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인물탐구- 나인성의 행렬
목회칼럼 (윤우식 예닮장로교회 담임목사)
오늘날에도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는 두 부류가 존재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과 ‘군중’입니다. 그러면 배우는 사람인, 제자는 군중과 무엇이 다를까요? 지금 우리는 군중입니까? 아니면, 배우는 사람입니까? 그런데 여기에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나인 성’에서 나오는 무리입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누가복음 7장12절. 여기에 ‘많은 사람’으로 해석이 된 부분도 ‘오클로스’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군중과 함께 독자를 잃은 과부 어미도 함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바로 죽은 아들입니다. 나인성에서 나오는 무리의 부류를 보면, 이미 죽은 아들과 아들을 잃은 과부 어미, 그리고 군중들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과 같습니다. 죄로 인해서 이미 죽은 삶, 그리고 이 땅에서 죄와 악으로 인해서 고통받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어떤 해결책도 알지 못하고 따라가는 군중입니다. 이 무리들이 성문에서 만난 것은 바로 ‘예수님과 제자, 군중’의 행렬입니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제자를 만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을 만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누가복음 7장13절.
‘불쌍히 여기사’는 ‘스플랑크니조마이’로 ‘동정하다, 측은히 여기다’의 뜻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12회 사용된 단어로, 단순한 동정의 의미가 아니라 ‘창자가 뒤틀릴 정도의 안타까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행렬을 보시면서 ‘창자가 뒤틀릴 정도의 측은함’을 느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홀로 남은 여인에게 하나 남은 아들마저 죽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잃음, 아픔이 아니라 방향과 목적, 해결책을 모르고 그냥 영원한 죽음의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에 대해서 100% 이해할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교회 밖의 사람들도 구원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인생을 보면서 그렇게 심각하게도, 창자가 뒤틀릴 정도로 심각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마저 모르는 인간을 위해서, 인간의 문제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에 허구라고, 거짓이라고 말하며 믿지 않습니다. 심각성이 납득이 가고, 믿어져서 장례 행렬이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일은 무덤에 아이를 묻는 것 밖에 없기 때문에 그냥 그 길을 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무덤’이 아니라, ‘죽음’이 아니라, ‘생명’임을 알게 된 겁니다. 믿어지지 않습니까? 납득이 가지 않습니까? 그냥 지금 그대로 사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다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 ‘생명’을 깨닫고, 예수님을 통해서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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