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의 향기] 저출산 문제 해결하려면
한상만 신부/성 크리스토퍼 한인성당
그러나 이런 경고를 접하면서도 아이를 더 낳을 수 없는 이유들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과도한 교육비 지출을 감당할 힘이 없다는 것이 어쩌면 제일 큰 이유일지 모르겠다.
치열한 경쟁에서 자기 자녀를 승자로 만들기 위해서 차별화된 양질의 교육을 시켜야 하니까 남보다 더 일찍 남보다 더 많이 남보다 더 비싼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리라.
이런 사고 방식을 가진 부모들을 대상으로 출산의 고통이 갖는 의미와 기쁨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출산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 새 생명 탄생의 기쁨이 마음에 새겨지기도 전에 위에 언급한 생계유지의 고통에 대한 증폭된 두려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도무지 그 답을 알 수 없는 고통의 문제는 인생의 뿌리에 닿아 있고 그런 뜻에서 창조주와 관련된 신비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풀릴 수 있는 문제이다.
창조 때 낙원의 인간은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의 존재였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무고통의 존재였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올 때 하느님과 단절되고 사람끼리 단절되고 사람과 사물들과 단절되면서 서로 비난하는 사이로 관계가 왜곡되었다.
그럼으로써 창조주께서 주신 본래의 선물인 상호 간의 매력은 지배와 탐욕의 관계로 변하고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땅을 지배하는 남편과 아내의 아름다운 소명에는 출산의 고통과 생계유지라는 고생이 부과되었다. 고통은 결국 원죄의 결과인 셈이다.
그런데 고통을 느끼는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결합체이다. 따라서 육체적 고통이 벌받음의 표징으로 이해되고 그 것은 정신적 고통으로 확산된다.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음 저주받음 또는 사탄의 공격으로 인식되는 고통은 죽음을 그 뿌리로 하며 인간을 절망하게 만든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점차 밝혀 주신 것처럼 의로운 이의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욥이 그러했고 예수께서 완전하게 계시하시지만 의로운 이의 고통은 저주 받음이나 버려짐의 표징이 아니라 시험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단절되었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시험의 의미를 가지고 찾아오는 고통의 신비는 우리들의 마음속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성령의 은총으로 밝혀진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시고 사막에 나가셔서 사탄의 세가지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철저히 거부하시고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수락하신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을 이끌어낸다. 결국 고통을 받아들임은 원죄를 이기는 회개를 의미하고 회개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며 그 효과는 기쁨과 행복의 충만이다. 이것이 고통의 신비이다.
그런즉 고통에는 기쁨의 측면이 숨어 있다. 고통을 쾌감으로 즐긴다는 병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승화된 고통의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 복음의 예수께서 부활의 기쁨을 산고의 기쁨으로 유비하신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겁먹고 회피하지 말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통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행해지는 자선과 고행들은 언제나 풍요한 영신적 열매를 맺어왔고 그 힘은 사회를 정화하고 지탱하는 힘이 되어왔다.
그런 뜻에서 고통의 신비를 이해함이 저출산의 문제를 심각하게 겪는 한국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만 낳아도 사라지지 않을 두려움이 이 신비의 이해로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