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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2001년 9월 11일.     23년 전 오늘, 공포의 바람이 뉴욕 하늘을 뒤덮었다.     강산이 두 번 변할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날의 아픔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그리고 여기, 평생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이가 있다. 사건 당일 남쪽 타워 79층 후지뱅크에서 근무 중이었던 1943년생 김 모 씨는 40분가량 진행된 전화 인터뷰 내내 떨리는 목소리를 여러 번 가다듬으며 긴박했던 당시 현장 상황을 전했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 언론에 한 번도 나선 적 없었지만, 모두가 기억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처음으로 용기를 내 입을 뗐다. 아직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그는 “지금도 말하다 보면 흥분이 돼서 덜덜 떨린다”는 말을 반복했다. 수화기 너머로 긴장감과 두려움이 전해질 정도였다.   ◆구름 한 점 없던 맑은 날   전세계가 공포에 휩싸였던 그날, 김 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출근길에 나섰다. 그는 “유난히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고 설명했다. 뉴욕 스카스데일 집에서 오전 7시반쯤 출발해 8시40분경 자리에 도착했다. 자리 정리를 하고, 늘 그랬듯 화장을 고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오전 8시46분. 아메리칸항공11편 비행기가 월드트레이드센터 북쪽 타워를 향해 돌진했다.   ◆화장을 고치고 나와보니   화장을 고치고 나와보니 평소와 달리 라운지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순간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복도로 나와보니 이미 사람들이 뛰어다니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남자 행원들이 그를 향해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고, 이에 급히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물 끼얹듯 조용해졌다   79층에서 53층까지. 20층 넘게 걸어 내려오는 동안 김 씨는 정확히 무슨 일이 터졌는지 알지 못했다. “비행기가 사고로 북쪽 타워를 쳤대.” 내려오면서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맑은 날 비행기 사고가 났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사고 현장은 소통을 위해 층마다 비상계단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뒀고, 오피스 스피커에서 조그맣게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와글와글한 사람들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다들 조용!” 아래층에 있던 한 남성의 고함에 현장은 일순간 물 끼얹듯 조용해졌다.     ◆분명 ‘세이프존’이라고 했는데   “남쪽 타워는 ‘세이프존’입니다.” 스피커에서는 ‘세이프존’이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됐다. 북쪽 타워에 있는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하니, 남쪽 타워에 있는 이들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라는 얘기가 들렸다. 도저히 다시 걸어 올라갈 수 없었던 김 씨는 52층 계단 벽에 몸을 기대고 서있었다. 2~3분쯤 지났을까. 찌이이익! 무언가 빌딩을 쥐고 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벽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고, ‘테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이 흔들리며 먼지와 파편들이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손잡이를 붙잡고 겨우 한 칸씩 내려가고 있는데, 불이 번쩍하며 빌딩 위쪽에 뭐가 부딪혔다. 비명 소리가 들리며 한 남성이 “킵 워킹!”이라고 소리쳤다. 그때부터 아비규환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비틀즈의 노래가 뇌리를 스치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이 계단을 3~4칸씩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지만, 잔뜩 겁먹은 몸이 따라주지 않아 김 씨는 빠르게 내려갈 수 없었다. 그때 한 미국 청년이 다가와, “두 유 워너 홀드 마이 핸드?”라고 물었다. 김 씨는 우습게도 그 순간 비틀즈의 ‘아이 원 투 홀드 유어 핸드’라는 곡이 뇌리를 스쳤다고 했다. 그는 노래 제목처럼 청년의 손을 잡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청년은 “가끔 빌딩이 바람에 흔들리곤 하는데, 그게 좀 심해진 상황이라고 생각해 보자”며 공포에 질린 김 씨를 안심시켰다. 중간쯤 내려왔을까. 함께 내려오던 무리에서 떨어져 자신 때문에 천천히 이동하는 청년에게 미안했던 김 씨는 “이제 내가 알아서 가겠다”며 손을 놨다. 그래도 청년은 쉽게 가지 못하고 자꾸 뒤를 돌아봤고, 김 씨는 “뒤돌아보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전했다.      ━   “죽음을 향해 오르던 소방관의 뒷모습 눈에 밟혀”     붕괴 전 일으켜 세운 소방관 덕에 목숨 구해 김 씨 근무했던 후지뱅크 직원 23명 사망   ◆온 세상이 시꺼먼 재로 뒤덮였다   드디어 고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3층까지 내려온 김 씨의 귀에 “지하 1층에 도착하면 북쪽으로 뛰어!”라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 1층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는 직감했다. 엄청나게 큰 일이 터졌다는 것을. 사람들이 1m 간격을 두고 양쪽으로 줄을 서 있었는데, 이를 통제하는 경찰들 표정이 엄청나게 심각했다. 하이힐과 휴지 등 물건이 사방에 널려있었고, 대낮인데도 온 세상이 시꺼먼 재로 뒤덮여 있었다. 줄을 따라가다 보니 회전문이 나왔고, 깨진 유리 사이로 빠져나온 김 씨는 강가 쪽으로 향했다. 북쪽으로 뛰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다리가 너무 떨려 도저히 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신없이 이동하던 그는 순간 뒤를 돌아봤다. 북쪽 타워에서는 90층 즈음에서, 남쪽 타워에서는 김 씨가 다니던 은행이 위치한 70~80층 즈음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고   처참한 광경을 뒤로하고 전철역에 다다른 그는 고민에 빠졌다. 이게 테러가 맞다면, 전철역 내부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빌딩이 무너질 거라는 확신이 생겼기에, 어디로든 피신해야 했다. 문제는 전철을 이용해 통근하지 않았던 그가 노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무작정 한 여자아이를 따라갔다. 플랫폼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전철이 김 씨 앞에 섰고, 열차에 올라타 여자아이에게 집 가는 길을 물었다. 그랜드센트럴역에서 환승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내렸는데, 공포가 얼마나 거셌으면 열차가 움직이는 소리조차 무서웠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고 환승역에 도착했고, 이때도 열차가 바로 왔다. 김 씨는 “천운이 따랐다”고 설명했다. 그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던 시간에, 월드트레이드센터는 붕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 향해 오르던 어린 소방관   오전 11시.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후유증 때문에 아파트마저 흔들리는 느낌이 들어 문 열기도 힘들었다. 그날 김 씨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올 때, 무거운 도끼를 들고 죽음을 향해 계단을 오르던 소방대원들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그는 특히 “내 목숨을 구해준 어린 소방대원을 잊을 수 없다”고 전했다. 계단을 내려오다 너무 힘들어 주저앉았는데, 무거운 소방호스를 맨 소방대원이 그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곧 건물이 무너질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내려가라”고 등을 밀어줬다. 곧 무너질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앞날이 창창한 어린 소방대원은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김 씨는 “그 뒷모습이 지금까지도 마음 아프게 자리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김 씨가 근무했던 후지뱅크는 이날 23명의 직원을 잃었다. 그는 “은행 보스들과 시큐리티들은 회사 기밀이 유출될까봐 자리를 지키다가 모조리 희생됐다”고 말했다.     살아나오지 못한 동료들, 그리고 자신을 살려준 어린 소방관을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사건을 겪은 많은 이들이 뉴욕을 떠났지만, “아직도 스카스데일 그 집에 살고 있냐”는 질문에 “그렇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윤지혜 기자구름 특별기획 북쪽 타워 남쪽 타워 월드트레이드센터 북쪽

2024-09-10

특별기획, '2022년 워싱턴 지역 부동산 시장 전망'

승경호 슈나이더 팀 대표가 내년 워싱턴지역 부동산 시장이 여러가지 변수와 정부 개입 등의 왜곡으로 인해 예측이 쉽지 않다고 전망했다.   그는 특히 코로나 펜데믹 이후 낮은 이자율로 소비자들의 금융조달비용이 낮아졌지만 세차례에 걸친 경기부양 지원금 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박으로 가계 부채 조정을 겪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주택경제는 장기적으로 계속 우상향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단기적으로는 하락과 상승의 연속이기에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 당시 차압과 숏세일 쓰나미가 다시 온다면, 가계 부채로 인한 재정건전성 상실과 정부지원금 포탈로 인한 대규모 추징사태로부터 불거질 수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워싱턴지역만 하더라도 편차가 심하고 여러 주택가격 영향 요소가 존재하는 만큼 조정 국면을 쉽게 예측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부동산 투자의 경우 개개인의 상황에 맞춰 무리하지 않으면 넉넉한 은퇴 자산으로 되돌아올 수 있지만, 무리할 경우 독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Q. 현장에서 바라보는 주택시장의 온도는 어떤가? A. 지금도 셀러들의 기대치는 상당히 높다. 아직 셀러스 마켓 즉 셀러의 세상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집을 판 것에 대해 만족한 결과를 가진 셀러들은 다시 불안한 바이어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Q.  주택경기 하락세를 예측하는 전문가들이 많은데, 대표님 생각은 어떤지? A. 보는 시각에 따라 견해는 다르다. 정부가 이미 개입한 경제이니 어느 정도는 버틸것으로 판단되지만 한번쯤 꺾어지는 주택경제 곡선은 준비해야 할듯 싶다. 주택경제는 길게 보는 상승선이지만 자세히 펼쳐놓게 되면 상승과 반등의 연속이다. 2-3년전에 왔어야 할 반등이 정치와 코로나로 인해 그 순간을 놓친 듯 하다. 잔치를 했으면 청소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달리던 말도 잠시 쉬어야 한다. 정부의 정책으로 그 순간을 잘 넘어 갔다. 시한 폭탄을 넘겨주듯 정권교체의 타이밍이 반등의 순간을 절묘하고 자연스럽게 비껴갔다. 하지만 청소하려는 정권은 안보이는 듯 싶다.     Q. 만약 주택가격 하락기가 온다면 언제부터 시작해서 어느정도의 영향이 있는지? A. 정부는 지난 서브프라임 사태의 처참함을 기억하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회복 불가능한 기업들이 정부의 지원금으로 겨우 버티고 있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얕아지는 지원금의 잔고가 불안하다. 그나마 필요한 지원금을 받은 기업들이 회복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서 말이 물통을 매고 달리며 언제 다시 오아시스가 나올지 모르는 황야로 달리고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물통의 물은 정부지원금으로 보면 된다. 언제 마를지 모른다.     Q. 주택가격 조정이 없거나 약간만 있다고 한다면 근거는? A. 워싱턴 디씨만 말한다면, 이 작은 도시에도 편차가 심하다. 교육의 열기가 뜨겁고 심각한 교통체증을 앓는 도시이기에 학군이 좋고 교통이 좋은 곳은 어느 경제 상황에서도 안정적이었다. 이미 외곽의 몇몇 지역은 바이어들이 뜸하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근무 형태가 자택근무로 바뀌면서 도시에서 외곽으로 이주하는 인구도 늘었다. 그 여파로 도심 교통 체증에 대한 민감성이 풀렸다고 보지만 만약 다시 정상적인 근무 형태로 되돌아간다면 상상하지 못할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교통체증은 주택경기에 큰 영향을 준다. 직장과의 거리, 출근시간에 따라 매도 지역과 교통요지의 주택가격 상승은 피할수 없게 된다.       Q. 지난 주택위기 당시 숏세일과 차압 사태가 줄을 이었다. 현재는 주택가격이 올라 에퀴티가 쌓여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말도 나오는데, 셀러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A.모두가 알고있듯이 기존 원자재의 단가가 올라서 모든 생활비 지출이 이미 늘었다. 이자가 낮아서 모기지 지출은 줄었지만 가계 지출이 몇 배로 올랐으니 의미가 없다. 또한 이미 상한가의 값으로 구입한 주택에 이자가 낮으니 도찐개찐인 셈이다. 그와중에 지출은 더 많아졌다. 많은 가정들의 가계 부채율도 심각해졌다. 숏세일과 차압사태가 다시 온다면 주원인은 가계 부채와 불법 정부지원금 포탈로 올 것으로 예상된다.     Q. 현재의 주택시장이 정점이 아니라면 어느정도까지 가격이 더 상승하리라고 보는가? A 정점을 논할수가 없다. 경제원칙에 근거해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가격이 더 상승하더라도 그만큼 낭떠러지도 보이는 법이다. 내년이 변곡점이라 해도 지금 매도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의 기대는 칼날이 올 때까지는 꺽이지 않는 법이다. 지난 서브프라임때도 어느 화창한 날 하루에 시작돼 몇년이 흘러갔다. 그 당시, 그 화창한 날에 대한 소문만 앞섰고 준비한 사람은 없었다     Q. 조정기나 비수기에 주택 매매를 하려면 셀러와 바이어 입장에서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는가? A. 간추리자면 주택은 누구에게나 가장 큰 재산이다. 내 가족의 행복을 꾸려나가고 쉬게 하고 또 보호하는 보금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무리해 구입해서도 안되고 구입 후 후회해서도 안되는것이다. 옆집, 친척이 웃돈을 주고 샀다고 인스펙션 없이 주택구입을 하는 것은 가장 잘못된 행동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집을 살 수가 없다면 사지 말아야 한다. 지금도 매도 하려고 하는 집에 방문하면 어떻게 이렇게 살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주택을 구입한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 당시 인스펙션도 안하고 웃돈 주고 구입한 주택들이라 할수없이 10년 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것이 나을듯한 집도 많다. 하는수 없이 지금 당장 집을 사야 한다면 부동산 에이전트와 주택을 면밀히 잘 검토하고 구입해야 할 것이다.     Q. 현재 시점에서 투자용 주택부동산 구입은 현실성 있는지, 어느정도 수익을 낼 수 있는지? A. 1시간을 넘게 설명해야 할 내용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투자용으로 주택을 구입한다면 그 가정의 경제사정에 따라 다르다. 독이 될수도 있고 멋진 은퇴자금이 될 수도 있다. 투자용 주택 부동산을 구입한 후 은행빚이 많아진다면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충분한 저축이 먼저다. 투자용 주택부동산은 가장 안정적인 금융투자 상품이기는 하지만 여유자금에서 마련해야한다. 이 또한 남들 따라 투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Q. 부동산을 투자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가장 좋은 부동산 투자는 무엇인지? A. 아주 쉽다. 온 가족이 모여 앉을 수 있는 리빙룸에서 넷플릭스 영화를 함께 보고, 다과를 나누고, 그날의 일상을 나누며 오늘 하루 수고했다고 등을 토닥여 줄 수있는 소파 하나가 들어갈 만한 집이면 되는것 같다. 자기 전에 아내의 이마에 손을 한번 얹어볼 수 있는 침대가 있는 집이면 더 바랄게 없다고 판단된다. 행복에 투자하길 바란다.   김윤미 기자 kimyoonmi09@gmail.com특별기획 워싱턴 내년 워싱턴지역 주택가격 영향 부동산 투자

2021-11-10

[취재수첩] 멈춰선 70년…미네소타 가는 곳마다 한국전 사연

19일 오후 3시, 출장 일정을 끝내고 미네소타를 떠나기 전이다. 잠시 미니애폴리스 다운타운에 들려 5가 인근의 밥 딜런 벽화 앞에 섰다. 미네소타는 밥 딜런이 나고 자란 곳이다. 그는 평화를 노래했다. 흥얼거림은 인식으로 스민다. 아무래도 이곳 사람들은 음률을 입은 그의 가사를 좀 더 음미하며 들었을 거다. 그래서일까. 조지 플로이드가 짓눌렸던 그 자리에는 지금 평화의 생기가 움튼다. 미네소타주는 애칭이 있다. '미네소타 나이스(Minnesota Nice)’. 이곳의 기운이 묻어나는 별칭이다. 미네소타에서 나눈 여담을 잠시 적는다. 이곳의 겨울은 미국 내에서 손꼽을 정도로 춥다. 북유럽 이민자가 많은 이유다. 이곳 사람들은 혹한을 이타심으로 이겨낸다. 미네소타에서 45년째 산 한현숙(전 미네소타아동복지회)씨는 “한 예로 한겨울에 차가 멈춰버리면 너무 춥기 때문에 정말로 위험한 곳이 여기”라며 “그래서 차가 멈추면 너도나도 와서 도와주는 게 미네소타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네소타의 혹한은 한국과 인연으로 닿았다. 한국전쟁 당시 추위에 익숙한 병사가 필요했던 탓에 미네소타의 병사들이 대거 차출됐다. 정전협정 뒤에도 미네소타와 한국의 인연은 계속됐다.한인 입양아도 많다. 미네소타 입양 역사 이면에는 한국전이 있다. 미네소타대학은 서울대학교에 학문과 기술을 전수하는 프로그램(미네소타 프로젝트)을 진행한다. 연간 75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710만 달러)를 투입했다. 취재 도중 그 당시 미국행 비행기 삯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미네소타대학 송창원 박사(88)를 만났다. 방사선 생물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그런 송 박사가 뜬근없이 퀴즈 하나를 냈다. 그는 1세대 국비 유학생(1959년 9월)이다. “장 기자, 내가 유학올 때 비행기표 값이 얼마였을 것 같아요.” 나는 1979년생이다. 맞출 리가 없다. “950달러였어요. 그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이 60달러대였으니 상상이 되십니까.” 미네소타대학이 한국을 돕기 위해 매년 지원한 금액이 어느 정도 규모인가를 가늠해본 대목이다. 이 대학 농과대학 부속 식물원에는 한국산 식물 수십 종이 있다. 한국전 후 미네소타대 교수들이 한국에 나가 가르치고 돌아오면서 가져온 것들이다. 미네소타에서 태양광 회사 EVS를 운영하는 김권식 대표는 이곳에 ‘한국의 언덕’ 제작을 추진중이다. 식물원 측과 어느 정도 논의가 오간 상태다. 인연은 여러 면에서 공교롭다. 미네소타는 작가 찰스 슐츠의 고향이다. 그는 미국인의 사랑을 듬뿍 받은 만화 캐릭터 찰리브라운과 스누피를 그려냈다. 한편으로는 ‘찰리 브라운’하면 김시스터스(The Kim Sisters·1953년 결성)다. 한국전 이후 미군 부대에서 인기를 끌다가 1959년 미국에 진출한 원조 케이팝 걸그룹이다. 이들이 부른 찰리 브라운(1962년)은 아직도 미네소타 사람들 기억에 남아있다. 한국전쟁은 ‘잊힌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린다. 당사자에게 그때의 기억을 묻는 건 상당히 조심스럽다. 전쟁은 실제다. 악몽을 소환해야 한다. 추상적 질문은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해서다. 질문자와 답변자 사이의 괴리다. 대신 이곳에는 흔적이 많다. 한국과의 접점들이다. 그 자취는 저마다 인연을 담아낸다. 종적을 따라간 건 답을 듣기 위한 과정이었다. 미네소타는 한국전의 ‘사실’을 70년이 흐른 지금도 사연으로 말하고 있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20-06-25

미네소타 참전 용사들 전쟁 고아까지 품었다

버려진 게 아니다. 인연으로 지켜진 거다. 미네소타주에는 가슴으로 낳은 생명이 많다. 한현숙(83ㆍ사진)씨는 미네소타주 한국 입양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외길만 걸었다. 미네소타아동복지회, 국제사회봉사회 등에서 40년간 해외 입양만 담당했다. 입양의 연분은 슬프게도 전쟁이다. 6·25는 고아를 양산했다. 곳곳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한국전의 또 다른 그늘이었다. 한씨는 “미네소타주의 한인 입양 역사를 보면 미군들이 한국전 참전 후 이곳으로 돌아올 때 한국서 고아를 데리고 오거나 양자를 삼으면서 시작됐다”며 “이후 입양 기관들이 생겨나면서 한국의 아이들이 공식 입양 절차를 밟게 되면서 입양아가 더 많아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미네소타주 참전용사를 돕는 김병문 박사 역시 “참전용사는 물론이고 그 자제들 중에는 아버지로부터 ‘한국전’ 이야기를 듣고 훗날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한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미네소타아동복지회가 한씨를 통해 이곳에 데리고 온 한인 입양아는 무려 1만 명이 넘는다. 한국전 이후 가슴으로 품고 지켜낸 어린 생명들은 그렇게 미네소타로 건너왔다. 한씨는 “미네소타는 한인 사회 구성이 타주와 다르다. 이곳의 한인 입양아는 현재 1만5000여 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한인 이민자보다 더 많다”며 “대부분 아기 때 미국인 가정에 입양됐기 때문에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한인들”이라고 했다. 입양인이 한인 이민자 1.5배 주 공화당 의장도 입양인 센서스국 조사도 진행중 실제 센서스국에 따르면 미네소타 지역 한인은 총 2만995명(2010년 기준)이다. 이중 한국어 사용자는 5678명 뿐이다. 센서스국도 미네소타주 입양인 사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특별히 올해 센서스에서는 입양인 인구 조사도 하고 있다. 정확한 입양 인구를 파악하겠다는 심산이다. 미네소타주의 한인 입양아들은 사회 곳곳에서 활동중이다. 미네소타주 공화당 의장 제니퍼 카나한도 입양아다. 지난 2016년 국적을 회복해 한국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에서 활동한 마리사 브랜트(한국명 박윤정) 역시 미네소타주에서 자란 입양아다. 한때 골수 이식으로 한국에서 관심이 높았던 미 공사생도 성덕 바우만 역시 미네소타주 출신이다. 한씨는 “유명 체인 스토어 ‘타겟(target)’이 미네소타주에서 처음 생겨났는데 그때 창업자(존 제스)도 한인 여자 아이를 입양해 내가 도움을 줬다”며 “한국전을 통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사연이 여러모로 많은 곳이 미네소타주”라고 말했다. 피보다 진한 인연이다. 거기엔 가슴으로 낳고 키운 생명들이 있다. ------------------------------------------------------------------------------ 한인 입양아, 왜 미네소타인가 미네소타와 한국은 1950년을 기점으로 각별해졌다. 특히 가장 많은 전쟁 고아를 입양해 돌본 곳으로 기록됐다. 그 흔적을 따라가봤다. “미네소타 입양아들 기록으로” 킴 잭슨 수석 아트 디렉터 킴 잭슨(사진)씨는 현재 ‘미니에폴리스ㆍ세인트폴 매거진’에서 수석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해군에 있을 때 1950년대 초반 한국에서 근무를 했다. 그 인연으로 1973년에 미네소타로 나를 입양했다”고 말했다. 잭슨씨는 미네소타주 한인 입양아들을 한 명씩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나’를 찾기 위한 여정에서 비롯됐다. 6년여의 걸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발간(2010년)된 사진집의 제목은 ‘HERE(여기에)’다. 그는 “친구가 사진집의 제목을 ‘THERE(거기에)’로 제안했는데 내가 나고 자란 이곳의 의미를 담아 제목을 ‘HERE’로 달았다”며 “이곳의 입양아를 담아내기엔 책 한 권으로 부족하다. 계속해서 ‘HERE’ 시리즈, 입양아들을 위한 기록을 남기는 일을 기회가 되는대로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잭슨씨는 본업 외에 미네소타주 한인 사회와 입양 가족들을 위한 계간지(Korean Quarterlyㆍ1997년 창간) 편집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는 지금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한국’에 대한 의미를 물었다. 그는 “내가 돌아갈 수 있고, 나 자신에 대해 아직도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잭슨씨는 “한국은 나에게 고향, 조국…동시에 먼 나라, 잘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부분이 많은 문화 등 여러 의미가 떠오른다”며 “그런데 이상할 만큼 상당히 친숙하다. 그 느낌은 역시 내 아이들에게 피를 통해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입양아 돕는 건 내 평생의 일” 미네소타대 쥬디스 에컬리 교수 쥬디스 에컬리(사진)는 미네소타대학 의과대학 부교수다. 소아과 전문의로서 현재 입양 아동 의학 클리닉 디렉터로도 활동중이다. 당시 에컬리 교수의 양아버지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것이 계기가 돼 에컬리를 입양하게 됐다. 그가 생후 5개월 때 일이다. 에컬리 교수는 ‘어머니’가 되고 나서 생모를 좀 더 이해하게 됐다. 그는 “내 딸이 태어나고 몇 달 후 양어머니가 ‘엄마가 되니까 생모 생각이 더 나느냐’고 묻더라”며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 당시 생모에게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머니가 나를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린 거라고 생각한다.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에컬리 교수는 학창 시절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다. 특히 고등학교 당시 ‘입양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나 존슨 박사를 멘토로 만난 게 계기였다. 이후 입양 의학(adoption medicine)을 통해 미네소타주의 또 다른 입양 아동들을 돕는 길을 걷고자 결심했다. 그는 “위탁 양육 아이, 입양아는 물론 어린 시절 부정적 경험 등을 가진 아이, 가족 등을 만나 소아과 의사, 전문 치료사, 심리학자 등이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며 “입양 의학은 소아과 분야에서 작은 부분에 해당하지만 이것은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했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20-06-24

미네소타대학, 전쟁 후 '한국 재건' 이끌었다

미네소타주와 한국의 인연은 '열매’를 맺었다. 미니애폴리스 다운타운에서 서쪽으로 20여 마일 떨어진 차스카 지역에는 미네소타대학교 농과대학 부속 식물원(MLA)이 있다. 그곳에 핀 라일락(lilac)의 공식 이름은 ‘미스 김(Miss Kim)’이다. 미네소타에서 태양광 회사 EVS를 운영하는 김권식 대표(서울대 61학번)는 “한국 전쟁 후 미네소타대학 농대 교수들이 한국에 나가 가르치고 돌아오면서 가져왔다. 이곳에는 한국 식물들이 아주 많다”며 "1950년대 진행됐던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흔적 중 하나”라고 말했다. 휴전 협정 체결 뒤 1년여 만이었다. 미네소타주는 ‘한국(Korea)’과 다시 한번 인연으로 묶인다. 미네소타대학교 기록 보관소에 따르면 당시 미국 정부 산하 국제협력국(ICA)은 미네소타대학과 3년간 계약을 맺었다. 1954년 9월28일이었다. 미네소타대학은 한국 전쟁 후 원조 계획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에 ▶의과 대학 ▶농과 대학 ▶공과 대학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학문과 기술을 전수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한다. 일명, ‘미네소타 프로젝트(Minnesota Project)’다. 미네소타대학 기록보관소 담당 캐서린 모켄은 “미네소타대학은 첫 계약 당시 연간 75만 달러를 이 프로젝트에 투입했다. 현재 가치로 보면 매해 710만 달러 가량”이라며 “한국에서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로 알고 있지만 원래 이곳에서는 ‘코리안 프로젝트’ 또는 ‘한국 협력 프로젝트(Korean Cooperative Project)’로 불렸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모든 게 황폐화됐다. 원조와 재건이 절실했다. 궁극의 방향은 자립과 발전으로 가야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미네소타대학은 서울대학교의 교수, 조교 등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짧게는 3개월, 길게는 4년 간 연수의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미네소타대학이 교육과 숙식을 포함, 모든 비용을 전액 부담했다. 미네소타대학 필립 듀다스 도서관 정보 담당은 “서울대학교에서 이곳으로 오기만 한 게 아니다. 당시 미네소타대학에서는 59명의 교직원을 한국으로 파견했다”며 “전략 개발, 교육 행정 등 각 분야의 체계 정비, 자문, 지원 등을 위해 한국에도 인력을 보냈다. 이후 당초 계약 분야 외에 수의학, 공공 행정학, 예술 분야까지 다양한 분야로 교류가 확대됐다”고 말했다. 실제 미네소타대학 기록 보관소에는 1957년 1~2월 사이 와이즈먼 미술관(당시 미네소타대 미술관)에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회화, 수묵화, 도자기 등의 작품이 전시됐다는 자료도 남아있다. 캐서린 모켄 기록보관 담당은 “그와 반대로 ‘미네소타 투 코리아(Minnesota to Korea)'라는 주제로 이곳의 작품이 서울대학교에 전시되기도 했다. 당시 미네소타대학의 작품은 경상도, 전라도 등 각 지방에서 순회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는데 그만큼 한국과의 교류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8년간 이어졌다. 1961년까지 총 226명의 서울대 교직원이 미네소타대학을 다녀갔다. 그 중 15명이 박사 학위, 68명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인연은 프로젝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미네소타주에 서울대 출신이 아직도 많은 이유다. GES컨설팅 지형범(서울대 77학번) 대표는 “우리 학번에서도 미네소타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동기가 꽤 있다”고 말했다. 지 대표는 “프로젝트 당시 미네소타대에서 교육받은 이들 대부분이 미국에 남지 않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들은 이후 학문적, 기술적으로 크게 기여했고 한국 발전의 보이지 않는 토대가 됐다”며 "그들이 바로 ‘이름없는 영웅(unsung hero)’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미네소타대학 역시 지난달 15일 미네소타 프로젝트 관련 자료에 대한 디지털화 작업을 최종 마무리했다. 사진, 편지, 서류 등 수년에 걸친 변환 작업이었다. 도움은 씨앗이다. 먼 훗날 가치를 맺는다. 한국의 ‘오늘'이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열매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20-06-23

"어쩌면 마지막…우린 기억되고 싶다"

기억은 희미하다. 상흔은 선명하다. 그 지점에서 꽃이 폈다. 대가를 치른 자유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미네소타주를 찾아갔다. 미네소타는 인구 대비 6·25 한국전쟁 참전군인 비율이 가장 높은 주다. 그 때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곳곳에 묻어난다. 그 흔적과 의미를 시리즈로 게재한다. 적적하다. 잔디의 푸르름이 무색하다. 그곳에 우두커니 선 보병 동상의 뒷모습은 쓸쓸함을 짊어졌다. 코로나19가 ‘6월’을 삼켜서다. 아니 70년 전 한국 전쟁의 기억마저 지우고 있다. 지난 18일 오전 8시,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의 참전 용사 기념공원을 찾아갔다. 김병문 박사(76)는 지난 2004년부터 이 지역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를 초대해 감사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함께 모이지 못한다. 김 박사는 “한국전은 ‘잊힌 전쟁’으로 불린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한국전 관련 70주년 행사들이 전부 취소된 상태”라며 “어쩌면 70주년은 그들(참전용사)에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재향군인회(VA) 공식 통계에 따르면 한국 전쟁 당시 미네소타주에서만 11만4000명의 군인이 차출됐다. 1950년 당시 주 전체 인구(298만 명)의 약 4%다. 미네소타는 인구 대비 참전군인 비율이 가장 높은 주 중 하나다. 혹한이 미네소타와 한국을 인연으로 이은 탓이다. 미네소타주에서 활동하는 변우진 변호사는 “미국에서 겨울이 가장 추운 지역으로 손꼽히는 곳이 미네소타”라며 “한국전 당시 개마고원, 압록강 지역의 겨울은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갔다. 혹한 때문에 추위에 익숙한 병사들이 필요해서 미네소타주 출신의 병사가 대거 차출된 것”이라고 전했다. 혹한의 전쟁은 치열하고 절박했다. 미네소타주에서는 육해공군 외에도 방위군(national guard)까지 동원됐다. 미네소타대학에서 은퇴한 잭 존슨 박사(미네소타 군사 박물관 초대 큐레이터)는 “1950년 11월부터 중국의 개입으로 상황이 반전되자 다급했던 미국에서는 전역이 취소되는가 하면 징병이 강화돼 예비군까지 동원됐다”며 “특별히 미네소타에서는 ‘바이킹’으로 불리던 47사단 주 방위군 소속 9000명이 그해 겨울 급히 한국전 차출 명령을 받고 각 부대에 배치돼 싸웠다”고 말했다. 당시 징집된 젊은 병사들은 대개 18~21세였다. 그때의 한국(Korea)은 지금과 엄연히 다르다. 이름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나라에 그들은 생명을 걸어야 했다. 동상 주변은 8개의 화강암 비석이 두르고 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봤다.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미네소타주 출신 병사들(758명)의 이름이다. 비석에 공백은 많다. 그건 여전히 채워져야 함을 뜻한다. 목숨의 행방은 K·I·A(Killed in Action·전사자)와 M·I·A(Missing in Action·실종자)로 나뉜다. 생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메워야 하는 공란이다. 김 박사는 비석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한동안 침묵했다.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는 “이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자유를 얻었는데…그 소중함을 오늘날 우리는 잊고 산다. 그들도 잊히고…”라고 울먹였다. 김 박사는 “(미네소타 참전용사 감사 행사에) 이제는 전년도에 참석했던 분이 이듬해에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왜 싸웠나’ 자괴감이‘한국 발전’ 보며 보람으로 90세 전후 참전용사들 재작년 한국 방문하기도 70년이 흘렀다. 생존한 참전용사들은 대부분 90세 전후가 됐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촉박하다. 지난 3주 사이 이 지역에서만 제럴드 맷슨(91·5월31일), 로버트 에드워드(88·6월3일), 스텐리젠슨(92·6월9일) 등 3명의 한국전 참전용사가 세상을 떠났다. 미네소타의 장진호전투협회 중서부 지부도 지난 1월 문을 닫았다. 이곳에 사는 펫 핀(88) 씨는 한국전 당시 해병대 1사단 소속이었다. 최대 혈전이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서 싸웠다. 조심스레 기억을 물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떨렸다. 핀씨는 “한국으로 갈 때가 18살이었다. 당시 원산에 상륙했다. 장진호 전투 때 살아 돌아온 동료는 몇 안 된다. 정말 추웠다. 피로하고 너무나 무서웠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70년 가까이 전쟁의 멍에를 지고 살았다. 비로소 짐을 벗은 건 한국을 방문(2018년)했을 때다. 그는 “한국전쟁, 그리고 우리는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핀씨는 “그때 전장에서 ‘왜 여기(한국)까지 와서 싸워야 하는가’라는 고민과 갈등이 심했다. 돌아와서도 끔찍했던 순간을 잊으려고 노력했다”며 “이후 세월이 흘러 한국을 둘러보며 전장에서 던진 질문에 답을 찾았다. ‘이게 내가 싸운 결과였구나’라는 확신을 그때 갖게 됐다”고 말했다. 혹한 속에 틔운 싹은 오늘의 꽃으로 폈다. 잊으면 안 되는 가치다. -------------------------------------------------------------------------------- 참전 7사단 사단가는 한때 ‘아리랑’ 참전 노병들 한국 사랑 각별 지도상 ‘동해’ 홍보도 앞장 미네소타주 참전용사들의 한국을 향한 마음은 전쟁 후에도 각별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당시 미국 7보병사단은 사단가를 한때‘아리랑’으로 지정(1956년 5월26일)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계속해서 아리랑을 흥얼거려 사단장에 의해 내려진 공식 명령(General Order No 63)이었다. 7사단 소속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제리렐리핀스키(89)씨는 “뉴스에서 나오는 한국 소식은 지금도 다 접하고 있다. 정말로 대단한 나라”라며 “여기서 우리들은 지역 초중고등학교에 가서 한국전 경험에 대해 말해주고 그 의미와 한국이 발전한 모습을 학생들에게 알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미네소타주에서 ‘동해(East Sea)’를 적극 홍보한 것도 참전용사들이다. 세인트폴의 참전 용사 기념 공원 입구 바닥에는 한국 지도가 새겨져 있다. 1998년 참전용사 동상 제작 당시 미네소타주 정부가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하자 참전용사들이 분개했다. 한국전 참전용사협회는 즉각 주 정부와 협의 후 석공을 고용, 그 부분에 ‘동해’를 새겨넣었다. 미네소타는 여름이 잠시다. 가을엔 유독 낙엽이 많고, 겨울이 되면 눈이 바닥을 완전히 가린다. 공원 바닥 곳곳에 새겨진 한국전의 각종 기록을 식별하기 어려워진다. 때문에 참전용사들은 사시사철 역사의 기록을 볼 수 있도록 따로 표지판까지 세웠다. 취재를 도운 김병문 박사는 한국 전쟁 당시 8살이었다. 이후 가난으로 인해 학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미군(제임스 반하겐 공군 하사)의 도움으로 학비 보조를 받아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때문에 김 박사 역시 자비로 참전용사들을 돕고 있다. 김 박사는 “참전용사의 후손들을 위해 장학금을 매년 제공(1인당 500달러·총 20명)하고 있다”며 “아버지로부터 ‘한국전’ 이야기를 듣고 이후 아이들을 입양한 참전용사의 자제도 많다”고 말했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20-06-22

[특별기획 3]차세대의 핵심 경쟁력은 '한국어'

한국어에 능숙하고 동양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차세대들이 경제적 성취도가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센서스 자료를 분석한 IOM이민정책연구원은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한인 1.5세의 경제적 성취도가 두드러지게 높다고 분석했다. 이창원 이민정책연구원은 “미국 동화론자들은 한국어를 빨리 잊고 영어만 사용하는 것이 미국 사회로의 동화를 촉진하는 것으로 인식했지만, 최근 연구들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는 것이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데 더욱 도움이 된다고 발표한다”며 “1.5세의 노동시장 성취가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중언어 능력과 이중문화 수용성이 주요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미국 센서스 통계에 따르면, 한인 1.5세의 연평균소득은 6만 5361달러로, 4만5446달러인 백인보다 2만 달러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와 달리 한인 2·3세의 연소득은 4만9295달러로, 한인1.5세보다 1만6000달러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창원 연구원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차세대에 한국어를 전수하는 것은 한인사회 전체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개인의 경쟁력 향상에도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 내 한글학교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한국어 교육의 내실화를 꾀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연구결과에 대해 한국어 교육계 지도자들도 공감을 나타냈다. 한연성 재미 한국학교 워싱턴지역 협의회장은 “자신에 대해 ‘나는 한국 사람으로, 미국에 와서 산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며 “부모가 자녀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지 않으면, 그 자녀는 혼란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은애 맥클린 한국학교 교장은 “학생들이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자 자랑스러운 미국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며 “한국어를 배우지 않은 자녀는 어른이 돼서 후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광자 한미교육재단 이사장은 “한국문화와 한국전통은 인격형성에도 도움을 준다”며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지 않으면, 부모와 대화가 단절되고 문화적 갈등도 심해진다”고 말했다. 한연성 회장은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학부모들이 한국어 교육을 후순위로 놓는다”며 “한국 정부의 한국학교 지원도 중요하지만, 동포사회의 인식 변화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은애 교장은 “부모가 자녀에게 한국어를 사용했으면 좋겠다”며 “자녀의 한국어 실력이 부족해도 실망하지 말고, 꾸준하게 한국학교에 보내면 나중에 한국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 연구원은 보고서 결론에서 한국 정부가 양질의 한국어 교사 양성을 위해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어 교육계 지도자들도 한국어 교사 전문성 제고와 함께 한국어 교육 자료와 장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심재훈 기자 shim.jaehoon@koreadaily.com

2017-01-19

[특별기획 2]한인 소득 양극화 현상 심해

재미한인들의 연소득 평균(세전 5만 9089달러)은 미국인 전체(4만9170달러)와 백인(5만 4699달러)보다 높지만, 한인들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판단하기에는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한인들의 빈부격차가 심하기 때문이다. 통계를 분석한 이창원 이민정책연구원은 “높은 평균 소득에 가려져있는 저임금 저소득층이 있다”며 “미국인 전체나 백인과 비교할 때 재미한인의 소득불평등 정도가 심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통계에 따르면 재미한인 5명 가운데 1명은 6만 달러 이상 벌고 있다. 연소득이 6만 달러 이상인 한인은 전체 한인의 19.4%나 된다. 이는 전체 미국인이나 백인보다도 높은 수치다. 전체 미국인 가운데서 6만 달러 이상 버는 미국인은 15.8%밖에 안된다. 백인들 가운데, 6만 달러 이상 버는 백인은 18%다. 이와 달리 연소득 9900달러 이하인 한인들도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한인들 가운데 22.5%가 연 9900달러를 못버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백인이나 전체 미국인보다 높은 수치다. 백인은 18.7%에 불과하다. 전체 미국인 가운데서 연소득 9900달러 이하는 20.8%다. 연령대별로 분석한 결과, 특히 한인 노인 빈곤율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원은 “재미한인은 노인빈곤율이 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한인 노인 5명 중 1명이 빈곤상황에 놓여 있다”고 분석했다. 백인의 경우 14명 가운데 1명만이 빈곤상황에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백인 노인 빈곤율은 7.4%다. 미국인 전체에서도 빈곤 노인은 10명 중 1명 정도로 빈곤율은 9.6%다. 이창원 연구원은 “두터운 한인 저소득층과 심각한 노인빈곤은 그동안 덜 주목 받아왔다”며 “한인사회 내 불평등과 빈곤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과 해결방안 마련을 위한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인사회 빈곤 문제에 대해 우태창 버지니아 한인회장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면, 재취업을 위한 ‘기술’이 최고”라며, 버지니아 한인회에서 운영하는 한사랑종합학교를 추천했다. 그는 “기술을 배워 일자리를 잡아야 한다”며 “형편이 어려운 한인들에게 무상으로 교육을 제공하고, 그 사람이 취업을 하면 등록금을 받는 방안 등을 검토하려 한다”고 말했다. 김영천 워싱턴한인연합회장은 “연합회 차원에서 노인빈곤 해결에 나설 것”이라며 “동포사회 노인빈곤 현황을 파악하고, 찾아가거나 여가 프로그램을 제공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손기성 워싱턴지역한인교회협의회장은 “미국 노인들은 은퇴 뒤에도 월마트나 세이프웨이같은 마트에 들어가 소일을 한다”며 “노인들에 대한 재정지원도 중요하지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심재훈 기자 shim.jaehoon@koreadaily.com

2017-01-17

[특별기획 1]한인, 높은 소득 불구 정치력 약해

한인들의 미국 이민이 114주년을 맞았다. 지구 반대편 낯선 땅에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인들. 다른 민족이 부러워하는 눈부신 성과도 많지만, 이면에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어두운 면도 적지 않다. 본지는 한국 정부와 국제이주기구가 설립한 이민 연구기관이 미국 센서스 자료를 분석해 발표한 보고서와 워싱턴한인사회 지도자 및 주미대사관의 조언을 종합, 한인사회의 현주소와 문제점을 진단하고, 발전방향을 모색한다. 미국 총인구조사에 따르면,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170만 6822명으로, 미국 인구의 0.54%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인들은 미국에서 1%도 안되는 소수민족이지만, 소득 수준은 미국인 전체보다 높고, 인종별로는 이민 역사가 가장 긴 백인보다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인들의 연소득 평균은 임금근로자의 경우 세전 5만 9089달러다. 미국인 전체 소득 평균(연 4만9170달러)보다 크게 높고, 백인(연평균 5만 4699달러)보다도 많다. 한인 임금근로자 가운데서는 1.5세의 소득이 가장 높았다. 1.5세는 매년 평균 7만7290달러, 2~3세는 6만 2011달러, 1세는 4만9940달러를 버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인 자영업자들의 소득 또한 미국인 전체 평균보다 높고, 백인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인 자영업자들의 연 평균 소득은 세전 4만4675달러다. 미국인 전체(연 평균 3만4147달러)나 백인(연 평균 3만7170달러)보다 크게 높다. 한인 자영업자도 1.5세의 소득이 가장 높았다. 1.5세는 연 평균 6만8822달러, 1세 4만1135달러, 2~3세는 3만7470달러를 버는 것으로 조사됐다. 통계를 분석한 이창원 연구원은 “한인 이민자들의 높은 교육수준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며 “1.5세의 소득이 두드러지게 높게 나타난 것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연방노동부 경제학자를 지낸 백순 워싱턴버지니아대 교수는 “열심히, 근면성실하게 일한 한인들의 성과”라며 “비교적 일자리 선택 폭이 넓고 여유있게 일하는 미국인들과 달리,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식을 갖고 악착같이 일한 것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백순 교수는 한인들이 더욱 발전하려면 스몰비즈니스를 넘어서 금융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 분야로 진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백 교수는 “우리와 같은 소수민족이지만 미국과 세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며 “월스트리트 등 금융 분야에는 유대인들이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문 파이낸셜 분야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한인 1.5세들이 고소득 직종에 진출하는 이유는 한국어와 아시아권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백 교수는 “세계경제의 축은 유럽에서 미국, 미국에서 아시아로 넘어가고 있다”며 “미국에 본사를 두고 세계에 지사를 확장하는 다국적 기업들도 중국과 인도, 동남아시아에 관심이 많다. 이런 추세가 아시아권 문화에 익숙한 1.5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인들의 ‘모범적 소수집단’ 이미지는 장점만 아니라 단점으로도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이창원 연구원은 “순종적이고 일을 잘하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집단이라는 이미지가 미국 주류사회 진입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며 “창조적이거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지위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인상을 줘 정치나 경영 지도자의 위치에서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동기 워싱턴총영사는 한인 정치력이 과거보다 많이 높아졌지만, 경제적인 면에 비하면 약하다고 말했다. 김 총영사는 “워싱턴 한인들은 풀뿌리 컨퍼런스 등 정치력 신장을 위해 열심히 뛰어왔다”며 “투표율을 더욱 높이고, 정치인을 배출하고, 지역사회 기여와 봉사활동을 강화해 계속 정치력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심재훈 기자

2017-01-13

"고교생 때부터 느낀 문제,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23년간 살아온 토박이, 2013년 최연소 당선 메넨데즈 의원 선거 캠페인 맡으며 정치 입문 "올해 말 재선 성공해 공약 계속 실천하고파" 뉴저지주 테너플라이의 첫 한인이자 최연소 시의원으로 당선된 대니얼 박(한국이름 박일환.31.민주) 시의원은 "학창 시절부터 이사 없이 이 동네에 거주한 만큼 테너플라이는 애착이 큰 도시"라며 "더 많은 한인들이 유입되고 권리를 주장하며 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박 의원은 2살 때 뉴욕 아스토리아로 이민 와 8살 때 테너플라이로 이사했다. 유년기와 학창 시절 모두를 한 곳에서 보내며 23년을 테너플라이 주민으로 살아온 박 의원은 이 동네의 청년 가운데서 보기 드문 토박이다. 2012년 로버트 메넨데즈 연방상원의원 선거 캠프에서 캠페인 담당자로 정치에 발을 디뎌 2013년 트레이시 줄 버겐카운티 프리홀더 보좌관 등을 역임하다 민주당 공천으로 시의원에 출마 그해 11월 당선됐다. 박 의원은 "버겐카운티 프리홀더 보좌관으로 일할 당시 그랜트와 정부 서비스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며 "세금 인상 없이 서비스와 프로그램들을 개선하는 방법들에 대해 배운 것이 시의원으로 일하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최연소 정치인으로 시작부터 어깨가 무거웠다는 그는 "고등학교 재학 중 문제가 됐던 지역사회 이슈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며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로 911 응급신고 전화를 20개국 언어 서비스가 지원되는 파라무스 911센터로 가게 해 한인들이 편리하게 한국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것과 세금이 큰 폭으로 오르지 않게 유지한 것 등을 꼽았다. 시의원은 급여가 거의 없는 봉사직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박 의원은 지난해부터 버겐카운티 다문화 디렉터를 풀타임 직업으로 삼아 일하고 있다. 인구 약 1만5000명의 테너플라이는 백인이 주류인 타운이라 한인 공무원이 단 한 명도 없고 커뮤니티에 한인들의 참여가 부족한 것이 늘 아쉬웠다는 그는 "타운정부 문턱을 낮추기 위해 우선 한인 경찰 채용을 위해 힘쓰고 있는데 지난해에도 한인 경관이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고 말했다. 아직 정치인으로서 일해온 기간은 길지 않지만 앞으로의 삶을 모두 테너플라이시와 버겐카운티 정부를 위한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그는 "올해 말 임기가 끝나는데 재선에 도전해 공약들을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의원은 "올해는 한인들이 투표나 커뮤니티 행사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그것만이 한인 권익 신장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어릴 때 이민 와 "한국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 아쉽다"는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 18년 전이라며 "버겐카운티와 자매도시인 경상남도 합천에서 거의 매년 정부 관계자들이 방문하는데 한국에 가서 어떻게 정부가 돌아가는지 살펴보고 싶은 마음도 크다"고 말했다. 황주영 기자 hwang.jooyoung@koreadaily.com

2016-01-20

"한인들이 정 붙이고 사는 포트리 만들겠습니다"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로 변화의 물결…정체성 확립 시급 타운정부에 한인자문위원회 설치 위해 한인사회 결속 주력 "한국어 정규과목 채택 쉽지 않겠지만 계속해서 추진할 것" "포트리 한인들도 지역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지난 2014년 11월 재선에 성공하며 올해로 타운의회 활동 3년차를 맞는 피터 서(43) 포트리 시의원의 말이다. 한인 인구가 지역 주민의 30%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포트리의 선출직 한인 공직자는 서 의원이 유일하다. 이에 대해 그는 "한인 유권자들의 저조한 투표 참여도 문제지만 포트리 한인 커뮤니티에 깊은 뿌리가 없다는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부분의 한인들이 포트리는 잠시 왔다 가는 곳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 여러 세대에 걸쳐 이곳에 뿌리를 내린 타민족 커뮤니티에 비해 결집력이 낮다는 얘기다. 그는 한인들이 포트리에 정을 붙이고 오래 살고 싶은 동네로 만들기 위해서는 포트리 정체성 확립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올해는 메인스트리트 인근에 럭셔리 주택과 대규모 상업몰 설립 사업을 추진해 포트리가 뚜렷한 정체성을 갖는 데 초석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최근 메인스트리트 인근 개선 사업을 전담하는 특별개선지구(SID)도 설립돼 타운정부는 인근 상권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서 의원은 "최근 주상복합 건물 '허드슨라이츠' 프로젝트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등 포트리는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며 "다양한 개발 프로젝트가 완료되면 한인들도 포트리를 장기 주거 지역으로 여기며 이곳에 안정되게 뿌리내리게 될 것 "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타운정부 조세 관련 부서나 클럭 오피스 빌딩국에 한인들이 신규 채용되며 타운정부 내 한인 기반도 서서히 다져지고 있다"며 "지난해 가장 뿌듯한 것은 포트리 한인 경찰 스티브 노씨가 경사에서 경위로 진급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한인 커뮤니티에도 해결할 과제가 아직 많다. 서 의원은 지난해 재선에 성공하며 타운정부 내 한인자문위원회를 만들어 한인 소통 창구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놓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자문위원회 구성을 위해 다양한 한인 단체들을 결집시키려다 보니 의견 차이와 오해가 다분히 발생했다"며 "한인 단체들 사이의 오해를 줄이는 일이 자문위원회 구성에 앞서 이뤄져야 할 것으로 판단해 올해는 먼저 한인 단체 통합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주민들이 요구해 온 포트리 학군 한국어 정규과목 채택은 쉽진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는 "예산 부족이 가장 큰 문제"라며 "프로그램 운영 비용을 지원할 개인의 조력 없이는 실현성이 낮다. 하지만 교육위원들과 끊임없이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조은 기자 lee.joeun@koredaily.com ◆피터 서=1973년 브롱스 출생 1995년 뉴욕대 졸업 2008~2014년 9월 포트리 교육위원 2012년 포트리 민주당위원회 위원 임명 2014년 9월~현재 포트리 시의원 및 저지시티 호라이즌헬스센터 최고재무책임자.

2016-01-19

"한인들이 주인 의식 갖고 지역사회에 참여해야죠"

2011년 초선 이어 2014년 재선 성공 맹활약 한인 최초 NJ 민주당위원회 여성위원에 임명 "중국계 등 아시안 주민 권익 위해 함께 노력" "한인 정치력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뉴저지주 역사상 두 번째로 한인 여성 시의원에 이름을 올린 글로리아 오(민주.52) 잉글우드클립스 시의원은 "한인 정치력은 누구도 무시 못할 만큼 커졌다. 올해는 이를 입증할 수 있도록 시의원으로서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 의원은 지난 2012년 시의원 당선에 이어 2014년 재선 성공했고 2013년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뉴저지주 민주당위원회 여성위원으로 임명되는 등 한인 정치사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지난해 헬렌 김 필라델피아 광역시의원 당선 수잔 신 앤굴로 캠든카운티 프리홀더 당선 등 한인 여성들이 주요 선출직에 당당히 이름을 올려 뿌듯하다"면서 "북부 뉴저지에서도 타운 시의원을 넘어 광역 단위 정치인이 나올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역량이 올라왔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 11월 본선거에서 젊은 한인 정치인인 크리스 정 팰리세이즈파크 시의장 피터 서 포트리 시의원 대니얼 박 시의원이 모두 재선에 도전한다. 이들이 당선될 수 있도록 적극 도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본선거에서 잉글우드클립스에서는 공화당 소속 후보들이 시장.시의원을 모두 석권하면서 정권이 바뀌었다. 이에 대해 오 의원은 "박명근 시의원 등 공화당 후보들이 더 절박하게 선거 운동을 했던 것 같다"며 "재산세 인상 등 실제보다 부풀려진 점은 많지만 공화당 후보들이 열심히 선거에 임했다. 한편으로는 지난해 두 명의 한인 시의원 후보가 모두 당선됐다면 좋았을 텐데 그 점이 다소 아쉽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이제는 소수당 입장인 만큼 타운 행정이 잘 이뤄지는지 철저히 살피면서 발전을 위한 부분은 적극 협력할 것"이라면서 "잉글우드클립스 시의회에는 한인 시의원 2명과 중국계 1명이 있는 만큼 아시안 주민 권익을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오 의원은 "1.5세인 입장에서 한인 1세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면서 2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잉글우드클립스 시의원 선거에서 아쉽게 낙선한 엘렌 박 변호사를 예로 들며 "젊은 한인들이 지역사회와 정치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고 싶다. 또 한인사회 정서와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젊은 한인들의 멘토 역할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LG전자 신사옥 건립이 조속히 진행될 수 있게 협력을 아까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 의원은 시의원 외에도 포트리.리지필드.새들브룩.버겐필드 관선 변호사로도 일하고 있으며 과거 포트리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사회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전국유색인종연합(NAACP) 버겐카운티지부로부터 커뮤니티서비스어워드를 받기도 했다"면서 "한인들이 주인 의식을 갖고 지역사회에 많이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북부 뉴저지에서 한인들의 힘은 작지 않다. 이를 바탕으로 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한서 기자 seo.hanseo@koreadaily.com ◆글로리아 오= 1963년 서울 출생 1976년 도미 1986년 보스턴대 심리학.경영학 학사 2011년 페이스 법대 졸업 2011년~현재 글로리아 오 로펌 대표 2012년 잉글우드클립스 시의원 2014년 시의원 재선 2013년~현재 뉴저지주 민주당위원회 여성위원.

2016-01-15

"1세가 뿌린 씨앗, 2세들이 열매 맺도록 하겠습니다"

두 세대 동시에 이해, 소통하는 1.5세 정치인 "팰팍 정치권 분열은 변화 위한 성장통일 뿐" 한인 유권자 등록, 젊은 층 정치 참여 등 과제 한인 인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 한인 밀집 지역인 만큼 올해 팰팍 타운정부에서 일하는 임명직 한인은 총 22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이에 반해 선출직 한인 정치인은 손에 꼽힌다. 크리스 정(민주.48) 팰팍 시의장은 단 두 명의 팰팍 한인 선출직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다. 지난 2년간 시의원 활동에 이어 올해부터는 타운정부 시의장직까지 겸한 정 의장은 한인 1.5세 정치인으로서 한인 1세와 2세 사이 중간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정 의장은 올해도 '소통'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그는 "열심히 일한 한인 1세들의 희생 정신을 존중한다. 이들이 일궈 놓은 환경을 발판으로 2세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며 "동시에 2세처럼 젊은 한인들의 참여가 있어야 주류사회에서 한인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두 세대를 동시에 이해하는 1.5세 정치인으로서 1세와 2세 사이 소통의 장벽을 좁혀나가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이다. 세대 간의 소통뿐 아니라 한인 정치인 사이의 소통도 올해 중점 과제다. 지난해 팰팍 시장 탄핵 추진 등 팰팍의 정치권 분열에 대해 정 의장은 "변화를 위한 성장통으로 본다"고 해석했다. 그는 "어디서든 정치권에서는 변화기가 있다"며 "한인 커뮤니티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긍정적 현상이기도 하다. 변화를 위한 과도기로 받아들이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인 소통을 통해 변화를 헤쳐나가겠다"고 밝혔다. 또 "한인이 50% 이상을 차지하는 팰팍이지만 여전히 한인들의 투표율은 저조하다"며 "한인 정치력 신장의 핵심인 한인 유권자들의 투표권 행사를 위해 올해도 활발한 유권자 등록 캠페인을 펼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올해 상반기 계획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팰팍 신형 주차미터기 문제 해결이다. 그는 "조만간 팰팍 시장과 상인 단체 주민들과의 회의를 이끌어 의견 수렴을 통해 조속히 해결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 외에도 BYOB(Bring Your Own Bottle) 규정 논란 해결과 한인 유권자 등록 캠페인 활성화 한인 젊은층 정치 참여 프로그램 추진 등을 올해 상반기 중점 사업으로 내세웠다. 이조은 기자 lee.joeun@koreadaily.com ◆크리스 정=1967년 전남 남원 출생 1978년 도미 1990년 커네티컷주 하트포드대 졸업 2002~2012년 홈디포 매니저 2008~2013년 팰팍 교육위원. 2012~현재 뉴저지주 포트리 부동산 투자업체 글로벌매니지먼트 LLC 디렉터 2014~현재 팰리세이즈파크 시의원 겸 시의장.

2016-01-14

"제 직책은 봉사직, 타운-한인사회 잇는 다리 되겠습니다"

4선 시의원으로 부시장 겸직…"미국인들에 한국인의 긍지 심을 것" '공인 7단' 태권도 지도자로 명성…지역 한인 돕고 싶어 정치 입문 올해 주요 과제는 코리아웨이-브로드애비뉴 도로 표지판 이름 병기 "지역.생활 밀착형 정책들로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겠습니다." 이종철(민주.59) 뉴저지부 팰리세이즈파크 부시장이 밝힌 올해의 각오다. 이 부시장은 "올해에는 코리아웨이-브로드애비뉴 병기가 주요 과제다. 브로드애비뉴의 이름을 코리아웨이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두 이름을 병기해서 표지판에 넣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를 위해 오는 4월쯤 브로드애비뉴에서 '블록 파티' 개최를 검토 중이다. 한인 사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태권도 지도자 출신인 이 부시장은 지역 한인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에서 정치에 입문하게 됐다고 말했다.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난 이 부시장은 지난 1983년 멕시코 국가대표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하다 1988년 뉴저지주로 이주했다. 태권도 공인 7단으로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코치를 역임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태권도 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던 그는 "팰팍 상공회의소 이사장과 뉴저지한인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지역 사회 봉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부시장은 지난 2004년 미 동부 최초 한인 시의원으로 당선된 제이슨 김 전 팰팍 부시장 선거 캠페인 본부에서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으면서 정치 활동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선대본부장 활동을 통해 정치의 중요성을 실감했다는 그는 2005년부터 팰팍 타운정부 렌트조정위원장 지역행정위원장 등을 맡았고 2008년에는 팰팍 교육위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지난 2009년 1월 사임한 욜란다 라코비노 전 시의원의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의 행보에 나섰다. 지난해 11월 본선거에서 4선에 성공하면서 미 동부의 현직 선출직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지난해 8월부터 팰팍 부시장을 맡고 있다. 이 부시장은 "팰팍 부시장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봉사직이라고 볼 수 있다"면서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역밀착형 정책들을 펼쳐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의원으로 활동하면서 BYOB 라이선스 도입 한인 교통경찰 채용 등 한인 주민과 소상인을 대변하는데 앞장서왔다"며 "타운과 커뮤니티의 중간 역할을 하는 것이 부시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아직도 해결돼야 할 커뮤니티 이슈들이 산적해 있다. 올해로 7년째 4선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한국과 미국 커뮤니티 간의 정서 차이 등으로 한인들이 차별을 당하는 것이 많다"며 "설명과 설득 토론 등을 통해 한인 주민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다. 한국인의 긍지와 자긍심을 미국시민들에게 심어주는 역할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승재 기자 ◆이종철=1957년 충남 예산 출생, 명지대 체육학과 졸업, 1983~1988년 멕시코 태권도 국가대표 사범, 1988년 도미, 2008년 팰팍 교육위원, 2009년~현재 팰팍 시의원, 2015년 8월~현재 팰팍 부시장.

2016-01-13

"상권 활성화와 한인 정치력 신장, 둘 다 잡겠다"

대형 한인마트, 400여 스몰비즈니스 몰려 상권 탄탄 46번 도로 인근에 종합 쇼핑몰·노인아파트 건립 추진 한인 교육위원 탄생 일조…"시의원도 더 많이 나와야"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리지필드를 한인 경제 중심지로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지난해 11월 본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데니스 심(60·민주·한국이름 심정구) 뉴저지주 리지필드 시의원의 목표다. 지난 2012년 리지필드 최초의 한인 시의원으로 이름을 올린 뒤 지난해 주민들의 신임을 확인한 그는 “리지필드에는 재개발을 할 수 있는 지역이 많다. 이를 탈바꿈시키면 경제 중심 지역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밝혔다. 심 의원은 “리지필드에는 약 400개의 스몰비즈니스 업체가 있다. 이는 최대 한인 상권인 팰리세이즈파크와 비슷한 숫자”라면서 “대형 한인마트들이 있어 전체 상권 매출액은 리지필드가 더 많은 편이다. 하지만 상권이 밀집되지 못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리지필드의 그랜드애비뉴와 46번 도로 인근에 170에이커 규모의 재개발 가능 지역이 있다. 이 땅을 타운정부가 어떻게 개발하느냐에 따라 발전 가능성이 크다”면서 “현재 이 지역에 대규모 종합 쇼핑몰과 400~500세대의 노인아파트를 건설하는 것을 두고 의견이 오가고 있다. 이들 재개발이 잘 이뤄질 수 있게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심 의원은 앞으로 3년 임기 내에 리지필드의 한인 시의원 추가 배출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리지필드 한인학부모회장으로 활동하던 스티브 양씨에게 리지필드 교육위원으로 출마할 것을 적극 권했다. 결국 양씨가 당선돼 리지필드 최초의 한인 교육위원이 탄생할 수 있었다”며 “함께 일할 수 있는 한인 시의원이 더 필요하다. 한인 밀집지역인 리지필드에서 한인들의 목소리가 더 반영될 수 있도록 반드시 한인 시의원을 늘리고 싶다”고 말했다. 또 그는 현재 1명인 한인 경찰 수를 올해 안에 더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리지필드는 대표적인 한인 밀집지역이지만 한인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는 경찰 수는 적은 편이다. 한인 경찰 추가 채용을 위해 지난해부터 적극 노력해왔고, 곧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2014년 리지필드 시장 출마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던 심 의원은 “당분간은 시의원으로서 한인 정치력 신장 활동에 주력할 것”이라며 “상권 활성화와 한인 정치력 신장이 내가 가진 두 가지 큰 목표다. 초선 임기 동안에 다 이루지 못했던 과제들을 재임 임기 동안 꼭 해낼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 한인 주민들의 격려와 성원을 바란다”고 말했다. 서한서 기자 seo.hanseo@koreadaily.com ◆데니스 심= 1955년 서울 출생, 1986년 도미, 1989년 프랫인스티튜트 커뮤니케이션디자인 석사, 2002년~현재 상업부동산 투자개발사 ‘CRBYDS’ 대표, 2010~2012년 리지필드 타운 플래닝보드 위원, 2012~현재 리지필드 시의원.

2016-01-11

"변화 바라는 한인들 열망이 가장 큰 힘입니다"

LG전자 신사옥 다루는 플래닝보드 맡아 '책임감' 세금 인상 억제 위해 타운정부 군살빼기 노력 "변화의 바탕을 만들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쁩니다." 지난해 한인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킨 인물로 박명근(62.공화) 뉴저지주 잉글우드클립스 시의원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11월 3일 본선거에서 타운정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민주당 측 후보와 맞서 승리하는 '사건'을 만들었기 때문. 당초 열세라는 평가 속에서도 당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에는 변화를 희망하는 한인 유권자들의 열망이 배경이 됐다는 평가다. 지난 3일 취임선서를 하고 공식 임기를 시작한 박 의원은 "나를 향한 주민들의 희망을 잘 알고 있다"며 "시의원을 처음 시작하는 만큼 아직 모르는 점도 많지만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시의회에서 플래닝보드와 예산위원회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타운행정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서들이라 부담이 적지 않지만 한인들에게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서이기도 하다"며 "특히 우리 타운에 막대한 경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LG전자 미주본사 신사옥 개발안이 잘 처리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플래닝보드에는 김경렬.김승환 등 2명의 위원이 있었으나 김승환씨가 최근 사임하고 제이 이씨가 새롭게 위원을 맡게 됐다. 박 의원은 "플래닝보드에는 한인 위원들도 많이 있는 만큼 이들과 협력해 한인들이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없게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세금 인상을 억제하기 위한 타운 행정부 군살빼기도 박 의원의 목표 중 하나다. 그는 "지난해 본선거에서 동반 당선된 마리오 크랜잭 시장도 밝혔지만 주민들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불필요한 예산 지출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며 "잉글우드클립스에는 노인 인구가 적지 않은데 이들이 한결 같이 갖는 부담이 재산세다. 주민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세금 인상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계속 찾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인 주민 권익 신장 및 서비스 확대도 중요 과제로 꼽았다. 박 의원은 "예산 부담으로 인해 한인 경찰이나 타운정부 직원을 당장 충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하지만 통역.번역 자원봉사자 등을 모집해 타운정부 소식이나 정부 직원과의 소통을 한국어로 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를 추진 중이다"면서 "한인 노인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도 확충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한인 1세 정치인으로 개인적인 욕심은 없다.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시의원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공화당 측으로부터 출마 권유를 받고 처음에는 결심이 쉽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지역사회에 올바른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한인들을 너무나 많이 만났다. 또 이들이 결집해 놀라운 승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공화당 측에서 한인 주민들의 지난해 선거 승리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항상 내 의견을 먼저 존중하고 있다"면서 "주민들의 선택을 받아 시의원이 된 만큼 항상 여론을 수렴하고 제대로 일하는 시의원이라는 평가를 받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한서 기자 seo.hanseo@koreadaily.com ◆박명근=1953년 경남 사천 출생. 1984년 도미. 1987년 디트로이트대 MBA 졸업. 1992년~현재 이노코보험 대표. 2012~2015년 뉴저지경제인협회 회장. 2016년 1월~ 뉴저지주 잉글우드클립스 시의원.

2016-01-08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이 내 정치의 원동력"

지역구는 주도 해리스버그, 시의원 거쳐 2012년 주의회 입성 올해 3선 도전…"지역 주민 돕는 일이 가장 큰 가치이자 보람" 저널리스트에서 정치인 변신 성공, 일과 가정 병행하는 워킹맘 '펜실베이니아주 사상 최초의 한인 하원의원' '저널리스트 출신 정치인' '펜주 이민역사를 새로 쓴 여성'. 패티 김 펜실베이니아주 하원의원(민주.103선거구)을 지칭하는 수식어들이다. 인구 6만2609명에 육박하는 펜주 103선거구를 이끄는 그는 백인과 흑인이 주류이고 아시안은 2000명이 채 되지 않는 이곳에서 시의원을 역임했다. 그때부터 해리스버그한인회와 실업인협회 등 한인 단체 행사는 물론 한인 소매상 모임 등에 참석해 시정부의 방범 활동과 규제 사항을 소개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등 한인사회의 기둥 역할을 해온 그는 지난 2012년 펜주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2014년 본선거에서 재선 고지에 오르며 한인사회를 넘어 민주당 내에서도 주목 받은 젊은 정치인으로 입지를 굳힌 그는 3선 도전에 나선 올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한 해를 보낼 예정이다. 김 의원의 지난 행보와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본다. ◆지역에 대한 애정은 정치와 정비례=10년째 펜주의 주도인 해리스버그의 발전과 위해 일하고 있는 그는 이곳에서 시의원과 시부의장 연방하원의원을 두루 거치며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을 더 많이 갖게 됐다고 했다. 김 의원이 "지역에 대한 애정이 정치와 비례한다"고 믿는 이유다. 김 의원은 현재 시정부가 떠안고 있는 부채 문제 성적이 저조한 학군들에 대한 개선 젊은이들 사이의 폭력 문제 등이 올해 개선해야 할 가장 큰 지역사회 이슈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안정된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직업 창출을 늘리고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과 에퀴티를 쌓기 위해 주택 소유를 원하는 지역 주민들에게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해 주자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가장 어렵고 약한 주민들을 돕는 일에 큰 가치와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주민들을 위해 주력하고 있는 3가지 정책을 강조했다. ▶첫째는 최저임금 인상을 위한 노력이다. 주민들이 경제적 부담 없이 렌트를 내고 가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는 주민들이 더 좋은 직업을 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과거에 저지른 비폭력 전과를 지워주는 일. 철없던 시절의 실수로 저지른 경범죄의 주홍글씨를 평생 가져가야 한다면 사회에서 평범하게 직업을 구하고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셋째로 공공교육 개선은 장기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해 나가야 할 문제라고 했다. ◆펜주 최초의 한인 하원의원이라는 무게=김 의원은 자신이 곧 '아버지의 아메리칸드림 실현'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친구 분들이 그런 말을 하신대요. 미국에 이민 와서 딸을 이 나라의 입법부에 뒀으니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거라구요. 그런 말을 들으면 저도 힘이 나고 뿌듯하죠." 누군가의 꿈이자 펜주 최초의 한인 하원의원이라는 무게감은 생각보다 크다고 했다. "솔직히 우리 아들딸에게는 정치인보다는 다른 길을 가라고 하고 싶어요.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거든요. 정책에 관한 어떤 결정을 하든 칭찬보다는 욕을 많이 먹기 쉽죠. 무던하게 견뎌낼 수 있어야 하고 그 가운데서도 중심을 지킬 수 있어야 하고요." 한국말을 못하고 단 한번도 한국에 가 본 적이 없는 김 의원이지만 한국인의 후예로서의 뿌리와 긍지에 대해서는 늘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했다. "저의 부모님을 포함해서 1세대 미주 한인들은 그동안 이 땅에서 거보를 내딛으며 미국 안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사회 전반에 미치는 커뮤니티로 성장했어요. 50여 년 전 미국에 오신 저희 아버지는 그 당시와 다르게 많은 아시안아메리칸들이 미 정계에 진출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시는 것 자체에서 전율을 느끼신다고 하세요." ◆저널리스트에서 정치인으로="어릴 때 막연하게 서비스직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돕는 일을 좋아했고 그 일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을거라 생각해서 간호사를 하려고 생각했어요. 정치인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대학 입학 직후 간호사 공부가 내 적성에 정말 맞지 않는 걸 알게 됐고 패닉에 빠졌죠. 하지만 그게 또 계기가 되서 커뮤니케이션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 거죠." 필연처럼 바꾼 전공으로 저널리스트의 꿈을 꾸게 됐고 CBS-21 뉴스에 입문하게 됐다. 저널리스트로 커리어를 시작해 6년 정도 방송기자와 앵커로 활동한 그는 당시의 경험이 정치인으로서 현재의 커리어에 큰 도움을 줬다고 했다. "정부 관계자들부터 일반 시민들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상호작용을 통해 시너지를 발휘하는 게 정치인의 역할이죠. 항상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상황을 바라보며 판단하는 훈련이 정치계에서의 생활에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봐요. 또 양쪽 직업 모두 공인이라는 점도 같구요. 그런 면에서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커리어 전환이 됐다고 봐요. 행운이죠." 커리어를 통해 대단한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지만 인생의 가장 큰 멘토는 여전히 13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라고 했다. "항상 제 편에 서서 응원해 주셨어요. 독실한 크리스천이셨고 존경 받는 삶을 사셨어요. 정말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도를 통해 어떻게 상황이 개선될 수 있는지를 늘 보여주신 분이에요. 저도 그런 엄마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일과 삶의 밸런스=2003년 남편 존 사이더와 결혼해 11살 된 딸과 8살짜리 아들을 둔 김 의원은 일도 중요하지만 '가족'이 삶의 중심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더 많은 기회를 가지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이 크죠. 내가 만약 일 때문에 가정의 화목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정치인으로서도 효율적인 정책을 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가정에 불화가 있다면 결국 그 걱정과 근심이 일터에서도 표출되기 마련이고 그러면 일터에서 110%의 효율성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그래서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사람들일수록 가정의 평화와 행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워킹맘으로서 일과 삶의 밸런스를 맞추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했다. "적응하는데 5년이 넘게 걸렸어요. 특히 직장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데 저의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간을 겪을 때 아이들이 제 옆에 있어야 했으니 정말 고된 나날들이 이어졌죠.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배운건 아침을 열면서 명상과 기도를 통해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스스로 감사하고 얼마나 많은 기도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지를 매일 되새기는 거죠. 요즘은 제 선거구의 주민들을 위한 지혜와 부드럽고 넓은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요." ◆패티 김=1973년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출생. 1995년 보스턴칼리지 커뮤니케이션학과 졸업. 1999~2004년 CBS-21 뉴스 TV리포터와 앵커로 활동. 2006년 해리스버그 시의원에 첫 당선 2009년 재선에 성공. 시의회 부의장을 거쳐 2012년 펜실베이니아주 하원의원에 당선. 2014년 주하원의원 재선. 황주영 기자

2016-01-07

"'아시안은 정치력 뒤진다' 편견 깬 게 내 훈장"

민주 텃밭 대도시서 재선 성공한 '공화 한인 정치인' "필라는 서울과 닮았다"…한국과 교류하며 발전 추구 미국의 5대 중심도시 필라델피아에서 2011년 한인 최초로 광역시의원 당선. 4년 후 연임 도전에 공화당 예비선거 압도적 1위로 본선거 진출. 공화당 1위로 재선 성공. 올해 취임 5년째를 맞는 데이비드 오(공화·55·한국이름 오승호) 필라델피아 광역시의원의 이력이다. 오 의원은 민주당이 대다수인 동부의 선출직 한인 정치인 15명 가운데 손에 꼽히는 공화당 정치인이자 한인 2세 정치인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재선에 성공하며 전통적 민주당파 필라에서 ‘아시안 공화당 정치인’이라는 난관을 ‘자랑스런 이름표’로 바꿨다. 이제는 베테랑 정치인의 진입로에 들어선 오 의원의 지난 여정과 새해 포부에 대해 들어봤다. ◇시정부가 공인하는 공화당 한인 정치인=오 의원에게 지난 4년은 끊임없는 도전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인구 155만 가운데 한인은 단 4% 밖에 안 되는 필라에서 아시안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고된 시간이었다. 오 의원은 “특히 지난해 재선 도전 시절 가장 크게 좌절했다”며 “지역 언론을 비롯한 유권자들은 필라 정치계의 ‘신기류’인 한인이라는 이유로 '정치력이 떨어진다'며 가혹한 공격을 가했다”고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오 의원의 과거 군 복무 경험 등 경력 위조에 대한 공격까지 무차별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예비선거와 본선거 모두 공화당 1위로 결국 당당히 재선에 성공하며 이제는 시정부도 공공연히 인정하는 필라의 아시안, 한인 정치인이 됐다”며 “이제는 지난 4년간 다져놓은 정치력을 바탕으로 미처 이루지 못한 정책들을 실현시킬 일만 남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오 의원은 지난해 11월 본선거에서 3만4297표를 획득, 득표율 3.82%로 공화당 후보 1위로 재선에 골인했다. “이제 필라에서 ‘아시안은 정치력이 떨어진다’는 옛말이 돼가고 있다”는 게 오 의원이 아시안 정치인으로서 이룬 가장 큰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는 “펜실베이니아주의회에는 총 세 명의 아시안 정치인이 있다. 나를 비롯해 헬렌 김 필라 광역시의원과 패티 김 펜주하원의원 모두 한인이다”며 “한인이 지역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적극적으로 싸울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어 “한인들은 문화적으로 위험 감수에 대한 의지가 높은 편인데 결국 이러한 성향이 정치계에서 승패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도전하는 경향으로 연결되면서 어느 순간 빛을 발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경쟁 도시 필라로=오 의원은 현재 시의회 국제기회 및 창조혁신경제 위원회 위원장을 겸하고 있다. 법조계에서 활동했던 1999년 탐 리지 펜주지사 시절 아시아 국가와의 무역 사절단 한국 담당관으로 활동했던 까닭일까, 그는 “필라는 한국의 서울과 많이 닮았다”며 “필라 경제를 구상하며 서울을 자주 머리에 연상한다”고 말했다. 펜주 한국 무역 사절단을 이끌며 오 의원은 한국 대통령과 주요 대기업 대표들과 펜주지사와의 회동을 이끌면서 모국인 한국을 알아갔다. 오 의원은 “서울과 인천 송도처럼 필라에도 활발한 국제 무역과 투자를 이끌어 내 글로벌 경쟁력이 높은 도시로 발전시키겠다”고 올해 포부를 다짐했다. 이 외에도 글로벌 시스템 채택을 통한 공교육 개선, 국제투자기금 창설, 세제 시스템 간소화 등을 올해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다. ◇필라는 나의 모든 것=필라는 오 의원에게 정치인으로서만 특별한 건 아니다. “출생부터 필라 토박이”이라는 오 의원에게 필라는 가족들의 깊은 슬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도미 후 필라에 정착한 오 의원의 아버지 고 오기항 목사는 오 의원이 태어나기 전 1953년 필라에 첫 한인교회를 설립했다. 필라 한인사회에 긍정의 변화가 찾아오는가 했다. 그러던 중 1958년 당시 오 의원의 아버지와 같은 아파트에 살며 유펜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던 오 의원의 사촌형 오인호씨가 흑인 10대 청소년들에게 느닷없이 집단폭행 당하다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흑인 청소년들은 파티 입장권을 사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사촌형을 무차별 폭행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가해 학생들에 대한 선처를 구하는 편지를 시정부에 보내며 이들을 용서하고자 했다. 오 의원의 가족들이 타민족에 보낸 용서는 지역사회에 큰 귀감이 됐다. 가족들이 시정부에 교육 빈곤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위한 성금을 보내자 이를 통해 시정부는 숨진 사촌형의 이름을 딴 ‘오인호기념장학금’을 설립했다. 또 필라에 첫 한인교회를 개척했던 오 의원의 아버지는 사촌형을 추모하는 커뮤니티서비스센터를 건립해 한인 2세들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를 교육하고 아시안들에게는 무료 법률 상담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렇게 오 의원은 지역사회를 지원하는 가족들을 보며 사회봉사를 익혔다. 아버지가 첫 한인교회를 개척했듯이 그는 지난 2014년 필라에 한인의 날(매년 1월 13일)을 제정했다. 그는 “뼛속까지 지역사회 봉사를 익혔던 때문일까, 항상 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다”며 “결국 변호사·검사·시의원 이 셋을 통해 가족의 뿌리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목사가 될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오 의원은 로스쿨 재학 시절 무료 법률 상담 자원봉사자로 활동했으며 졸업 후엔 약 3년간 필라 지방검사로 활동했다. 이후 육군에 입대해 소위로 제대 후 로펌을 설립, 18년간 변호사로 활동한 것이 발판이 돼 한인 최초로 지금의 광역시의원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필라에 대해 오 의원은 “가족의 아픈 역사가 있는 필라에서 시작해 필라에서 끝을 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취임 5년째인 올해는 다가오는 13일 시정부 청사에서 열리는 필라 한인의 날이 유난히 기다려지는 해”라며 “네 아이의 아버지이자 시의원으로서 필라의 기둥이 되고 한인 정치인으로서 귀감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올해는 대통령 선거의 해로 특히 정치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며 "지난해 오하이오주 공화당전당대회에서 '떠오르는 공화당 리더' 자격으로 패널에 참석했는데 앞으로 내놓는 필라 정책에 따라 대선 관련 활동을 펼칠 수도 있기 때문에 향후 움직임을 잘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데이비드 오=1960년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출생. 1982년 딕킨슨칼리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85년 럿거스대 캠든캠퍼스 로스쿨 졸업. 1985~1988년 필라델피아 지방검사. 1988~1991년 육군 입대 후 소위로 제대. 1991년 로펌 ‘데이비드 오 P.C.’ 설립. 1999년 펜주지사실 산하 한국 무역 사절단 조직. 2008~2012년 대형 로펌 ‘자윈 바움’에서 국제법률그룹 위원장. 2012년~현재 필라델피아 광역시의원 및 시의회 국제기회 및 창조혁신경제위원회 위원장.

2016-01-06

"시장 당선 꿈 이루려 주민과 24시간 소통합니다"

지역사회 활동으로 타민족 주민 신뢰 얻어 NJ 최대 도시 시의원…정치 지망생 롤모델로 한인사회 고충 해결, 후배 양성에도 최선 "저지시티 시장 도전을 위해 열심히 뛰겠습니다." 한인으로는 최초로 대도시 시장 당선을 노리는 윤여태 저지시티 D선거구 시의원. 그에게 있어 2016년은 도전의 발판을 닦는 한 해다. 지난 2013년 저지시티 시의원 선거에서 열세라는 평가를 뒤집고 기적적인 당선을 일궈낸 그는 "2017년에 있을 저지시티 시장 선거에서 꿈을 이룰 수 있게 매일 같이 지역 주민들을 만나고 한인사회와도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 의원은 한인 이민자 출신 정치인의 롤모델로 꼽힌다. 1세 출신이지만 수십 년간 지역사회 활동에 적극 나서며 이끌어 낸 타민족 유권자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정치인의 꿈을 이룬 것. 특히 저지시티 D선거구는 유권자 2만 여명 가운데 한인이라고는 고작 6명밖에 없지만 오직 실력으로 경쟁자였던 현역 주하원의원을 꺾는 놀라운 일을 만들어냈다. 취임 3년째를 맞는 그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 저지시티 주민들과의 소통은 물론이고 한인사회 고충을 듣는 일에도 시간을 많이 쏟는다"면서 "이민자 정치인은 주류사회의 지지를 받기 전에 모국 커뮤니티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자신의 뿌리로부터 외면 받는 사람을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뉴저지를 대표하는 저지시티 시의원인만큼 정치력 영향력을 발휘해 한인들을 돕는 일에도 열심이다. 특히 지난해 12월 저지시티에서 의류매장 '톱플러스'를 운영하던 한인 이병은씨가 권총강도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저지시티 경찰국장과 허드슨카운티검사장으로부터 사건 보고를 받고 철저한 수사를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소수계 주민이 희생됐다고 해서 수사를 소홀히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며 "사건이 발생한 매장에 감시카메라가 없고 목격자 확보도 쉽지 않아 수사가 난항을 겪고 있지만 수사당국에 철저한 수사를 거듭 당부한 만큼 반드시 범인이 잡힐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또 윤 의원은 지난해 뉴저지 한인 네일업주를 대변해 주의회에 상정된 네일업소 단속 강화 법안의 수정을 이끌어냈다. 이 밖에 지난 2014년 연방하원 뉴저지 5선거구에 출마한 로이 조 포트리 시의원 예비선거에 나선 폴 윤 등 한인 후보 돕기에 적극 나서는 등 젊은 정치인 양성에 기여한 점도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그는 "저지시티는 대도시인 만큼 시의원 한 명이 대변하는 유권자 수가 엄청나게 많다. 그만큼 정치적 영향력이 크다"며 "시장 도전에 나선 것은 주민들을 대변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뉴저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정치인이 돼서 한인사회를 돕고 싶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가을 그는 30여 년간 운영했던 삶의 터전인 '가든스테이트뉴스' 서점 문을 닫고 주민들이 항상 찾아올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꿨다. 윤 의원은 "주민들과 더 많이 소통하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윤 의원은 지난해 12월에는 지역에 사는 3~16세 어린이.청소년 700여 명을 초청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3년째 이어진 이 행사에서 어린이들은 무료로 선물을 받고 산타와 기념촬영을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울러 부자에게만 재산세 감면 등 세제 혜택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일반 주택 소유주도 똑같이 혜택을 누리는 정책을 펴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정치인에게 있어 주민들을 만나고 돕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는 유권자와의 약속이기 때문"이라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항상 연락을 할 수 있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준다. 바쁜 일정 때문에 전화를 못 받더라도 나중에 꼭 다시 전화를 건다"고 강조했다. 윤 의원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인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을 것이다. 윤여태라는 이름 석 자를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오는 29일 잉글우드클립스에서 기금모금 행사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시장 당선을 위해 열심히 뛰겠다. 한인들의 각별한 관심과 지지가 꼭 필요하다"고 새해 포부를 밝혔다. 201-214-3505. 서한서 기자 seo.hanseo@koreadaily.com

201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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