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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그리스도인 (2)

그런데 얼마 후 나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그 기숙사의 지하실에는 부엌이 하나 있었는데 미리 신청만 하면 거기서 자기 나라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부엌을 민족 식당이라고 부르곤 했다. 우리 한국 신부들은 대개 한 달에 한 번 꼴로 그 부엌을 이용하여 우리 음식을 즐겨 해먹었는데 요리하기 전에 각자 분담을 하여 찬거리를 사 와서는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재주가 좋은 신부들은 된장이나 고추장을 구해와서 우리를 즐겁게 했다. 오랫만에 맛보는 된장국은 정말 별미였다. 한 번은 이 된장국을 맛있게 해 먹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후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나이지리아 신부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방을 노크하고 들어오더니 다짜고짜로 "너희 한국 신부들 오늘 저녁 해 먹었지?"라고 물어왔다. 나는 "그래. 오래간만에 우리 음식 한 번 잘 먹었다"라고 자랑을 했더니 그 신부님 말이 "그런데 너희 한국 사람들은 똥을 먹고 사나?"라고 잔뜩 화가 난 듯하면서도 의미 있는 웃음을 지으면서 한 마디 내뱉었다. "너희들이 지하 식당에서 먹고 즐기는 동안 우리는 산보하면서 그 고약한 음식 냄새를 얼마나 맡아야 했는지 아느냐? 하두 냄새가 고약해서 멀리 피해버렸다"라고 했다. 나는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우리가 맛있게 해 먹은 그 된장찌개 냄새를 그들은 고약한 똥 냄새로 맡았던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고 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우리에게 맛있는 된장이 그들에게는 악취를 풍기는 음식이었다니. 나는 그 날 이후로 아프리카 신부들 몸에서 나는 그 역겨운 냄새를 더 이상 싫어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했다. 내 몸에서도 그들이 싫어하는 된장 냄새나 김치 냄새가 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사람 몸에서 나는 냄새는 음식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끼리 살 때는 몸을 자주 씻지 않거나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몸에서 냄새가 나는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여러 민족이 같이 살 때는 각자가 살면서 오랫동안 먹어온 음식 냄새가 몸에 배어 그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서양 음식만 오래 먹다가 김치나 된장국을 먹고 오는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벌써 2~3미터 전방에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문화 속에 오래 살다보면 누구든지 그 문화의 주요 음식 냄새를 풍기기 마련인 모양이다. 우리나라 음식에 '장아찌'라는 것이 있다. 무우를 알맞게 썰어 된장 속에 오래 넣어두면 장아찌가 되는데 그러면 무우 냄새도 아니고 된장 냄새도 아닌 바로 장아찌 냄새가 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사도 성 바오로께서 하신 냄새에 관한 좋은 내용이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1고린 215)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는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주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 냄새는 김치나 된장을 먹음으로 생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냄새 치즈를 먹는 서양인들의 냄새 또는 흑인들에게서 풍기는 그 민족 고유의 냄새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말과 행동 아름다운 향기로 사람들을 상쾌하게 해 주는 냄새나 향기가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 사기 횡령 청소년 추행 R1 비자 등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개입되어 있다. 그런 기사들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부끄럽다. 예수님은 좋지만 예수쟁이들은 싫다고 한 인도의 성자 간디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2011-01-18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자신을 귀히 여기려면 자기 관찰 필요

Q. 남의 인생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들다가도 나도 이 정도면 괜찮지 하는 마음으로 돌이키기도 합니다. 늘 가족이 먼저고 자식이 먼저고 옆 사람이 먼저였기에 남이 나를 칭찬해 주어도 '에잇 내가 뭘'이라며 나에 대한 긍정이나 자부심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공부하면서 부터 진심으로 나를 예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기도문으로 기도하면 진심으로 나를 귀히 여기고 나에 대한 긍정이나 수긍이 잘될까 여쭙니다. A. 사람이 자꾸 비교하면 끝이 없습니다. 죽 먹을 때는 옆에서 라면 먹는 것만 봐도 부럽고 라면 먹을 때는 밥 먹는 것만 봐도 부럽고 밥 먹을 때는 고기반찬 먹는 게 부럽지요. 이렇게 먹는 것 가지고 부러워하다가 먹는 게 해결되면 그 다음엔 옷 입는 게 부럽고 이 문제가 해결되면 또 그 다음엔 집 가지고 부러워하고 집 문제 다 해결이 되면 그 다음엔 차가 부럽듯이 이렇게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다 자기 고뇌가 제일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이 보면 어떻습니까?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문제 삼는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남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그것 가지고 뭘 괴로워하느냐'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남의 얘기를 듣고 '저 사람에게는 저게 큰 문제겠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각자 세계가 다른 것입니다. 상대의 관점에 따라 모두 다른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내가 편합니다. 그렇지 않고 나를 기준으로 타인을 보면 이해가 안 되니 자꾸 짜증만 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다른 사람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는 어떨까? 지금 내가 고민하는 이것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어떻게 생각할까? 인도에 가보면 하루 1000원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내가 가진 게 무척 많구나. 이 세상에 정말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구나. 그런 그들도 다 웃고 사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인생을 못 살겠느냐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마음 공부라는 것은 마음이 늘 경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마음의 성질이지만 그렇다고 마음 따라 다 갈 수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때로는 안 해야 되고 하기 싫은 일도 때로는 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보가 따르니 하기 싫더라도 이것은 하는 게 좋겠다 하고 싶더라도 이것은 멈추는 게 좋겠다 하고 싶은 것은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안 하는 게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까르마의 속박을 받고 있는 것이지 자유가 아닙니다. 이렇게 자기 관찰을 해본다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 정리가 됩니다. 이 원리를 알면 친구들 모임에 가서 '내가 이런 걸 부러워하는구나 이런 것에 열등의식을 좀 갖고 있구나 이런 데 끌리고 있구나' 하고 그냥 그걸 보고 일어나는 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큰 집을 보면 좋아하는 게 있구나 정원을 잘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그릇을 보면 좋아하는구나 그런 게 내 까르마구나 이런 정도로 자기를 관찰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그걸 따라가다 보면 과보로 인한 고통이 생깁니다. 그러면 또 그런 자기를 문제 삼지 말고 '이런 마음이 일어나네' 알면 됩니다. 이런 걸 보면서 '나한테 아직은 이런 부러움이 있구나 내 까르마에 이런 게 남아 있구나' 하고 자기를 보고 그냥 지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괴로움이 없습니다. 괴로움이 일어났다가도 금방 사라집니다. 이렇게 괴로움 없이 사는 것이 자기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특별히 무얼 갖고 기도하면 좋겠나 생각하지 말고 자기 관찰을 잘 해보세요.

2011-01-18

[변화] 종말과 벼락치기

종말 얘기가 또 나오고 있다. 도대체 몇 년에 한 번씩 홍역을 치러야 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종말이 임박했기 때문에 자꾸 종말을 논하는 것일지도 모르니 함부로 종말론을 짓밟기도 겁이 날 지경이다. 2011년도 종말론은 5월 21일로 날짜가 확정되었다. 이번에도 휴거가 일어날 것인가 말 것인가로 한바탕 소란이 일 것이고 라스베이거스의 프로 도박사들이 판돈을 훈훈하게 걸게 뻔하다. 교계에서는 "Back to Jerusalem"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이 말세를 이슈화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빨리 오시도록 실크로드를 통해 이슬람권을 전도하면서 최종 목적지의 예루살렘 유대인 14만 4000명을 전도하면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주장이다. 92년 10월28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당시 '다미선교회'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전답을 팔아 헌납하면서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자정 넘어 29일이 되어도 예수님은 나타나시지 않았다. 일부 기독교인들의 극단적인 헤프닝은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번졌고 기독교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혔다. 여태까지 말세론을 들고 나와서 사회적인 무리를 일으키지 않은 집단은 없다. 삶이 궁핍하다보면 종말론에 자꾸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현실이 어려운 사람들은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그러다 보니 극단적 종말론에 자꾸 말려든다. 평소 성경과는 거리가 먼 할아버지가 갑자기 성경을 붙들더니 며칠째 성경만 읽었다. 손자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왜 갑자기 하루 종일 성경만 읽어요?" 할아버지가 대답한다. "너도 시험 때가 되면 밤새도록 공부하잖니. 나도 마지막 시험 준비하느라 이렇게 벼락치기를 하고 있단다" 신앙생활은 절대 벼락치기가 안 통한다. 종말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속셈은 결국 벼락치기를 하겠다는 얘기다. 연초부터 5월달의 종말론이 걱정된다. 자칫 예수님이 5월달에 재림하셔서 "때와 시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분명히 말해줬는데 너희는 어떻게 미리 알고 일도 안하고 여기서 죽치고 앉아있었니 너희는 빼고 나머지 다 올라와!"라고 말씀하실까 걱정이다.

2011-01-11

[생활속에서] 탓의 문화

역사를 더듬어 보면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정복했을 때 그 당시 기독교의 모습은 강자가 아니라 매우 연약한 모습이었던 사실을 보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가 타락했을 때는 오히려 강자의 모습이었다. 교회의 종탑이 하늘을 찌르고 교회 권력으로 세상의 왕을 갈아치울 수 있을 만큼 강했을 때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서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은 '교회는 약한 모습일 때 오히려 더 강한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에 대해 매우 독특한 표현을 쓰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고후 5:17). 사실 교회 안에는 한 종류의 사람만 있으면 된다. 그것은 권력이나 경제력 학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변화 받고 새로워진 사람'이다. 특히 교회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진 사람을 요구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해 생각이 혁명적으로 바뀐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 자기처럼 의로운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후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도무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탓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한다. 뭐가 제대로 잘 안 되면 제일 먼저 '조상탓' '대통령 탓' '부모 탓'을 한다. 내 탓은 없다. 얼마 전 한국 경찰서에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붙잡혀 온 젊은이가 구속되었다.경찰의 심문을 통해 이 청년은 "그동안 하는 것마다 잘 되지 않아 고생했는데 그 이유는 가난한 부모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홧김에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예수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언제나 '남의 탓'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만 빼고 모든 사람들을 죄인으로 보고 자신이 죄인일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를 정확하게 만난 사람은 "나에게는 죄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나는 죄인입니다" 그 한 마디 고백이면 충분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주변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멀어져 갈 것 같은데 오히려 내게 가까이 온다는 것이다. 만일 내 주변 사람들이 점점 멀어져 가고 나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면 그것은 다른 원인이 아니라 스스로를 소외시킨 결과일 것이라고 보면 된다. 모든 것이 남의 탓이고 자기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점점 소외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은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도 아니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은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깊이 깨닫고 인정한다면 그는 자신의 삶 한복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2011-01-11

[사목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그리스도인 (1)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40년 정도 사시다가 프랑스로 돌아간 신부님이 계셨다.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우리 후배 신부들에게 들려주셨다. 한국에 왔으니 한국 사람이 되어보겠다고 서양음식은 거의 안 드시고 한국 음식을 즐겨 드셨다. 된장 고추장 김치는 물론이고 보신탕까지 드시면서 열심히 일을 하셨는데 위가 좋았던지 별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5년 후 본국 휴가를 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고향에 가서 동생 식구들과 얼마 동안 지내는데 사람들이 모두 신부님 몸에서 한국 냄새가 난다고들 했다. 자기도 모르게 몸에서 김치 냄새가 풍겼던 것이다. 빨래를 해주던 제수가 "신부님 옷에서도 한국 냄새가 난다"고 했고 마굿간에서 키우던 소들도 신부님이 가까이 접근하면 놀래더라고 하셨다. 프랑스 토종이 한국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냄새들이 있다. 사람 몸에서 나는 땀내나 노린내 같은 냄새들을 비롯해서 시골의 향수라고 하는 논밭에서 풍겨나는 인분 냄새 로션이나 향수 냄새 구두 뒷창에서 풍겨나는 악취 같은 치즈 냄새 갖가지 과일 냄새 등등. 이런 냄새들 중에는 향기로운 냄새가 있는가 하면 맡기만 해도 견딜 수 없는 역겨운 냄새도 있다. 나는 한 때 이런 냄새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냄새와 관련된 잊지 못할 추억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독특한 냄새가 나면 자연스레 냄새에 대해 흥미를 갖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로마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교회 기숙사에는 세계 각처에서 온 신부들 약 150여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는데 한 마디로 인종 전시장이라 할 만큼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특히 아프리카 신부들은 모두 흑인이었는데 그들과 처음 살아보는 우리에게는 얼굴 모습이나 머리카락 등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 그들과 함께 살다보니 재미있는 일들도 있었으나 눈에 거슬리고 힘든 일도 많았다. 같이 음식을 먹을 때 특히 빵을 손으로 집어 먹을 때 새까만 손으로 쥐었다 놓은 그 빵을 내가 먹어야할 때는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아예 먹지 않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기 어려웠던 것은 그 사람들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 무엇이라고 딱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한 냄새는 함께 살아본 사람이면 누구나 얼굴을 찡그리게 할 정도로 고약하고 역겨웠다.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고약한 냄새는 우리를 상당히 곤욕스럽게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생각을 바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래서 되겠는가? 내가 여기에 살면 얼마나 살까? 이 기회가 얼마나 좋은가? 여기에 사는 동안 저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봐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는 옆 방 건너방에 있던 나이지리아 신부와 가까이 지냈다. 자주 접촉을 하다 보니 사람이 아주 순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보다 현대문명에 덜 물이 들어서인지 착하고 순수했다. 그러나 그 냄새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을 아는 아프리카 신부들은 하루에 여러 번 샤워를 하면서 그 냄새를 없애려 해도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방문을 두드리면 "기다려라" 하고는 창문을 열어 방 안의 공기를 환기시키고는 세수를 하고 난 뒤에 문을 열어 주는 데도 방 안에 들어가면 여전히 그 역겨운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냄새를 맡으면서도 그 신부와 가까이 지내려고 노력했으니 이유를 알아보니 그가 순수했기 때문이다.

2011-01-11

[지혜의 향기] 올바른 자선의 의미

당연한 것 같은 얘기에도 때로 물음표를 한 번 씩 달아 보는 것이 아주 헛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은 이런 물음을 한 번 해 보자. 자선은 과연 좋은 것인가? 해야만 하는가? 안 그래도 딸랑딸랑 자선냄비나 고속도로 나들목에 하염없이 서 있는 노숙자를 못 본 채 그냥 지나칠 때는 마음이 좀 언짢기도 했는데 혹시 이런 자선은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우리 불자들의 마지막 목표는 성불이다.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는 괴로움이 바다와 같다. 어떻게하든 이 물결을 헤쳐 건너가 저편 기슭에 닿아야 한다. 거긴 아무 근심 걱정이 없고 윤회를 벗어난 열반의 땅이다. 이 바다를 건너자면 여섯 둥치 통나무로 엮은 육바라밀이라는 뗏목을 타고 저어가야 하는데 그 첫 번째 둥치가 보시바라밀이다. 보시란 나눠 주고 베풀어 주는 것이니 자선과 같은 말이다. 보시라는 통나무를 떼내어 버리면 뗏목 전체가 풀어 흩어져 물에 빠져 죽고 만다. 베풂에도 종류가 있겠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우선은 물질이다. 굶는 이에게는 밥을 목마른 이에게는 물을 주고 최소한의 옷과 잠자리를 마련해 줘야 한다. 그리고 병든 이에게는 약을 주고 보살펴야 한다. 세상에는 이렇게 자선을 행하여 죽어가는 목숨들을 살려내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종교적인 동기에서 이런 착한 일들을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요 고마운 종교다. 하지만 자선가가 넘치는 이러한 세상보다 진실로 더 아름다운 세상이 있으니 그건 바로 자선할 필요가 별로 없는 그런 세상이다. 그런데 그런 세상이 정말로 있을 수 있을까? 고통에는 크게 봐서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받아야만 하는 생리적인 고통인데 생로병사의 개인적인 고통이다. 태어남 늙음 죽음의 문제 같은 건 결국은 각자가 신앙심으로 맞닥뜨려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병은 좀 다르지만. 다른 하나는 잘못된 사회가 주는 고통인데 이건 혼자서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제도를 개선하고 사회 전체의 물질적 정신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 이렇게 수준이 높아진 나라가 문명국이요 선진국이며 정의로운 사회다. 진정한 불국토요 파라다이스다. 그런데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렇게 사회의 수준을 높이는데 종교가 오히려 걸림돌이 된 일도 드물지 않다. 문제의식을 처음부터 갖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이다. 마음 한 번 바꾸니 지옥도 천국이 되더라고 모든 것을 개인탓 전생탓 마음먹기탓으로 돌려 버린다. 그래도 이웃의 아픔에 대해 정말 마음 짠해 하면 얼마간의 보시를 부추겨 자위하고 잊어버리게 만들진 않았는지. 세모의 길모퉁이에서 딸랑딸랑 하는 자선냄비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나들목의 무숙자도 보살펴야 한다. 우선 푼돈이나마 자선을 행함이 백번 옳다. 하지만 거기서 맴돌고 더 넓고 깊게 나아가지 않는다면 더욱 더 이러한 자선만이 다급해지는 세상이 될 것이다. 여섯 둥치 바라밀 호는 혼자서 저어갈 수 없다. 여럿이 함께 타고 편대를 이루어 저 건너 열반의 땅에 이르자면 두 가지 나침반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깨침과 사회적인 깨침이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거친 바다에서 갈 길을 잃고 서로 부딪치며 성불의 저 언덕에서 점점 멀어져 갈 것이다.

2011-01-11

[생활속에서] '바복, 책복, 남복' 하는 새해되길

새해가 되면 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한다. 원래부터 '복'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마음에 잘 맞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기복신앙에 대한 알러지 반응을 가진 필자로서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얼마 전에 트위터에서 필자가 목사인지 모르고 축복의 글을 써주었다. "새해에는 대박 나세요." 순간 '아멘'으로 받을 뻔했다. 그리고 생각을 담아 썼다. "주신 축복을 감사하게 받습니다. 하지만 목사인지라 '대박'은 좀 부담이 되는군요. 대박 나지 않고 '쪽박'을 차도 좋으니 옳고 바르게 사는 축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민하고 생각해본다. 우리에게 복을 받으라는 말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내가 너무 기복신앙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민감한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기복신앙이 잘못된 것이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복의 근원이시기에 제대로된 개념을 가져야겠다 생각했고 주신 마음을 따라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새해에 바르게 복 받으시고 책임감 있게 그 복을 누리시며 남모르게 받은 복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혼자 적어 놓고 참 잘 적었다고 자화자찬했다. 줄이면 '바복' '책복' '남복' 이다. 〔〈【사실 기복신앙은 분명코 잘못되었지만 그렇다고 저주받는 것이 훌륭한 신앙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선택은 못 먹고 못 사는 것과 잘 먹고 잘 사는 것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르게 먹고 바르게 사는 것에 있다. 무조건 많이 받고 싶어하는 탐욕적인 기복신앙이 문제이지 바르게 받는 축복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이 풍요를 과다로 변질시켜 흥청망청한 것이 문제지 받은 축복에 죄의식을 느끼고 사는 것이 잘하는 것만은 아니다. 부유층의 무책임한 돈 잔치가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책임감 있게 복을 누리는 것은 또한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받은 복을 자신만의 것으로 여기고 이기적인 탐욕에 빠지는 것이 슬픈 일이다. 하지만 '배워서 남주자. 벌어서 남주자' 정신으로 살아가는 모습…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 모르게 복을 나누는 모습은 더욱 큰 기쁨이 될 것이다. 기복신앙을 극복하자는 것이 단순하게 지지리도 복 없는 인생을 살자는 말은 아닐 것이다.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삶은 고통을 축복으로 여기고 바르게 축복을 받고 누리고 나누는 길이다. 분명코 큰 고통도 우리가 믿음의 눈을 들면 축복의 통로임을 보게 된다. 그래서 고통을 축복으로 바꾸고 절망 찬양으로 바꾸고 눈물을 감사로 바꾸며 살아가는 모습 속에 진정한 축복의 삶이 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삶에 넘치는 현실적인 축복이 있을 때 바르게 받고 책임감 있게 누리며 남 모르게 나누는 삶도 또한 아름다운 축복의 삶일 것이다.

2011-01-04

[변화] 신묘년은 '미친 존재감' 으로

대학에서 요리를 전공하는 한 평범한 여학생이 MBC 드라마 '동이'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당시 극중 최고 상궁인 최상궁보다 더 눈에 띄는 존재감으로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때 인터넷에서는 그녀의 별명인 '티벳 궁녀'라는 단어가 검색순위 1위에 오르며 젊은 네티즌들 사이에 '미친 존재감'이라는 유행어가 급속히 퍼져나갔다. 어감이 조금 거칠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미친 존재감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시쳇말로 '제대로 밥값 한다'는 말이다. 사람은 '존재감'을 느끼지 못할 때 '소외감'을 느낀다. 가령 연말 파티에 갔는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자연스레 스멀스멀 올라오는 외로움과 불쾌감을 경험하게된다 칭찬은 존재감의 재확인이기에 7톤이 넘는 범고래 '샤무'도 춤을 추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밥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존재감'으로 산다. 시들해진 사람들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존재감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선교지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느끼고 발휘할 수 있는 곳이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작은 교회 공동체에서 존재감을 확인하려 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지도 모른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더 넓은 세상 그리고 나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장을 만나게되면 생각보다 쉽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굳이 선교지가 아니더라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늙고 병약한 노인들에게 소박한 나의 존재는 여전히 빛을 발휘할 것이다. 새해를 맞이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바로 그곳에 서 있어야 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의 '무존재감'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양한 사람으로 만드신 이유는 우리 모두가 어딘가에는 절대적으로 쓸모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2011년 신묘년 한해동안 보이는 사람앞에서의 존재감을 인정받으려 안간힘을 쓰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미친 존재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2011-01-04

[사목의 향기] 여행중 보게 된 교환원의 양심

오래 전 친구 신부와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패키지 여행으로 뉴질랜드와 호주를 다녀오는 여행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단히 유익한 여행이었다. 두 나라를 둘러본 것도 좋았거니와 그 여행에서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부당한 전화요금을 청구했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여행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세계 지도를 그리는 방식에 있어 고착된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나의 사고방식이 바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유럽이나 아메리카를 가 보아도 세계 지도를 보면 위는 러시아 알래스카 캐나다 아이스랜드 그리고 북극해 등이 있고 남쪽에는 호주와 뉴질랜드가 있고 남극이 있는데 호주와 뉴질랜드를 갔더니 자기들 사고방식으로 지도를 그려 놓았다. 그들은 호주와 뉴질랜드를 맨 위에 놓고 밑으로 내려오면서 파푸아뉴기니 필리핀 중국 우리나라 만주 러시아 등의 순서로 세계 지도를 그려 놓은 것이다. 처음에는 이상하고 다소 놀랬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게 그리는 것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지구는 둥그니까 지면상으로는 얼마든지 기준점을 바꾸어 세계 지형들의 위치를 바꾸어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참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여행이 좋구나! 눈으로 보면서 배우니 배움이 꼭 책이나 교실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호주의 다양한 동식물들을 구경하며 좋은 분위기 속에서 관광을 했는데 호텔에서 자고 나올 때 사소한 문제가 하나 생겨 기분이 언짢았다. 전 날 저녁에 우리가 알고 있던 호주 친구에게 장거리 전화를 한 번 했는데 아침에 호텔 교환실에서 그 장거리 전화 요금을 청구하기에 버스에 오르기 전이라 시간이 촉박하여 달라는 대로 주고 차 안에서 청구서를 찬찬히 훑어보았더니 여러 군데 전화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한 통화 밖에 하지 않았는데 여러 통화 전화한 것으로 되어 있어 나는 조용히 여행 안내자를 불러 사정을 말했다. 여행 안내자는 버스 기사에게 부탁하여 호텔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다. 호텔의 교환실에 들려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그 여성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5달러를 돌려주었다. 실수했다는 말도 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 빨개진 얼굴을 보니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한테 잘못한 일을 들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실수로 5달러를 더 청구한 것이 아니라 영어를 모를 거라 생각하고 고의적으로 더 청구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이 이런 식으로 당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즐거웠던 여행이 언짢아졌다. 영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거나 알더라도 실전 회화에는 입이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라 생각을 하였기에 그런 부당한 요금을 청구 했을 거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몇 몇 사람들은 알고도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돈이니까 점잖게 그냥 가자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 교환원이 하루에 여러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부당 요금을 받아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외화가 부당하게 유출된다? 문제는 돈 많은 한국 사람들 영어를 모르는 한국 사람들!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서히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봉이 되어 버린다는 생각을 하니 화가 났다. 우리가 영어를 모른다고 해도 이것은 그 교환원의 양심에 대한 문제이지만 세상에는 양심적인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서양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속여 먹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2011-01-04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감사할줄 알고 욕심 버려야

예술가로서 오랫동안 저의 관심은 내 작품을 통해서 어떻게 나의 독창성을 발견하고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많은 훌륭한 예술가에게 영향을 받아왔는데 그 영향을 너무 오랫동안 지녀온 것 같습니다. 그동안 받은 영향들을 떠나보내고 내 독창성을 알아차리고 싶은데 그것에 대한 스님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배움은 일정 기간 유지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자립을 해야 돼요. 어릴 때는 부모가 돌봐줘야 하지만 사춘기가 넘으면 자립을 시도해야 되고 성년이 되면 완전히 독립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춘기를 넘기고 성년이 될 때까지 부모에게 보살핌을 받아버리면 자립이 안 돼 결국 마마보이가 되어버립니다. 지금 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세월이 흘러 저절로 자신도 모르게 그 스승의 예술 세계를 계승하든지 둘째 일찍 독립해서 자기만의 세계를 스스로 구축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스승의 영감을 받아 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걸 떠나 자기대로 하고 싶어 한다면 이런 것을 욕심이라고 합니다. 지금 욕심을 내고 있기 때문에 심리적 안정이 없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부모는 나를 보살펴주는 존재이기도 하고 나를 속박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보살핌은 받고 속박은 안 했으면 좋겠다 자꾸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인간관계에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부모 자식 간이 아니라 이 세상 어떤 관계에도 보살핌을 받을 때는 반드시 보살펴준 사람이 요구하든 안 하든 결국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보살핌을 받았으니 은혜를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부모가 속박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보살핌만 받고 간섭은 안 받겠다고 한다면 부모가 나를 속박하는 걸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은혜를 입은 부모를 은혜를 입은 스승을 원망하게 되는 이런 불행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부모는 낳아주신 것만으로도 키워주신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을 내야만 이것이 보금자리로만 작용하고 속박으로는 작용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처럼 내가 스승의 영감과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 그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그 기초 위에서 열심히 하면 되지 스승의 그늘에서 빨리 벗어나야겠다 이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인이 스승 밑에서 배웠는데 그걸 떠나 자기 독창성을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금방 이뤄지겠습니까? 그러니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창조는 모방에서 일어납니다. 그림이나 조각에서도 100% 완전히 새로운 게 생기는 게 아닙니다. 10명 것 모방하고 20명 것 100명 것 모방하다 보면 뒤섞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게 창조가 되는 겁니다. 이게 인류 역사입니다. 그러니 오리지널의 기준에서 보면 잘못한 게 되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창조가 되는 겁니다. 즉 모방하지 않고서는 창조는 없습니다. 모방을 해나가다가 거기서부터 창조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은 영향 받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새로운 세계에 대응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창조력이 생긴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공부할 때는 순수한 마음이라야 깊이 들어갑니다. 욕심을 내면 자꾸 기교를 피우려고 하거든요. 자꾸 이것저것 배워가지고 적당히 섞으려고 하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술을 하는 분이니 좋은 것을 본받았다 하면 거기서 빨리 독립하려고 하지 말고 그걸 그대로 고맙게 생각하고 받아들이세요. 처음 배울 땐 좋았는데 이거 내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내 것은 없지 않은가 독창성이 없지 않느냐 빨리 나도 나만의 세계를 가져야지 하는 이런 생각은 욕심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것은 계승도 안 되고 창조도 안 되고 죽도 밥도 안 됩니다. 그러니 욕심 내지 말고 꾸준히 해나가면 조금씩 창조성이 생겨나게 되고 내 것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2011-01-04

[생활 속에서]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희망차게 시작했던 2010년이 뭔가 아쉬움 속에 저물어 가고 있다. 엊그제 시작한 것 같은 2010년 묵은 해가 이제 곧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시간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시간은 반복이 없다. 오늘 12월 31일인데 내일 또다시 12월 31일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단 하루라도 시간을 뒤로 무를 수 있다면 죽을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이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1분 1초도 뒤로 물릴 수 없다. 따라서 시간과 함께 전진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역사의 낙오자로 남게 될 것이다. 또한 시간은 중단이 없다. 우리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쉬지 않고 달린다. 그러기에 '성공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쉬지 않고 달리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2010년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생의 마지막 순간도 생각하게 된다. "만일 오늘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우리는 지금 하고 있는 똑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을까?" "만일 오늘 우리 인생이 끝나서 지금 만나는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면 우리는 이 사람을 지금처럼 똑같이 대하고 있을까?" "만일 오늘 우리 인생이 끝나 마지막 종착역에 도착했다면 우리는 후회하지 않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까?" 시인 류시화는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그 하루를 정원에서 보내리라. 허리를 굽혀 흙을 파고 작은 풀꽃들을 심으리라. 내가 떠나간 뒤에도 그것들이 나보다 더 오래 살아 있도록 아마도 나는 내가 심은 나무에 기대리라"고 노래하였다. 시인은 자신의 인생 마지막 날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 소원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이 끝난 뒤에도 자신 보다 오래 남을 풀꽃을 정원에 심어 에게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다. 얼마전 LA에 사는 한 한인 남성이 전 부인의 남편을 총격 살해한 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평범한 이민자의 가정에 엄청난 비극이 한 순간에 찾아온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그는 잦은 사업 실패로 인해 경제난에 허덕이다가 결국 전 부인과 이혼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매번 이런 보도를 접할 때 마다 "왜 이민 사회에는 이런 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을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이 만일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우리는 조금 다르게 인생을 마쳐야 하지 않겠는가? 찬란하게 빛 나던 가을 옷을 벗어버린 나무 숲 속을 거닐며 인생의 마지막 발자국을 남기면 어떨까? 햇살이 평화롭게 내리 쬐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내 뒤에 남은 사람들의 행복을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장기를 이식받고 누군가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육체의 그 어떤 부분이라도 선물로 남기고 가는 것은 어떨까? 재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가난한 이웃을 위해 다 기증하고 가면 어떨가? 누구에게나 인생의 마지막은 찾아온다. 어쩌면 인생은 그 마지막 순간을 의미 있게 맞이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까?

2010-12-28

[변화] 나라사랑 교회사랑

애국심은 가르쳐야 생기는 것이다.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 나라를 빼앗겨 보지 못한 세대는 절대로 애국심을 가질 수 없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Nation 보다 Global이라는 단어를 더 자주 쓰는 세대에서는 가르치지 못하면 배우지 못할 덕목이 애국심이다. 여러 인종이 탄 비행기가 추락의 위기에 닥쳐 3명이 내려야만 살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제일 먼저 프랑스인이 뛰어내렸다. "죽음도 예술이다!" 두 번째 미국인이 뛰어내렸다. "미국이 최강이다!" 세 번째 한국인이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 그리고 일본인을 밀었다!! 썰렁한 유머이지만 나라를 잃어본 사람의 한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가끔 TV 화면에 나오는 조국의 애국가와 국기 게양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야 무엇이 되었든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말 설고 물 설은 나라에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저기 작은 기도 모임에서 잊지않고 조국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역시 우리 이민자들은 애국자들임에 틀림없다. 애국과 함께 배워야 할 한가지 중요한 덕목이 있다. 바로 '교회사랑'이다. 교회가 어려워지면 처음에는 뒷담화하는 재미도 있고 불만이던 목사나 리더에게 문제가 생겨 고소하기도 한게 사실이다. 그러나 장시간 동안 싸움이 지속하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전쟁터에 있는지 직장에서도 일손이 안 잡히고 가정에서도 삶이 말이 아닌 것을 하나같이 느낀다. 조국의 평화가 곧 나의 평화임을 조국을 떠나서야 비로소 깨닫듯이 교회의 평화가 나의 평화임을 교회가 분열되고 나서야 겨우 느끼게 된다. 다니던 교회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누구나 한번쯤 겪는 일로 생각이 되었다가도 그것이 평생 잊지 못할 상처로 남는 것을 보면서 아차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하물며 아직 여린 순과 같은 우리 자녀는 어떻겠는가? 우리 자녀 에게는 깨진 교회로 인해 받은 상처가 평생 무교회주의자로 목회자에 대한 불신으로 작은 교회에 대한 혐오감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애국심을 가르치기 위해 고심하듯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도 어떻게 가르쳐야할 것인지 고심해야 할 때이다.

2010-12-28

[사목의 향기] 변질되가는 어머니의 사랑

학생 시절 논리학 강의 중에 보편 명제를 다룰 때 이런 주제가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아이를 사랑한다." 이것이 "인간은 죽는다"처럼 보편 명제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 라는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 기억이 난다. 교수를 비롯하여 반 분위기는 보편 명제로 삼아도 타당하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내가 지금도 그 주제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늘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기도 하지만 주위의 많은 어머니들의 헌신적인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6.25 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어려움을 당할 때 자녀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들의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마을에서 큰 불이 났는데 아이를 살리려다가 화상을 입은 여성을 보았다. 그 여성은 죽을 때까지 화상으로 인한 흉한 상처를 지니고 다녔지만 그 집의 아이들은 자기들 어머니에게 너무 잘 하는 것을 보고 마을사람들은 효자들이 났다고들 했다. 자기들의 깨끗한 얼굴들은 모두 어머니의 화상 덕분이기 때문에 더 더욱 효성을 다했을 것이다. 이런 것 외에도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들 특히 어머니들의 사랑 이야기는 가끔 들을 수 있다. 양주동 박사가 지은 "나실 제 괴로움"으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노래를 떠올리지 않아도 어머니의 자녀 사랑 이야기를 듣거나 실제로 그런 모습들을 볼 때 늘 마음이 편안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곤 한다. 부모의 사랑을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자녀에 대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강도를 잠시 비교해 본다면 모든 엄마들은 아이를 아홉 달 동안 몸 안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들보다도 어머니들의 사랑이 더 지극하다고 한다. 사실이라고 본다. 더구나 감정이 풍부한 여성들이니 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어찌 된 셈인지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한 탓인지 어떤 사람들의 말대로 말세를 사는지 모르지만 대학 1학년 때 논리학 시간에 다루었던 그 주제 즉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은 보편적 명제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가 낳은 아이를 버리는 엄마들이 있기 때문이다.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고는 죽이고 가는 엄마가 있는가 하면 모텔에서 아기를 낳고는 두고 버리고 간 엄마도 있고 아이를 낳아서는 부잣집 대문 앞에 놓고 가버린 엄마도 있다는 뉴스를 들을 때 심히 마음이 아프다. 오죽 했으면 어미로서 이런 비윤리적이고 어처구니 없는 짓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들의 고민을 좋게 이해해 보려고 하나 정신이 혼미해진다. 자기가 낳은 아이를 유기하는 무책임한 행위는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며 그런 엄마들이 평소에 미혼모를 돌보는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거나 교회나 행정기관에 문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안타까운 일들을 보면서 인명경시 풍조가 하루 빨리 사라지도록 참다운 윤리관과 폭넓은 홍보가 널리 확산되어야 하지 않을까?

2010-12-28

[지혜의 향기] 미국까지 묻어 온 '땟자국'…

뭐든지 오래 되면 때가 끼고 찌들기 마련이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라서 불교나 기독교에도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처음 가르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군더더기 때들이 묻기도 했고 씻겨 나가기도 했다. 세상의 때를 씻어 주고 앙금을 가라앉혀 맑혀 주려면 그 진흙탕과 구정물에 발을 담가야 한다. 그게 종교 본래의 임무이다. 그러다 보면 종교 자체에도 어느 새 세속의 때와 앙금이 옮아와 눌어붙게 마련이다. 그걸 두려워해선 아무 일도 못한다. 자신에게 묻는 때는 부단히 정화해 나가면서 동시에 세상을 더러움과 고통에서 건져 내야 한다. 그렇다면 1600년이나 흙투성이 사바 세상에서 치다꺼리를 해 온 한국 불교에는 어떤 때가 묻어 있을까? 여러 가지 때가 끼어 있지만 당장 찜질방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푹 삶은 뒤에 박박 밀어 버리고 싶은 나쁜 때가 하나 있다. 불교적인 옷을 멋대로 갖다 입거나 불교에 달라붙어 먹고 사는 점바치들이란 때다. 이들은 버젓이 무슨 보살입네 무슨 큰스님입네 하며 황당한 사칭을 한다. 큰 생색이나 내는 양 바쁜 짬을 내어 LA까지 잠깐 다니러 왔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고 찾아와 앞날을 상담하라고 광고까지 내고 있다. 물론 공짜는 아닐 것이다. 결단코 말하지만 이런 것들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우리 불교계는 점잖아선지 귀찮아선지 이런 일들에 대해 소 닭 보듯 상관을 않고 내버려 두는 듯하다. 아니면 너무나 자비심이 강해서 그것도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 오죽했으면 부처님까지 팔아 교포들 눈물 콧물 묻은 푼돈을 챙기겠냐고 눈감아 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이러다보니 사람들이 아직도 불교라면 무슨 점이나 치고 액막이 굿이나 해 주는 무당 비슷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오해와 나쁜 선입관에 크게 일조하는데 포교에도 이만저만한 장애가 아니다. 부처님을 욕 되게 하는 것도 분수가 있지 이런 건 정말 못하게 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수천 년 생존술을 터득한 기생충들처럼 끈질기고도 교묘하게 우리의 나부끼는 마음을 낚아채고 흔들리기 쉬운 우리 삶의 약한 고리를 용케도 파고든다. 연말연시에는 더 기승을 부린다. 알다시피 조선 시대 500년간은 척불의 시대였다. 제대로 된 공부나 수행 법보시는커녕 살아남기조차 힘겨웠다. 산중으로 숨어들어가 사회에서 소외 된 밑바닥 부녀자층에 기대어 살아남았다. 그러다 보니 무명에 가린 민중의 종교적 욕구에 무턱대고 결벽증만을 보일 순 없었다. 부처님의 가르침 외에도 온갖 방편이 동원 되었다. 점을 봐 달라면 점을 택일을 해 달라면 택일을 해 줬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미국에까지 묻어 온 이 땟자국들은 마지못해 지어왔던 그 일시적인 방편들의 업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승가에 속한 자로서 이러한 업을 짓는 이들은 없다. 혹시 있다면 불교의 이름을 훔쳐 파는 외도에 다름 아니다. 외도라서 이러한 업을 짓는 것이 아니라 옷차림이나 호칭이야 어떻든 이러한 업을 짓는 이를 일컬어 외도라 하기 때문이다.

2010-12-28

[생활속에서] 크리스마스와 선물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선물이다. 여러 사람에게 크리스마스가 기쁜 이유를 물었을 때 제일 많이 듣는 말은 '선물'이었다. 아빠와 엄마에게 선물을 받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 받는 즐거운 계절이 성탄절이 기쁜 가장 큰 이유란다. 필자역시 선물을 받는 설렘으로 밤중에 찾아올 산타클로스 기다리느라 이브의 밤을 보내었던 어린 추억이 있기에 크리스마스와 선물은 쌍둥이처럼 여겨왔다. 선물이 가득한 크리스마스에 진정한 선물을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지 짧은 생각을 나누고자한다. 크리스마스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선물이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세상을 향해 주신 구원이란 선물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많은 선물을 받고 있지만 정작 희생과 사랑으로 주어진 구원이란 선물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의 즐거움이 가득한 선물은 넘치지만 바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선물을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넘쳐나는 선물 속에 다시금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산타 할아버지는 울고 있는 아이 거짓말하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는다.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다. 누가 착한 애인지 나쁜 애인지. 그런데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선물은 하얀 눈처럼 의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내가 연약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산타 할아버지만큼 하나님도 알고 계신다 '누가 착한 애인지 나쁜 애인지'. 하지만 그 선물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자신감에 넘치는 사랑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많은 사람이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선물을 먼저 받게 되길 소망해본다. 그리고 이제는 받는 선물의 기쁨만큼이나 주는 선물의 기쁨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본다. 이제 아버지라는 존재가 되어서 선물을 고르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 틈에 선물 받는 기쁨보다는 선물을 주는 즐거움이 더 큰 것을 느끼게 된다. 선물은 받을 때 가장 행복한 것으로 알았는데 이제는 선물을 주는 사람들의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선물은 희생으로 시작되었다. 잉여 생산물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를 희생하여 나누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선물이었다. 하늘로 초대받아 얻은 것이 크리스마스의 선물이 아니라 말 구유에 오셔서 희생하심으로 나누어 준 것이 선물이었다.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선물은 바로 이런 희생 위에서 나누어지는 삶의 한 조각이 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많은 선물을 받는 것을 꿈꾸는 성탄이기보다는 얼마나 많은 선물을 나눌 수 있었는지 그래서 얻은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느끼는 성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2010-12-21

[변화] 나눔의 중독

일본 메이지가쿠인대 '쓰지 신이치' 교수는 '행복의 경제학'이라는 책에서정말 행복해 지려면 '돈 = 행복'에서 '='를 빼라고 주장한다. 돈 대신 무슨 단어를 대체해야 할까? 남가주 대학의 리처드 이스털린 교수는 2차 세계대전 후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룬 일본인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를 분석하면서 '이스털린 패러독스'라 불리는 경제 이론을 내놨다. 생활수준이 행복의 기본적 조건이 되지만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행복이 더 늘어나는 것은 아님을 밝혀낸 것이다. 남미 어느 한적한 바닷가에 도시에서 온 부자가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마침 야자수 그늘 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어부를 발견했다. 이를 한심하게 본 부자가 물었다. "여보시오 이 금쪽같은 시간에 왜 고기를 안 잡소?" "오늘 몫은 다 잡아 놨습니다." "오늘처럼 시간 날 때 더 잡아 놓으면 좋지 않겠소?" "그래서 뭘 하게요?" "돈을 더 벌어 큰 배도 사고 그래서 더 깊은 데로 가서 더 많이 잡고 그러다 보면 큰 부자 가 되지 않겠소?" "그렇게 부자가 되면 뭘 합니까?" "아 그렇게 되면 나처럼 편안하고 한가롭게 삶을 즐길 수 있잖소." 부자의 말에 어부가 답했다. "내가 지금 그러고 있잖소?" 미국 국립보건원의 신경과학자들이 기부를 작정한 사람들의 뇌를 MRI로 찍어보니 유독 복측피개영역(VTA) 즉 연인들이 사랑을 나눌 때 활성화되는 쾌락의 중추가 활성화되는 현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나눔은 곧 연애하는 만큼의 쾌락과 행복을 준다는 결론이다. 받을 때의 기쁨도 좋지만 나누어 줄 때의 그 짜릿한 기쁨은 해본 사람만이 안다. 나눔의 중독이라고 할까? 나눔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유가 생기면 나누지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작은 것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큰 것을 나눌 수가 없다. 아기 예수가 말구유에 탄생하신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고 삶을 나누어주었기에 인류가 살았다.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하는 우리도 열심히 예수님 흉내를 내야 하지 않겠는가!

201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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