시방서가 어떻게 달라졌고 우리가 어떤 공사를 해 왔는지 리스트도 제출했으니까 고속도로공사는 활주로 공사하고 어떤 차이가 있으니 유념해서 하라고 가르쳐줘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 것도 없이 아주 고약하게 애를 먹일 작정을 한 거야. 정말 수업료 많이 내고(손실을 많이 보았다는 뜻) 무척 고생을 했어요. 근데 내 얘기는 그때 보니까 신입사원들이 얼마나 기특한지 말이야 그 복잡하고 전문적인 시방서를 전부 번역하면서 결국은 해내더라 그거야. 그걸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이 역시 공채를 해서 유능한 인재를 참 잘 선발했다 그런 걸 많이 느낀 거예요."

정 회장은 우수한 기술력을 갖춘 이춘림 권기태 이연술 같은 인적자원이 있었다는 것이 행운이었다면서도 국제화된 인력을 양성했다는 것이 가장 큰 현대의 자산이 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실 현대건설이 60년 세월을 걸어오는 동안 건설회사이면서도 창업주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치적인 부침에 휩쓸려 건설 외적인 문제로 홍역을 앓았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는 게 희한한 노릇이지만 한편으로 보면 그런 악몽 같은 세월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유능한 인적 구성이 버팀목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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