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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인물탐구-섬기는 여인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누가복음 8:1~3. 예수님께서 복음 사역을 하실 때에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닌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 남는 기적을 본 후에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이런 사람이 왕이 된다면 물고기 잡으러 갈 필요도, 고되게 농사를 지을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위를 걷고, 놀라운 신적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왕이 된다면 로마로부터 충분히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주변 나라들이 범접하지 못할 나라가 건설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런 인기 때문에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어서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 흠을 잡아서 그를 잡을 구실을 찾기 위해서 따라 다닌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을 따른 여인들에 대한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악귀가 나가고, 병 고침을 받은 여인들입니다. 악귀에 사로잡힌 것은 평생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악귀가 지배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여인들입니다. 그 중에 막달라인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린 자’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에도 그 자리에 있었고, 장사된 후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순간을 맨 처음 목격하기도 합니다. 귀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무언가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나의 의지보다는 지배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서 간다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날에는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무언가에 의해서 지배를 당한 사람은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중독’이라고 말을 합니다. 마약에 중독이 되고, 알코올에 중독이 되며, 게임에 중독이 된 사람. 때로는 관계 중독, 사랑 중독 등으로 말하는 중독도 있습니다. 이런 삶은 그 중독되게 하는 것으로 인해서 삶이 황폐해져 버립니다.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지 못하게 됩니다.악귀에 의해서 지배를 받던 여인이 그것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완전한 치유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청소가 된 그 안에 무엇이 채워지고, 무엇으로 인해서 지배를 받는 삶이 되느냐 입니다. 이 여인은 성령으로 지배를 받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삶은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지켜지고,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삶입니다. 병 고침을 받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인들은 자신의 삶이 병과 악귀로 인해서 황폐한 삶에서 해방이 된 후에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여인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섬기다’는 ‘디아코네오’인데, ‘식사시중을 들다, 돌보다’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은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자기들이 소유로 식사 시중을 들 듯이, 아픈 사람을 돌보고 간호하듯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섬긴 것은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 은혜가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며,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도 다양할까요? 다양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가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황폐한 삶에서 구원하신 것처럼 영원한 죽음으로 황폐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구원자이시기에 그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부자가 되고, 권력을 얻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분이 내 삶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성탄절 또한 이런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다시 깨닫고, 기념하며, 그 은혜를 기뻐하는 날입니다. 왜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까? 어떤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열광을 합니까? 그 분이 유일하신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좇는 은혜가 2024년 새로운 한 해에도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인물탐구 신약 구원자이신 예수님 관계 중독 병과 악귀

2024-01-08

신약 인물탐구: 요셉

 요셉을 우리는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님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남편인 것은 이해가 되는데, 정말 예수님의 아버지입니까? 예수님의 탄생에 요셉은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셉을 통해서 어떤 믿음을 본 받을 수 있습니까? 요셉에 대해서 마태복음 1장1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은 남자와 여자가 약혼을 한 후에 일년 동안 서로가 만나지 않고 떨어져 지냅니다. 약혼 후 결혼까지의 기간은 여자의 순결을 확인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 ‘잉태된 것’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아주 큰 사건입니다.         먼저 마리아의 편에서는 돌에 맞아 죽을 일입니다. 깨끗하지 않은 여자라는 겁니다. 그리고 요셉에게도 동거할 수 없다는 규칙을 깨고 약혼한 여자와 동거했다고 오해를 받고 정죄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입니다. 이 부분의 원어를 보면 ‘앤 가스트리 에쿠사 에크 프튜마토스 하기우’로 되어 있습니다.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을 하면, ‘거룩한  바람에 의해서 자궁 안에 가지게 되었다’입니다. 여기에 ‘거룩한 바람’은 곧, 성령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에서 ‘영’에 해당하는 ‘루아흐’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왜 ‘성령으로 잉태된 것’,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 된 것은 첫 번째는 ‘처녀가 잉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7장14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도무지 불가능한 가운데서 유다가 다시 회복하도록 해주심에 대한 약속의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메시야의 구원’입니다. 죄로 인해서 영원한 죽음 가운데 있는 인간이 그 죄를 탕감 받는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죄의 탕감’이 ‘메시야’로 인해서 가능한 현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가능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는 징조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해서 요셉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마태복음 1장19절 말씀을 보면,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가만히 끊고자 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조용히 파혼하다’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절대적으로 준수하는 요셉은 동거도 하기 전에 잉태한 약혼녀 마리아를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자!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하는 형벌에 해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 대해서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공의를 집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랑만이 필요한 겁니다. 또한 이 사랑도 내가 누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누군가가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마치 하나님이 공의를 집행하시는 그 자리에 자신이 서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파혼을 결심한 요셉에게 주의 사자의 말씀이 전해집니다.          마태복음 1장20절에,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주의 사자는 요셉을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자손’은 ‘휘오스는 ‘아들, 남자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메시야에 대한 징조에 대한 확인입니다. 첫 번째가 ‘처녀의 잉태’이며, 두 번째가 ‘다윗의 자손’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예언하신 ‘메시야’의 탄생의 징조이며, 증거입니다. 이것을 요셉에게 다시금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재림’입니다.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입니다. 재림의 징조를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징조’에 관심이 있지 정작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왜 재림을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잊고 있는 모습입니다. 징조를 보고, 확신하게 된 요셉은 어떻게 합니까? 마태복음 1장24절 말씀에,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분부’는 ‘프로스타쏘'인데, ‘명령하다, 지시하다’의 뜻입니다. 요셉은 ‘명령’에 대해서 순종합니다. 이것이 의로운 요셉의 행동입니다. 믿음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재림의 메시야’에 대해서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징조를 볼 때에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십니까? 성경을 읽어서 징조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 징조를 보고 무엇을 순종하고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행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십니까? 깨닫고, 행하는 자리에까지 가는 그런 믿음을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인물탐구 신약 자손 요셉 남편 요셉 약혼녀 마리아

2023-10-27

신약의 인물탐구: 데오빌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데오빌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1차 수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도들의 행적에 대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전달합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헬라어 원어를 보면, ‘데오필로스’인데,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몇몇 신학자는 이 데오빌로가 어느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당시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데오빌로에 대해서 ‘각하’라는 ‘크라티테스’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이 호칭은 당시 로마 총독을 부를 때에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에도 ‘벨릭스, 베스도’ 총독을 부를 때에도 이 호칭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해석은 데오빌로는 특정한 인물을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오빌로가 어느 특정한 인물이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키든, 누가복음의 내용은 단순한 어떤 특정한 인물에게 쓰여졌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일차적인 독자는 특정한 사람이라 해도, 전체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 서신인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등이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라고 해서 그 사람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만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서 편지를 쓰게 하심으로 오늘 날 그리스도인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사도행전’도 그리스도인 전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만으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그 내용을 특정한 사람 데오빌로에게 기록한 것은 당시 헬라 문학에서는 작가가 자신의 글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헌정하는 유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데오빌로를 수신자로 기록했다는 것은 데오빌로가 당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누가복음 1장1절-3절.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복음 1장4절. 여기에 ‘각하가 알고 있는 바’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 ‘알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가 ‘카테케오’라는 단어로, ‘가르치다, 배워주다, 깨닫게 하다’의 뜻입니다. 단순하게 데오빌로가 가지고 있는 궁금증이 아닙니다. 데오빌로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고, 배우고, 깨달은 상태입니다. 거기에 더 확실한 내용을 누가복음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소위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율법, 말씀에 대해서 능통하다고 자부하는 종교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위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데오빌로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가 아니라 깊이 깨닫고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겁니다. 당시 상황은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박해와 핍박이 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고상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핍박과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위치에 있는 데오빌로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최고의 지식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또한 어떤 것이 최고 가치의 지혜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의 학문을 아는 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알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위대한 지혜와 지식은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우리는 예수를 알고, 말씀을 깨닫는 것에 열심을 내고 있을까요?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그 누구에게도 뒤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살면서 정작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애타하지도, 답답해 하지도 않습니다. 이 당시 데오빌로 정도가 된다면 세상적으로 남 부럽지 않을 삶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또한 그냥 믿는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믿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적인 욕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알고, 깨닫기를 원하는 믿음의 갈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 말씀을 바로 알고, 깨닫고 신앙 생활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런 믿음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인물탐구 신약 정작 그리스도인 당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 전체

2023-08-04

목회칼럼 / 신약의 인물탐구 - 빚진 자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이 구절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빚진 자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여기에 ‘빚 주는 사람’은 ‘다네이스테스’로 ‘돈을 빌려주는 사람, 채권자’입니다.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친분에 의해서 돈을 빌려주게 된 사람이 아니라 돈을 빌려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오백 데나리온’, 다른 한 사람에게는 ‘오십 데나리온’을 빌려주었습니다. 여기에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 제국의 화폐 중에 하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화폐 개혁을 일으킬 때까지 로마에서 중요하게 통용되는 화폐 중에 하나였습니다. 흔히 1데나리온을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당시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대개 그 정도의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일당이 현대의 일당의 가치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날의 일당으로 환산을 한다면 $100 정도가 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노동자의 일당은 밥 세 끼를 겨우 먹을 수 있는 돈으로 지금으로 한다면 $30도 안 되는 돈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500데나리온은 그런 노동자가 500일을 꼬박 일해서 모아야 하는 돈입니다. 그리고 50데나리온은 50일을 일해서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이 두 채무자가 모두 ‘갚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 갚을 것에 해당하는 단어가 ‘아포디도미’로 사용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다, 포기하다, 지불하다’의 뜻입니다. 즉, 갚을 여유가 없다는 표현과 함께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포기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의미입니다. 여윳돈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재산을 다 포기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인 겁니다. 그런데 채권자는 이들에 대해서 채무를 면제해 줍니다. 성경에는 ‘탕감해 주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원어는 ‘카리조마이’인데, ‘거저주다, 은혜를 베풀다, 용서해 주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빚에 대해서 모두 대신 지불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시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당연하게 더 많이 빚진 자가 더 고마워하고, 더 사랑할 것이라는 것이 시몬의 대답입니다. 물론 우리도 시몬과 같은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500과 50의 차이는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시몬의 대답을 정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빚진 자’에게 있습니다.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50데나리온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누가 더 능력이 없는 사람일까요?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입니다. 그 마저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빚진 자’는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50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빚을 탕감을 받은 후에 그의 수중에는 얼마의 돈이 있을까요? 반면에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빚을 탕감 받은 후에 그의 수중에 얼마가 남아 있을까요? 이 말씀은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은 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면 누가 더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할까요? 아주 많은 죄를 지은 사람, 아주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런 사람이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은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닌 죄를 지은 사람은 용서함을 받은 후에 덜 사랑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심각성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하다, 대수롭지 않다는 기준을 하나님은 매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죄가 더 심각합니까? 아니면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죄가 심각합니까? 그 대가로 일어난 일들을 보면 더 심각하고, 덜 심각한 것을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심각한 징계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심각한 죄만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죄가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대신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 좀 한 것과 사람을 죽인 것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심각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500데나리온을 빚졌는가? 아니면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인가? 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빚진 자’임을 바로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갚지 못할 심각한 빚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서 탕감을 받게 되었는가? 이것을 바로 아는 사람이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건, 교회에 실망을 해서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죄’에 대해서 스스로 등급을 매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것은 좀 낮은 등급, 누구는 높은 등급의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A등급이상의 심각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그 심각함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12월 성탄절. 우리의 이 심각한 상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바로 알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목회칼럼 인물탐구 예수 그리스도 화폐 개혁 당시 노동자

2022-12-23

신약의 인물탐구- 나인성의 행렬

 우리가 잘 아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 관한 말씀은 4복음서 중에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의 병을 고치신 후에 ‘나인’이라는 성으로 향하십니다. 여기에 나인은 갈릴리의 북쪽의 작은 성읍입니다.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성으로 가신 것은 이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의 예수님의 행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우연하게 만나서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여러 성읍이 있었고, 큰 성읍도 있었지만 이 작은 성읍으로 향하신 것은 과부의 삶에 일어난 문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선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나인성을 향해서 가실 때에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누가복음 7장11절. 여기에 ‘많은 무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무리에 해당하는 원어가 ‘오클로스’로 ‘대중, 민중’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 나오는 제자와는 대조가 됩니다. 제자는 ‘마태테스’로 ‘제자, 배우는 사람, 생도’의 뜻입니다. 성경은 지금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두 부류로 나눕니다. ‘배우는 사람’인 ‘제자’와 ‘그냥 많은 대중, 군중’입니다.      오늘날에도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는 두 부류가 존재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과 ‘군중’입니다. 그러면 배우는 사람인, 제자는 군중과 무엇이 다를까요? 지금 우리는 군중입니까? 아니면, 배우는 사람입니까? 그런데 여기에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나인 성’에서 나오는 무리입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누가복음 7장12절. 여기에 ‘많은 사람’으로 해석이 된 부분도 ‘오클로스’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군중과 함께 독자를 잃은 과부 어미도 함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바로 죽은 아들입니다. 나인성에서 나오는 무리의 부류를 보면, 이미 죽은 아들과 아들을 잃은 과부 어미, 그리고 군중들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과 같습니다. 죄로 인해서 이미 죽은 삶, 그리고 이 땅에서 죄와 악으로 인해서 고통받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어떤 해결책도 알지 못하고 따라가는 군중입니다. 이 무리들이 성문에서 만난 것은 바로 ‘예수님과 제자, 군중’의 행렬입니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제자를 만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을 만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누가복음 7장13절.   ‘불쌍히 여기사’는 ‘스플랑크니조마이’로 ‘동정하다, 측은히 여기다’의 뜻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12회 사용된 단어로, 단순한 동정의 의미가 아니라 ‘창자가 뒤틀릴 정도의 안타까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행렬을 보시면서 ‘창자가 뒤틀릴 정도의 측은함’을 느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홀로 남은 여인에게 하나 남은 아들마저 죽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잃음, 아픔이 아니라 방향과 목적, 해결책을 모르고 그냥 영원한 죽음의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에 대해서 100% 이해할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교회 밖의 사람들도 구원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인생을 보면서 그렇게 심각하게도, 창자가 뒤틀릴 정도로 심각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마저 모르는 인간을 위해서, 인간의 문제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에 허구라고, 거짓이라고 말하며 믿지 않습니다. 심각성이 납득이 가고, 믿어져서 장례 행렬이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일은 무덤에 아이를 묻는 것 밖에 없기 때문에 그냥 그 길을 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무덤’이 아니라, ‘죽음’이 아니라, ‘생명’임을 알게 된 겁니다. 믿어지지 않습니까? 납득이 가지 않습니까? 그냥 지금 그대로 사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다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 ‘생명’을 깨닫고, 예수님을 통해서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인물탐구 나인성 나인성 과부 제자 군중 장례 행렬

2022-10-07

신약의 인물탐구- 한 백부장

 오늘 함께 살펴볼 신약의 인물은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한 백부장’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마태복음 8장5절. ‘백부장’은 ‘헤카톤타르케스’로 수하에 50명~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지휘관입니다. 현대 군대로 말한다면 중대장 정도 되는 계급입니다. 그런 백부장에게 한 하인이 중풍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백부장에게 이 하인이 어떤 하인인지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누가복음 7장2절.   ‘사랑하는 종’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종은 둘로스로 단순한 종의 의미를 넘어서 노예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종에 대해서 ‘사랑하는 종’이라는 표현이 사용돼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하다’는 ‘엔트모스’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존경 받는, 고귀한’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인격도, 자유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종, 노예에 대해서 ‘존귀한’, ‘고귀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백부장이 그의 종, 노예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종이나, 노예가 없지만 업주나, 상사의 위치에 있으면서 직원이나, 팀원을 마치 종이나, 노예를 대하듯, 인격적으로 모욕하며, 함부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노예제도, 종이라는 제도가 있던 당시 상황에서 백부장이 그의 수하에 있는 종을 ‘존귀하다’, ‘고귀하다’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아주 드문 것이며, 백부장의 뛰어난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백부장은 당시 유대인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누가복음 7장5절.         유대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여기에 ‘사랑하다’는 ‘아가파오’로 ‘사랑하다, 마음에 품다, 인격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다’의 의미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을 위해서 회당을 지었습니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의 표현으로 그들을 위해서 회당을 지어준 지도자였습니다. 밖으로뿐 아니라 자신의 노예에게도 인격적으로 대하며, 존귀하게 여겼습니다. 노예를 존귀하게 여기면 주인으로 위신이 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변의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지금 종이 중풍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유대인의 장로들이 그를 대신해서 예수께 간청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간청을 듣고 종의 병을 고쳐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백부장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이 때 백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누가복음 8장6절,7절.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하다’와 자신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감당하다’가 다른 단어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익카노스’로 ‘충분한, 넉넉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감당하다’는 ‘악시오’로 ‘고려할 만하다, 당연하게 생각하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은 성자하나님으로 이 땅에 ‘메시야’, ‘그리스도’로 오신 분이신데, 그 분이 자신의 삶에 들어오시기에 자신은 죄인이며,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예수님 앞에 나가가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죄로 인해서 죽음을 당하는 의미를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인인 상태를 인정함과 함께 그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야, 그리스도로 오셨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대함을 얻게 되며, 구원에 대한 예언을 정확하게 표현한 ‘믿음의 고백’입니다.예수님은 백부장의 이런 행동을 보시면서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7장9절. 백부장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믿는 믿음의 삶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회당을 지었습니다. 또한 그의 생활에서 비록 ‘노예’, ‘종’이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겼습니다.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주여, 주여’하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믿음입니까? 백부장과 같이 ‘이만한 믿음’으로 사는 이 시대의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목회칼럼인물탐구 백부장 종이 중풍병 인격도 자유 당시 노예

2022-08-01

신약의 인물탐구- 거짓 선지자(False Prophets)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태복음7장15절. ‘거짓 선지자’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선지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는 구약에서부터 나오는 직분으로 히브리어로는 ‘나비’입니다. 뜻은 ‘대변인, 예언자, 말하는 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창세기20장7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 나비라는 단어의 어원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아바’, ‘알리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실 때에 ‘선지자’가 그 말씀을 대언하고, 알린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나바’, ‘부글부글 끓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주 강력하게 선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견해는 ‘나부’라는 ‘부르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택하셔서 부르셨다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견해 모두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는 사람이 바로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프로페테스’로 ‘선지자, 예언자’의 의미입니다. 신약에 세례 요한이 대표적인 선지자입니다. 그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거짓 선지자’는 ‘세우도프로페테스’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거짓말을 하는 선지자’입니다. 거짓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교묘하게 바꾸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이런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라고 말씀하는데, ‘삼가다’는 단어는 ‘프로세코’로 ‘주목하다, 주의하다’의 뜻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에게 돌리다, 따르다’라는 의미도 함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삼가라는 것은 단순하게 거짓 선지자를 따르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참 선지자’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의 ‘참 선지자’는 누구일까요? 흔히들 목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렸습니다. 이 시대의 ‘참 선지자’는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계시의 종결’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계시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신비적으로 알아내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시가 바로 성경을 통해서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선지자’가 됩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도 선지자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의 예언과 계시를 세상 가운데 선포하고, 알려야 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거짓 선지자’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 성경이 아닌 것을 교묘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포장해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경우는 마치 자신의 주장을 성경을 빗대어서 하나님의 뜻인 냥 말하는 경우입니다. 성도라면, 성경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거짓 선지자’를 조심해야 하지만 나 자신이 ‘거짓 선지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 선지자’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 계시, 참 예언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뭔가 특별하게 해석하는 것이 성경을 잘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없던 해석을 하는 것이 신선한 성경 해석도 아닙니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도구로 내 주장을, 내 개인적이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은 참 선지자입니까? 아니면 거짓 선지자입니까? 이것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하고 주의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내 기준의 신앙이 아니라 말씀에 합한 신앙을 가진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인물탐구 prophets 말씀 하나님 거짓 선지자들 말씀인 성경

2022-06-13

신약의 인물탐구 - 안드레(Andew)

 오늘 살펴볼 신약의 인물은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입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요한복음 1장40절. 또한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인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은 그의 스승인 세례요한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세례요한보다 예수님이 더 위대하신 분이시고, 세례요한이 전하는 분이시기도 하기 때문에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서와 선지자들의 글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그들 역시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은 예수님을 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배격했습니다. 이유는 자신들의 생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당시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소위 모세의 율법이라고 하는 율법서와 선지자들의 글과 함께 유대인의 전통이 확고한 그들에게 그 틀을 깨는 예수님의 사역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가지고 있는 신념과 가치관을 쉽게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틀렸다고 하는 것에도 나의 신념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과학에서는 세상의 시작에 대해서 진화론과 창조론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을 살펴보면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증명되지 않은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조그만 물질이 생겨났으며, 빅뱅이라는 현상이 일어났는지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천지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창조론을 믿지 않으려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처럼 내게 들어와서 ‘나의 것’으로 된 신념, 가치관은 쉽게 바꾸지 않습니다. 그런 안드레가 스승인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게 된 것은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맹신 한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의 중심에 있는 의미를 잊지 않고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가르친 중심에 있었던, 메시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그는 예수님을 알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 베드로에게 가서 전합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요한복음 1장41절. ‘먼저’로 번역이 된 헬라어 ‘프로톤스(προτονs)’는 ‘첫 번째’, ‘제일 먼저’라는 의미입니다.        안드레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가장 먼저 알린 사람은 그의 형제 베드로였습니다. 이유는 그 발견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하지 않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확실하기 때문에 알린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로 인해서 살고, 예수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합니까? 너무나도 귀하고, 위대한 진리를 당장에 달려가서 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왜 우리는 안드레처럼 당당하게 선포하지 못할까요? 혹시 기독교를 종교로만 여기고만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서 살게 되었고, 예수님 때문이라면 생명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예수라는 이름의 간판을 걸어 놓고 그 안에서 먹고 마시는 친목단체나 교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곳입니다. 안드레처럼 말씀을 바로 알고, 예수님에 대해서 바로 깨닫고, 그 위대함을 알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인물탐구 안드레 메시야이신 예수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메시야 그리스도이신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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