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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목회] 지도자의 대답

이민교회 지도자가 이민성도들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말하고자 한다. 첫째 "시대적인 요청"이 있기 때문이다. 시대적인 요청이란 동시대의 사람 즉 컨템포러리(con-temporary)이민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므로 지도자들이 동시대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이민자들을 구체적으로 알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 필수과목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풀러신학교 인류학 교수인 촬스 H. 크래프트는 문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람들이 신뢰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는 1.비교문화의 부족성 2.신학과 인류학의 배경지식에 대한 부족성이라고 말했다. 이민지도자들이 이민자들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베테랑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역사적인 요청"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복합문화 사회이다. 이민자들의 주변을 보면 마치 각국 나라의 대표들이 상주하는 것처럼 수많은 인종들이 있다. 이들과 어떻게 사귀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실제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정보와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형편이다. 이민자들은 각기 제 나름대로의 시각과 경험을 가지고 대처하고 있지만 전문적인 수준이 아니어서 실수와 실패로 마치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지도자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큰 것이다. 그래서 이민자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셋째 "신학적인 요청"이 있기 때문이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동시에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지구에 하나님은 관심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인간을 위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자는 인간에게 큰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 관심은 이민자에 대한 신학적인 관심이다. 신학적인 관심은 이민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게 하는 것인데 이민자들이 미국복합문화 사회에서 성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민교회 지도자는 시대적인 역사적인 신학적인 대답을 해야 한다.

2009-08-11

[생활 속에서] 고통은 교만의 치료제

고통이 시작하면 원망도 함께 따라옵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더욱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은 멀쩡히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있을까'라고 수없이 질문하게 하는 게 육체의 고통입니다. 저는 지난 주에 관절염이 다시 와서 다시 고통을 겪었습니다. 수년 전에 체중 감량 등 각고의 노력으로 완전히 다 나았다고 생각했던 관절염이 최근 운동을 게을리하고 음식 조절을 하지 않았더니 작은 부상이 원인이 돼 다시 찾아왔습니다. 걷는 게 힘들었고 결국은 '뼈주사'를 맞고 회복기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아픈 중에도 다녀올 데가 있어서 멀리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걸어다니는 게 곤욕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지인이 암에 걸려서 투병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풀러신학대학원의 구약학 교수인 존 골딩게이 박사는 최근 아내를 잃었습니다.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했던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 아내 되시는 분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환자였습니다. 이 아내를 수년 동안 돌봤던 이 교수는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이 저주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한 인간으로서 성숙해졌음은 아내를 돌보면서 인간의 본질을 피부에 와 닿게 경험한 결과일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생로병사'입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인간이 타고난 운명입니다. '생로병사' 중 병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병은 고통을 안겨주는데 우리는 인생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육체의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플 때마다 세 가지가 생각납니다. 첫째는 '병이 다 나았다'는 생각은 교만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병은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으니 죽는 날까지 잘 다스려야 한다는 깨달음이 생깁니다. 두 번째는 질병과 고통은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만났던 지인은 "고통과 고난이 찾아오니 겸손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고통과 고난인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입니다. 주삿바늘이 제 살을 찌를 때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님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겠구나. 주삿바늘도 이렇게 아픈데….' 전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공공연히 밝히신 예수께서 왜 십자가 처형을 당했는지 솔직히 이해를 못 했습니다. 질병을 얻고 투병을 한 후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로병사'에서 '병'을 맞닥뜨릴 때 예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려고 그런 선택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신을 찾는 것처럼 '병'이나 '고난'을 만날 때 십자가 사랑을 기억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2009-08-11

[사목의 향기] 자선에 대하여

오늘 아침 신문에서 모 대학에 3천만 원을 기부하신 어떤 할머니 이야기를 읽었다. 그 할머니를 묘사하는 수식어들이 대충 이러했다. 남루한 옷차림 검은 비닐 봉지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셨고 이름을 밝히기를 부끄러워하셨고 할머니의 친자식들은 공부를 못 시키셨다고 했고 슬리퍼를 신으신 가난한 발로 파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셨다고 그런데 그 할머니께서 작년에도 1억 원을 그 학교에 기부하셨고 아마도 그 할머니께서는 신앙 생활을 하시는 분인 것 같다고 학교 담당자가 말했다는 것이다. 마치 성경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접하는 것 같아서 일종의 긴장감을 느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 귀족의 의무)의 면모와는 사뭇 다른 그 무엇 때문에 느끼는 긴장감이 거기 있다. 귀족이니까 그래서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앞장서 길을 간다는 뜻으로 행하는 기부와 자선 활동은 참 당당하고 멋있고 화려하고 모든 이의 부러움을 살만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의 목격자들은 많을지 모르지만 '나도 그렇게' 행동하자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처럼 귀족이 아니니까. 그러나 오늘의 할머니 이야기에서 느끼게 되는 그 무엇은 좀 색다르다. 마치 숨겨놓은 마음속의 비밀 같은 것을 들킨 느낌이고 그러면서도 외면하면 안될 진실을 대면했을 때 느끼게 되는 그 무엇이 있다. 그래서 동참해야 한다는 절박함 같은 것이 거기 있다. 그렇다. 종교적 요구와 도전이 오늘의 할머니의 이야기에 숨겨져 있다. 자선은 본래 기도와 단식과 더불어 신앙의 법으로 요구되는 종교적 행위이다.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 신앙이다. 진실한 신앙이란 기도와 단식과 자선이라는 종교적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신앙은 종교적 행위로 증거 되야 하고 이 세가지 행위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한가지 목표를 지향하여 행해진다. 한마디로 자선은 단식의 열매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단식을 통하여 배고픔을 느껴보라는 것이 단식의 법이며 단식한 결과 남긴 것을 배고픈 이웃에게 나주어 주라는 것이 자선의 법이다. 사실 배고픔의 체험은 인간의 실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즉 하느님 없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하느님께 돌아 설 이유를 알게 해 준다. 이 같은 회개의 행위로 수행되는 단식과 자선은 구원의 역사를 요약하기도 한다. 종 노릇 하던 때의 비참함을 기억하고 그 노예살이에서부터 해방시켜주신 하느님의 업적에 대하여 찬미와 영광을 드리며 지금 부리고 있는 종들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겨 제때에 먹이고 보살피라는 요구가 단식과 자선의 법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행해야 하고 나팔을 불어 제 자랑을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이다. 숨은 일도 다 보고 계시는 하느님께만 오롯한 뜻을 두고 수행하라는 신적 요구와 도전이 있다. 그에 대한 겸손한 인간적 응답이 오늘의 할머니 이야기에서 발견되었고 그것 때문에 훈훈한 감동을 느끼게 된 것이다. 아마도 할머니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하는 줄 깨달으신 것 같다. '귀족이 아니니까'라는 이유가 설 자리가 없다. 다만 감사와 나눔이 있을 뿐이다. 먼저 베푸신 사랑에 대한 당연한 응답이다. 이름도 밝히지 않고 가난한 슬리퍼 발걸음으로 파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가셨다는 이야기에서 지루한 가난과의 전쟁을 견뎌낼 힘을 얻는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까 6:20)

2009-08-11

[지혜의 향기] 삶의 여섯 건널목 '육바라밀'

미국은 어딜 가나 길도 시원하게 잘 뚫려 있고 뭐든지 큼직큼직 여유 있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예전 내 선입견이었고 또한 여기서 눈으로 확인한 첫 인상이었는데 좀 오래 살다 보니 요즘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다 상대적이라는 생각에 젖기도 한다. 고국의 짜증나는 길바닥에서 부대끼다 여기 와서 일직선으로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릴라 치면 속이 다 확 트였는데 어럽쇼 여기도 해가 갈수록 장난이 아니다. 오렌지카운티 같은 외곽에서 코리아타운 한 번 나왔다 들어가는 것이 마치 서울 강북에서 강남에 일 보고 오는 것처럼 하루를 다 잡아먹는 꼴이 돼 간다. 빨간 불에 걸려 기다리는 시간만은 죄다 모아서 내 인생에서 빼 놓았다가 덤으로 다시 붙여 주십사고 서울의 어느 택시 운전사가 올린 글이 있었다. 요즘은 내가 LA 중심가를 오르내리며 5번 프리웨이에서 뭉그적거리는 시간만은 제발 항공 마일리지처럼 따로 모아 두었다가 나중 요긴하게 쓸 자투리 시간으로 다시 내어 주십사고 빌고도 싶어진다. 미국은 기차도 별로 안 다니는 줄 알았더니 이것도 장난이 아니다. 무려 칠팔십 칸이나 되는 긴 열차가 땡땡땡땡……. 출근길을 가로막고는 빨리 지나가지도 않는다. 그러더니 일진이 나빴는지 늦은 퇴근 시간 같은 건널목에서 간발의 차이로 또 열차를 만났다. 이번에는 천천히 지나가는가 싶더니 눈앞에서 그만 멈춘다. 그리곤 다시 덜컹거리며 거꾸로 밀고 간다. 그러다 다시 왔다 갔다 하며 애들 기차놀이처럼 세월아 네월아 하고 오르내린다. 참을성 많은 미국사람들도 마침내 자동차를 끼익 유턴하여 되돌아가기도 한다. 오냐 누가 더 끈질긴가 보자. 오기를 부리지만 진작 되돌아갈 걸 하며 은근히 후회도 된다. 그러다 이왕지사 늦은 몸 운전대에 두 팔을 얹고 나름대로 선정에 들어 본다. 눈앞의 저 건널목이야 어쨌든 새벽이 오기 전까지는 틀림없이 트일 것이다. 그런데 트여 봤자 갈 곳이란 뻔한 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 집이 그 집이고 그 일터가 그 일터일 것이다. 그리고 땅 넓은 미국이라고 해도 내가 가는 곳마다 예기치 않게 이렇게 수시로 붐비고 막히고 시달리고 진이 빠질 것이다. 나 또한 그런 흐름에 한 탓이 되고 보탬이 되어 나 때문에 모든 것이 좀 더 붐비고 막히고 시달리고 진이 빠지리라. 그런데 나는 뭐 때문에 그리 악을 쓰고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싸돌아다니나? 그러지 말고 이 쳇바퀴를 훌쩍 뛰어 넘을 건널목은 없을까? 있다. 육바라밀이 그것이다. 벌레를 씹듯 징그럽고 싫어도 지그시 눈을 감고 참아야 하는 세상 살을 도려내는 아픔도 이를 악물고 견디어야만 하는 사바의 땅 내가 시동을 끄고 지금 멈추어 선 속세의 이 땅이다. 그러면서도 발부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괴로움의 바다다. 그 바다에 둥둥 떠서 조그마한 기쁨과 즐거움을 마취제 삼아 하루하루를 덮어 나간다. 이 물결치는 고해를 건너 영원한 기쁨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여섯 건널목 그것이 바로 육바라밀이 아니던가! 그 하나하나를 되새겨 보자. 첫째 내가 다 갖지 않고 아낌없이 나눠 주는 건널목 다음이 계율을 지키는 건널목이다. 그 다음이 참고 견디는 건널목 부지런히 갈고 닦는 건널목이다.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건널목 마지막으로는 눈 밝은 슬기를 깨치는 건널목이다. 그 여섯 건널목이 차례로 눈에 겹쳐 어리는데 땡땡땡땡……. 오징어 다리처럼 불을 번쩍이는 가로대는 이윽고 다시 팔을 들어 올리며 이 밤 내 갈 길을 재촉한다.

2009-08-11

[신앙 상담] 사주를 보고 싶은 유혹이…

Q: 저는 20년 넘게 교회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항상 유혹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점이나 사주를 보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사주를 보고 그 얘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한번은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사주를 보면 정말 안되는 것인가요? A: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성도가 점이나 사주를 보는 것은 안 됩니다. 첫째 점이나 사주를 보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생명을 주셔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배신하는 하는 행위입니다. 출 20: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십계명의 첫째 계명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점이나 사주를 보는 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간음에 비유하셨습니다. 간음은 배우자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합니까? 점이나 사주를 보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행위입니다. 둘째로 점이나 사주를 보는 것은 악한 영을 따라가는 행위입니다. 점이나 사주를 보는 것이 우리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어떤 면에서는 유익을 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요 10: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적에게 속는 것은 지혜로운 행동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라가면 주님께서 우리를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셋째로 성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롬 1:17b)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점이나 사주를 보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도가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히 11:6)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은 반드시 계시고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면 점이나 사주를 보고 싶은 유혹을 확실하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 늘 마음이 기쁘고 평안합니다. 믿음을 갖는 비결은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믿음은 말씀에서 옵니다. 그리고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주님은 믿음을 달라는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또한 성령 충만하면 믿음이 충만합니다. 성령 충만 역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해야 얻습니다. 믿음을 갖는 또 다른 방법은 믿음의 친구들을 사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귀는 대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믿음이 충만하셔서 점이나 사주를 보고 싶은 유혹을 다 이기시고 늘 승리하시는 복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크신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문의:(213)368-2639

2009-08-11

[이민목회] 다민족과 공존

미주에서 코리안-아메리칸이 자영업을 통해 접촉하는 민족가운데 가장 큰 민족은 라티노라고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라티노는 우리 코리언이 자영업을 통해 만나고 사업하는 좋은 이웃이다. 다운타운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피부로 와 닿는 민족이 바로 라티노이다. 실제로 고객차원에서 평가를 해본다면 흑인이나 라티노 민족들은 다정다감하고 쉬운 반면에 백인들은 까다로운 것이 사실이다. 즉 흑인이나 라티노는 값을 쉽게 흥정하고 물건을 고르는데도 오래 걸리지 않아 편하다. 하지만 백인들은 흥정도 까다롭지만 나중에 불평하는 태도가 많이 있으며 여차하면 수(law suit)를 거는 경우가 있다. 다른 민족의 경우를 보자. 다음에 언급한 민족성에 대한 부분은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일반적인 경우를 말하는 견해임을 미리 밝혀둔다. 흑인들은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기질을 지녀 순간적인 선택을 하므로 기분만 맞추어 주면 쉽게 결정하는 경향이 있고 독일 사람의 경우는 물건을 1센트까지 흥정을 하는 민족이므로 한인 자영업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까다로운 사람들로 인식된다. 인도사람들은 세탁물을 50개를 가져오면 원 가격보다 더 싸게 흥정을 하므로 조금 그들을 꺼리는 경향이 있으며 필리핀 사람들은 비교적 신사적이고 깨끗한 편이라 비교적 선호한다. 그리스사람들과 유대인들은 흥정할 때 많이 까다롭고 특수한 경우가 많아 꺼리는 편이며 도미니카 사람들은 푸에토리코 사람들보다 조금 더 잘 살지만 감정적으로 우울한 편이므로 대화를 잘할 필요가 있다. 타민족을 배제하고 한인들의 아이덴티디를 정확하게 조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특수한 이민교회를 제외하고 평신도 대부분은 비즈니스현장에서 매일 타민족을 만나고 대화하는 현장에 있는데 유독 이민교회만이 마치 동굴에 사는 사람들처럼 스스로 게토화할 필요는 없다. 굳이 아프리카에 가지 않아도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지역을 방문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타민족이 가까운 곳에 있다. 이민교회옆에도 비즈니스현장 가까이에도 한인들 집주위에도 그들과 대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민신학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고 정립되어야 할 역사적인 요구에 직면해 있다. 이민교회의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때이다

2009-08-04

[생활 속에서] '영혼은 복제할 수 없습니다'

몇 년 전 라엘리언이라는 한 종교 집단이 운영하는 생명공학회사 클로네이드에서 "복제아기를 탄생시켰다"고 발표하여 전 세계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깊은 충격 속으로 빠져든 적이 있다. 그동안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가능해 보였던 인간 복제에 대한 소식을 들으며 종교계는 "인간이 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의 침입" 혹은 "인간의 존엄성과 윤리 종교를 뿌리 채 흔드는 사건"으로 비판하면서 평가하면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복제 인간을 만들었다는 라엘리언 종교집단은 프랑스의 클로드 보리옹이 창시한 집단으로 그가 27세 되던 1973년 프랑스의 한 화산 꼭대기에서 외계인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그 때 그는 외계인들을 통해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외계인들이 유전자를 조작하여 자신들을 복제해 만들었다"는 메시지를 들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외계인의 복제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현재 복제 인간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의 사악한 탐욕과 생명과학기술이 만나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인간 복제는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의학적으로는 복제 양 돌리를 탄생시킨 영국 로즐린 연구소의 지적대로 "복제는 유산되는 비율이 높고 정상적으로 출생한다 해도 얼마 못살고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또한 거듭되는 복제과정에서 심각한 기형아가 양산될 가능성도 많다. 또한 윤리적인 면에서는 아버지의 체세포를 복제하여 만든 아기가 아버지와 어떤 가족 관계를 설정할지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또한 사회적으로 복제 인간은 인격이 부정되는 장기 대용품이나 소모품으로 출생하게 되어 태생적으로 어두운 사회 계층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인간의 생물학적 육체를 복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영혼을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만이 창조하실 수 있다. 따라서 복제를 통해 태어난 인간에게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를 나누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복제 인간은 영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세계와 무관한 영원한 '영적 소외 계층'으로 남게 되는 무서운 결과가 일어나게 되어 복제 아기의 탄생은 인류에게 소망이 아니라 재앙의 길이 시작된 것을 뜻한다.

2009-08-04

[사목의 향기] 저출산 문제 해결하려면

한국인의 저출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통계자료를 분석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런 인구 감소 추세를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멸종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걱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경고를 접하면서도 아이를 더 낳을 수 없는 이유들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과도한 교육비 지출을 감당할 힘이 없다는 것이 어쩌면 제일 큰 이유일지 모르겠다. 치열한 경쟁에서 자기 자녀를 승자로 만들기 위해서 차별화된 양질의 교육을 시켜야 하니까 남보다 더 일찍 남보다 더 많이 남보다 더 비싼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리라. 이런 사고 방식을 가진 부모들을 대상으로 출산의 고통이 갖는 의미와 기쁨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출산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 새 생명 탄생의 기쁨이 마음에 새겨지기도 전에 위에 언급한 생계유지의 고통에 대한 증폭된 두려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도무지 그 답을 알 수 없는 고통의 문제는 인생의 뿌리에 닿아 있고 그런 뜻에서 창조주와 관련된 신비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풀릴 수 있는 문제이다. 창조 때 낙원의 인간은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의 존재였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무고통의 존재였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올 때 하느님과 단절되고 사람끼리 단절되고 사람과 사물들과 단절되면서 서로 비난하는 사이로 관계가 왜곡되었다. 그럼으로써 창조주께서 주신 본래의 선물인 상호 간의 매력은 지배와 탐욕의 관계로 변하고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땅을 지배하는 남편과 아내의 아름다운 소명에는 출산의 고통과 생계유지라는 고생이 부과되었다. 고통은 결국 원죄의 결과인 셈이다. 그런데 고통을 느끼는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결합체이다. 따라서 육체적 고통이 벌받음의 표징으로 이해되고 그 것은 정신적 고통으로 확산된다.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음 저주받음 또는 사탄의 공격으로 인식되는 고통은 죽음을 그 뿌리로 하며 인간을 절망하게 만든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점차 밝혀 주신 것처럼 의로운 이의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욥이 그러했고 예수께서 완전하게 계시하시지만 의로운 이의 고통은 저주 받음이나 버려짐의 표징이 아니라 시험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단절되었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시험의 의미를 가지고 찾아오는 고통의 신비는 우리들의 마음속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성령의 은총으로 밝혀진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시고 사막에 나가셔서 사탄의 세가지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철저히 거부하시고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수락하신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을 이끌어낸다. 결국 고통을 받아들임은 원죄를 이기는 회개를 의미하고 회개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며 그 효과는 기쁨과 행복의 충만이다. 이것이 고통의 신비이다. 그런즉 고통에는 기쁨의 측면이 숨어 있다. 고통을 쾌감으로 즐긴다는 병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승화된 고통의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 복음의 예수께서 부활의 기쁨을 산고의 기쁨으로 유비하신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겁먹고 회피하지 말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통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행해지는 자선과 고행들은 언제나 풍요한 영신적 열매를 맺어왔고 그 힘은 사회를 정화하고 지탱하는 힘이 되어왔다. 그런 뜻에서 고통의 신비를 이해함이 저출산의 문제를 심각하게 겪는 한국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만 낳아도 사라지지 않을 두려움이 이 신비의 이해로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09-08-04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왜 마음이 허전할까요

Q: 왜 이렇게 마음이 허전할까요? 마음 한 구석이 비어 있는 듯 허전함을 느낍니다. 그 허전함에 쫓겨 삶을 낭비할까 두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A: 마음이 공허하고 허전할 때가 많다는 것은 욕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 하지만 인생에 뭔가 의미 부여를 많이 하고 있어요. 인생이라는 것은 길가에 자라는 한 포기의 풀처럼 그냥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고 죽는 그런 겁니다. 특별하게 '나는 뭐가 되어야 하겠다' 이런 것도 다 욕심이에요. 결혼생활은 이러이러해야하고 연애는 이렇게 멋있어야 하고 돈은 이만큼 벌어야 한다는 등 여러 가지 기대와 바람이 있잖아요. 그런데 막상 결혼해서 살아 보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지요. 아내가 아름답다 남편이 멋있다는 것도 그때 뿐이고 세월이 흘러 지나보면 별 것 아니지요. 그게 인생이에요. 이렇게 사는 게 인생이란 말이에요. 저는 인생에 별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안되어도 특별하게 좌절할 것도 없고 잘 된다고 특별히 기대할 것도 없어요. 어떤 일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내가 한 게 아니지요. 이 세상에서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쌀 한 톨 만들어지는 것도 천지 만물이 관여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나 혼자 한 일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마음이 공허하다 허전하다는 것은 뭔가 바라고 기대하고 채우려고 하는데 그게 뜻대로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고 하지 말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부부 관계가 무료하다는 것은 부부 관계가 특별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위로해주면서 사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머리 깎아 스님이 되면 뭔가 특별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특별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절에 들어가기 때문에 도를 구한다고 하다가 제대로 안되면 금방 포기해 버리기도 하지요.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라고 하지요. 얻을 바 없는 줄을 알아야 해탈의 길을 이루는 겁니다. 절에서 뭘 얻어 가려 하기 때문에 날마다 반야심경을 독송하며 절에 다니면서도 해탈을 못하는 겁니다. 절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탈하지 못합니다.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합니다. 마음이 허전하다고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묻는 것은 망상을 좇는 것입니다. 개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흙덩이만 쫓습니다. 그런데 사자는 흙덩이를 던지는 사람을 쫓습니다. 허전하다고 뭔가 채울 것을 찾는 것은 개가 흙덩이를 쫓는 것과 같아요. 사자가 사람을 쫓듯이 망상을 쫓지 말고 허전한 마음을 탁 꿰뚫어 봐야 합니다. '아 내가 뭔가 바라는 마음으로 헤매고 있구나.' 바라는 마음을 놔 버리면 허전한 마음은 흔적도 없이 즉시 사라져 버립니다. 이렇게 본질을 꿰뚫어야 합니다. 본질을 놓치고 뭔가 자꾸 채우려고 하면 그때부터 마음은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서예로 채울까? 골프로 채울까? 춤으로 채울까? 이것 채우면 저게 문제고 저거 채우면 이게 문제고 이렇게 해서 헤매는 것이지요. 채우려는 생각을 버리세요. 그러면 허전함도 없어집니다.

2009-08-04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하나님 외에 '나'를 섬기지 마라

#풍경1 : 사람들은 말하죠. "한국의 개신교는 너무 배타적이야. 독선적이야." "다른 종교와 소통하려 하질 않잖아." 뿐만 아닙니다.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일 수밖에 없는 종교"라고 스스로 고백하고 선언하는 크리스천 종교학자도 있습니다. 이유는 성경에 기록돼 있답니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구약성경 출애굽기 20장 3절)는 구절 때문입니다. 숱한 기독교인이 이 구절을 가슴에 새기죠. 그건 모세가 하늘로부터 받은 십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니까요. 사람들은 말하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그건 하나님(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거다." 그래서 이 구절은 만사를 제쳐놓고 따라야할 '깃발'이 됩니다. 사람들은 '바리케이트'를 치죠. 행여 다른 종교가 내 땅을 밟을까봐 행여 내가 다른 신에게 눈길이라도 줄까봐 말이죠. 타종교를 향한 더 높고 더 두터운 벽. 그걸 세울수록 '나의 신앙'은 안전지대가 된다고 믿으면서 말이죠. #풍경2 : 이 계명을 역사종교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까요? "모세 당시에는 여러 민족이 태양신 등 여러 신을 믿었다. 일종의 다신교 사회였다. 그래서 유대인은 이민족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의 신앙과 정체성을 지켜야했다. 그걸 위해 '유일신'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역사적인 해석이죠. 그런데 그뿐일까요? 다른 이유는 없을까요? 모세 당시에는 '십계명'이 단순한 율법이 아니었죠. 그건 신을 향해 다가가는 구체적인 '징검다리'였습니다. 그래서 '현문우답'은 이 구절을 안고 묵상합니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선 안 된다." 다시 말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여기에 담긴 '울림'을 향해 눈을 감습니다. 왜냐고요? 거기에는 '지금도 살아서 꿈틀대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종종 묻습니다. "하나님(하느님)이 어디 계세요?" 그럼 목사님도 신부님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십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이 우주에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시죠.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래서 유일신이죠. 오직 하나의 신밖에 없으니까요. 그 외에 그밖에 달리 어떠한 신도 없는 거죠. 이 무한대 우주를 다 채우고 있는 오직 하나의 신 하나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강조하셨을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를 십계명 중 첫 계명으로 꼽으며 그토록 신신당부했을까. 이유가 있습니다. 온 우주를 다 채우며 흐르는 하나님도 내 안에는 흐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고요? 내 안에 이미 섬기는 신이 있기 때문이죠. 그게 과연 뭘까요? 사람들은 '나'를 믿고 '나'를 섬기죠. 눈물을 흘릴 때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를 섬기죠. "하나님!"이란 외침으로 시작해 "부디~해 주세요. 아멘!"으로 끝나는 기도의 상당수도 따져 보면 '나의 성공 나의 잘남'을 위한 거죠. 결국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사는 모양새죠. 그럼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리는 존재는 뭘까요?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막고 숨결을 막고 뜻을 막는 존재는 뭘까요? 그렇습니다. 내 안에 있는 다른 신 그게 바로 '나'죠. 그래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겁니다. 그 십자가 위에 '나'가 못 박힐 때 비로소 하나님이 사시는 겁니다. 그 순간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

2009-08-04

[이민목회] 가정신학

이민목회의 기본적인 소스는 이민교회 가정이다. 이민자들은 가정에 대한 꿈을 가지고 미주에 왔다. 그들의 소박한 꿈은 남편이 좋은 직장을 잡아 가족부양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아내는 집에서 자녀들을 미 주류사회에서 성공시키기 위해 교육하며 집안을 돌보는 것이다. 밤이면 자녀들과 오순도순 대화하며 그날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꿈꾼다.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모습인가? 하지만 이민생활을 해보면 이러한 이야기들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이민생활의 현실은 남편과 아내가 새벽에 일어나 직장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구조이다. 아내가 아침을 준비하여 같이 먹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아침을 거의 생략한채 간단히 커피한잔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가족간의 대화는 결코 쉽지 않은 구조이다. 이렇게 부부가 시간을 내어 대화하기가 어려운 미국의 경제구조 소매업을 경영하는 사람들도 일하는 시간에 꽉매여 여유가 없는 사회적인 구조 무슨 사업을 하든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정적인 기반을 이루지 못하는 구조등이 가정의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이민교회는 가정신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1920~2006년 사이에 미국의 이혼율은1932년부터 계속 증가하더니 마침내 1980년대 부터 50%를 점유하는 현상은 가히 작금의 미국가정의 위기를 직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인들의 가정위기 현상도 결코 이러한 통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민교회가 가정신학을 정립해야 하는 당면한 두가지 과제는 다음과 같다. 1.적지 않은 한인들의 가정붕괴 현상이 감지되고 있다는 점 2.미국의 불경기 경제구조가 한인들의 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어 가정회복에 대한 구체적인 영적플랜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민신학의 중요한 소스가 되는 가정신학의 정립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이다. 이민교회는 이민자들의 가정회복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하고 가정세미나 가정상담 가정회복 프로그램 건강한 가정세우기에 대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늘여 이민자들의 행복한 가정에 대해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2009-07-28

[생활 속에서] 가시나무새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은 편할 곳 없네…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가수 조성모 씨가 불러 공전에 빅히트를 쳤던 '가시나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이 노래는 원래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씨가 작곡 작사해 불렀습니다. 가사가 너무나 깊고 그에 따른 멜로디가 서정적이라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드는 곡입니다. 가시나무는 가시돋힌 나무입니다. 실제 그런 나무가 있습니다. 이 가시나무를 찾는 새가 있는데 바로 가시나무 새입니다. 가시가 돋혀 있어도 찾아오는 가시나무새는 쉴 곳이 없습니다. 편하게 앉아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하덕규 씨는 가시나무를 인간의 마음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인터뷰에서 가시나무새는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았던 순전한 예수님은 인간의 가시로 가득한 마음에 찔려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이들에 의해 찔리고 있습니다. 찔려 날아간 그에게 더욱 날카로운 가시를 들이대며 '사기꾼' 취급을 합니다. 그런데 더욱 아픈 대목은 바로 가시가 다 제거된 줄 알았던 나무에 앉았을 때 예수님 모습입니다. 가시가 제거된 줄 알았던 나무에 다시 가시가 돋아날 때 그 나무로 날아든 새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과연 어린 새가 쉴 수 있는 가시 없는 나무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가시를 빼어내려면 아픔을 견뎌내어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그저 날카로운 가시를 품고 나를 공격하려는 사람들을 찌르고 나에게 다가오는 어린 새를 거부하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눈물이 나는 대목은 그런 가시나무에 반복적으로 날아오는 가시나무새가 있다는 것입니다. 새는 피를 흘리며 나에게 우리 이웃들에게 다가옵니다. 바람이 불면 가시는 서로 부댓깁니다. 그리고 더욱 날카로운 가시가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가시는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그런 나에게 다가오는 가시나무새. 미안하면서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시나무새가 있어야 가시나무의 존재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파도 피흘려도 나무에게 달려듭니다. 아무리 사뿐히 앉아도 새는 가시에 찔리게 되어 있습니다. 삶 속에서 현장 속에서 우리 마음의 가시를 한 번 돌아보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안의 가시가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날카로운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있는 다른 가시가 나를 찌를 때 나는 내 가시로 그를 찌르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여전히 찌르고 있으신가요? 저도 오늘 찔렀습니다. 아내에게 마음의 가시로 다시 찔렀습니다. 아내의 마음에 난 상처를 보며 나를 향해 날아왔던 가시나무새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2009-07-28

[사목의 향기] 쉼, 휴식의 영성

계속되는 뜨거운 날씨는 지친 몸을 잠시 쉬라 하지만 쉴 수 없는 이유들이 인생의 고달픔을 느끼게 한다. 경제적으로 유난히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으니 아이들의 방학이 누구는 무섭기까지 하단다. 그래도 휴가철이라 미국을 찾아온 가족과 친구를 외면할 수 없어 간신히 따라나선 여행길에 만져지는 지갑은 가난하기만 하다. 그래서 먼 산을 바라본다. 작년 여름이 생각난다. 올해와 별로 다르지 않게 휴가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었는데 그 후유증이란 거의 몸살 같았다.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지만 피로와 실망이 컸다는 기억뿐이다. 고작 휴가라는 것이 돈이 없어 서럽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것이 전부라면 그 휴가라는 것을 왜 가야 할까, 그래서 지금의 망설임은 새롭게 달리 하고 싶은 몸짓이라 하겠다. ‘주님의 날’에 쉼과 휴식이 있다. 이 날은 ‘은총의 날’이며, 쉼과 휴식의 영성의 샘이다. 세상 창조 때 하느님께서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쉬셨듯이(창세 2,2)’, 인간의 삶도 노동과 휴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구약의 시대에는 안식일을 지켰고, 신약의 백성들은 ‘주님의 날’을 지내며, 삶의 풍요로움을 가져오는 노동과 휴식의 가치를 깨달았던 것이다. ‘주님의 날’에 담긴 두 창조의 기억이 맨 처음의 새로움을 회복 하고 그로 인한 생기를 얻는 것이 쉼과 휴식의 영성이다. 맨 처음 세상이 창조될 때 인간은 아주 특별하게 창조되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창조되었고, 세상 만물에 이름을 붙이는 권한을 선물로 받았고, 하느님처럼 그것들을 호명하여 지배하고 다스렸다. 온 우주의 중심으로 인간이 창조 된 것이다. 비록 인류가 타락하여 돈과 명예와 욕정에 사로잡혀 종 노릇을 하는 신세가 되었고, 비록 죽음에 부쳐져 그나마 사는 기간이 슬픔과 고통의 연속이라 해도 인간은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새 창조의 의미로 다가온 부활의 의미를 주님의 날 기념한다. ‘주간 첫날(마르 16,2)’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째 날’이고, 이 날은 안식일 다음날인 ‘여덟째 날’ 로서 모든 날 중의 첫째 날, 모든 축일의 첫째 축일, ‘주님의 날’, 즉 ‘주일’이다. 성 유스티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날은 ‘해의 날’이며, 암흑에서 사물을 끌어내어 창조하신 날로서 첫째 날인 것이다. 이 날은 우리가 빛을 발견하는 날이다. 우리 인생의 의미가 환히 밝혀지는 날이다. 이같이 ‘주님의 날’에 기억되는 주님의 부활, 즉 죽음에 대하여 영원한 삶의 승리는 인생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하고, 그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삶을 위한 의욕과 생기는 또 다른 역경을 이겨내고 남을만한 힘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주님의 날, 주님과 함께 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며, 거룩한 휴식의 열매인 것이다. 모든 형태의 억압 상황, 에집트나 무덤으로 표현되는 모든 것들, 예를 들어, 가난, 질병, 소외, 추방이라든가, 이와 비슷한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이 쉼과 휴식의 시작이다. 또한 가나안과 부활로 표현되는 창조주 하느님과의 내적 일치가 쉼과 휴식의 완성이다. 이것이 파스카 여정이고, 그 안에 우리의 쉼과 휴식이 있다. 만일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방탕을 겨냥한 방랑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지옥일 뿐이다. 구약의 출애굽이 사 십 년의 방랑을 말하면서 이스라엘이 파라오의 억압으로부터 탈출은 했으나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목적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약속의 땅으로 표현되는 하느님과의 일치가 진정한 평화를 가져온 참다운 쉼이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즉 주님의 날에 기억되는 파스카의 여정을 길잡이로 삼아, 어디를 가든, 언제이든, 일상의 번거로움을 떠나지만 창조주와의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마음의 여행을 시도하자. 그리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느껴지는 사랑 받고 있음을 이해하여 생기를 얻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데 지치지 않을 힘을 얻어 내자. 이것이 쉼과 휴식의 영성이다.

2009-07-28

[불교 칼럼] 가장 어려운 문병

옛날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인도의 비야리 성에는 유마힐이란 거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돈을 많이 번 부자인데다가 머리 기른 채 큰 수행을 닦는 재가의 대승보살로서 참으로 높은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보살이 그만 큰 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소식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병문안을 가도록 분부하셨다. 하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으니 큰 슬기 사리불이나 신통 제일 목건련이나 공을 잘 안다는 수보리도 그랬고 말 잘하는 부루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유마거사의 병이 보통 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이즈도 없던 시절이고 조류 독감도 몰랐던 시절인데 조상을 잘못 만나 무슨 희귀 유전병에라도 걸렸단 말인가? 어쨌든 그가 이름 모를 큰 병에 걸리긴 했는데 병명도 없단다. 병의 원인은 나와 있는데 자기가 지금 앓고 있는 이유는 이 세상 모든 중생이 앓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남들이 모두 병이 나아야만 자동적으로 내 아픈 증세가 사라지는 희한한 병이라는 것이다. 이러니 문병을 간들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어느 의사가 고칠 수 있겠는가! 자칫 잘못 했다가는 유마거사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의 병을 건드려 덧나게 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사실 더 어려운 문제는 다는 데 있었다. 유마 거사의 경지가 어찌나 높고 법담에 뛰어났던지 그와 겨루어 이긴 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부처님의 열 큰 제자 가운데서도 그와 법담을 나누다 당하지 않은 이가 없다지 않은가! 그렇다고 문병을 안 갈 수는 없으니 마침내 문수보살이 총대를 메었다. 문수보살이라면 사뭇 옛적 부처님의 스승인데 무려 일곱 부처님을 내리 가르쳤다지 않은가! 그렇다면 제 아무리 유마 거사라 할지라도 한 판 벌여 볼 만 하것다. 그리고 공짜 구경이라면 자다가도 도시락 싸들고 나서는 법. 보살들과 나한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도 눈부신 이 한마당을 놓칠세라 줄줄이 함께 그를 따랐다. 잘 오셨소이다. 문수보살이여 오지 않음으로 오시며 보지 않음으로 보십니까? 거사여 참으로 그러하오. 온다 하여도 온 것이 아니며 간다 하여도 간 것이 아니외다. 왜냐면 온다는 것은 온 데가 없고 간다는 것도 간 데가 없으며 본다는 것도 실상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병환은 어떠십니까? 단수가 높다. 예삿얘기가 아니다. 이 주고받기를 비롯하여 유마의 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높고도 멀리 두루 너른 이야기로 이어가다 마침내 '둘 아님'의 법문에 들어선다. 둘이 아닌 오직 하나 뿐임이라는 법의 문에는 어떻게 들어갑니까? 유마가 물었다. 제 생각에는 말없이 알음알이 없이 묻고 답하기를 모두 떠나는 것이 '둘 아님'의 문에 들어감이라 하겠소이다. 그리곤 되묻기. 거사님 그렇다면 거사님은 어떤 것이 '둘 아님'의 법문에 드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 거사는 다만 가만히 앉은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문수보살이 찬탄하였다. 참으로 좋고도 좋도다! 글자도 말까지도 없는 것이 참으로 '둘 아님'의 법문에 들어감이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웠던 문병은 이렇게 이어지는데 결과가 궁금하신 분은 반드시 대승의 크지 않은 경전 유마힐경을 찾으시라. 더군다나 궁금하신 그대가 한낱 재가의 불자라면.

2009-07-28

[신앙 상담] 봉사에 대한 부담감 있는데···

Q: 저는 어린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아직 신앙이 깊지는 않지만 주일예배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합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이 바쁘기 때문에 교회에서 봉사나 사역에는 참여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에서 무언가 해야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습니다. 봉사를 하기에는 시간이나 체력적으로 힘들고 안하면 왠지 다른 교인들에게 미안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들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두 자녀를 키우는 것은 바쁜 일입니다. 그런 경우 교회 봉사는 엄두가 안 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부담이 있다는 것은 성도님께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셨다는 뜻입니다. 사정이 힘들어서 봉사가 어려운 경우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봉사를 하는 것은 나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신앙 성장에 꼭 필요한 일입니다. 누군가의 봉사와 헌신으로 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봉사로 갚아야합니다. 봉사를 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라시는 주님의 뜻을 이루게 되고 자신은 더욱 성숙한 성도가 됩니다. 봉사를 크게 하려고 하면 여러 가지로 부담이 됩니다. 또 봉사하는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생기구요. 작게라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시면 됩니다. 섬기시는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도 훌륭한 봉사입니다. 다른 교인들은 나의 기도 봉사를 모를 수 있으나 주님은 아십니다. 꼭 교회에 안가시더라도 집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직장 동료 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도 귀중한 봉사입니다. 우리는 또한 힘닿는 대로 물질로도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어리면 아이들이 속한 교육부에 행사가 있을 때 음식을 만들어 한 번 대접을 할 수도 있습니다. 봉사를 할 때는 주님께서 주신 나의 은사를 알아서 은사에 맞는 봉사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회는 봉사를 하려고 들면 크고 작은 일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담당 사역자를 찾으셔서 상담하시면 내게 맞는 일을 찾는데 더욱 도움이 됩니다. 봉사를 위한 교육도 받을 수 있구요. 사람마다 관심 재능 은사 성품 경험 환경 여건 등이 다 다르기에 내게 맞는 봉사를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봉사를 하는 비결은 먼저 봉사하겠다고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봉사할 수 있는 시간과 힘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꼭 응답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감동이 오는 일을 담당 사역자와 의논을 하시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을 하시면 됩니다. 하다보면 자신감도 생깁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시간도 납니다. 힘도 납니다. 나의 봉사로 유익을 얻는 영혼을 바라 볼 때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봉사의 기쁨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봉사는 하늘 나라에 상급을 쌓는 일입니다. 봉사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함으로 이 땅에서도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받는 행위입니다. 성도님의 삶에 주님의 은총과 평안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9-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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