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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마지막…우린 기억되고 싶다"

6·25 70주년 특별기획 l 미네소타 참전 용사를 찾아서 (1)

18~21세 청년 ‘낯선 땅으로’
미네소타서만 11만 명 참전
병력 부족 예비군까지 동원

세인트폴의 한국전 참전용사 동상은 1998년 세워졌다. 그 앞에 가운데가 뚫린 조형물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군인을 뜻한다. 김병문 박사는 동상 앞에 서자마자 거수경례로 예의를 표했다.

세인트폴의 한국전 참전용사 동상은 1998년 세워졌다. 그 앞에 가운데가 뚫린 조형물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군인을 뜻한다. 김병문 박사는 동상 앞에 서자마자 거수경례로 예의를 표했다.

김병문 박사가 비석에 새겨진 전사자 로버트 오스텐도프의 이름을 만지고 있다. 오스텐도프의 여동생 도리스씨는 “그때 아버지가 오빠의 전사 통지서를 받아들고 현관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말했다.

김병문 박사가 비석에 새겨진 전사자 로버트 오스텐도프의 이름을 만지고 있다. 오스텐도프의 여동생 도리스씨는 “그때 아버지가 오빠의 전사 통지서를 받아들고 현관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말했다.

1953년 7월28일 뉴욕 데일리뉴스 신문이다. 휴전 협정 체결 다음날이다. 한 전사자의 어머니가 “(휴전이) 너무 늦었다”며 아들의 관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사진이다. 김 박사가 당시 신문 복사본을 보여주고 있다.

1953년 7월28일 뉴욕 데일리뉴스 신문이다. 휴전 협정 체결 다음날이다. 한 전사자의 어머니가 “(휴전이) 너무 늦었다”며 아들의 관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사진이다. 김 박사가 당시 신문 복사본을 보여주고 있다.

기억은 희미하다. 상흔은 선명하다. 그 지점에서 꽃이 폈다. 대가를 치른 자유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미네소타주를 찾아갔다. 미네소타는 인구 대비 6·25 한국전쟁 참전군인 비율이 가장 높은 주다. 그 때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곳곳에 묻어난다. 그 흔적과 의미를 시리즈로 게재한다.

적적하다. 잔디의 푸르름이 무색하다. 그곳에 우두커니 선 보병 동상의 뒷모습은 쓸쓸함을 짊어졌다. 코로나19가 ‘6월’을 삼켜서다. 아니 70년 전 한국 전쟁의 기억마저 지우고 있다.

지난 18일 오전 8시,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의 참전 용사 기념공원을 찾아갔다. 김병문 박사(76)는 지난 2004년부터 이 지역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를 초대해 감사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함께 모이지 못한다.

김 박사는 “한국전은 ‘잊힌 전쟁’으로 불린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한국전 관련 70주년 행사들이 전부 취소된 상태”라며 “어쩌면 70주년은 그들(참전용사)에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재향군인회(VA) 공식 통계에 따르면 한국 전쟁 당시 미네소타주에서만 11만4000명의 군인이 차출됐다. 1950년 당시 주 전체 인구(298만 명)의 약 4%다. 미네소타는 인구 대비 참전군인 비율이 가장 높은 주 중 하나다. 혹한이 미네소타와 한국을 인연으로 이은 탓이다.

미네소타주에서 활동하는 변우진 변호사는 “미국에서 겨울이 가장 추운 지역으로 손꼽히는 곳이 미네소타”라며 “한국전 당시 개마고원, 압록강 지역의 겨울은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갔다. 혹한 때문에 추위에 익숙한 병사들이 필요해서 미네소타주 출신의 병사가 대거 차출된 것”이라고 전했다.

혹한의 전쟁은 치열하고 절박했다. 미네소타주에서는 육해공군 외에도 방위군(national guard)까지 동원됐다.

미네소타대학에서 은퇴한 잭 존슨 박사(미네소타 군사 박물관 초대 큐레이터)는 “1950년 11월부터 중국의 개입으로 상황이 반전되자 다급했던 미국에서는 전역이 취소되는가 하면 징병이 강화돼 예비군까지 동원됐다”며 “특별히 미네소타에서는 ‘바이킹’으로 불리던 47사단 주 방위군 소속 9000명이 그해 겨울 급히 한국전 차출 명령을 받고 각 부대에 배치돼 싸웠다”고 말했다.

당시 징집된 젊은 병사들은 대개 18~21세였다. 그때의 한국(Korea)은 지금과 엄연히 다르다. 이름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나라에 그들은 생명을 걸어야 했다.

동상 주변은 8개의 화강암 비석이 두르고 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봤다.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미네소타주 출신 병사들(758명)의 이름이다. 비석에 공백은 많다. 그건 여전히 채워져야 함을 뜻한다.

목숨의 행방은 K·I·A(Killed in Action·전사자)와 M·I·A(Missing in Action·실종자)로 나뉜다. 생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메워야 하는 공란이다.

김 박사는 비석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한동안 침묵했다.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는 “이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자유를 얻었는데…그 소중함을 오늘날 우리는 잊고 산다. 그들도 잊히고…”라고 울먹였다.

김 박사는 “(미네소타 참전용사 감사 행사에) 이제는 전년도에 참석했던 분이 이듬해에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왜 싸웠나’ 자괴감이‘한국 발전’ 보며 보람으로

90세 전후 참전용사들
재작년 한국 방문하기도


70년이 흘렀다. 생존한 참전용사들은 대부분 90세 전후가 됐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촉박하다.

지난 3주 사이 이 지역에서만 제럴드 맷슨(91·5월31일), 로버트 에드워드(88·6월3일), 스텐리젠슨(92·6월9일) 등 3명의 한국전 참전용사가 세상을 떠났다. 미네소타의 장진호전투협회 중서부 지부도 지난 1월 문을 닫았다.

이곳에 사는 펫 핀(88) 씨는 한국전 당시 해병대 1사단 소속이었다. 최대 혈전이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서 싸웠다. 조심스레 기억을 물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떨렸다.

핀씨는 “한국으로 갈 때가 18살이었다. 당시 원산에 상륙했다. 장진호 전투 때 살아 돌아온 동료는 몇 안 된다. 정말 추웠다. 피로하고 너무나 무서웠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70년 가까이 전쟁의 멍에를 지고 살았다. 비로소 짐을 벗은 건 한국을 방문(2018년)했을 때다. 그는 “한국전쟁, 그리고 우리는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핀씨는 “그때 전장에서 ‘왜 여기(한국)까지 와서 싸워야 하는가’라는 고민과 갈등이 심했다. 돌아와서도 끔찍했던 순간을 잊으려고 노력했다”며 “이후 세월이 흘러 한국을 둘러보며 전장에서 던진 질문에 답을 찾았다. ‘이게 내가 싸운 결과였구나’라는 확신을 그때 갖게 됐다”고 말했다.

혹한 속에 틔운 싹은 오늘의 꽃으로 폈다. 잊으면 안 되는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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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7사단 사단가는 한때 ‘아리랑’

참전 노병들 한국 사랑 각별
지도상 ‘동해’ 홍보도 앞장


미네소타주 참전용사들의 한국을 향한 마음은 전쟁 후에도 각별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당시 미국 7보병사단은 사단가를 한때‘아리랑’으로 지정(1956년 5월26일)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계속해서 아리랑을 흥얼거려 사단장에 의해 내려진 공식 명령(General Order No 63)이었다.

7사단 소속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제리렐리핀스키(89)씨는 “뉴스에서 나오는 한국 소식은 지금도 다 접하고 있다. 정말로 대단한 나라”라며 “여기서 우리들은 지역 초중고등학교에 가서 한국전 경험에 대해 말해주고 그 의미와 한국이 발전한 모습을 학생들에게 알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미네소타주에서 ‘동해(East Sea)’를 적극 홍보한 것도 참전용사들이다. 세인트폴의 참전 용사 기념 공원 입구 바닥에는 한국 지도가 새겨져 있다.

1998년 참전용사 동상 제작 당시 미네소타주 정부가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하자 참전용사들이 분개했다. 한국전 참전용사협회는 즉각 주 정부와 협의 후 석공을 고용, 그 부분에 ‘동해’를 새겨넣었다.

미네소타는 여름이 잠시다. 가을엔 유독 낙엽이 많고, 겨울이 되면 눈이 바닥을 완전히 가린다. 공원 바닥 곳곳에 새겨진 한국전의 각종 기록을 식별하기 어려워진다. 때문에 참전용사들은 사시사철 역사의 기록을 볼 수 있도록 따로 표지판까지 세웠다.

취재를 도운 김병문 박사는 한국 전쟁 당시 8살이었다. 이후 가난으로 인해 학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미군(제임스 반하겐 공군 하사)의 도움으로 학비 보조를 받아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때문에 김 박사 역시 자비로 참전용사들을 돕고 있다.

김 박사는 “참전용사의 후손들을 위해 장학금을 매년 제공(1인당 500달러·총 20명)하고 있다”며 “아버지로부터 ‘한국전’ 이야기를 듣고 이후 아이들을 입양한 참전용사의 자제도 많다”고 말했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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