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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밝히는 신들!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 가면 봐야할 곳 중에 성당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실리카 성당 (Basilca Del Voto Nacional)’입니다. 이 성당 실내의 높이가 30m나 됩니다. 신고딕풍 건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흥미로운 건 성당 이름입니다. 직역하면 ‘국민투표 대성당’입니다. 실제로 이 성당 설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국민투표에 부쳤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 성당은 입장하는 곳이 2군데가 있습니다. 본당으로 들어가는 곳은 입장료가 2불입니다. 또 한 곳은 지붕과 철탑으로 올라가는데 입장료가 4불입니다. 이 번(2023년 5월)에는 지붕과 철탑 쪽만 보기로 했습니다. 65세 이하인 3명은 4불의 입장료를, 65세 이상 3명은 3불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계단이 시작되는 곳에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김승호’ 회장은 ‘돈의 속성’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의 책의 ‘기도로는 부자가 될 수 없다!’라는 소제목이 있습니다. 그는 이 부분에서 아래와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신은 당신을 부자로 만들지 못한다. 신의 은혜로 부자가 된다면 이 세상 부자들은 모두 종교를 믿는 신실한 사람들일 것이며, 이를 본받아 부자가 되고 싶은 모든 인간이 신을 믿고 있을 것이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부자가 많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 중에도 부자가 많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신은 당신을 부자로 만드는 것에 관심도 없지만 돈을 만들지도 못한다. 신이 할 수 없는 일 중 하나다. 세상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모든 축복을 내릴 수 있다는 신이 이상하게 돈은 인간들에게 부탁한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똑같다. 아무리 위대하고 웅장한 건물에 살고 계신 신이라도 자기 집을 구경하고 나면 마지막 방에서는 기념품을 팔고 계신다. 돈을 버는 일은 신보다 인간들이 더 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은 스스로 벌어야 한다. 참된 종교인이라면 복권을 사놓고 신에게 반드시 좋은 일에 쓰겠다는 따위의 기도는 하지 않을 것이며 성실하게 살면 언젠가 부자가 되게 해주시리라는 소망도 버려야 한다. 부자는 기도나 성실함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지혜, 기회와 운이 합쳐져 이뤄진다. 기회와 운은 신을 믿는 사람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불특정하게 다가간다. 그것이 기회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노력과 지혜가 필요할 뿐이다. 또한 점술가, 무당, 점성가, 관상학자, 역술가, 타로카드와 같이 그 직업이 무엇이라 불리는지와 상관없이 당신이 그에게 돈의 방향에 대해 묻기 전에 그가 나보다 부자인가를 알아봐라. 그가 나보다 가난하다면 더 물을 것도 없고 그가 나보다 부자라면 그 사람보다 부자가 되긴 글렀다.“ 성당뿐만 아니라 절도 돈을 밝히는 것 같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소원성취 기도의 다양한 종류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아래와 같이 인용해 보았습니다.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원성취 기도는 다양한 종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제일 많이 눈에 띄는 기와 불사는 사찰을 건축할 때 쓰기 위한 방식입니다. 얼마의 돈을 받고, 기와에 소원을 적은 뒤 추후 사찰 건물 지붕에 소원이 적힌 기와를 사용하게 됩니다. 기와 불사를 하기 위해 냈던 돈은 건물 건축에 쓰이면서 자연스레 공양을 한 셈이 됩니다. 깨끗한 양초를 켜두는 기도 방법도 있습니다. 불상의 모습을 한 양초를 선물로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는 양초를 켜두는 불사가 화재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찰 연꽃 등은 소원성취 종이를 적은 뒤 등 아래 달고, 대규모 축원 기도 날 한꺼번에 전시하는 방식입니다. 보통 100일 동안 연꽃 등을 매달아놓고 기도합니다. 망자를 추모하기 위한 흰색 연꽃 등을 따로 모아 달기도 합니다. 이 밖에도 사찰 입구에 흔히 볼 수 있는 불교 기념품점 또한 소원성취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찰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기념품을 판매 후 생기는 수익이 그대로 공양된다는 생각으로 기념품을 구매하기도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올 해(2023년)로 59년째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나이 40에 신학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신학대학에서 4년, 미국의 신학대학원에서 4년을 공부했습니다. 나이 46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동안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는 많은 분들을 보았습니다. 특히 돈(헌금)문제로 상처를 받았다는 분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상처가 커서 교회를 멀리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부패했다고 교회를 떠난 분들의 신앙상태가 제가 보기에는 더 나빠졌다고 봅니다.올해로 결혼 43년이 됩니다. 특히 결혼한 이후부터 십일조 생활을 충실하게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우리 부부 수입의 25%정도를 헌금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신용카드로 결제 시 잔고를 걱정해 본적이 없습니다. 목회칼럼목회칼럼 에콰도르 소원성취 기도 국민투표 대성당 세상 부자들

2023-06-16

목회칼럼 / 신약의 인물탐구 - 빚진 자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이 구절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빚진 자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여기에 ‘빚 주는 사람’은 ‘다네이스테스’로 ‘돈을 빌려주는 사람, 채권자’입니다.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친분에 의해서 돈을 빌려주게 된 사람이 아니라 돈을 빌려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오백 데나리온’, 다른 한 사람에게는 ‘오십 데나리온’을 빌려주었습니다. 여기에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 제국의 화폐 중에 하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화폐 개혁을 일으킬 때까지 로마에서 중요하게 통용되는 화폐 중에 하나였습니다. 흔히 1데나리온을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당시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대개 그 정도의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일당이 현대의 일당의 가치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날의 일당으로 환산을 한다면 $100 정도가 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노동자의 일당은 밥 세 끼를 겨우 먹을 수 있는 돈으로 지금으로 한다면 $30도 안 되는 돈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500데나리온은 그런 노동자가 500일을 꼬박 일해서 모아야 하는 돈입니다. 그리고 50데나리온은 50일을 일해서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이 두 채무자가 모두 ‘갚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 갚을 것에 해당하는 단어가 ‘아포디도미’로 사용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다, 포기하다, 지불하다’의 뜻입니다. 즉, 갚을 여유가 없다는 표현과 함께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포기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의미입니다. 여윳돈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재산을 다 포기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인 겁니다. 그런데 채권자는 이들에 대해서 채무를 면제해 줍니다. 성경에는 ‘탕감해 주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원어는 ‘카리조마이’인데, ‘거저주다, 은혜를 베풀다, 용서해 주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빚에 대해서 모두 대신 지불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시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당연하게 더 많이 빚진 자가 더 고마워하고, 더 사랑할 것이라는 것이 시몬의 대답입니다. 물론 우리도 시몬과 같은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500과 50의 차이는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시몬의 대답을 정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빚진 자’에게 있습니다.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50데나리온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누가 더 능력이 없는 사람일까요?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입니다. 그 마저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빚진 자’는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50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빚을 탕감을 받은 후에 그의 수중에는 얼마의 돈이 있을까요? 반면에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빚을 탕감 받은 후에 그의 수중에 얼마가 남아 있을까요? 이 말씀은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은 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면 누가 더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할까요? 아주 많은 죄를 지은 사람, 아주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런 사람이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은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닌 죄를 지은 사람은 용서함을 받은 후에 덜 사랑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심각성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하다, 대수롭지 않다는 기준을 하나님은 매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죄가 더 심각합니까? 아니면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죄가 심각합니까? 그 대가로 일어난 일들을 보면 더 심각하고, 덜 심각한 것을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심각한 징계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심각한 죄만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죄가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대신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 좀 한 것과 사람을 죽인 것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심각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500데나리온을 빚졌는가? 아니면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인가? 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빚진 자’임을 바로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갚지 못할 심각한 빚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서 탕감을 받게 되었는가? 이것을 바로 아는 사람이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건, 교회에 실망을 해서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죄’에 대해서 스스로 등급을 매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것은 좀 낮은 등급, 누구는 높은 등급의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A등급이상의 심각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그 심각함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12월 성탄절. 우리의 이 심각한 상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바로 알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목회칼럼 인물탐구 예수 그리스도 화폐 개혁 당시 노동자

2022-12-23

배우자를 배우자!

 나이 육십에 은퇴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은퇴할 줄 몰랐습니다. 벌써 은퇴한지도 7년이 넘었습니다. 은퇴 전에 생각하기를 돈만 있으면 될 줄 알았습니다. 충분한 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돈만으로는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은퇴하지 않은 친구들은 일 때문에 만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은퇴한 친구들은 손자들 보살피느라고 자녀의 집으로 대부분 이사를 갔기 때문입니다. 돈 있고 친구들이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친구하고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습니다. 돈 있고 친구들이 있어도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노후 준비에 필요한 것들의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첫째가 할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표현을 한다면 소명(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하겠습니다. 가치와 보람이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로는 친구들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적인 표현으로는 동역 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가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노후에 필요한 재정에 대한 착각들이 있습니다. 첫째가 계속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은퇴한 순간부터 은퇴 전과 같은 생활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은퇴 후에는 노동 수입이 없어지기 때문에 모아둔 자산이 빠르게 감소하게 됩니다. 집의 빚을 다 갚았다고 해도 고정적으로 나가는 생활비가 있기 때문에 매월 고정적으로 쓸 현금이 필요합니다. 둘째 착각은 자녀들을 지원하면 자녀들이 노후를 책임져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한국인들은 자녀들을 과도하게 지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4~50대가 노후 준비를 하지 못하는 이유의 65%가 자녀의 교육비와 결혼 지출 때문이라는 통계자료가 있습니다. 자녀가 내 노후 대비책이라고 믿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자녀 세대가 부모를 부양하겠다는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구조적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현 시대는 결혼한 자녀 2명이 양가 부모를 부양하는 시대입니다. 또한 부양하려는 자녀 역시 책임져야 하는 자식이 있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셋째 착각은 무언가를 배우기에 늦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머리가 굳고 습득이 느리기 때문에, 혹은 이 나이에 배우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엔 노후 연령이 늘어나는 만큼 제2의 직업이나 취미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평생 노화를 연구해 온 박상철 전남대 석좌교수는 젊은 세포와 늙은 세포에 동일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자외선도 쏘이고, 화학물질 처리도 했습니다. 저 강도 자극에서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 강도 자극을 하자 예상과는 반대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고 강도 자극에서 젊은 세포는 반응하다 죽었지만, 늙은 세포는 죽지 않았습니다. 2년 이상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결과는 같았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노화는 증식을 포기한 대신 생존을 추구한다!’ 였습니다. 박상철 교수는 이 연구 결과를 보고 노화에 대한 인식을 확 바꿨다고 합니다. 즉 ‘노화는 죽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 이라는 것입니다. 박 교수는 노화과정을 긍정적으로 보고, 당당하게 늙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장수의 비밀을 아는 사나이’ 라는 별명을 가진 박 교수는 세계적인 장수 과학자입니다. 그는 ‘당당한 노년을 위해 골드 인생 3원칙’을 제안합니다. 그 첫째는 ‘하자’ 입니다. 뭐든지 하면서 노년을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장수 인들의 특징은 늘 뭐든지 한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움츠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자신이 좋아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주자’ 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사회에 봉사하고 기부하며 베푸는 것입니다. 나이가 먹었다고 받으려 하지 말고 뭔가 주려고 애쓰면 아름답고 당당한 노년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원칙은 ‘배우자’ 입니다. 일반적으로 은퇴를 하는 50, 60대를 지나 적어도 30년 이상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살고 싶다면 새로운 사회와 문화, 과학에 대한 배움에 조금의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우자’ 란 결혼한 상대를 일컫는 포괄적인 어휘입니다. 상대방의 성별에 따라 남편, 아내로 나뉩니다. 비슷한 말로 ‘여보(如寶)’와 당신(當身)이 있습니다. '여보'의 뜻은 한자로 같을 여(如), 보배 보(寶)입니다. 이를 풀어 본다면 ‘보배처럼 소중한 사람!’ 이라는 좋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당신'의 뜻은 한자로 마땅할 당(當), 몸 신(身)입니다. 풀어 본다면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바로 내 몸과 같다!’ 는 좋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여보'와 '배우자'의 차이점은 여보는 2인칭이고 배우자는 3인칭이라는 것이 다릅니다.배우는 것 중의 으뜸은 ‘배우자’를 잘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우자를 배우자!'라고 외쳐봅니다.   목회칼럼배우자 목회칼럼 은퇴 전과 자녀 세대 자녀 2명

2022-11-18

독하게 노력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제목이 제가 생각한 것과 같아서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제목이 ‘뼈를 깎는 노력이 반드시 실패하는 이유’ 이었습니다. 강사는 ‘이지영’씨였습니다. 그(1982년생)는 사회탐구영역 ‘1타 강사(인기가 좋은 스타강사)’로 유명한 분입니다. 2017년 7월, 체온이 38도가 넘는데도 마감을 지키기 위해 진통제를 30분마다 먹어가며 업무 마감일을 지키던 그는 급성 충수염으로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일주일 이상 입원해야 한다는 말에도 급히 퇴원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매년 7월은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수능을 5개월 앞둔 시점이자, 여름방학 특강을 개강하기 직전인 만큼 여름방학 교재 원고를 완성해야 했고, 그래야 강의를 기다리는 10만여 명의 학생들에게 교재와 강의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당 40시간이 넘는 현장 강의 촬영을 했습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정말 어리석고 한심하죠?”라며 “얼마의 보상이 있다면 그런 어리석고 무모한 선택을 하겠나?”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화면에 그의 2017년 매출액(317억 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이제 생각이 달라지시냐?”며 “저 정도 숫자라면 몸을 갈아서라도 일을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드시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의 저라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절대로 그런 최악의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때까지 만해도 저의 독함이 모두의 표본이 되고 독함이 성공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하지만 제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2018년 4월 죽음의 고비를 만났습니다. 숟가락을 들 수 없었고 턱에 힘이 없어 음식을 씹을 수도 없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차 올랐고, 신체의 모든 수치는 죽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복귀는 불투명했고 강의 중단으로 인해 3배로 배상해야 할 금액은 매우 컸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무슨 죄를 지은 걸까 싶었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할 때 열심히 하고, 한 분야에서 성공하라고 할 때 성공을 위해 뼈 깎는 노력을 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피곤에 지친 고3 수험생들에게 “3시간 자도 죽지 않는다!” “죽을 각오로 공부하라!”고 다그친 게 후회된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좀 쉬어 가며 공부하라고 할 걸!, 자신을 학대하면 안 된다고 얘기할 걸!, 제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다 늦어버린 그때야 알게 됐다!”고 고백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하기도 한다!”며 “하지만 뼈를 깎는 노력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에겐 절대 큰 선물이 주어지지 않는다!”며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도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진짜 귀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며 강의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문과임에도 불구하고 전국 물리경시대회에서 3등을 했습니다. 학창 시절 3시간씩 자며, 졸릴 때는 포크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공부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커피를 씹어 먹다가 위에 구멍이 나서 응급실에 여러 번 실려 갔다고 합니다. 그는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IMF로 부모님이 장장 2년 동안 월급을 못 받게 되면서 집안의 경제적 사정은 더더욱 나빠졌고, 설상가상으로 부모님이 모두 암에 걸리면서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고 합니다. 당시 국민기초생활지원금 수급 대상자이자, 전교에서 5명도 받지 않는 무료급식 대상자였기 때문에, 홀로 다른 곳에서 다른 색깔의 도시락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는 충북 진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에 입학했습니다. 같은 대학원에서 윤리교육과 석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중입니다. 연봉은 2014년에 처음 100억 원에 도달하여 그 이후로 한 번도 100억 원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다고 합니다. 통장 잔액을 공개하였는데 잔액은 약 130억 이상이었습니다. 평생 기부한 금액을 합치면 50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성경 창세기 2장에 가장 기본이 되는 인생 설계도가 나옵니다. 그 중에 첫 번째가 안식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일하면 일할수록 수입이 증가하기 때문에 쉬지 않고 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이유가 없지만 스스로 안식하시면서 인생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하나님과 만나자고 하십니다. 즉 주일(일요일) 예배 시간에 만나자고 하십니다. 목회칼럼노력 목회칼럼 여름방학 교재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대학원 박사과정

2022-07-18

아! 우크라이나

 2014년 우크라이나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사역하시는 김교역 선교사님의 사역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김 선교사님은 키이우(키예프)에서 선교센터를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김교역 목사님은 김교철 목사님의 형님이십니다. 단기 선교팀은 세계선교교회에서 3명(김교철 목사님 부부와 태권도 사범이신 집사님), 포근한 교회에서 3명(리디아지 권사님과 저희 부부) 그리고 플로리다에서 1명(장진광 목사님)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선교 기간은 9월 1일(월)부터 13일(토)까지이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휴스턴과 독일을 거쳐 키이우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는 환영 팀이 나와 있었습니다. 팀은 약 20여명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꽃다발을 어떤 이는 플래카드를 어떤 이는 기타를 들고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공항 로비에서 함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공항에서 선교센터까지는 40여분이 걸렸습니다. 9월 1일부터 5일까지 교단 총회, 목사 안수식, 입학식, 졸업식, 부흥회를 한꺼번에 거행했습니다. 여러 지방에서 참석하기 때문에 여러 번 행사를 하지 않고 일시에 한다고 합니다. 이번 주간에는 100여명 이상이 참석했습니다. 선교센터에서 숙식을 하면서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김 선교사님은 앞으로 200여명이 동시에 합숙할 수 있도록 증축할 계획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고아원도 설립할 예정이라고 합니다.(현재 선교센터도 다 증축되고 고아원 건물도 세워졌습니다.) 월요일 저녁부터 부흥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낮에는 성경공부가 있었습니다. 통역은 권이라 목사님이 하셨습니다. 김 선교사님은 1994년 8월에 우크라이나에서 사역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2004년 8월에 Harvest University를 세웠습니다. 신학대학(원)의 이름은 ‘마지막 추수를 감당’ 한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 영적지도자들을 육성했습니다.육성된 지도자들을 여러 지역에 파송하여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지금까지 170여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교단이 결성되었습니다. 2003년 8월 우크라이나 종교부에 정식으로 교단 등록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총회장을 지낸 현지인 목회자가 여러 명으로 늘었습니다. 교회를 더(1,000개 교회 목표) 개척하기 위해서 선교센터에서 매월 모임을 갖는다고 합니다. 또한 현지 목회자들과 2개월마다 만나 연장 교육을 위한 특강을 한다고 합니다.      선교센터와 별도로 '은혜 기독 학교(K-12)'를 2011년 9월에 세웠습니다. 정부의 정식 인가를 받은 학교입니다. 학교를 통해 간접적으로 선교하기 위해서 설립했다고 합니다.주말에는 키이우를 관광했습니다. 가장 중심가의 건물에는 총탄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을린 건물들이 많았습니다. 휘장으로 가려진 건물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방문하기 7개월 전에 ‘우크라이나 혁명’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시위는 2014년 2월 18일부터 22일까지 키이우에 2만 명의 시민이 2004년의 헌법으로 되돌릴 것을 요구하면서 촉발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 75명이 죽고 1,100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후 전국적인 봉기로 확대되었습니다. 시위대가 키이우 시내를 장악한 뒤 이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야권이 주도권을 잡은 우크라이나 최고 의회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탄핵했습니다. 최고 의회는 5월 25일에 조기 대선을 실시한다고 밝혔습니다.월요일(8일)부터 일주일간 지방의 교회들을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미콜라이브’ 지역을 향해 가는데 검문이 있었습니다. 도네츠크(러시아에 인접한 동남부 지역)에서는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러시아를 좋아하고 젊은이들은 유럽을 좋아하기 때문에 계속 내전(?) 상태라고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폴란드를 들렸습니다. 폴란드는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에 가입했습니다. 두 나라의 도로는 차이가 뚜렷했습니다. 폴란드의 고속도로의 제한속도는 130km이었습니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김교역 선교사님이 생각났습니다. 김 선교사님은 지금 선교센터에 머물고 계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선교센터에는 50여명의 어른들과 20여명의 아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루에 한 끼씩만 먹으면서 버티고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군이 20km 근처까지 왔다고 합니다. 보내주신 비디오를 봤습니다. 기도해 주시니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계속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하셨습니다. 오늘(3월 6일) 보내주신 비디오에는 예배 드리는 모습이 담겨있었습니다. 우리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기도와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칼럼우크라이나 목회칼럼 우크라이나 종교부 김교역 선교사님 현재 선교센터

2022-03-14

[신약인물탐구] 마태

 오늘 살펴볼 신약의 인물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이자 신약 성경 ‘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입니다. 마태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마태를 ‘레위’라고합니다. 이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당시는 아랍어, 히브리어, 헬라어 등이 함께 혼용되어서 사용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2개 이상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레위라고도 하는 마태의 직업은 당시 세관의 관원이었습니다. 당시 세관은 운임이나 통행료를 받는 곳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하는 세리가 근무하는 사무실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받아서 로마 정부에 상납을 하는 과정에서 세리들은 부당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거두어야 하는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사람들에게 징수해서 나머지 돈은 모두 자신이 가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리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세리를 싫어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세리들이 취급하는 돈을 깨끗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세리들은 이방인들의 돈과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이익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그 돈을 만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정결하지 않은 자로 취급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리들이 도둑질한 돈, 창기들의 부정한 돈을 취급하기 때문에 정결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당시 성전에 드려지는 헌금에도 이 돈들이 돌고 돌아서 오게 됩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의 헌금을 자기 것으로 챙겼습니다. 얼마나  이율 배반적입니까? 돈을 더럽다고 말하면서 돈을 밝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죄인과 세리는 항상 함께 취급을 합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세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태복음9장10절, 11절. 세리를 부정한 사람,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서 오늘도 여전히 돈에 집중된 삶을 사는 마태에게 찾아오십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복음9장9절.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라고 마태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지금 잠깐 나와 함께 갈 데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고 있던 삶에서 빠져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부당한 이익을 챙겨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삶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쉬울까요? 우리가 흔히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라고 말하는데 제자가 무엇입니까? 내 삶은 그대로 있고 거기에 예수님을 스승, 선생으로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삶의 우선 순위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생각, 내 주관, 내 이익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입으로만 따른다고, 순종 한다고 말하는 것이 제자가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님의‘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누가복음 5장28절. 여기에 버리다는 헬라어로 ‘카탈레이포’입니다. ‘버리다’, ‘떠나다’, ‘남겨두다’, ‘소홀히 하다’의 뜻입니다. 나중에 다시 찾을 것을 대비해서 다른 곳에 보관해 두는 것이 아니라 잃어 버려도 상관 없다는 생각으로‘내팽개쳐버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어쩌면 평생을 부여잡고 살던 세리라는 직업. 그것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이익 등 여러 가지를 한 순간 포기하는 것, 잃어버릴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것을 마태는 각오하고 자신이 깔고 앉아있던 ‘세관’을 박차고 나와서 예수님이 서 계신 곳, 제자의 길에 섭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이 예수 믿으면 건강하고,아픈 데가 없어지고,실패 없이 성공 만 있고, 부유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아픈 사람, 실패한 사람들을 보면서 기도 제대로 안 해서, 신앙생활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고 판단합니다. 약 33세에 단명하신 예수님은 실패한 인생입니까?  예수 믿기 전에는 잘 나갔지만 예수 믿고 난 뒤부터 고난, 핍박, 매 맞음의 고생길을 산 바울도 실패한 인생입니까? 믿음은 우리 인생의 장식품이 아닙니다. 하나쯤 있으면 나쁘지 않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내 것을 포기하고, 버릴 수 있는 결단입니다. 무늬만 기독교인 삶, 입으로만 순종을 떠드는 삶이 아니라 마태처럼 결단하고 예수님께로 오는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의 길입니다. 마태와 같은 결단과 순종으로 예수님 제자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신약인물탐구 마태 목회칼럼 예수님 제자 가운데 예수님 우리 인생

2022-03-07

인정받고 싶은 욕망

 저의 'Face-Book 친구(페친)‘ 중 한 분은 Face-Book에 많은 글과 사진을 올립니다. 그녀는 ’페친‘을 통해서 회사의 영업직을 얻었고, 집을 구했고, 식당 매니저가 되었습니다. 저도 매일 습관적으로 ‘Face-Book'에 들어갑니다. ’좋아요‘를 눌러준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해 봅니다. 그 분들이 저를 인정해주는 것이 고맙습니다. 저도 다른 분들이 게시한 글이나 사진이 좋으면 ’좋아요!‘를 누릅니다. 누구나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이 욕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많은 마케팅 업체가 인정 욕구를 이용해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한 데이터 분석업체는 어떤 개인이 SNS상에서 어디에 ‘좋아요’(likes)를 눌렀는지 68개만 알면 그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고도 그의 피부색과 가정사, 마약·술 중독 여부 등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70개를 알면 그와 잘 아는 ‘절친’처럼 될 수 있고, 300개를 알면 그의 아내나 남편보다 그를 더 속속들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300개를 넘어서면 그에 대해 그보다 더 잘 아는 전지자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합니다. ‘좋아요’가 기업들에 소중한 마케팅 자료로 쓰이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상업적 가치가 1조 달러를 넘는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들꽃/김영자’ 시인의 ‘사랑받고 싶으신 하나님’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무엇이 부족하셔서 / 하찮은 나의 사랑이 필요하시리 / 다만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 내 사랑도 받고 싶으신게지 / 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 그 사람도 나의 사랑을 원하지 않을까? /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 왜냐하면 나는 너를 그 만큼 사랑하니까" /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 그 사람의 사랑이 진실일까? / 나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좋다 / 나를 그만큼 사랑해 주신다는 게 좋다 /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 나를 황홀하게 만든다 / 부족한 이 모습 이대로 / 나 이제 / 나의 하나님을 내 온 맘 다해 사랑하오리 / 그 분이 원하시는 사랑은 / 당신의 가슴 크기 만큼이 아니라 / 쪽박만큼이나 작고 좁은 / 내 가슴 크기 만큼일 테니까 /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출20:5) /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4:24)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인정 욕구’가 사람을 성장시키고 일의 성과를 올리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동시에 인정 욕구의 문제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무의식적으로 생기는 인정 욕구에 대한 강박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인정 욕구의 늪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인정 욕구에 좌우됩니다. 인정받으면 변화합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인정이 필요합니다. 인정해 주면 자존감이 올라갑니다. 사람은 인정받으면 받을수록 거기에 매달리게 됩니다. 노력해서 만든 몸을 자랑하고 싶어 SNS에 사진을 올렸다가 ‘좋아요’를 꽤 많이 받자,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무리하게 운동하고 체중 감량을 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SNS를 시작하지만 어느새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게 됩니다. SNS에 혹은 카페 게시판에 게시물을 올린 뒤 조회 수가 얼마인지, ‘좋아요’가 얼마나 눌려졌는지 수시로 확인하게 됩니다. 의식적으로 든 무의식적으로 든 타인에게 ‘잘했다!’, ‘멋지네!, ‘괜찮아’라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것이 인정 욕구입니다. 인정 욕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과해지면 오히려 스트레스에 잠식되거나 번 아웃에 빠져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이어 가기 힘들게 됩니다.         인정은 거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거울을 통해서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타인과 주위의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그것이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애초에 인정은 상대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인정받고 싶어도,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가 인정해주지 않으면 인정 욕구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과 경제력이 있어도 힘을 써서 인정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타인이 존재해야 하고 서로에게 의존하는 가운데 충족되는 욕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지금 이렇게 괴로운 것이 ‘완벽하지 못해서’, ‘예쁘지 않아서’, ‘연봉이 높지 않아서’, ‘실적을 채우지 못해서’,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남의 인정에 목말라 하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칼럼욕망 목회칼럼 인정 욕구 하나님 여호와 데이터 분석업체

2022-02-15

한 중풍병자와 네 사람

 마가복음 2장에는 ‘한 중풍병자’의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한 중풍병자’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네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십니다.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마가복음2:1.  여기에 ‘다시’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시다가 가버나움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수일 후’에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한 중풍병자’와 ‘네 사람’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계신 소문이 이들에게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네 사람은 중풍병자를 들쳐 메고 예수님이 계신다는 집으로 옵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마가복음 2:3. ‘중풍병자’인 사람은 자기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가고 싶어도 스스로는 갈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에 ‘네 사람’이 등장합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간 이들을 ‘하인들’이라고 하기도 하고, ‘친구들’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들쳐 메고 예수님께로 오지만 예수님이 계신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입구에서부터 사람들로 인해서 막혀 버린 겁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마가복음 2:2. 이 사람들이 모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집 안뿐 아니라 마당, 문 앞까지 사람들이 꽉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도’는 ‘톤 로곤’으로 신약성경에 ‘복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고 계셨습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은 도무지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그것을 뜯고 구멍을 내서 중풍병자를 예수님 서 계신 앞으로 달아 내립니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마가복음 2:4. 여기에 ‘뜯다’에 해당하는 단어 ‘아포스테가조’는 ‘덮개를 벗기다’의 의미입니다. 지붕의 덮개를 벗깁니다. 그리고 구멍을 뚫습니다.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아주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성인 한 사람을 달아 내리기 위해서는 큰 구멍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적지 않게 놀랐을 것입니다. 천장에서 흙이 떨어지고 곧 구멍이 뚫립니다.그리고 그 구멍을 통해서 사람이 내려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행동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2:5.          여기에 ‘그들의’에 해당하는 단어 ‘아우톤’은 ‘그들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중풍병자’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를 메고 온 ‘네 사람들’까지 포함된 의미입니다. 가버나움을 떠나신 후에 다시 그들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오시기만을 기다리다가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로 옵니다. 사람들로 인해서 예수님께로 가는 길이 막혀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옴으로 중풍병자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있었지만 ‘네 죄사함을 받았다’라고 칭찬을 받는 믿음은 이들뿐이었습니다. ‘믿음’은 무엇일까요?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고백하는 것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이나 힘든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날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에 나가서 예배 드리는 것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마켓을 가고, 식당을 가며, 여행을 위해서 비행기를 타는 것은 하면서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것은 민감하게 생각을 합니다. 중풍병자와 네 사람이 수많은 인파로 인해서 막힐 때에 그냥 돌아 갔다면 이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날 나에게는 이들과 같은 믿음이 있는지,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돌아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중풍병자 목회칼럼 마가복음 2장

2022-01-21

참지!

 한국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먼저 코비드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한국 행 비행기 탑승 전 72시간 이내에 코비드 검사를 받아야만 유효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찾은 검사장은 주차장에 있었습니다. 검사원은 우리에게 진단키트를 주고서 검사 요령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검사원이 검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검사하도록 했습니다. 검사 결과는 24시간에서 48시간 내로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코비드 검사를 마치자마자 3차 백신 주사(부스터 샷)를 맞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즉석해서 맞을 수 있는 곳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곳을 찾아갔더니 30여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 쯤 후에 백신 주사를 맞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음성이라는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덴버를 출발해서 달라스를 경유해서 인천공항에 내리는 비행 편이었습니다. 달라스에서 인천 가는 비행기를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탈 비행기를 고치고 있다는 안내 방송이 있었습니다. 결국 8시간 기다린 후에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탑승해보니 빈 좌석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8시간이나 기다리게 해놓고도 아무런 보상도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늘에서 고장이 나지 않고 땅에서 발견한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했습니다.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해외에서 입국하는 줄과 국내선의 줄이 달랐습니다. 우리는 ‘격리통지서’를 받았습니다. 통지서에는 10일간 격리됨을 통지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자가 격리’ 웹을 핸드폰에 설치해야 했습니다.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웹을 즉시 설치해주었습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가방을 찾아 세관 검사대를 통과했더니 자정이 이미 넘었습니다. 공항 방역 버스는 이미 떠났기 때문에 방역 택시를 타기로 했습니다. 택시에 8개의 가방을 실었습니다. 익산에 도착하니 새벽 4시쯤 되었습니다.      격리 기간 매일 오전과 오후에 웹을 열어 체온과 증상에 대해 보고를 해야 합니다. 질병 관리청으로부터 핸드폰을 장시간 사용하지 않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전에 뉴스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베트남에서 들어온 2사람이 격리기간에 핸드폰을 집에 놓고 격리장소를 벗어나갔다가 적발되었고 추방되었다는 뉴스였습니다. 다음날 코비드 검사를 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다음날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음성이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격리 용품이 한 박스 도착했습니다. 햇반, 물, 카레, 짜장, 김 등 가득했습니다. 서울 지역은 아예 지원 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격리 마지막 날 하루 전에 코비드 검사를 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집을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질병관리청에서 ‘격리장소를 벗어 나셨습니까?’ 라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완전히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식당이나 상가에 들어가려면 입구에 설치된 체온 측정을 먼저 해야 합니다. 백신접종 QR 코드 인증을 해야 합니다. QR 코드가 없는 사람은 백신접종 확인서를 보여주고 질병관리청에 전화를 해야 합니다. 4명이상 만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형제들과 가족모임을 가졌습니다. 총 8명이었습니다. 식당에 들어갈 때 4명씩 두 팀으로 들어가고 대화도 하지 않고 계산도 별도로 했습니다. 고속버스 표를 사려고 매표소에 갔더니 직원은 없고 자동발매기만 있었습니다. 승객은 45인승 버스에 총 9명이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실의 호두과자 매장을 보았습니다. 판매원 한 사람과 자동판매기 2대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승객들이 가득했습니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버스에는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내릴 정거장과 다음 정거장이 자막으로 나오고 음성으로도 안내했습니다. 어떤 버스에는 WiFi도 가능했습니다. 횡단보도 바닥 경계에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 노선 별 버스 도착시간이 실시간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정류장 의자가 따뜻한 곳도 많았습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 함께 식사한 친구가 주차증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식당 주인에게 차량번호 뒷자리 4번호를 주었더니 핸드폰 웹으로 주차비를 처리해주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불편한 점을 편리하도록 개발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프로불편러’들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5년 무렵부터 인터넷에서 이른바 ‘프로불편러’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이라는 영어단어와 ‘불편(不便)’이라는 한자단어, 그리고 영어 접미사 ‘-er’을 조합한 말입니다. 해석하자면 ‘매사에 불편해 하는 사람’ 이라는 정도의 뜻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문제될 것이 없는 일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부정적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목회칼럼목회칼럼 임동섭 코비드 검사 세관 검사대 검사 요령

2022-01-10

내 꿈은 놀면서 사는 것!

 책 제목입니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는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이런 제목의 글을 쓴 저자가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저자는 ‘와다 히데키’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1960년에 출생한 노인정신의학 전문의 이었습니다. 그는 다양한 이력을 가진 분입니다. 영화감독이라는 이력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데뷔작인 ‘수험의 신데렐라’는 2007년 모나코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저희 부부는 ‘코비드-19’ 이후로 처음 국제선 비행기를 탔습니다. 덴버에서 달라스 경유 인천 공항으로 가는 항공편이었습니다. 달라스에서 우리가 타려는 비행기가 고장이 나 고치고 있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습니다. 기다렸다가 탑승했습니다만 다시 내려 기다려야 했습니다. 결국 다른 비행기로 대체되었습니다. 우리는 8시간 만에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중에 어떤 분들은 보상도 해주지 않는다고 화를 냈습니다. 다른 분들은 공중에서 고장 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출발 전에 격리 14일에서 무조건 10일로 변경되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오히려 4일 줄어들었습니다. 지인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격리 중이라 얼마나 답답하냐고 하셨습니다. 답답하지 않고 오히려 모처럼 휴식을 즐기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 분은 참 편하게 생각하고 편하게 잠을 자는 저희 부부가 부럽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연스러웠지만 어떤 분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4년 한국의 N신학대학원에서 H전도사님과 함께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40일 금식을 2번이나 했다고 하셨습니다. 공부할 당시 금식 후유증으로 힘들어 하셨습니다. 결국 그분은 공부를 포기하셨습니다. 무리하다 쓰러지면 죽도 밥도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편한 데로 사는 사람이 더 잘될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긴 인생길에서 놀며 쉬며 가야 지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1984년도에 M그룹 전산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개인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사무자동화가 되면 회사 생활이 아주 편해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일인당 업무 처리량이 약 6배 정도 향상되었으며, 업무시간은 오히려 더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바쁘게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할 일을 다 마치면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섭니다. 사람들은 놀면서 생활하는 사람을 보면 “팔자 좋네!”라고 말합니다. 부러워서 하는 말이겠지만 그 밑바닥에는 편해지는데 대한 죄의식이 있습니다. 누구든 편안한 삶이 제일 좋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럼에도 편히 살면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노력 없이 좋은 결과가 나오면 ‘운이 좋았다’라며 성과를 깎아내리고, 노력했지만 결과가 안 좋으면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라며 다음을 기약합니다.노력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믿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믿으면 괴로움을 참는 것이 미덕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고생 끝에 오는 건 낙이 아니라 또 다른 고생입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세상이 됐습니다. 기술 및 도구의 발달로 확실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안해질 수 있는 시대입니다. 불편함을 참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뇌는 편안함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뇌는 본래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뇌는 힘들거나 괴로운 일을 좋아하지 않고, 노력이나 근성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뇌는 우리가 놀 때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편해질지’를 궁리할 때 인간의 뇌는 가장 힘이 넘친다고 합니다. ‘지나영’ 정신과 의사는 “소크라테스가 ‘바쁜 생활을 조심하라!’고 한 것처럼, 바쁜 삶에서 매우 애쓰는 자세를 내려놓고, 조금 더 자신의 마음이 흐르는 대로 삶을 살아갈 때 평온함과 만족감이 더 큰 것을 흔히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내 꿈은 놀면서 사는 것’으로 인생관을 바꿔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CEO는 게으른 사람을 뽑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게으른 사람은 일을 쉽게 처리할 방법을 찾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편안함을 선호하는 것은 결코 게을러서가 아니라,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은 점점 발전하는 세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생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잠 19:2)라는 성경 말씀처럼, 서두르다 보면 하나님의 길을 지나칠 위험이 큽니다. 세상은 단시간에 더 많이 일하라고 다그치지만 예수님은 한 번도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성경학자 ‘윌라드’는 “예수님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느긋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느긋함은 영적 리더십의 핵심입니다.   목회칼럼목회칼럼 임동섭 국제선 비행기 회사 생활 달라스 경유

2021-12-20

목회칼럼 덴버예닮장로교회 윤우식 목사

 신약성경 마태복음 8장과 마가복음 1장, 누가복음 5장에는 ‘한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나음을 받는 사건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병환자’는 과거 ‘문둥병’이라고도 하고, ‘한센씨병(Hansen’s disease)’이라고도 하는 병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런 병에 걸린 사람은 일반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었으며, 성 바깥에 격리되어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으로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살이 녹아서 내리는 병으로 병자 자신도 힘든 상황에서 가족과 떨어져서 살아야 하고, 더욱이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들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간혹 영화에서 묘사되는 모습은 온몸을 천으로 가리고 가지만 금세 이 사람이 ‘나병환자’라는 것을 안 사람들은 침을 뱉고, 아이들은 돌을 던지면서 놀리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사복음서 모두에는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었다’ 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어서 살아야만 하는 그가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예수님께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굴에 숨어서 기도하면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 그러나 이 사람은 모든 것을 감수하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침 뱉음, 돌을 맞는 수모 등 .이 ‘나병환자’는 왜 이런 결정을 합니까? 바로 예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과 기대 때문입니다.오늘날에는 ‘코로나 19’으로 인해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보편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예배’든 무엇이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입니다.집에서, 자동차 안에서, 휴가지에 가서. 어떤 장소여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내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나의 ‘수고’가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병환자 역시도 내가 있는 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처소에 예수님께서 찾아와 주시기를 기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극복해야 했고, 모멸감 등을 느끼면서 예수님 앞에 나아옵니다. 이렇게 예수님 앞에 나아온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 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당시에 이 병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만약에 완전하게 낫는다고 해도 모든 살이 놀아 내린 상태로, 더 이상 나병이 퍼질 곳이 없을 정도로 된 후가 되어야 합니다. 나병은 나았을지 몰라도 얼굴과 몸은 흉측하게 변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서 그는 완전하게 나음을 입습니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마가복음1장42절. 나병환자가 나은 것은 그가 예수님께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병이 낫게 된 것은 전적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가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이행하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감수하기로 결단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우리가 기도하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수고를 드리기로 결단하고 헌신할 때에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알게 됩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추위를 무릅쓰고 새벽기도회를 나오는 것, 일주일 중에 모처럼 쉴 수 있고 토요일과 연결해서 여가를 즐기고 여행을 갈 수 있는 주일 아침마다 준비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를 나오는 것 보다 어느 곳에서나 스마트 폰으로 실시간 예배를 드리는 것이 편리하고 편하지 않습니까? 이런 가운데서 지금 내가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삶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물론 예배를 드리러 예배당으로 나오는 것이 간절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내 삶에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해결되는 것을 목격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믿음 생활이라고 하면서 내가 수고하지 않고 편하게 하려는 것이 어쩌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겁니다. 나는 이 나병환자처럼 간절함이 있는가? 그리고 그 간절함이 나의 삶에 어떤 행동으로 나오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이 시대의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은혜 기자목회칼럼 윤우식 윤우식 목사 예수님 당시 실시간 예배

2021-12-03

[목회수상] 대화는 공감을 끌어낸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행동함이 같지 않다. 이견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최선의 방법은 대화다.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서로 다른 악기 연주자들의 개성을 활용하면서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음악을 연출해내는 사람이다. 건전한 사회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대화를 통한 하나의 지향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대화는 공감을 이끌어낸다. 대부분의 국가 대통령이나 수상들은 첫 선출 시 높은 지지율이 임기를 끝낼 때는 곤두박질치며 떨어진다. 그런데 퇴임 시에 반대로 더 많은 국민의 지지율을 받은 사람이 있다. 지난 1월 8년의 대통령 집권을 끝내고 퇴임한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이다. 지지율이 무려 87%이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높은 대중의 인기를 얻게 했을까. 룰라는 가난한 노동자 계급 출신이다. 어머니를 따라 산토스로 이주했다. 열 살 때까지 글을 배우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을 자퇴해 거리에서 구두를 닦고 땅콩을 팔았다. 18세 때 선반공으로 공장에 취직한 뒤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금속노조 위원장을 거쳐 노동자당(PT)을 창당했다. 룰라의 전력으로 인해 그가 대통령이 되자 반 시장정책을 우려했다. 하지만 룰라는 예상을 뒤엎고 시장친화적인 정책을 폈다. 좌파 정치인이라는 시각에도 우파 의원 엔피케 메이리레스를 중앙은행 총재로 앉혔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진짜 서민을 위하는 길은 파이를 나누기보다 키우는 것’이라는 룰라식 실용주의를 펼쳤다. 국민복지·국가성장을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를 가리지 않고 대화를 하며 귀를 기울이고 힘을 모았다. ‘소통과 믿음’으로 일관했다. 재임 기간 중 670일을 지방 출장, 470일을 외국방문에 썼다. ‘가족지원 제도’를 만들어 빈곤 가정을 지원했다. 무조건 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학교에 가고 예방주사를 맞아야만 주었고, 돈은 아빠 대신 엄마만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가정 경제에 쓰라는 뜻인 것이다. 그의 재임 기간 중 1억9000만 인구 중 2800만 명이 빈곤에서 탈출했고, 3000만 명이 중산층으로 올라섰다. 덥수룩한 서민적 외모, 잘 웃고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룰라는 서민의 친구다. 소통뿐만 아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했기에 신의를 얻은 것이다. 아름다운 그의 퇴장은 장기 집권자의 귀감이 되었다. 예수의 말씀이 힘이 있고 감동을 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청중과의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사하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대화하시고 말씀을 전하셨다. 많은 무리가 모여왔다. 얕은 산 높은 자리에 앉으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으니, 천국이 저희 것이 될 것이다.”(마태복음 5:1-3)

2011-05-04

[목회수상] "네" 라는 대답을 이끌어 내라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배려하는 대화가 중요하다. 개인관계나 사업이나 좋은 대화란 논쟁이 아닌 긍정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견이 충돌하는 문제에 관한 토론이나 대화에서 우선 상대방의 긍정을 이끌어 내도록 노력하라. 오버스트리느는 ‘감화를 주는 처신법’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상대방이 일단 ‘아니오’라고 응답하면 그것을 ‘네’로 바꾸게 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아니오’라고 말한 이상 그것을 번복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아니오’라고 말한 후 속으로 후회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네’라는 대답이 나오도록 이야기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뉴욕의 한 은행직원 제임스는 자신이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어떤 고객이 예금구좌를 열려고 은행에 찾아왔다. 신청용지에 필요한 사항을 기록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그 고객은 대부분 대답을 했지만 어떤 질문은 귀찮은 듯 대답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예전에는 그런 경우 질문에 응답하지 않으면 구좌를 열 수 없다고 잘라 말하곤 했다. 그래서 손님을 놓친 일이 있었다. 제임스는 이번에는 자신이 손님의 입장에서 ‘네’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제임스는 일단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하지만 손님이 예금하신 후에 불의의 사고가 생긴다면 법적으로 가까운 친척이나 누구를 찾을 수 있도록 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래요.” “그런 경우 우리는 신속한 업무 처리를 위해 손님에게 유익하도록 도와드리게 할 수 있겠지요.” “네, 그렇군요.” 손님은 제임스의 유도에 기분 좋게 말을 따랐고 경직된 태도를 버렸다. 상대방에게 ‘네’라는 대답을 이끌려면 인내와 설득이 필요하다. 희랍의 철인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소크라테스는 ‘네’라는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시험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합니까? 내지 말아야 합니까?” 세금을 내라고 하면 반유대인으로 몰릴 것이고, 내지 말라고 하면 법을 어기게 된다.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논쟁하지 않았다. “로마 동전 데나리온을 가져와라. 이 동전의 얼굴이 누구냐?” “로마황제입니다.” “그러면 로마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라”고 명쾌한 답을 주셨다.(마태복음 22:15-22)

2011-04-06

[목회자 칼럼]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났으니 우리에게 주신 아들"(이사야 9:6)이라고 선포 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그 아기를 주신 날입니다. 고로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를 선물로 받는 놀랍고도 흥분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다른 선물을 전달하고 배달하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양 아닌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얼마나 얼빠진 모습입니까? 백화점마다 대형 산타가 걸리고, 요즈음은 산타 할아버지가 낮에는 앞뜰에서 주무시다가, 밤만 되면 불을 켜고 탱탱하게 서서 자리를 잡는 모습도 많이 보입니다. 산타 할아버지가 타고 다닌다는 루돌프 사슴들도 밤만 되면 불을 밝히고 휘황찬란하게 빛납니다. 밤 문화에 익숙한 요즈음 세대들에게 밤에 선물을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이 되어 집니다. 세상살이 힘들게 살아가다 보니, 말구유의 먹이통과 같이 더럽혀지고 흉해진 우리의 마음속에, 올해의 선물은 아기 예수님을 받읍시다. 그 분의 온유하심과 선하심, 그 분의 사랑하심과 섬김의 마음, 그 분이 주신 영생의 소망을 담아서 올해도 또 한번 새롭게 거듭 태어나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얼마나 훈훈하고 가슴 벅찬 일이겠습니까?’ 진정으로 아기 예수님을 마음의 선물로 받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신앙상담 : (972)395-9200

2009-12-23

[목회칼럼]기도하라는 신호

우리는 한나를 기도의 어머니로 알고 있다. 그녀는 결혼하였지만 아이가 오랫동안 없었다. 사람들은 결혼하면 아이가 생기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는 없을 때 그 괴로움은 당하는 사람만 알 것이다. 한나는 아이만 없었지 아이가 없다고 잃어버린 것은 없었다. 여전히 남편은 자기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남들에게는 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없을 때 나에게는 모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남을 부러워하고, 아니면 자기 신세를 비관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내가 있는 것을 남이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에게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없는 것만 생각하면 한없이 슬퍼지는 것이다. 남들은 있는데 나에게 없는 것만 보는 사람은 세상을 한탄하며 살게 된다. 그러나 자기에게 있는 것을 보고 사는 사람은 감사의 생활을 하며 산다. 우리는 나에게 없는 것을 보지 말고 있는 것을 보고 감사해야 하겠다. 한나에게 아이가 없자 남편은 하는 수 없이 또 아내를 얻었다. 그런데 두 번째 여자는 야속하게 주렁주렁 애들을 낳는다. 얼마나 불공평한 세상인가? 한나에게는 아이 하나만 있어도 소원이 없겠는데 남에게는 애들이 득실거리니 얼마나 자신이 초라해 보이겠는가! 남편이 자기에게 갑절이나 먹을 것을 주며 여전히 사랑했지만 한나의 슬픔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매년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실로에 절기를 지내기 위하여 갔지만 축제의 절기는 한나에게 더욱 고통을 더할 뿐이었다. 남들이 기뻐할수록 자신은 더욱 슬퍼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음식을 먹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슬퍼하는 한나를 더욱 위로하며 사랑하는 남편을 보고 브닌나 라는 다른 아내는 화가 났다. 애없는 집안에 들어와서 주렁주렁 애들을 낳아 주는데 남편의 사랑은 여전히 한나에게 가는 것을 보고 한나를 구박하기 시작하였다. 애 낳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브닌나의 구박은 너무 심해서 사람구실도 못하는 자신이 너무 미웠다. 하도 브닌나가 구박하니 한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게 된다. 그녀는 자기 신세를 생각하며 통곡하며 서원하여 기도하였다. “아들만 주신다면 그 아들을 평생 하나님께 바치겠나이다.” 아들을 당신께 평생 바쳐도 좋으니 불임의 여자라는 누명만을 벗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미친듯이 기도했다. 그러자 그녀는 사무엘이라는 아이를 얻게 된다. 기도의 어머니 한나에게서 태어난 사무엘 역시 기도의 아들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기도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두 사람이 있다. 모세와 사무엘이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했던 모세나 사무엘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최고의 중보 기도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드린다고 하더라도 이 백성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단호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브닌나의 구박 때문에 간곡히 기도하여 아들을 얻게 되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한나가 기도하였기 때문에 사무엘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브닌나를 통하여 구박하게 하심으로 한나로 기도하게 하여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신 아들을 주신 것이다.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사람보다 수수께끼를 낸 사람이 답답해서 답을 말해 버리는 것처럼,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슬퍼하는 한나를 브닌나를 통하여 격동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사사시대 350년 암흑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왕정시대를 열게 될 왕을 세우는 막중한 일을 할 마지막 사사를 보내기 원하셨다. 그런데 한나는 매년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실로에 올라오지만 자신의 신세를 한탄만하지 기도할 생각을 하지 않자 다급해진 하나님께서는 도탄에 빠진 이스라엘을 인도할 사사를 한나의 몸을 통하여 보내기 위하여 브닌나를 움직여 한나를 격동시키신 것이다. 그리하여 기도하게 만드신 것이다. 오늘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사역을 위하여 우리가 생각지 못하는 귀한 것을 마련하시고 주시기 원하는데 우리가 신세한탄만 하고 기도할 생각을 하지 않을 때 기도하라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신앙상담(469)693-3737

2009-11-12

[목회칼럼]고난주간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으며 다음 주는 종려주일로 고난주간을 맞이한다. 사순절은 부활하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40일 이전에서부터 회개, 구제와 금식을 통하여 준비하는 기간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6개월 전에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의 절정을 맞이했다. 5천명, 4천명을 배부른 먹인 이적으로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제자들은 변화산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가 장차 정치적인 메시야 즉 왕으로 등극하리라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제자들 사이에 누가 높은가라는 문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잘 나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돌연 인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잡혀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들의 욕망이 성취되기 위하여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자들끼리의 자리다툼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가장 높은 두 자리에 앉혀달라는 요청으로 심화되었고, 급기야는 6개월의 긴 싸움이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조차 누가 높으냐는 문제로 싸움판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므로 서로 섬기라는 본을 보여주셨고, 그것도 모자라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고 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는 도중 발을 멈추시고 제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셨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저희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자들만이 남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그리고 반목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하나 되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는 인종(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성(남자나 여자나), 그리고 사회계급(주인이나 종이나)를 초월하여 하나되게 하신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런 자들만이 진정한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2009-04-03

[목회칼럼]내 모습대로 살아가기

‘가이드 포스트’지의 창간자인 ‘노만 빈센트 필’박사는 최고의 인생을 사는 방법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러셀 나이프’라는 사람은 연극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인데, 그는 유명인이 되기 전에 자신이 좀 유명해 지고 싶었는데 그의 용모가 따라주지를 않았습니다. 늘 초라하고 볼품없는 그의 용모는 자신을 위축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안경 낀 자신의 모습을 바꾸기 위해 콘텍트 렌즈로 바꾸어 끼었고, 유명하게 생각되는 배우들의 연기를 모방하기를 힘썼습니다. 연극계에 뛰어들어 유명한 배우들의 성격을 흉내 내는 일을 계속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변변한 배역을 얻는 데는 늘 실패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총명한 연출가가 이 사람을 이 사람의 본래적인 모습의 배역을 맡겼습니다. 촌스럽고 수줍어하며, 안경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배역을 맡겨 연기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진짜 연기를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연극 비평가들은 이 사람의 천연덕스럽고 자연스러운 연기에 극찬을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 사람은 연극에서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고 합니다. ‘윌리암 모리셋’은 영업사원으로 많은 성공과 부를 얻었지만 만족하지 못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항공기와 관련된 일을 구하다가 말단직을 얻을 수밖에 없어 주위 사람들로 부터 미친 선택을 하였다고 비난도 받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정력과 시간을 쏟아 일하였기에 부사장의 위치까지 올라가게 된 일을 노만 필 박사는 소개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가게 될 때 인생에서 많은 기쁨과 성취를 얻게 될 것을 교훈합니다. 대학의 갈 자녀들을 둔 부모님들은 이제 1주일 안에 입학 지원한 모든 대학으로 부터 결과를 듣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맞는 대학으로 가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로 발휘하여 더 좋은 미래가 있음을 격려하며 감사하시는 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신앙상담 : (972)395-9200

2009-03-27

[목회칼럼]상식을 딛고 나서는 믿음

마태복음 14장에서, 제자들을 먼저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뒤늦게 풍랑 중에 외로이 노 젖던 제자들에게로 다가가십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 물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외치죠. “내니 두려워 말라” 주님의 음성에 모두들 당황합니다. 바로 그 순간, 뚱딴지같은 베드로의 외침이 들려옵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옵소서.” 베드로의 그 도전이 제게는 큰 충격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이 베드로의 담대함을 보십시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잠시 후, “오라” 주님의 허락에 베드로는 물 위로 뛰어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거기 그 물 위에 서게 됩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두려움이 엄습하고 그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절규하는 제자를 주님 붙드시고, 함께 배에 오르십니다. 어떤 분들은 여기서 베드로의 흉을 봅니다. “아니 물 위를 걸었으면, 끝까지 주님을 봐야지. 왜 거기서 두려워해 물에 빠져. 창피하게...” 예, 물론 아쉬움이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날, 그곳에서, 물 위를 걸은 제자는 단 한 사람, 바로 그 베드로뿐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니 인류 역사 상, 물 위를 걸은 사람은 예수님하고 베드로, 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날,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은 그 베드로가 무척이나 부럽습니다. 그리고 “주여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그 믿음의 도전을 외치는 베드로의 음성이 저의 것 되었으면 하고 소원합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욕심 없으세요? 남들은 다 상식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사는데 (물고기는 물속에, 사람은 배 위에!) 유독 그날, 베드로만이 그 ‘믿음’ 으로 인하여, ‘상식’ 이라는 울타리를 과감히 제치고 나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저의 인생과 여러분의 인생이 단순히 그 ‘상식’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았으면 하고 소원합니다. 한번 사는 인생, 한번 믿는 예수, 한번 세워가는 하나님의 교회인데, 이 것 저 것 따져보고, 그래서 지극히 상식적인 일들만을 결정하고, 그 일들만을 감당하는 신앙생활 안 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 저는 이 베드로와 같이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안 돼’ ‘가만히 있어’ 또는 ‘잘난 척 하지 마’ 라고 이야기 하지만, 저는 우리 모두 ‘물위를 걷고 싶다고’ 과감한 도전의 기도를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즘 여러 가지로 어렵다고 합니다. 맞아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요즈음 새로운 직장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수입도 줄었습니다. 그게 우리 인생, 환경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그 때, "다 그래요. 그러니 그러려니 합시다." 하고 만다면, 여러분 그때 우리는 상식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물론 그게 뭐 특별히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죠. 하지만 그때, 우리 모두 베드로와 같이 믿음의 도전을 하자는 것입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옵소서." "주여, 상황은 어렵고, 다들 안 된다고 말하지만, 내가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기복신앙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나의 피난처 나의 방패 나의 도움 되시는 주님을 바라기 때문에, 나도 물 위를 걷고 싶다는 바램을 말씀드립니다. 주여, 나로 물 위로 걷게 하시옵소서." 그때, 우리는 상식이라는 울타리를 딛고 일어나 과감한 믿음으로 인생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목회상담(972-245-1419) http://yonhap.org

2009-03-20

[목회칼럼]작은 것을 꾸준히

저는 미국 달라스에 온지 20년 만에 가장 어려운 경제 환경을 지금 접하고 있습니다. 지금 모든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는 시기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작은 것을 꾸준히 하여 큰 것을 이룰 것을 기대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프란시스 파크맨은 일생의 상당 기간 동안 육체적인 고통이 너무나 극심해 한번에 5분 이상 일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시력도 너무 나빠 종이 한 장에 아주 큰 글씨 몇 자 밖에 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식으로 20권에 달하는 위대한 역사서를 남겼습니다. 불굴의 의지를 발휘해 자신이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한 것입니다. 장애물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물을 뛰어 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성공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다시 시도하고 또 다시 시도하는 데 능력이 있습니다.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였던 파데레프스키는 “나는 천재이기 이전에 힘들고 단조로운 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작은 것을 아끼고, 작은 것을 꾸준히 반복해서 시도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티끌모아 태산입니다. 미래는 오늘 심는 작은 것에 의해 결정됩니다. 작은 배려, 작은 격려, 작은 칭찬, 작은 친절, 작은 미소, 작은 저축, 작은 섬김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야할 때입니다.

2009-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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