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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남은 한 사람, 내 편

“숨쉬기가…. 다 된 것 같다. 그간 고마운 게 많았다.” 유언처럼 짧게 전해진 메시지에 심장박동이 기승을 부리니 나도 따라 숨쉬기가 곤란해진다. 해가 바뀌면서 부쩍 통증을 호소해오던 작은오빠가 보낸 카카오 톡 문구다. 산다, 죽는다에 연연하지 않고 의연하게 살아오던 대로 살자. 가야할 때가 되면 묵묵히 받아들이자. 뭔 호들갑이냐고 다독이며 인생의 마무리 작업을 돕고자 했던 시간들이 저만치서 웃음기 없이 나를 바라본다. 친구 어머님 끝마무리도 혼신을 다한 기도로 해 드렸고, 나이가 채워지지 않은 환자들에겐 꼭 회복하기를 원해서 기도를 했다. 내 간절함이 하늘에 닿아 분명 병상을 털고 일어나리라 기대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그들은 고통스러워 불행한 얼굴을 내게 보이며 떠났다. 모두 다. 환갑을 한 해 앞둔 시누님도, 시아주버님도 병상을 털지 못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린 내 정성 어린 기도로 끝을 삼고 떠나셨다. 친정 엄마도 입맛 잃고 기운 없어 말도 못하시더니 내 마무리 기도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거칠게 몰아쉬던 마지막 호흡이 기억난다. 평화롭게 오빠를 설득한다. 오빠가 살아 온 생활 패턴으로 얻은 암이란 녀석을 두 번씩이나 제거 수술을 했지만 이젠 폐까지 점령했다니 호흡이 곤란한 결과야 당연한 것 아니겠나. 통증을 동반했다면 진통제로 피하고, 그도 아니면 모르핀 주사로 시간을 연장하다 끝나는 것이 순서니 그러려니 준비하도록 종용한다. 시신기증도 좋은 일로 마무리하는 방법일진대 선택 여부를 물었더니 버럭 언성을 높인다. “야, 나 그렇게 금방 안 죽어.” 나랑 뜻이 맞아 죽을 준비가 잘 진행되나 싶더니 갑자기 거부반응이 나온다. 역시 남의 얘기에 내가 너무 깊게 간섭을 했나 보다. 나 자신도 시신기증 서류를 작성하지 않고 있다. 남편의 동의가 필요하다. 남편의 반응이 걱정스러워 서류를 건네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막상 끝 시간이 닥치고 보니 피하고 싶은 심정이 느껴진다. 자식이 있으면 뭐하나. 남겨 줄 재산 없는 병든 부모 마지막 정리 정돈 맡아서 끝낼 자신이 없단다. 무섭기도 하단다. 감당 못하겠단다. 숨어버리고 싶단다. 하물며 작은오빠에겐 자식이 없다. 핏줄이라곤 나, 나 하나뿐인데 나도 떠안기 싫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어수선한 정치로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나라로 오빠 마지막 마무리하러 가기 싫다. 그래도 오빤데. 단 한 사람 내편이 되어주는 친정 오빤데. 어찌 싫다는 소리가 이리도 금방 나올까. 비행기 타고 13시간 날아가서 마땅히 머물 곳도 없는 한국인데, 누구에게 연락해서 의지할 사람도 없다. 다행히 오빠 친구들이 주위에 여럿 있으니 대신 해주지 않을까. 구태여 내가 가서 쩔쩔매며 고생하느니 오빠 친구들이 해주면 안 될까. “야, 팔순이 넘은 노인들이 뭘 해주냐. 요즘은 장례식 같은데 가지도 않아. 할 수 없지. 무연고자로 정부에서 해 줄 터니 넌 걱정하지 마. 우선 통증이라도 잡게 병원에 입원해야겠다.” 오빠 속마음은 어떨까. 나라도 혼자 가서 곁에 있어 주다가 끝마무리 하느라 고생하더라도 오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난 확고하게 안 가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아예 오빠가 내게 부탁하지 못하도록 일찌거니 선을 그었다. 싫은 건 싫은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못 박고 그 외에 내가 뭘 해 주길 원하느냐 묻고 있다. “야, 됐어. 해주긴 뭘 해주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넌 아무 걱정하지 마.” 여섯살 터울로 여동생 생긴 후 작은 오빤 아마도 많은 시간을 나 돌보느라 애썼을 거다. 엄마 도와주려고 우는 동생 등에 업고 달래기도 했고 친구들과 밖에 나가 놀고 싶을 때 집에 잡혀서 나가지도 못했던 날들도 허다했을 텐데 그 많은 작은 오빠의 노고를 난 빚지고 있는 거다. 엄마 아빠 앨범에서 본 사진 중에 내 마음을 찌른 작은 사진 한 장. 오만상을 찌푸리고 울고 있는 아기를 자전거에 태우고 뒤에서 안고 어르고 밀어주는 오빠. 확연한 작은오빠 얼굴이다. 작은오빠보다 두 살 위인 큰오빠는 나를 봐주는 모습이 어디에도 없다. 어쩌나. 그래도 한국 나가기 싫은데. 아직도 남편보다는 내 편인 작은오빠. 죽지말지. 까짓 것 전신에 퍼진 암 덩어리 곱게 품고 같이 살지. 그냥 이렇게 카카오 톡하면서 내 편으로 남아 있어주면 좋겠다 오빠야.

2020-04-08

[문예마당] 기차놀이

현관문을 들어서며 TV 앞에 졸고 있던 엄마에게 나는 버릇처럼 물었다. "엄마 오늘 뭐했어요?" "운동했지." 내가 물어보는 의도를 알아챈 엄마는 재빠르게 선수를 친다. 운동을 하면 얼마나 했을까 싶었다. "어떤 운동했어? 다시 한 번 해봐." 내말에 엄마는 입이 불쑥 나온다.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막내딸이 미웠나보다. 심드렁한 얼굴로 느릿느릿 팔을 들어 올려 앞뒤로 몇 번 내젓고 손바닥을 서너 번 마주치더니 소파에 등을 붙여버린다. 몸놀림이 부드럽지 않아보여서 "운동 안했지?"하고 눈을 흘기자 "네가 봤어? 너 없었잖아 나 혼자 했단 말이야"하며 처진 눈 꼬리에 바짝 힘을 준다. 평상시엔 목소리가 어눌해 듣다보면 답답증이 나서 내가 말허리를 자르곤 했는데 자신을 방어할 때엔 속사포처럼 거침없이 쏘아댄다. 엄마가 정색을 하고 그렇게 말하면 나는 입을 닫아야 한다. 얼마 전까지 나는 엄마와 함께 1년을 살았다. 무릎 수술 후 더 이상 아들집에서 사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엄마는 다른 노인들처럼 독립해서 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신 가시는 날까지 자식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엄마의 지론이다. 엄마는 늘 그랬다. 둘째아들과 죽는 날 까지 살 거라며 종 주먹을 흔들어보이곤 했다. "지가 날 무시하면 안 되지 저희 애들 둘 다 키웠는데…." 엄마는 항상 손녀딸 키워준 것을 무기로 삼았다. 진작 병원에 모셔야 했다. 무릎 연골이 닳아 버린 것도 모르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일하다 바지마다 무릎 구멍을 내어 성한 것이 없었다. 통증으로 인해 엄마는 밤마다 앓은 소리를 쏟아내었다. 엄마의 신음소리는 바로 이층에 있는 손녀딸 방까지 들려서 잠들 수 없는 아이가 자주 제 엄마에게 불평을 했다. 그렇게 해서 엄마는 무릎수술을 위해 입원을 했다. 평생 병원신세를 진적이 없는 엄마는 수술 후 하룻저녁을 혼자 지내더니 병원 문을 들어서는 내게 적적하고 외로웠다며 얼른 집으로 가자고 했다. 엄마는 점점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건 전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책임이었다. 시장까지 평생 봐다 주시던 아버지 덕에 여느 노인들처럼 독거할 엄두도 못낼 만큼 엄마는 겁쟁이가 되어있었다. 대개 언니가 와서 엄마 목욕을 시켰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엄마의 몸을 씻겨보기로 했다. 무릎수술 이후로 엄마는 190파운드 가깝게 체중이 불어서 걷는 것을 힘들어 했다. 워커와 지팡이 없이 걷기 연습을 할 때는 영락없이 뒤뚱대며 걷는 오리 같았다. 어떻게 저토록 몸이 불어날 수 있을까. 엄마의 몸은 여자라기보다 스모선수 같았다. 아래로 처진 젖가슴과 세 겹으로 늘어진 배는 엄마의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혼자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보니 먹을거리를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식사량에 비해 활동량이 턱없어 부족함으로 체중이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였다. "아이 아파! 네 언니는 손이 부드러운데 너는 매워." 목덜미를 조금 세게 문질렀더니 엄마는 당장 아프다고 짜증을 냈다. "손이 매운 것이 문제가 아니야 엄마 몸을 봐요. 씨름선수 같잖아 이게 뭐야 더불버거도 아니고 삼겹살이네." 그러자 엄마는 십팔번인 둘째 며느리 얘기를 꺼낸다. 몸피가 버들가지처럼 야리야리한 올케는 나이가 들수록 배가 나와야 허리힘이 있다는 말을 노래처럼 하는 사람이다. 네 올캐는 너같이 모질게 말하지 않는다며 엄마는 목소리를 떨었다. 노인이 되면 고집만 는다더니 당연한 것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아직 엄마의 속살은 검버섯 하나 없이 매끄럽다. 90을 바라보는 노인의 몸이라고 믿기지 않게 탄탄하다. 엉덩이 부분은 정말 너른 마당이다. 나는 아이가 장난치듯 엄마의 늘어진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엄마의 봄날도 푸르렀을 것이다. 그 몸에서 아홉 자식을 생산했지만 이제는 폐가가 되어버렸다. 잠시 쓸데없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나는 막내딸 기질이 살아나서 장난이 치고 싶었다. "엄마 엉덩이 좋네." 엄마 등의 물기를 닦아내며 나는 손바닥으로 드럼을 치듯 장단을 맞췄다. 몸무게로 승강이를 하던 엄마는 갑자기 앞니가 조금 부러진 틀니를 드러내며 히히히 웃는다. "나 몸매 좋았어. 네 아버지 처음 만나던 때." "아냐 엄마 지금도 뒷모습은 50대 같아. 영감님 친구 하나 만들어도 되겠어." "넌 참 웃겨." "그럼 웃어야지 그래야 건강해요." 엄마를 웃게 하는 데에는 나의 버릇없는 장난기가 특효약이다. 목욕 후에 재활훈련사의 말처럼 엄마를 운동시켰다. 그러나 엄마는 조금 따라하다 포기하고 만다. 나는 엄마를 붙들고 기차놀이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 허리춤을 붙들라 하고 발걸음에 구령을 맞추어 걸으면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혼자 운동은 불가능하다. 제대로 설 수 없어 넘어지기라도 하면 무릎은 폭삭 무너질 것이었다. "자! 나를 잘 붙들어요. 말만 잘하면 어느 역이건 정차하는 자가용 기차입니다." 칙칙폭폭 기차가 간다. 엄마는 안간힘을 다해 내 허리에 매달린다. 87년 세월의 무게가 화물차처럼 무겁게 끌려온다. 그때 갑자가 뿡뿡 하는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시침 뚝떼고 묻는 내게 엄마는 멋쩍은 듯 히히히 웃는다. "뒤가 힘이 없어 나오나봐 냄새 없어. 그냥 가자." "그래 엄마 뭐 어때. 붕붕 소리 내야 기차가 가지. 자 해봐요 내가 하나 둘 하면 짠지!" 하나둘 셋넷 하나 둘 짠지 하나둘 아멘 하며 엄마는 소리 나는대로 했다. 나는 엄마의 기차가 되어 계속 달린다. 엄마 방을 나와 리빙룸으로 향한다. 집안을 도는 기찻길 옆엔 먹다 남은 뻥과자와 새우깡 봉지가 뒹군다. 강아지 녀석도 신이 나는지 엄마의 좌우를 자발없이 팔짝팔짝 뛰어다닌다. "힘들면 말해요." "아니야 괜찮아." 말은 그랬지만 엄마는 힘이 드는지 또 방귀를 뿡뿡 터트리더니 히히 하고 웃는다."뭐야 정말 괜찮아 엄마?" "그래 어서 가기나 해." 슬며시 돌아보니 엄마의 하반신을 벗어난 속바지가 철길을 베고 누운 주정꾼처럼 허옇게 널브러져 있었다. <약력> '해외동포문학상' 수필 당선 오렌지 글사랑 회원 재미수필문학회 회원

2010-08-22

[문예마당] 처음 맛본 이런 희열

를 위해서가 아닌 교수님을 위해서란 명분 아래 평소에 하기 싫어 피해오던 연주회에 참여키로 했다. 내가 다니는 여기 LA시티 칼리지에서는 악기를 배우는 클래스나 성악을 공부하는 클래스는 학기를 마치며 발표회를 한다. 공부할 시기에 맞는 나이의 음악도들은 UC계열 대학으로 편입하기 위해서도 발표회 때 연주하는 것은 필수다.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도 꼭 연주에 참여한다. 그러나 난 단순 취미생활 정도의 수준인 학생이니 연주회에 참여하기엔 적합지 않다고 스스로 피해 오던 터다. 취미 생활중 한 가지로 기타 클래스를 등록했다. 원하는 대로 내가 치는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것이 목표였다. 남이 치는 것을 보았을 땐 그리도 쉬워 보이더니. 막상 기타 몸통을 끌어안고 여섯 줄을 편애 없이 사랑하려 노력했는 데 재주가 부족했던 탓인가 쉽게 목표를 이룰 수가 없었다. 쉽사리 재능 한가지 늘려 보려 시작했던 건 결혼도 하기 전 까마득히 옛날이다. 광화문 어딘가 학원에 첫 등록을 한 후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경력이 있다. 10년쯤 지난 후 결혼하고 미국까지 와서 다시 시작해 보려 직장 다니며 밤 클래스에 등록하고 애를 쓰다 또 포기했다. 하고자 하는 마음에 따라주지 않는 연습. 시간도 부족하지만 우선은 너무 어렵다. 안 된다. 손가락이 짧아서라고 불평을 한다. 손가락 사이가 필요한 만큼 벌려지지도 않는다며 또 포기를 했다. 그리고 바쁜 십여 년을 보낸 후 다시 등록을 했었다. 역시 계속하지 못하고 말았다. 또 다른 십 이삼년을 지내고 나니 이젠 일에서 손 떼고 시간은 넉넉한 학생이 되어 시작한 기타. 간격이 보통 십 년 이상이고 보니 세 번째 포기했을 땐 이젠 기타와의 사랑은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도 미련이 남아 일 년 반 만에 다시 등록하고 학기말 연주회다.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도 없고 청중 앞에서 연주라니…. 실력이 뻔하니 연주회 참여는 사양하고 지냈다. 그러나 이번엔 무슨 맘이 들었나. 여러 해 기타를 전공한 학생들로 구성된 앙상블 클래스(합주반) 학생들의 독주 외엔 솔로 연주자가 없다고 난감해 하시는 교수님 말씀에 선뜻 자원을 했다. 내가 무슨 일을 벌이는 건가. 연주라니. 교인들 앞에서 찬송가 한 곡 부르는데도 숨이 막힐 듯 벌벌 떠는 주제에 교회보다 훨씬 넓은 대학 강당에서 그것도 완전하게 외워서 칠 수 있는 곡 하나 준비도 안 돼 있으면서 연주를 하겠다고 나섰나. 연주할 학생이 없다고 난감해 하시는 교수님 표정에 순식간에 도와 드리겠다고 인심을 쓴 것까진 좋았는데 이런 낭패가 어디 있나. 18년 전 1991년 클래스에서 학기 말 시험으로 쳤던 곡을 틈틈이 연습은 했었지만 그 틈틈이란 수년에 몇 번 정도다. 외워지지도 않고 악보에서 눈을 떼면 그 순간 하얗게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상태다. 2주 동안 날마다 연습이다 제법 된다. 악보도 외웠다. 남편의 반응이 경이롭다는 표정이다. 된다. 할 수 있다. 며칠 동안은 하루 종일 연습했다. 연주 당일에도 일찍 가서 내 차례가 되기까지 몇 시간을 그 한 곡만을 치고 또 치고 또 쳤다. 떨리는 가슴이야 무슨 도리가 없으니 그냥 떨리는 대로 떨기로 마음 먹었다. 악보를 다 외웠는데도 자꾸 자신이 없다. 중간 중간 깡그리 잊어버린다. 어디서 다시 시작을 해야 할지도 생각이 안 난다. 할 수 없다. 잊으면 잊은 대로 하리라. 그래도 교수님을 도와드린다는 생각 하나에 마냥 기쁘기만 하다. "기제 너 잘할 수 있어. 아주 잘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정말 잘할 수 있다니까. 기타 이리 줘 봐. 내가 튜닝해 줄게. 됐어. 심 호흡 한 번 하고. 됐어. 다음이 네 차례니까. 괜찮아. 평상시대로 하면 돼. 아주 잘하니까." 내가 보기엔 교수님이 더 떨고 있다. 발갛게 상기 된 얼굴이며 말이 많아 진 것을 보니 무척 걱정이신 모양이다. 가엽다. 교수님이 불쌍하다. 직장에서 해야 할 자신의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만 뭔가 부족해서 쩔쩔매는 상황인 듯 보여서 안쓰럽다. 학생이 연주를 잘해야 하는 건 아닐 거다. 발표할 충분한 학생 수에 그동안 가르친 결과를 학생들이 연주로 증명해 주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무대로 나가려니 교수님이 직접 내게 맞춘 풋스텝을 들고나가신다. 가슴이 찡하니 감사한 마음에 환하게 웃으며 기타를 들고 대기실을 나간다. 청중을 향해 밝게 웃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내가 나를 느낀다. 그래. 잘할 수 있다. 이렇게 고마운 마음인데 연습 잘 되던 때처럼 잘 할거다. 마음을 평안히 갖자. 여긴 내 방이고 나 혼자 연습하려고 무대에 앉을 뿐이다. 나를 위해서 나선 것이 아니다. 나를 보이려고 나 잘났다고 뽐내려 나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난 그저 교수님이 안전한 위치를 확보하고 계시는 데 일조하려는 것이니 잘 될 거다. 가뜩이나 줄어드는 학생 수. 이러다간 기타클래스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다. 등록은 했어도 나처럼 계속하는 것이 힘겨워 도중하차하는 학생들이 반은 되는 성 싶다. 학기 초엔 교실이 꽉 차 보였는데 학기말엔 금방 눈으로 학생 숫자가 파악된다. 그러니 내 작은 힘을 보태자. 실력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연주회 의상을 고르고 화장을 예쁘게 하고 머리손질은 가발로 대치한다. 성의를 보이면 기타클래스의 인상이 좋을 것이다. 연주회에 온 청중들이 혹시라도 매력을 느껴 다음 학기엔 기타 클래스에 많이 등록을 하고 싶도록 보여지고 싶다. 교수님을 위해서. 이렇게 기특한 생각으로 떨리는 가슴 진정하며 애쓴 보람이 내게 큰 상으로 돌아왔다. 엄청난 기쁨이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듯한 이 희열. 내가 청중들 앞에서 기타 독주를 하다니. 우하하하 노기제 만세. <약력> ▷‘한국수필’ 등단 ▷‘재외동포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

2009-12-20

[문예마당] 다른 정서 다른 문화

마 전 신문에서 개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밸리 지역에서 누군가 개에게 독극물이 묻은 미트볼을 먹여서 병원으로 실려가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다. 최근엔 이글락 지역에서도 다섯 마리의 개가 독극물에 중독되어 한 마리가 죽었다고 한다. 애완 동물을 사랑하는 이곳에서는 큰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관계 당국은 범인 색출에 적극 나서는 한편 주민들에게 애완견 돌보기를 철저히하고 집 마당에 이상한 음식이 있는 지 등에 대해 주의하라는 기사다. 한국도 이제는 많이 달라져 애완동물을 집안에서 많이 기르지만 20년 전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올 때만 해도 개는 집에서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를 먹여 키웠고 어느 정도 크면 복날 남자들의 보양식을 위해 보신탕 집으로 팔려가곤 했다. 원래 나는 개를 비롯해 모든 동물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미국에 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더욱 싫어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가 처음 정착한 곳은 롱비치에 있는 한 아파트였다. 집 앞에는 커다란 목련 나무가 있어 따가운 오후의 햇살을 막아 주었다. 운전도 길도 익숙지 않아 마켓에 가려면 길 이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날도 걸어서 마켓을 다녀 오느라 나는 좀 큰 누런봉지를 양팔에 들고 7살 어린 딸에게도 작은 고기봉지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좀더 가깝게 질러가기 위해 샛길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뭔가를 말하는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골목 중간쯤 왔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개 한마리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인적이 드문 뒷골목을 택한 것이 잘못이었다. 상황이 너무 급했다. 겁에 질려 내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딸에게 개가 길길이 뛰며 곧 달려들 태세였다. 미친 개 광견병 그 생각이 들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양손에 마켓봉지를 들고 아이를 뒤로 빼돌렸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바나나를 꺼내어 등 뒤로 던졌다. 달려가 냄새를 맡더니 다시 따라 붙는다. 시간을 벌기 위해 계속 하나씩 던졌다. 한 손에 들었던 봉지가 찢어져 물건들이 길바닥이 흩어졌다. 무릎이 찢어졌는 지 바지 위로 피가 비친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딸이 들었던 고기 봉지를 내가 들었는데도 개는 줄기차게 딸에게만 달려 들었다. 그런데도 고기가 든 봉지를 얼른 던져 준다는게 우리 정서로는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진땀을 빼고 있는데 한 백인 여자가 쓰레기를 버리려고 뒷문을 열고 나왔다. 구세주였다. 개가 그쪽으로 가는 틈을 타 딸에게 먼저 집으로 뛰어가라고 일렀다. 개가 쫓아오면 막으려고 난 뒤에서 걸었다. 멀리 아이가 커브를 막 돌아 뛰어갔는데 개는 내 앞을 지나 앞으로 내닫는 게 아닌가. 눈 깜박할 사이에 더욱 불안한 사태가 벌어졌다. 마켓 봉지를 땅에 버리고 개를 따라 나도 뛰었다. 커브를 도는데 자전거를 타고 오는 백인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난 청년을 향해 개를 손으로 가리키며 "헬프 미"하며 저만치 뛰어가는 딸을 또 손으로 가리켰다. 백인 청년은 오던 길을 돌아 개를 쫓아가 잡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놀래서 뛰는 딸의 이름을 불렀다. 개가 없다고 소리를 쳐도 딸아이는 뒤도 안보고 "엄마 빨리와"하며 계속 뛰어 집으로 들어갔다.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개는 바나나를 안 먹는다고 했다. 그 말에 곁들여 개를 때리면 동물 학대죄로 붙잡혀 간다는 것이다. 그 후 우리 모녀의 개에 대한 공포가 병적으로 심해 멀리서 개가 보이면 다른 길로 돌아서 갔다. 얼마 후 신문에서는 개를 때린 한국 남자가 6개월 실형을 받고 벌금을 물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토록 문화가 다른 곳에서의 적응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 후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입학할 즈음 학군이 좋다는 T시로 이사했다. 뒷마당이 커서 구입한 집이었다. 아이들이 동물을 좋아해서 여러 종류의 동물을 기르며 차차 개에 대한 공포도 사라졌다. 애완 동물들이 점점 자라 집안을 너무 많이 훼손 시키기에 잘 키우겠다는 다른 이웃에게 주고 말았다. 그때 개를 키우지 않았다면 우리 모녀는 평생 개를 싫어하며 살았을 것이다. 지금도 두 딸은 토내(개이름)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한다. 우리가 준 개가 그집에서 2주 만에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길에서 우리를 놀라게 했던 그 개처럼 거리를 방황하다 누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미국사람들은 개를 가족처럼 생각한다. 때로는 개에게 유산을 남겨 개의 노후가 편안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한국에서 살았던 시대에는 개는 복날의 보신탕 감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문화와 정서가 다름을 절실히 대조해 보게 되는 대목이다. <약력> ▷‘미주크리스찬문학’ 수필 입상 ▷‘수필문학’ 등단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이사

2009-09-07

[문예마당] 쉽고도 어려운 것

이 시대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문제는 불신으로 점철 되어온 신뢰의 상실이다. 과학이나 문학 예술분야에 있어 특별히 전문가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는 인터넷 시대 지식의 바다를 마음대로 헤엄쳐 다니며 거기에서 얻어지는 것에 대한 만족감도 있지만 한편 얼굴 없는 살인자 악플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자멸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걸음 다가서면 그 거리만큼 두려워지는 체감온도 너와 나 사이 불신의 벽은 깰 수 없을까? 근래에 일상에서 겪은 에피소드 한 토막을 함께 나누고 싶다. 한 보름 전으로 기억 되는데 이른 아침 미국 마켓에 갔다. 다섯 블록쯤 되는 걷기에도 아주 적당한 거리를 걸음 가볍게 날아가듯 했는데 그만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바나나 한 무더기와 달걀 한 판에 평소에 잘 안 사던 포도 주스에다 자루에 든 감자까지 사들고 주차장을 나와 내 차를 한참 찾아보았으나 안 가지고 간 차가 보일 리가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내 건망증에 대한 실망보다는 염려의 경지까지 도달하게 된다. 계산한 물건을 금방 물리자니 낯이 뜨겁고 이 무게를 들고 도저히 걸어 갈 자신이 없어 망설이고 있었는데 한 남자분이 내 앞에 차를 파킹하고 급히 마켓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죄송하지만요 앞에까지만 태워주실 수 있을까요?" 심사숙고할 겨를도 없이 뻔뻔스럽게 물어봤다. 다행히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는 안했는지 오분만 기다리라 했다. 무슨 일로 마켓을 들렀는지 몰라도 정확하게 오 분이 조금 지나자 한국 남자분이 약속대로 나타났다. "아주머니 참 겁나는 분입니다. 날 어떻게 믿고 이 차를 타십니까?" 황당하다기보다 자존심 상하는 물음이었지만 그분의 말이 백 번 맞았다. 집 앞에까지 와서 나에게 던진 그의 말에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했다. "요즘 세상에 모르는 날 믿어주는 분이 있다는 것이 눈물나게 감동입니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인정이 깃든 이 사실이 눈물까지 날 정도의 감동이라니…. 가뿐하게 출발한 그날 아침이 한심한 나의 건망증까지 가세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같은 동족끼리도 믿지 못하는 시대 가족과 부부간의 신뢰 한 걸음 더 나아가 노사의 갈등이 현 정부와 정치가를 불신의 늪으로 빠뜨리고 있다. 믿음으로 가는 길은 언제 열릴 수 있을까. 그 길은 옛날 실크로드로 향하는 길만큼이나 길고 험한 고행일까. 낙타에 모든 생필품을 싣고 끝없는 사막 길을 가야만 했던 유목민들의 몸과 마음은 고되었지만 한편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참 걷다보면 그들의 꿈인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한국에서 가끔 치러지는 큰 행사 때마다 오프닝에서부터 각종 프로그램의 이벤트를 총 지휘 감독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나 영화를 만드는 프로듀서와 감독의 위치와 같다고나 할까. 생각해보면 고갈된 정서 생활에 윤활유의 역할을 해주는 이들이 있어 안방이나 거실 소파에서도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비교적 성공적인 행사를 마친 후 모 일간지에 실렸던 인터뷰 기사의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행사를 잘 치러 낼 수 있었던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쉽고도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자신이 하는 작업을 일컬어 '아직 사랑에 이르지 않은 두 개의 개체를 서로 만나게 해서 사랑에 빠뜨리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문인의 한 사람으로 공감이 가며 깊은 의미가 담긴 표현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궁극의 목적은 어떤 대상을 사랑의 큐피트 화살로 명중시키는 것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때로는 무의미한 날들을 보내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러 내 막혔던 가슴이 봇물처럼 터지는 것 같은 때를 경험한다. 비록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를 지켜보고 있는 초자연의 힘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의 몸짓을 통해서도 진실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쉽고도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어려운 길이라도 택하련다. 내안에 내가 숨 쉬고 있는 한 큐피드 화살이 중심에 찍힌 점 한 개를 명중시킬 수 있을 때까지. <약력> ▷문예운동 등단 ▷재미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재미시인협회 사무국장

2009-08-16

[문예마당] 굼벵이의 노래

오체를 온탕안에 들여 앉혀 불린 때를 민다 내 지놈지도 위에 더께진 유전자 줄기때 우매 굼뜸 어눌 무딤 우직 미망 딱지 앉은 좌절 자괴 패배 비굴 절망 등 버거운 줄기 들춰가며 애벌 두벌 속때까지 피 어리게 밀어내고 정수리 세어버린 세월도 함께 흔들어 헹궈냈다 갑의 벗은 몸 날개 돋아나는 소리 웅비하는 소리 흑암을 닦는 계율 지잠(地蠶) 한살이 한 세 네 이레 남짓 부를 노래 득음안거(得音安居) 은인(隱忍) 여남은 해 벗고 굼벵이 천장(遷葬)하는 이 새벽 섬섬한 나래 펴 이녁을 연다 삼등열차 풍속에 휘휘대다 일어서는 그리이스 철길가 도열한 갈대숲에서나 변산해변 백사장 포푸라숲에서나 득음한 소리 흉성 두성 불러내어 하얀폭포 한 폭 찢어 흩뿌리는 찬비 얼얼한 여름 장조가락 황망히 떠난 혜성의 아리아 파기한 약속 찾아 떠도는 메아리 장마 떠난 초원에 이는 푸른 함성 은빛 햇살 튕기어 파랑새 춤사위 탄주하는 아다지오 영혼 구슬 굴리는 콜로라투라 산개울 소리 풀벌레 소리 두눈 부릅 떠 입술 하얗게 강울음 울어 껍데기만 남을 삶의 현 톱으로 켜 백골가루 오소소 쏟아내는 절명의 노래 한살이 벗고 빛바다 파고넘어 어느 하늘가 반쯤 떠돌 내 이명의 모래 그 만가 <약력> ▷미주 문학세계 시조 당선 ▷미주시조협회 회장

2009-08-16

[문예 마당] 아내의 자리

이른 새벽에 집에 도착했다. 입구에 놓여있는 신문을 집어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과 이틀 동안인데 오랫동안 비어 있는 것 같이 집안이 서늘하다. 우편물을 수거해 대략 정돈하고 식탁의자들을 바로 하고 흩어진 것들을 치우며 각방 문들을 열어보아도 별 이상이 없다. 가정이란 여러 사람이 더불어 살아 갈 때는 포근함이요 따뜻함이요 안락함이요 또는 불만 불평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세대의 흐름인지 시대의 조류인지 우리 부부도 핵가족으로 단 둘이 살고 있다. 동물과 다른 인간에게는 자율성이라는 것이 있다. 간섭을 배제하고 자기 의지를 굽히기 싫어한다. 현대 사회의 공통적인 사고 방식이다. 우리들의 이전 세대에는 한 가구에서 보통 삼사세대가 공동체 집단으로 살았다. 할머니의 등에서 아기가 울고 어머니의 품에서 젖먹이가 웃으며 서로가 어울려 가족 또는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살았다. 어떠한 불편이나 부당함이 있어도 용해되면서 협조와 양보로 인내하며 살아왔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도 행복한 시절이었다. 가정이란 때로는 즐거운 극장이요 때로는 울타리 없는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정 반쪽인 아내가 입원을 하니 텅 빈 공간은 너무 크다. 외로움 적막함 고요함 등등은 새삼 인간의 나약함을 느낀다. 아내의 무게가 온 우주 같이 무겁다는 생각도 한다. 오늘 새벽 병원에서 잠이 깨었을 때는 4시경 이였다. 수혈을 받으며 아내는 잠을 자고 있었다. 세월 앞에 장사없는 것이 더욱 실감난다. 얼굴이며 손등이며 목 둘레며 주름살은 더욱 선명하고 뚜렷하게 보인다. 우리가 만든 많은 시간의 흔적이요 존재의 증명이다. 바삭거리니 왜 벌써 일어나? 하며 아내가 눈을 뜬다. 팔에는 주사 바늘 줄이 연결되어 있어 거동이 불편한가 보다. "나 집에 잠깐 다녀 올래 그래도 이틀이나 지나니 궁금도 하고 아마 한 시간이면 충분 할거야 빨리 다녀 올 거야"하고 왔다. 몇 가지 책을 주섬주섬 가방에 넣고 속옷이며 필요한 것들을 가방에 함께 넣었다. 아직도 밖은 깜깜한 밤이다. 새벽의 공기는 싸늘하다. 다시 병원을 향하여 차는 달린다. 사람은 갑자기 일상생활에서 벗어나면 당황한다. 지난 2일전 혈액 닥터와 예약이 되어 검진을 받으러 갔다. 의사는 현기증이 없느냐? 가끔씩 춥지 않으냐? 힘이 없느냐 몇 가지를 가볍게 질문하고 검사 기록만 쳐다본다. 굳어진 얼굴 표정이다. 일상생활에서는 불편한 것이 없느냐고 질문한다. 약간은 허약한 상태지만 정상인처럼 생활했고 내일 또한 1박2일의 골프게임이 예약돼 있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나를 쳐다보며 말을 한다. 입원 해야 합니다 어떤 수치는 너무 낮으니 집에 갈 수 없다고 한다. 현 상태로 일상 생활을 계속할 수 없음으로 빨리 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한다. 눈이 휘둥그레진 아내는 나만 쳐다보며 힘이 없고 실망스런 표정이다. 참으로 예상이 어긋난 상황이다. 죄 없는 사람을 형사가 강압적으로 감옥에 넣은 것처럼 당황하면서 의사 지시에 따라 입원을 했다. 입원 2일째 되는 날 집을 다녀왔다. 입원실 문을 열고 다시 들어가니 아내가 책을 보다가 핼쓱해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빨리 왔네 한다. 아직은 이른 새벽인데 잠을 못 자며 기다렸나 보다. 같이 있어야 잠을 편히 자는 습성이다. 여기 다른 책도 있어 하며 주었다.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한번도 쓰러지지 않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쓰러질 때 마다 어려워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이란 생명체는 어떤 환경에서도 순응하는 끈기가 있다. 아내에게 힘내라 말하고 싶다. 그 힘에다 내 힘도 같이 보태겠다고…. ■약력 ▷전남 광주 출생 ▷'창조문학' 수필당선

2009-07-26

[문예 마당] 도광야회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화폐전쟁이 세계열강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세계에서 미국이 가장 위대한 경제력을 지녔고 따라서 현재나 미래에도 달러는 세계 공동화폐의 결제수단이다. 세계 최강의 달러에 중국의 위안화가 도전장을 내밀고 화폐전쟁을 벌일 태세이다. 겨우 삼십년 전만 해도 중국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경제 성장을 이루고 세계 최고의 달러 보유국이 되었다. 무엇이 오늘의 중국을 이처럼 발전시켰을까? 나는 지도자의 정치철학과 그가 제시하는 비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0세기에 중국에는 위대한 두 명의 지도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공산당철학으로 국가를 지배한 모택동이다. 다른 사람은 등 따뜻하고 배부른 실용철학으로 중국을 통치한 등소평이다. 나는 내부적으로 국민의 실용적인 삶을 중시한 등소평이 좋다. 그의 기본적인 외교정신은 '도광양회'였다. 도광양회의 뜻을 알고 난 후 한때는 도광양회가 나의 화두였다. 도광양회라는 말은 삼국지에 유비와 조조의 인간관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교활한 조조가 유비의 사람됨을 알아보려고 그의 영지 채소밭을 가꾸게 했다. 유비는 천둥번개에도 벌벌 떠는 바보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며 때를 기다렸다는 이야기다. 도광양회는 "자신의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1980년대 중국이 내부 성장을 할 즈음 외국과 경쟁하며 힘을 낭비하지 말고 조용히 경제발전을 이루자는 외교노선이 도광양회였다. 2009년 우리 주변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세계의 경기가 나쁘니 미국경기가 나쁘고 특히 남가주경기는 더욱 나쁘다. 한인사회는 한국경제와 긴밀하고 모국이 어려우니 이곳 동포경제의 주름도 깊다. 소위 잘나가던 사람들 여러가지 일을 벌였던 사업가들은 더욱 어렵다고 소문이 나있다. 이제는 자신을 돌이켜 보고 얼마나 힘이 부치는지 챙겨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혹시 골목대장쯤이었는지 아니면 우물 안의 개구리이었는지 생각해야한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이 있다. 희망은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우리의 시작은 보잘 것 없고 약했지만 초심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자신감의 불씨가 내 핏속에 녹아 심장에 모이고 불꽃으로 타오르던 그 시절을 생각한다. 희망과 꿈에는 세금이 없다. 무겁지 않다. 도둑맞을 걱정도 없다. 그것은 내 몸과 마음을 항상 들뜨고 행복하게 만든다. 도광양회의 참 뜻을 새겨볼 때이다. 뒤돌아보자. 혹시 자만에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았나? 멋진 차에 비싼 동네에서 빚지며 살지 않았나? 돈벌이와 씀씀이는 비슷한지 살펴보아한다. 조용히 자신의 능력을 키우며 미래를 기약하는 내실을 귀하게 키워야한다. 우리는 가슴속에 "할 수 있다"라는 귀중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어수룩하고 검소해도 비굴하지 않는 삶이 좋다. 먼 길을 가는 수도자처럼 인내하며 밝은 내일을 준비하자. ■약력 ▷미주 수필가협회 회원 ▷남가주 공인회계사 협회장

2009-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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