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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 신약의 인물탐구 - 빚진 자

덴버예닮장로교회 윤우식 목사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이 구절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빚진 자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여기에 ‘빚 주는 사람’은 ‘다네이스테스’로 ‘돈을 빌려주는 사람, 채권자’입니다.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친분에 의해서 돈을 빌려주게 된 사람이 아니라 돈을 빌려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오백 데나리온’, 다른 한 사람에게는 ‘오십 데나리온’을 빌려주었습니다. 여기에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 제국의 화폐 중에 하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화폐 개혁을 일으킬 때까지 로마에서 중요하게 통용되는 화폐 중에 하나였습니다. 흔히 1데나리온을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당시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대개 그 정도의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일당이 현대의 일당의 가치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날의 일당으로 환산을 한다면 $100 정도가 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노동자의 일당은 밥 세 끼를 겨우 먹을 수 있는 돈으로 지금으로 한다면 $30도 안 되는 돈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500데나리온은 그런 노동자가 500일을 꼬박 일해서 모아야 하는 돈입니다. 그리고 50데나리온은 50일을 일해서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이 두 채무자가 모두 ‘갚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 갚을 것에 해당하는 단어가 ‘아포디도미’로 사용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다, 포기하다, 지불하다’의 뜻입니다. 즉, 갚을 여유가 없다는 표현과 함께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포기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의미입니다. 여윳돈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재산을 다 포기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인 겁니다. 그런데 채권자는 이들에 대해서 채무를 면제해 줍니다. 성경에는 ‘탕감해 주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원어는 ‘카리조마이’인데, ‘거저주다, 은혜를 베풀다, 용서해 주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빚에 대해서 모두 대신 지불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시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당연하게 더 많이 빚진 자가 더 고마워하고, 더 사랑할 것이라는 것이 시몬의 대답입니다. 물론 우리도 시몬과 같은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500과 50의 차이는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시몬의 대답을 정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빚진 자’에게 있습니다.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50데나리온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누가 더 능력이 없는 사람일까요?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입니다. 그 마저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빚진 자’는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50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빚을 탕감을 받은 후에 그의 수중에는 얼마의 돈이 있을까요? 반면에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빚을 탕감 받은 후에 그의 수중에 얼마가 남아 있을까요? 이 말씀은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은 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면 누가 더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할까요? 아주 많은 죄를 지은 사람, 아주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런 사람이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은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닌 죄를 지은 사람은 용서함을 받은 후에 덜 사랑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심각성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하다, 대수롭지 않다는 기준을 하나님은 매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죄가 더 심각합니까? 아니면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죄가 심각합니까? 그 대가로 일어난 일들을 보면 더 심각하고, 덜 심각한 것을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심각한 징계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심각한 죄만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죄가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대신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 좀 한 것과 사람을 죽인 것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심각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500데나리온을 빚졌는가? 아니면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인가? 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빚진 자’임을 바로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갚지 못할 심각한 빚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서 탕감을 받게 되었는가? 이것을 바로 아는 사람이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건, 교회에 실망을 해서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죄’에 대해서 스스로 등급을 매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것은 좀 낮은 등급, 누구는 높은 등급의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A등급이상의 심각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그 심각함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12월 성탄절. 우리의 이 심각한 상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바로 알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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