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송민수 파이낸스뉴스 발행인, 전 美연방의원협회 방한단 교류

㈜파이낸스뉴스 송민수 발행인 겸 대표이사가 최근 한국을 방문한 전 미국 상하원의원들로 구성된 ‘전직연방의원협회(FMC)’ 한국 방문과 관련해 국제 친선교류 활동에 함께 했다.   이번 FMC 방문단은 한국측 의장인 김창준 전 美연방하원의원(김창준 한미연구원 이사장)이 주축이 돼 10박11일간 일정을 소화했다. 송 대표는 2020년 3월 한미연구원의 홍보대사로 위촉돼 2021년에 이어 올해 FMC 방한 활동을 언론을 통해 알리는데 앞장서 왔다.    FMC는 전직 미국 정계 지도자들로 구성돼 2019년부터 정례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정치, 경제, 행정 등 각계 분야와 교류를 이어왔다. 이를 통해 한·미간 유대강화와 협력증진을 위한 민간 외교를 돈독히 했다.     이번 방문에서도 FMC는 한덕수 국무총리 방문과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간담회, 아시안리더십컨퍼런스(ALC) 참가 및 포스코, 현대자동차, 롯데그룹, CJ 등 주요 기업을 시찰했다. 이번 일정에 송 대표는 방한행사 주관처 홍보대사로서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간담회 참석과 파주시장 오찬 간담회를 주선하는 등 한미 민간유대 증진 노력에 기여했다.     한편 김창준 (사)한미연구원은 미국에서 쌓아온 정치활동과 기업경영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미래정치 경제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이번 FMC 한국 의장으로 민간외교 가교역할을 했던 김창준 이사장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시바 시장과 공화당 연방하원의원(3선)을 역임했다.    박원중 기자 (park.wonjun.ja@gmail.com)미연방의원협회 파이낸스뉴스 파이낸스뉴스 송민수 국제 친선교류 김창준 한미연구원

2022-07-29

[김창준] 나를 만든 것은 꿈…꿈을 꿔야 기회가 온다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22·끝〉가능성 없는 일, 혼자서 결정   출마 종용 받아들이며 인생의 전환점 시작 1991년 11월이었다. LA 지역 공화당원들이 나를 찾아왔다. 악수하고 자리에 앉았다. 한 명이 대뜸 물었다. “다음 연방하원 선거 출마 생각이 있습니까?” 나는 이미 주 하원의원 출신의 척 베일러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아, 김 의원 못 들었습니까? 다이아몬드바 시는 새롭게 만들어진 선거구에 들어갑니다. 현직 의원이 없는 신생 선거구입니다. 한 번 출마해보지 않겠습니까?” 캘리포니아 인구가 많이 늘면서 2개 선거구가 마련됐는데, 이 중 한 지역구에 다이아몬드바 시가 포함됐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공화당 후보를 물색하고 있습니다. 거론되는 이들이 다 변호사와 정치인 출신뿐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입니다. 당신은 맨주먹으로 미국에 와서 사업을 일구고 시장까지 됐습니다. 공화당이 찾고 있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바로 당신입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큰 제안이 쑥 들어왔다. 당황했다. 연방하원 선거는 시의원이나 시장 선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이었다. 더구나 주 의원도 거치지 않았는데 곧바로 연방하원 출마라니. 입에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인구 8만명의 작은 도시 시장 선거와 65만명을 대표하는 연방하원 선거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새로 생겼다는 41선거구를 공부했다. 주민들 소득 수준과 인구분포 등을 따져보니 공화당 후보로 나선다 해도 당선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는가. 그날 한숨도 자지 못했다. 서재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결심했다. 누구에게도 의논하지 않기로 했다. 의논하면 나보고 “미쳤냐”며 반대할 것이 뻔했다. 의논해서 결정할 일이 있고, 혼자서 결정할 일이 있다. 인생의 전환기였다. ‘Yesterday’s Dream is Today’s Opportunity.’ 어제의 꿈은 오늘의 기회가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다. 사람은 꿈을 꿔야 한다. 꿈을 꿔야 기회도 오고 잡을 수 있다.     나는 미국에 오겠다는 꿈을 꿨다. 그리고 수많은 기회를 잡았다. 미국에 항상 감사한 마음이다. 언제나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 준 모든 이에게도 감사하다.       ━   “숨기고 싶은 이야기도 담아…한·미 민간외교 활동 최선”      ‘남기고 싶은 이야기’ 마치며    -연방의회에서 활동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의 의회 연설을 성사시킨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발의 법안은.   “북한과 대만의 핵폐기물 거래를 반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던 일입니다.”   -현재 미국 정치, 바이든 정부에 대한 생각은.   “바이든 대통령의 인기는 썩 좋지 않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철수 문제도 의회와 충분한 논의 없이 대통령 특명으로 결정했는데, 실수라고 봅니다. 이러한 대통령 옆에서 부통령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도 분명하지 않아 보입니다. 바이든 정부의 신뢰성과 정책의 확고성이 떨어져 보입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친밀한 정부라고 생각합니다. 한미 동맹의 굳건함에도 의심이 없고, QUAD에 한국이 동참하기를 원하는 것도 옳은 판단이라 여겨집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소감은.   “이번 연재를 하는 동안 한국과 미국 전 대통령 등 저명 정치인이 여러분 소천하셨습니다. 저에게도 그분들과의 만남을 돌아보며 옛일들을 추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솔직하게 얘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숨기고, 가리고 싶은 이야기도 그냥 했습니다. 이 나이가 되면 체면보다는 솔직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모양입니다. 제가 미국으로 건너왔던 시절, 차별 없이 저를 받아준 미국에 감사합니다. 제가 떠난 지 50년도 지나지 않아 세계가 부러워할 만큼 눈부시게 성장하고 발전한 한국에도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양국이 변함없이 굳건한 협력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민간외교사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창준 한미연구원과 아카데미를 설립해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앞으로 펼칠 저의 뜻과 활동에도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님들의 댁내에 새해에 더욱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기회 연방하원 선거 시장 선거 결정 출마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2-01-26

[김창준] 사업의 절정에서 가슴 속 뭔가가 꿈틀댔다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21〉비즈니스맨에서 정치인 변신   신생도시 다이아몬드바 시의원 출마 결심 아무리 뛰어도 반응 냉랭…승리 나도 놀라 1977년에 회사 ‘제이킴 엔지니어스’를 설립했다. 상·하수처리장 등 도시개발 프로젝트 설계 회사였다. 중소기업청에서 지원 받은 10만 달러에 직장생활을 하며 번 돈을 합쳐 다이아몬드바에 사무실을 열었다.     직원은 파트타임 비서 한 명 뿐이었다. 낮에는 사업계약을 따내느라 동분서주하고 밤이면 주문받은 설계를 하느라 도면과 싸웠다. 다행히 일거리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서부 6개 주에서 일할 수 있는 면허증을 얻은 덕이었다. 나중에는 혼자서 일감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설계 직원을 더 채용했다. 시간이 지나니 고용할 사람은 더욱 많아졌다. 어느새 150명의 직원을 둔 회사로 컸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나만의 경영 전략을 세웠다. 첫째, 미국에서 사업하는 동안 한국적 사고방식을 버린다. 둘째, 미국 사회의 관습과 불문율을 기억한다. 셋째, 어떤 경우라도 경영자와 사원의 경계선을 지킨다. 넷째, 사원 모두가 내 회사라는 자긍심을 갖도록 애를 쓴다.     제이킴 엔지니어스는 설립 10년 만에 연 매출 1000만 달러를 올릴 정도로 급성장했다. 캘리포니아 500대 설계회사 중 하나로 떠올랐다. 서부지역에만 여덟 군데에 지사를 설립했다. 도시개발 전문가로 인정받으면서 LA타임스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나를 소개했다. 여기저기 강연 요청도 쇄도했다.     그러는 동안 마음 한켠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직 욕심이 생겼다. 2년 동안 이웃 도시인 샌디마스의 도시계획자문위원장으로 봉사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바로 왔다. 신흥 도시인 다이아몬드바의 두 번째 시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초대 시의원 3명 중 한 사람이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사임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가슴이 뛰었다. 마치 나를 위해 문이 열리는 듯했다. 그런데 ‘내 주제에 무슨 시의원 선거 출마냐’는 생각도 바로 엄습했다. 기대와 함께 괴로운 마음이 오버랩 됐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선거 출마를 놓고 고심했다.     설계 책상 위에 A4용지를 펼쳐 놓고 펜을 들었다. 종이 반을 접어 한쪽엔 ‘유리한 점’ 다른 한쪽엔 ‘불리한 점’이라고 썼다.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경우 나의 장단점도 써내려갔다. 불리한 점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다.   출마 결심을 하니까 머리가 말끔해졌다. 다이아몬드바 시에 대해 공부했다. 지역도서관에 가서 시의 역사와 주민 분포, 재정 상태 등에 대한 자료를 모조리 찾아 읽었다. 인구 8만 정도의 다이아몬드바는 독립한 지 1년밖에 안 된 신생도시였다. 도시가 새로 생기면 보통 4년 안에 도시 전체의 마스터플랜을 세운다. 마침 시의원 선거 출마 시점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릿속으로 다이아몬드바 시를 짓고 허물고를 반복했다.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나를 알리는 게 가장 중요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 주민의 85%가 백인인 이 도시가 과연 아시안을 대표로 선출할까. 속으로 여러 번 나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선거 기간 중 토론이 8차례 있었다. 최대한 쉬운 말로, 단순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     “정부와 개인기업이 공조해서 작지만, 효율 높은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여러분의 세금 부담을 확실히 덜어드리겠습니다. 도시계획 전문가로 일해 온 저의 경험과 노하우로 가장 합리적이며 안전한 도시를 만들겠습니다.”   이민자인 내가 변호사 출신인 다른 후보들을 토론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법은 오로지 하나였다. ‘단순하라.’ 그런데 주민들이 나를 주목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지역 언론 기자들도 나를 철저히 외면했다. 인터뷰 기회조차 없었다. 선거 전날까지도 그랬다.   이쯤 되니 당선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개표가 시작되니까 괜히 출마했다는 후회감마저 밀려왔다. 그런데 초반부터 충격적인 개표 결과가 나왔다. 개표 결과는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2위보다 1000표나 많았다. 밤 11시쯤 승리가 확정됐다. 나보다 놀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높이 들었다.     당시 미 전역에서 시의원에 출마했던 한인은 3명. 이중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나만 유일하게 당선됐다. 내 신분도 순간 확 변했다. 한인 언론과 한국 특파원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어떻게 위상이 이렇게 빨리 바뀌나.’ 이튿날 한인과 한국 언론에 ‘한인·한국 이민자 최초로 미국 시의원에 당선되다’라는 제목의 보도가 잇따랐다. 그날 이후 내 이름 앞에는 ‘최초’ ‘유일’이란 수식어가 계속 따라붙었다.   캘리포니아주의 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LA나 샌프란시스코처럼 큰 도시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시장이 모든 행정을 책임진다. 하지만 대다수 작은 도시들의 시장과 시의원들은 자기 직장이 따로 있다. 이들은 시의회에서 결정권만 쥐고 있으며 시 운영은 시티 매니저에게 맡긴다. 다이아몬드바도 그랬다. 나는 제이킴 엔지니어링을 운영하면서 매주 화요일 시의회에 참석했다.   시의원 임기는 4년이다. 그런데 시의원이 된 지 1년 반 만에 시장 자리가 공석이 됐다. 다이아몬드바 시장은 2년마다 5명의 시의원 중에서 선출한다. 다이아몬드바 시장 선출은 유권자가 아닌, 시의원들 투표로 결정된다. 나는 출마를 결심했다. 이어 또 다른 시의원 3명은 물론 나와 경쟁하려던 시의원까지 설득해 만장일치로 시장에 당선됐다. 시의원에 당선된 지 2년 만이었다. 최초의 한인 시장 당선이었다.   시장이 되고 나서 바빴다. 아침 8시면 집무실로 향했다. 8시부터 9시까지 시장 업무를 본 후에 제이킴 엔지니어링으로 출근했다. 파트타임 시장으로 일하면서 받는 급료는 600달러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봉사활동이었다.   공약대로 나는 작은 정부 만들기를 실행에 옮겼다. 시청사를 지으려던 계획을 없애고 빌딩에 세를 얻어 들어갔다. 시장실도 책상 하나 겨우 놓을 정도로 좁은 방을 빌려 썼다. 시의회도 별도 건물 없이 카운티 환경부 회의실을 임대해 사용했다. 시 공무원 채용도 중단했다. 다이아몬드바와 같은 규모의 시를 운영하려면 통상 150명 정도의 공무원이 필요하다. 나는 파트타임 직원 2명을 포함, 총 24명의 공무원만 채용했다. 이런 노력으로 연 1000만 달러의 예산을 줄였다.   다이아몬드바는 효율적인 재정관리로 흑자를 냈다. 또 경찰서를 두지 않고 매년 LA 카운티 셰리프국과 계약을 맺고 외주를 줬다. 예산 절약에 주민들은 크게 감격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사업 절정 시의원 출마 시의원 선거 시의원직 욕심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2-01-19

[김창준] 하수처리 전문 업체 창업 주류사회 진입 느낌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20〉사업가로 성공하며 미국 정착   신문 배달하며 USC서 토목공학 전공 한인정치협(KAPA) 조직 정치 눈 떠   유학생들이 모이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국제관계 연구 동아리였다. 그런데 모임에 가는 게 큰 부담이었다. 영어가 안되니까 그들의 토론내용을 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고 토론을 벌이며 무언가 개선하려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한국 교육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학생들은 각 나라 외교정책을 두고 토론을 벌였다. 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주제였다. 때때로 토론에서 코리아도 나왔다. ‘세계 속에 한국이 있구나.’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나는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 식민지 교육을 받았고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도 겪었다. 당시 한국 역사와 나의 존재를 놓고 고민한 적은 없었다. 부정선거에 항거해 목숨을 내걸고 구름 떼처럼 경무대(현 청와대)로 치닫던 학생들 무리를 보고서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먼 미국에 오니까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동아리 회장을 새로 뽑는다고 했다. ‘내가 나가봐야지.’ 새로 들어온 신입 회원의 출마 선언에 다들 생뚱맞은 표정이었다. 정견발표를 준비해야 했는데 영어 소통이 잘 안 됐던 나로서는 도움이 필요했다.   친절하게 대해주던 한 백인 여학생을 찾아갔다. 정견발표를 대신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며칠 뒤 학교 신문에 나와 그녀 사진이 크게 실렸다. 우리 팀은 교내에 화제를 불러 모았다. 결국 동아리 회장으로 덜컥 당선됐다. 그 여학생은 동아리 행사마다 나와 함께 늘 같이했다.     우리 파트너십은 이런저런 이유로 2년 임기 중 7개월 만에 깨졌다. 나로서는 영어가 더 절실해졌다. 여긴 미국이었다. 영어를 제대로 해야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늦은 밤 집에 돌아오면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V와 F, TH, Z 발음이 가장 어려웠다.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어느 날 신문을 소리 내 읽었다. 신문에 실린 주요 기사를 몇 번씩 소리 내 읽었다. 그렇게 영어 공부에 매달리자 유학생활 1년 만에 영어 실력이 부쩍 늘었다. 하루가 다르게 귀가 열리고 말문이 터졌다. 그래도 특유의 악센트는 여전히 남아 있고 아직도 서툰 부분이 있다.   그 무렵 지역 신문사 보급소에 새 일자리를 얻었다. 새벽 시간에 일해 낮에 공부하기 좋았다. 수입도 좋은 편이었다. 신문 배달을 하는 동안 단 하루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걸 좋게 봤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역 책임자가 됐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수입이 늘었다. 병원 청소도 그만뒀다.     신문 보급소 일을 하면서 내가 가고 싶었던 USC 토목공학과 2학년에 편입했다. 꿈이 실현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원대한 꿈을 가져야 한다고들 한다. 그때 내 삶은 원대한 꿈을 갖고 살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코앞에 닥친 현실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학부 공부를 하면서 미국과 미국 사회가 이해됐다. 그러다 보니 미국 친구도 사귀게 됐다.     토목공학은 적성에 맞았다. 이 분야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내 성격이 엔지니어에 적합하다는 걸 몰랐다. 공학은 기준을 세우고 표준을 만드는 일이다. 모든 작업은 기준에 맞아야 했다. 그런 일이 내 성격과 잘 맞았다. 덕분에 좋은 성적으로 USC 졸업 뒤 곧바로 USC 대학원에 진학했다.   전공은 환경공학으로, 상하수도 물 정화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주경야독으로 조교까지 하면서 1969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 온 지 8년 만이었다. 학교에서는 박사과정을 권했지만, 연구직은 내게 맞지 않았다. 주류사회에 나가 사업가로 성공하고 싶었다.   마침 대학원을 마칠 무렵 미 전역에서 하수처리장 설치로 바쁠 때였다. 전공 분야라 좋은 직장에 금방 취직됐다. 신문사 아르바이트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던 빡빡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하수처리 컨설팅 업체인 ‘제임스 몽고메리’에서 경험을 쌓은 뒤 직접 회사를 차렸다.   하수처리장 짓는 일은 주정부에서 발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으면서 업무상 정부 관계자들을 자주 만났다. 하수처리장 수주를 잘 따기 위해 신문·잡지를 꼼꼼히 읽으며 정부에 관한 지식을 키워나갔다.   미 전역에서 동시다발로 폐수처리 사업이 이어지다 보니 일거리가 쏟아졌다. 하루가 멀다하고 비행기를 타고 서부 지역을 날아다녔다. 미국으로 건너와 처음으로 내가 뭔가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더는 이방인이 아니고 미국 주류사회 일원이 된 기분이었다.     엔지니어로 왕성하게 일하면서 일본계가 만든 아시아기업가협회(AAA)에 나가 활동했다. 얼마 뒤 일본계를 제치고 내가 AAA 회장이 됐다. 그러면서 일본계가 어떻게 미국의 주류사회와 소통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인들과의 교분도 이어갔다. 한인이 늘면서 한인들을 위한 이익단체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무역업을 하던 배기성씨와 함께 1972년 한미정치협회(KAPA·카파)를 조직했다. 나는 2대 회장이 됐다. 우리는 카파의 첫 번째 사업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출마한 제리 브라운 당시 후보의 정치모금 파티를 열어 후원금을 걷어줬다. 브라운은 8년 동안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했다. 당시 최연소 주지사였던 그가 40년 뒤 다시 주지사직에 당선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카파 회원들은 정치 후원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게 됐다. 앞으로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2세들을 위해서라도 한인들이 더는 먹고사는 일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미국은 거대한 나라지만 그 거대한 나라를 움직이는 것은 지역구민들이 뽑는 주 의원, 시의원이라는 걸 실감했다.     정치 모금은 한인사회 의견을 주지사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길이었다. 풀뿌리 민주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하수처리 주류사회 영어 공부 지역 신문사 동아리 회장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2-01-12

[김창준] 4·19 혁명 직후 꿈에 그리던 미국으로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9〉 손에 200불 쥐고 유학길 올라 영어 문제 극복하며 아르바이트로 버텨 '땀 흘려 일해야' 대가 삶의 기본 깨달아   군대에서 빨리 제대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한국은 부패가 만연했고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더 오래 있어 봤자 안 좋은 것만 계속 볼 것 같았다.     당시 군대 의무복무기간은 36개월. 나는 적당히 기회를 봐서 의병 제대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대전에 있는 63육군병원에 입원했다. 병명은 악성치질.   병원에서는 주말마다 외출증을 끊어주며 나보고 집에 가라고 했다. 주말에 배급되는 내 양식을 빼돌리기 위해 나를 내쫓는 거였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 고문관들로 구성된 병원 감사반이 들이닥쳤다. 계획이 틀어졌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만한 증거를 만들어야 했다. 급한 대로 치질 수술을 했다. 멀쩡한 생살을 찢고 꿰맨 것이다. 그런데 수술 후 처리를 잘못 했는지, 수술 부위가 감염돼 엄청난 고생을 했다. 10개월 만에 의병 제대를 했다.     치질 수술 부위는 계속 말썽을 일으켰다. 잘 걷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건너온 후에도 한동안 고생했다.   어쨌든 조기 제대를 했다. 미국 유학 시험 준비를 서둘렀다. 서울대 문리대 안에 있던 한국외국어학원(FLI)을 찾아가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FLI는 한국 정부에서 유학 준비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정식 영어교육기관이었다.     그날도 FLI에 가려고 집을 나설 때였다. 서울 효자동 전차 종점 부근에서 경찰이 길을 막았다. 경찰 어깨너머로 사람들 머리가 새카맣게 밀려들었다.   “이기붕을 죽이고 이승만은 물러가라.”   다다다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경찰이 학생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나도 겁에 질렸다. 몸을 웅크리고 뛰었다.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 선거도 부정으로 얼룩졌다. 정권연장에 눈먼 이승만 정권은 부정선거를 저질러 학생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그날 내가 맞닥뜨린 것이 4·19 혁명이었다.     유학 시험은 국사 과목에서 한차례 낙방했다. 석 달 만에 다시 치러 합격했다. 부정선거 책임을 지고 이승만 정부가 물러났다. 허정 임시정부가 들어섰지만 사회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호적초본을 떼는 데도 양담배 한 통을 건네줘야 했다. 국방부에 출국증을 받으러 가니 담당 직원은 양복 한 벌을 요구했다.   모든 수속을 끝냈다. 미국에 가져갈 수 있는 한도액 200달러를 손에 쥐고 1961년 1월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하얗게 얼어붙은 김포벌판을 날아오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배웅 나오셨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채피 대학이 있는 LA 인근 업랜드(Upland) 시에 방을 얻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그림 같은 도시였다. 미국에 도착하니 온갖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영어가 문제였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외국어학원에서 도대체 무얼 배운 것인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1961년 당시만 해도 남가주에는 아시안이 적었던 시절이다. 나는 세계 최빈국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내가 가장 즐겨 사용한 단어는 “파던(pardon: 뭐라고요)?”이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서머타임을 몰라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 강의실에 들어가 기다린 적도 있다. 친척도, 친구도, 돈도 없었다. 아파도 혼자였다. 미국 교회를 가려 해도 여의치 않았다. 잘 알아듣지도 못할뿐더러 일요일에도 일해야만 겨우 입에 풀칠할 때였다.   ‘내가 미쳤다고 왜 이 타지에 왔지?’ 미국에 온 지 2주도 안 돼 가난과 부패에 찌든 한국이 너무도 그리웠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뿐이었다.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다.   “주님, 제 옆에 바짝 붙어 지켜 주세요. 저 혼자서는 이 고난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정말 자동차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었다. 자동차 살 돈이 없었던 나는 중고 오토바이 한 대를 샀다. 그걸 타고 동네 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해 생활비를 벌었다.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오토바이 운전 실력도 늘었다.   어느 날, 철길 근처에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순간 오토바이가 ‘붕’하고 높이 떠올랐다. ‘아, 기분 좋다’하고 생각한 순간 내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오토바이에서 튕겨 나갔다. ‘쿵’하고 오토바이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사고가 난 지 이틀이 지났다고 했다. 정신을 잃었을 뿐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입원실을 나가려 하자 병원 관계자들이 들이닥쳤다. 병원비를 정산하라고 했다. 200달러 들고 와 방을 얻고 오토바이를 샀으니 무슨 돈이 남아 있겠는가. 들어놓은 보험도 하나 없었다.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병원 관계자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이란 점을 고려해 병원비의 4분의 1만 받고 나머지는 학교에서 받아갔다.   명동 암달러상한테 바꿔온 돈 200달러는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일푼이 된 나는 방값이며 밥값을 버는 게 급선무였다. 하루도 쉬지 않고 2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잠을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았지만, 새벽이면 알람이 울리기 무섭게 일어났다.   병원 청소도 했다. 업랜드에 있는 샌안토니오 병원의 더러운 마룻바닥을 윤이 나도록 닦고 피고름 묻은 거즈가 가득한 쓰레기통을 치웠다. 서울이었다면 코를 틀어막고 도망갈 일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생각이 바뀌니 못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태평양을 건너 이역만리에서 누구 도움도 없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훗날 나는 샌안토니오 병원을 다시 찾았다. 그 병원에서 지역구 연방하원의원을 초청했다. 병원의 육중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저는 이 병원을 잘 압니다. 매일 밤 제가 청소하던 곳이니까요.” 사람들은 내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농담이 아닙니다. 30년 전 저는 이 병원의 청소부였습니다. 마룻바닥 닦는 일을 제일 많이 했지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손뼉 치며 환호했다.     미국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학교 수업도 따라가기 힘든데 아르바이트까지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영어도 못하고 주머니에 돈도 없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편안했다.   서울에서는 돈과 ‘백’에 의지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미국에 오자 모든 게 달라졌다. 햄버거 하나를 먹어도 내가 땀 흘려 일한 대가로만 먹을 수 있었다. ‘1+1=2’라는 삶의 기본을 깨달아가는 날들이었다. 그동안 나는 조국에서 벌어지는 부정부패를 지독하게 혐오하면서도 정작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아버지 힘을 빌려 손쉽게 모든 일을 해결했다.   미국에서 마음이 자유롭고 편안해진 이유. 그것은 나의 힘으로 뭔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미국 혁명 병원 감사반 중고 오토바이 부정선거 책임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2-01-05

[김창준] 대입 실패에 좌절 춤에 빠졌다 미국 유학 결심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한국말 했다고 뺨 맞다 해방 이후 한글 배워 연극반서 성격 바뀌고 '부잣집 도련님' 벗어나   선거에 떨어지고 나서 문득 내 조국 한국에 가고 싶었다. 어린 시절 거닐던 골목길이 자꾸 생각났다. 다시 그 길을 걷고 싶었다.     나는 일본 식민지 지배 시절에 태어났다. 4대 독자로 부모님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 부모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엄마, 아빠에게 둘째를 낳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 사업 덕분에 기와집에서 편안하게 살았다. 나는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저 그런 보통 아이였다. 종로구 통인동 청운초등학교에 다녔다. 매일 아침이면 ‘일본 천황’이 있다는 동쪽을 향해 절을 했다. 일본어가 서툴러 한국말이 튀어나오면 즉시 일본인 선생에게 불려가 따귀를 맞았다.   학교에 들어간 이듬해였던 것 같다. 하늘에 비행기 소리가 자주 들렸다. 그럴 때면 공부를 하다 말고 책상 밑으로 숨었다. “깨졌다 싱가포르, 물러섰다 영∼국.” 학교에서 돌아오면 ‘천황 폐하의 선물’이라며 나눠 받은 고무공을 튕기면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노래를 이렇게 불렀다.     어느 날 내 뺨을 때리던 일본인 선생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으스대던 일본인 학생들도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해방을 맞은 것이다. 학교에는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선생님 말씀이 지금도 기억난다. “우리는 이제 더는 일본말을 쓰지 않는다. 너희는 한국 사람이다.”   어렸지만 해방의 맛을 알았나 보다. 학교 가는 것도 즐거워졌다. 공부도 잘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권유로 보성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1년이 지나지 않아 한국전이 발발했다. 며칠도 안 돼 한강 다리가 끊어져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였다. ‘안심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게 문제였다. 서둘렀다면 우리도 건널 수 있었다.   당시 을지로에 살았다. 인민군들이 요란한 굉음을 내는 탱크를 타고 서울 거리로 밀려 들어왔다.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인민군들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짜고짜 우익정치단체에 아버지 이름이 올라 있다면서 “아버지 어디 있냐”고 물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이미 몸을 피하신 뒤였다.     화가 난 인민군들은 우리 집에 빨간 딱지를 붙였다.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면 안 된다는 표시였다. 어머니와 나는 집안 물건들을 남몰래 내다 팔며 간신히 끼니를 해결했다. 인민군은 밤마다 어머니와 나를 불러냈다. 나는 완장을 차고 한강 변으로 나가 삽으로 매일같이 땅을 팠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올지도 모를 국군에 대항해 싸울 수 있도록 참호를 파는 일이었다.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던 국군이 석 달 만에 서울을 되찾았다. 하지만 우리 집은 폭격을 맞아 기둥이 무너지고 기와지붕도 내려앉았다. 겨울이 되자 중공군이 넘어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사람들은 피란을 떠났다. 우리도 봇짐을 꾸려 리어카에 싣고 피란길에 올랐다. 3대 독자인 아버지에게는 변변한 친척이 없었다. 아주 먼 친척이 살고 있다는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연극반에 들어갔다. 당시 난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대전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게 자신감이 됐다. 권투 선수였던 집주인 아들에게 권투를 배운 것도 도움이 됐다. 그렇게 나는 변해갔다. 나를 옭아매던 ‘4대 독자’ ‘부잣집 도련님’ 굴레를 조금씩 벗어던졌다.     당시 연극반에는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배우 이순재 씨도 있었다. 지금도 종종 서로 안부를 묻는다. 교회에도 처음 나갔다. 밴드부 활동을 하면서 두 명의 친구와 가깝게 지냈는데 모두 착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이들의 권유로 종교생활을 했다. 성가대 활동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 가는 게 좋았다. 성가대에서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있었다. 매주 일요일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성경공부도 시작했다.     활발해진 나의 대전 생활과 달리 현지에서 마땅한 사업을 찾지 못하셨던 아버지는 서울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대전고 2학년 때 다시 상경했다. 다시 온 서울은 활기가 넘쳤다.     대학 입학시험을 치를 때가 됐다. 당시 학교 성적이 괜찮아 선생님은 나를 비롯해 7명에게 서울대 법대 원서를 써 주셨다. 합격을 장담했던 7명 중 나만 떨어졌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버지 강권에 못 이겨 후기대학에 시험을 치고 붙었지만 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머니한테 용돈을 얻어 양복 한 벌을 맞춰 입고 머릿기름을 발랐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명동에 있는 댄스클럽을 찾아갔다. 클럽을 가득 메운 남녀가 손을 맞잡고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이 신기했다. ‘슬로우 슬로우 퀵퀵∼.’   “저게 무슨 춤이야?” “지르박이란 거야. 요즘 최고 인기 춤이야.” 다음 날 나는 대학 입학금을 들고서 댄스 클럽을 다시 찾아갔다. 어차피 공부할 마음도 없었다. 연극에 몰입했던 것처럼 나는 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창준이 이놈, 도대체 뭘 하고 싸돌아다니는 거냐. 재수하든지 편입하든지 할 것이지. 허구한 날 모양만 내고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바지 주름을 잡으며 대문을 나서는 나를 향해 아버지 호통이 이어졌다. 매번 못 들은 척하고 나갔다. 춤에 일가견이 있었다. 클럽에서 나는 소문난 춤꾼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춤을 추면서도 마음이 영 편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막연히 미국 유학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법 공부보다는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기로 하고 공대 쪽으로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후원자를 찾기 위해 미국의 로터리 클럽에 편지를 보냈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그레이버씨에게서 답장이 오고, 그가 사는 동네의 채피 대학에서 입학허가서가 왔다. 변두리에 있는 대학이었다. 그런데 군 복무를 마치지 않으면 비자 받기가 힘들었다. 아버지에게 부탁해 당초 입대 예정일보다 6개월 먼저 입대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카투사를 훈련시키는 제2훈련소로 보내졌다. 어이없게도 군대에서도 춤바람이 한창이었다. 장교들은 쉬는 날이면 지르박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훈련소에 들어간 다음 날부터 장교들에게 춤을 가르쳤다. 훈련은 거의 받지 않았다. 그리고 두 달 만에 의무대로 발령이 났다.   어느 날 고참이 나를 찾았다. 링거 2병을 주며 대전 시내의 어떤 약국에 갖다 주라고 했다. 약사는 링거병을 받자마자 봉투를 내밀었다. 빳빳한 현금이 들어 있었다. 병사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수많은 약과 주사가 그렇게 빼돌려지고 있었다. 사회나 군대나 곳곳에 부정이 만연했다. 환멸을 느꼈다. 결심했다. 미국에 가기로. 원용석 기자김창준 미국 대입 독자인 아버지 아버지 사업 아버지 권유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1-12-29

[김창준] 연방하원 4선 좌절…FBI 수사 5년 만에 종결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7〉 정치인 생활 끝나다 주거 제한·공화당 지원 끊긴 악조건 속 완패 "한국에서 사업가·정치인 경험 전하자" 귀국   연방하원 4선 도전을 놓고 고민이 많았다. 당시 정치자금 수사가 끝나지 않았다. 상당히 곤혹스러운 입장이었다.     온갖 어려움 속에 캘리포니아 41 선거구 예비선거에 입후보했다. 같은 공화당 소속 후보들이 나를 공격했다. 상대 후보인 개리 밀러 주 의원은 내가 곧 감옥에 갈 것처럼 흑색선전을 늘어놓았다. 선거를 치르는 중 나는 정치자금 사건을 경범죄로 종결짓는 ‘플리바겐(plea bargain·사전형량조정제도)’을 마지못해 수락했다. 주거제한과 보호관찰형을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 예비선거 직후까지 선거구에 발도 디딜 수 없었다. 선거구에 가지 않는 조건으로 연방수사국(FBI)이 5년간의 수사를 끝내기로 했다. 악몽의 시간이었다. 나뿐 아니라 친구와 가족들도 너무나 힘들어했다. 대만 국적자로부터 후원금 5만 달러를 받은 것 등이 문제였다. 후원자들의 국적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또 진보 성향의 LA타임스가 나를 저격했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억울한 마음이 컸지만 할 수 없었다. LA타임스 여기자와 인터뷰 한 번 잘못해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다니. 내가 너무 순진한 마음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거제한과 보호관찰형을 선고받은 불리한 여건에서 캠페인 활동을 해야 했다. 당시 내 나이 59세였다. 경범죄는 기록에 남지 않는다는 변호사의 끈질긴 설득에 굴복하긴 했지만 그토록 힘든 시간을 견뎌 놓고 왜 마지막 순간에 양보했는지, 지금도 후회할 때가 많다.     공화당은 중립을 내세웠다. 현역의원에게 관례로 돼 있는 일체의 지원도 끊었다. 선거운동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메일과 전화, 비디오 영상물 등을 통해 의정활동을 알리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손발을 다 묶인 처지에서 선거판에 나선 셈이었다. 결국 예선에서 완패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 나는 이렇게 끝나는구나.’ 허무했다. 그토록 애태우며 가꿔온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더티한 정치판에 내가 희생양이 됐다는 기분이었다.     소리 내 울었다.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다이아몬드바 시의 시장이 되던 날의 기쁨과 연방 하원의원이 되던 날의 환호와 박수갈채.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나를 향해 몰리던 기자들.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기뻐했던 가족과 지지자들 얼굴이 떠올랐다.     연방 하원의원 3선을 하는 동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한다. LA타임스와 오렌지카운티 레지스터 등 주류언론에서도 나의 치적과 활약상에 대해서는 모두 높은 평가를 했다.     본회의 참석률 100%에다 최다 발언 기록을 남겼고 우수 의정상도 받았다.     최근 내 뒤로 훌륭한 연방의원들이 나란히 탄생해 반가웠다. 같은 남가주에서 같은 소속인 공화당의 미셸 박 스틸과 영 김 의원이 올해 연방의회에 입성했을 때, 내 일처럼 기뻤다. 이들이 나를 반면교사, 타산지석으로 삼길 바란다. 내가 겪은 불이익과 고난을 뛰어넘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인 정치력을 더욱 키워나갈 것으로 믿는다.     개인적으로 1994년도 뜻깊은 한 해였다. 뉴트 깅그리치 연방하원 의장의 노력으로 남부 민주당 의원 10여명이 탈당하고 공화당에 입당했다. 미국 정치사에 커다란 혁명이었다. 의사당 안에선 며칠에 한 번씩 공화당에 입당한 민주당 의원들을 환영하는 리셉션이 열렸고 나도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해 11월 공화당은 230대 204, 26석 차로 46년 만에 다수당이 됐다. 나도 여기에 일조했다는 기쁨이 크다. 덕분에 나도 건설교통 소위 위원장으로 선임됐다. 어렵게 잡은 다수당인 만큼 바쁘게 일했다. 밤새도록 의회가 계속될 때면 사무실 소파에 누워 틈틈이 새우잠을 잤다. 투표한다는 벨이 울리면 졸음을 참고 의사당에 들어가 투표했다. 밤에 배가 고프면 컵라면을 뜨거운 물에 데워 먹었다. 몇 달을 그렇게 밤마다 라면만 먹어서 체중이 많이 늘었다.   공화당은 수십 년 동안의 서러운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여전히 많은 한인이 잘 모르는 것 같다. 참고로 내가 등원했을 때 민주당이 82석이나 더 많았다.   연방의회를 떠나며 내 정치 인생도 마감했다. 시원섭섭했다. 성공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털어버리고 모든 걸 비웠다. 3선 연방하원의원 경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의 경험을 조국 젊은이들에게 돌려주자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다짐하니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언론에 칼럼도 쓰고 강연도 많이 했다. 한국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내가 경험한 실제 미국 정치를 한국 정치와 제도적으로 비교하면서 알려주고 싶었다. ‘김창준 정경아카데미’는 그런 취지에서 만들었다. 반세기 가까이 미국에 살면서 사업을 일구고 미국의 중앙정치 무대를 경험한 유일한 한인으로서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자는 마음이 컸다.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서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간과했던 주위 사람들이 소중해졌다. 감사함이 밀려왔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제니퍼 안(한국명 안진영), 바로 내 아내다. 실용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라 내가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용기를 북돋아줬다. 항상 명랑하게 웃고 여유가 있다. 토닥여주는 와이프와 살다 보니 툭하면 화를 내던 내 성격도 많이 수그러들었다.   아내는 10남매 중 넷째로 맏언니인 고 안진현 씨와 아주 가까웠다. 처형인 안진현 씨는 국민가수 조용필 씨의 부인이었다. 조용필 씨는 손윗동서이지만 내 나이가 더 많다며 항상 깍듯이 대접해줬다. 심장이 약했던 처형은 안타깝게도 2002년에 54세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아직도 조용필 씨가 처형 산소에 가서 벌초도 직접 하며 아내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볼 때 ‘국민가수 이전에 자상한 남편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으로 나를 가장 많이 도운 이는 뉴트 깅그리치 전 연방하원 의장이다.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항상 지켜준 사람이다. 그가 당시 남긴 유명한 말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맴돈다.     “정치는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 마음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나를 따르는 지지자들을 더욱 견고히 단결시키고 한 명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연방하원 좌절 정치인 경험 귀국 연방하원 공화당 지원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1-12-22

[김창준] 한국으로 기밀 유출 로버트 김 구명 좌절 무력감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6〉 로버트 김 사건의 전말 공식 요청 가능한 정보 빼냈다 8년 중형 불법 요구한 한국 무관 '나 몰라라' 귀국   어느 날 의회 사무실에 한국 국회의원이 찾아왔다. 명함에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표정이 심각했다. 앉자마자 뜨거운 커피를 대접했다. 무슨 사정으로 왔는지 물었다. 자신의 형님 일 때문이라고 했다. 형님 이름은 로버트 김이라고 했다. 현재 미 해군 비밀서류 유출 혐의로 기소돼 감옥에 있는 형님을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겠냐고 했다.     그는 “누구한테 물어보니 미국 연방의원만이 살릴 수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아마도 개별 법안(Private Bill)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나는 로버트 김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일단 전후 상황을 파악한 뒤 연락을 주기로 하고 헤어졌다. 도대체 로버트 김이 뭘 잘못했으며, 미 해군 비밀서류가 어떤 것들이고, 또 이것을 누구에게 넘겼기에 이런 처벌을 받게 됐는지 보좌관들에게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알아본 결과 연방수사국(FBI)이 로버트 김의 불법행위를 포착했다. 6개월 이상 로버트 김이 비밀서류를 꺼내 불법으로 사본을 만든 뒤 누군가에게 지속해서 전해줬다는 혐의였다. 로버트 김이 국가 비밀서류 사본을 만들어 외부로 유출하는 게 불법이란 것을 잘 알면서도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었고, 이는 명백한 범죄라는 설명이었다.   공교롭게도 로버트 김이 넘긴 자료들은 특급비밀이 아니었다. 동맹국인 한국 정부가 정식으로 미국 정부에 요청했더라면 사본을 만들어 그냥 줬을 일이었다.     로버트 김이 안타까운 상황에 부닥쳤다고 생각했다. 비밀서류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로버트 김은 엄연한 위법행위를 했다. 그 상황에서 그를 돕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로버트 김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를 해봤다. 착실한 크리스천으로, 교회 장로이며 범죄 기록도 없었다. 그의 부인도 기독교인으로 교회에서, 또 한인사회에서 많은 존경을 받는 분이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도대체 왜 이렇게 좋은 분이 이런 엄청난 실수를 했을까.    서류들을 복사해 누구에게 주었는지 알고 나서 또 한 번 놀랐다. 서류들은 매번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관에 무관으로 나와 있는 해군 대령 손에 넘어갔다고 했다. 이런 2급 비밀서류라면 동맹국인 미국 정부에 정식으로 요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왜 알만한 자리에 있는 무관이 왜 로버트 김을 꾀어내 어마어마한 죄를 범하게 했을까. 그 대령이 괘씸했다.   좀 더 경과를 알아보니 그 해군 대령은 로버트 김과 평소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어떻게 된 사실인지 대사관에 알아보려 했지만, 그 해군 대령은 이미 한국으로 소환돼 행방을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국에 무관으로 파견돼 겨우 한다는 게 순진한 한인을 시켜 몰래 국가 비밀서류를 빼내는 따위 일을 하다니. 게다가 억울하게 그를 감옥에 보내고 자신은 훌쩍 본국으로 도주했다고 하니 더욱 화가 났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련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정식으로 사안을 조사해 진상을 밝혀내야 하는 일이었다.   로버트 김을 도울 방법이 있는지 고민했다. 이번에도 뉴트 깅그리치 연방하원 의장을 찾아갔다. 깅그리치 의장은 사안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손을 떼는 게 현명하다고 했다. 사건이 이미 사법부로 넘어가 손 쓰기에는 늦었다는 것이었다. 검찰이 기소해 사법부로 넘어간 경우 절대로 입법부 소속 의원이 사법부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항의할까 고민도 했다.     깅그리치 의장 사무실에서 나왔다. 마음이 언짢았다. 이튿날 로버트 김의 동생인 한국 국회의원에게 도와줄 길이 없다고 했다. 이 스토리에 해피엔딩은 없는 듯했다. 다시는 순진한 한인을 감언이설로 꾀어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일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결심이 섰다. 한국 정부가 해외 공관에 특명을 내리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마음먹으며 무거운 심경을 달랬다.   얼마 뒤 1년 정도 실형이 나올 것이라는 예측을 뒤엎고 로버트 김에게 8년 형이 선고됐다. 충격이었다. 특급비밀도 아닌데, 적국도 아닌 우방국에 사본을 넘겨 준 것에 이처럼 가혹한 판결이 내려질 줄 몰랐다. 그분 나이가 60세가 훨씬 넘었는데 8년 복역하고 나면 70세를 넘는다. 그동안 연방 정부에서 일한 데 따른 혜택도 없어지고 복역이 끝난 뒤 그분은 전과자가 된다.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피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미국 법이 무섭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이 넓은 대륙에서 여러 인종이 섞여 사는 미국사회를 질서 있게 이끌어 나가려면 당연히 법치가 우선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마음이 무거웠다.       ━   북한군 동향 등 담긴 복사본 한국대사관 무관에 전달     로버트 김 사건은   1996년 9월 24일. 미 해군정보국(ONI)의 컴퓨터 분석관이던 그는 주미 한국대사관이 워싱턴 알링턴 포트마이어 육군 장교클럽에서 개최한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됐다.   그의 혐의는 국가기밀 취득 음모죄. 당시 주미 대사관 해군 무관인 백 전 대령에게 미국의 국방 비밀을 넘겨줬다는 것이다. 로버트 김은 백 전 대령에게 북한군의 동향과 훈련 실태, 96년 ‘동해안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 당시 북한 잠수정의 침투 경로 등의 정보를 백 전 대령을 통해 한국 측에 알려줬다.   그는 97년 ‘미국 시민이 미국법의 심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간여할 수 없다’는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결국 징역 9년, 보호관찰 3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펜실베이니아의 앨런 우드 연방교도소 등에서 만 7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당시 한국 정부는 외교 관계를 의식,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그의 소식이 전해진 이후 97년 국회의원과 종교계 인사 등이 참여한 ‘로버트 김 구명위원회’가 조직됐고, 2003년엔 ‘로버트 김 후원회’가 발족해 각 기관 등에 탄원서를 보내는 등 백방으로 그를 도왔다. 특히 후원회는 2003년 당시 미국을 방문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로버트 김 사면을 건의하고 시민 모금을 통해 그에게 새집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로버트 무력감 이튿날 로버트 이상 로버트 비밀서류 유출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1-12-15

[김창준] 도덕성만 공격하다 클린턴에 다시 완패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5〉밥 돌 돌풍에도 백악관 탈환 실패 뚜렷한 메시지 못 내고 공격 집중도 떨어져 클린턴, 간결하고 힘 있는 ‘경제 이슈’ 성공   1996년 8월.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정치인으로서 내게 뼈아픈 기억이다. 미리 축포를 터트리면 안 된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모양이다.     그해 전당대회는 공화당 역사상 처음으로 샌디에이고에서 열렸다.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여자 문제로 이미지가 많이 구겨졌던 상황이었다. 1992년에 당연히 재선될 줄 알았던 조지 H. W. 부시가 클린턴에게 일격을 당해 충격에 휩싸였던 공화당이었다. 백악관 재점령을 위해 절치부심이었다.     당내 경선에서 상원 원내대표인 밥 돌 의원이 연전연승을 거두며 공화당 대선주자가 됐다. 공화당원들은 결집했다. 클린턴에 대한 복수 일념에 불탔다. 밥 돌은 누가 봐도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클린턴처럼 도덕적으로 흠이 많은 인물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출신이라는 메리트까지 있었다. 그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돌 역시 노동장관과 교통장관을 지낸 유명 정치인이었다. 정치 경험이 전무했던 힐러리 여사보다 여러모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들 부부 금실도 좋기로 소문났다.     당내에서는 밥 돌이 클린턴의 재선 가도를 막을 수 있는 최고의 적격자라고 판단했다. 부통령으로 지명된 잭 캠프도 정치권에 널리 알려진 거물이었다. 캠프는 프로풋볼(NFL) 쿼터백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이 있었다. 당시 클린턴은 복잡한 여자관계를 비롯해 게이와 레즈비언의 입대 허용 뜻을 밝혀 큰 논란이 됐다. 그의 지지율도 흔들렸다. 민주당이 중간선거에서 역사적인 대패를 당하자 대다수 논객은 클린턴이 단임 대통령으로 끝날 것으로 내다봤다.     폴라 존스가 클린턴에게 성희롱당했다는 주장이 1994년에 수면 위로 오르면서 클린턴 사생활이 본격적으로 타깃이 됐다. 공화당은 ‘도덕적인 후보’와 ‘그렇지 못한 대통령’ 대결 구도를 잡았다.     전당대회장 분위기도 4년 전 텍사스 때보다 뜨거웠다. 훨씬 많은 사람이 모였고 샌디에이고 도시 전체도 축제 분위기였다.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아니라 마치 밥 돌 대통령 당선 축하파티를 보는 듯했다. 그만큼 당원들은 자신 있었다.     현직 의원은 언제고 전당대회장 안에 들어갈 수 있다. 나는 들어가서 캘리포니아주 대의원들과 악수를 하고 식사도 같이했다. 모두가 이념이 같은 공화당이라 무척 친절했다. 당시 한미의원친선협회의 한국 국회의원 대표인 오세웅 의원도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주최 측에 부탁했다.     오 의원은 이런 축제 분위기를 신기해하며 놀라는 표정이었다. 한국에서는 공화당 전당대회에 초대받았다는 자체가 의미가 크다고 했다. 귀국한 다음 한국 신문에도 대서특필되고 국회 안에서 입지도 강해진다고 했다. 앞으로 사흘 동안 무얼 할 것이냐 물었더니 이곳 한인 동창, 친지들과 매일 골프 약속이 있다고 했다.     저녁마다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스케줄도 꽉 차 있다고 했다. 대통령 취임식이라면 몰라도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공화당 또는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해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빙빙 돌다 한인들과 함께 골프 라운딩이나 하고 간다니. 마음이 좀 그랬다. 쓸데없이 그 많은 공금을 써 가면서 올 필요가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전당대회는 화끈하고 좋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우리가 자만했다. 전당대회 때 이미 대통령이 된 것처럼 너무 흥분했다. 무엇보다 공화당은 국민을 향한 뚜렷한 메시지가 없었다. 반면 클린턴은 4년 전과 같은 메시지로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여러분, 4년 전 부시 행정부 때보다 여러분의 경제 사정이 나아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4년간 저와 한 번 더 가겠습니까? 아니면 공화당의 돌 후보를 붙잡고 4년 전 어려웠던 부시 시절로 돌아가겠습니까?” 클린턴의 메시지는 간결하면서 힘이 있었다.     공화당은 오로지 도덕만 내세웠다. 그렇다고 밥 돌 의원이 토론 때 클린턴의 사생활을 공략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클린턴 사생활 문제라면서 언급을 피했다. 특히 클린턴 정부 시절 경제가 호황이었다. 경제만 튼튼하다면 그깟 여자 문제야 대수가 아니지. 대선 때 마치 국민이 우리에게 그렇게 외친 듯했다. 96년 대선에서 클린턴은 선거인단 379명을 확보하며 159명에 그친 돌에 압승을 거뒀다.     샌디에이고 얘기를 하다 보니 그 지역 출신으로 한때 인기가 대단했던 듀크 커닝햄이 떠오른다. 그는 나와 같은 시기에 연방 하원에 진출했다. 커닝햄은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베트콩의 미그기를 격추한 전쟁 영웅이다. 나와는 각별한 친구 사이였다. 성격도 원만해서 주위에 친구가 많았다. 커닝햄은 자신의 지역구인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많은 역할을 떠맡았다. 그중 하나는 캘리포니아 출신 공화당 의원들을 특별 만찬에 초대하는 일이었다. 그는 워싱턴에 있을 때 포토맥 강에 매달아 놓은 집같이 생긴 보트(House Boat)에서 거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베트남전 영웅이 2006년 3월 3일, 8년 4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죄목은 최소 240만 달러의 뇌물수수와 탈세 등이었다. 커닝햄은 64세 나이에 8년 형을 선고받아 72살이 되어서야 출옥했다.     샌디에이고는 분명 멋진 도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내게 좋은 추억을 준 곳은 아니다.     전당대회 때 우리(공화당원들)는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그 결과 민주당 정권을 4년 더 내줬다.       ━   나를 가장 많이 챙겨준 그분이 그립다     밥 돌 의원을 보내며   의원 시절, 연방상원에서 나를 가장 많이 챙겨주셨던 분이 밥 돌 의원님이었습니다.   상원의원 중 제가 가장 많이 만난 분입니다. 저를 특별하게 여겨서 항상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저를 두고 “공화당에서 유일한 한인이자 아시안 의원”이라고 여기저기 동료 의원들에게 소개해줬던 게 엊그제 같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셨던 그분은 이탈리아 전장에서 오른팔을 다치셔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실물로 보면 정말 잘 생겼습니다.     유머 감각이 뛰어났고 농담하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던 분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 정치인 중 한 분이고, 1996년에는 정말 밥 돌 의원이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을 거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남기고’ 시리즈를 하면서 여러 한국 대통령들께서 돌아가시더니 이번에는 미국 대통령 후보가 눈을 감았다는 소식에 착잡합니다. 세월 무상입니다.     돌 의원님, 1990년대 당시 연방의회에서 부족했던 저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돌 의원님의 안식을 기원하며, 유가족에게도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클린턴 도덕성 공화당 전당대회 전당대회장 분위기 공화당 대선주자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1-12-08

[김창준] 볼커의 금리 인상에 무너진 일본의 폭풍성장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4〉기세 등등하던 일본과 미국의 위기의식 미국을 모두 사들일 듯 록펠로 등 전방위 매입 여섯 번 금리 올리자 부동산 가격 20% 폭락     눈을 감았다. 비만이 많은 미국. 그런 반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베트남 사람들. 6.25 직후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던, 비참했던 우리 모습이 오버랩됐다. 내 인생을 돌아봤다. 미국 땅으로 건너와 비즈니스도 성공하고 미국을 대표하는 연방하원 의원으로 선출됐다. 감사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옆에서 대사관 직원이 나더러 괜찮냐고 물었다. “나도 어렸을 때 이렇게 가난한 나라에서 자라 마음이 울적하다”고 했다. 두 시간 남짓 울퉁불퉁 농촌 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발굴 현장에는 50명 남짓한 베트남 아녀자들이 조심스레 땅을 파헤치면서 열심히 뭔가를 찾고 있었다. 브리핑을 통해 들어 보니 언덕 너머 미군 전투기가 추락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동네 사람들 말에 따라 근방을 샅샅이 뒤지면서 전사자들 유품이나 목에 걸었던 인식표 등 뭐라도 찾기 위해 벌써 거의 한 달을 이곳에 있었다고 했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나온 게 없고 쇳조각 몇 개만 발견했는데, 그나마 비행기 잔해가 아니라는 실험 결과가 나와 일주일쯤 더 찾아본 뒤 다른 장소로 옮길 예정이라고 했다.   발굴 현장에서 일하는 아녀자들은 굉장히 밝은 표정으로 서로 웃어가며 수다를 떨었다. 이곳에서 하루에 버는 돈이 남편들 한 달 벌이보다 좋았다. 미 해병대원들과 함께 따뜻하게 데운 ‘깡통’ 음식을 점심으로 먹으며 들은 얘기에 따르면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을 봤다는 장소 열 군데 중 유골과 유품이 발견되는 경우는 한 곳 정도에 불과하다. 당시 미국은 발굴된 유해가 미군의 것임이 확인되면 베트남 정부에 유해 한 구당 100만 달러를 지급했다. 미국은 수천 구의 유해 발굴을 기대했지만, 실제 발굴된 유해는 극소수다.   그렇다면 미 정부는 왜 이처럼 엄청난 돈을 써가면서 베트남 산골짜기 곳곳을 뒤져 미군 유해를 찾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희생된 군인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지, 미국 국민에게 보여주려는 의도다.     그동안 일시 중단됐지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덕에 미국은 북한 지역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전사하거나 실종된 미군 유해 55구를 송환했다. 내가 트럼프 전 정부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다.     비용이 얼마가 들건 미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미국민 유해를 기어이 찾아내겠다는 미국 정부의 이런 노력은 군인들과 그 가족들의 사기를 높일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미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충성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런 정책들이 미국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베트남 이후 미국을 위협한 나라는 또 있었다. 바로 일본이다.     1980년대 당시 일본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며 세계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 수출 대국이었다. 일본의 경영기술을 배우기 위한 IST란 프로그램이 미국 내에서도 유행했다. 기업체들은 물론 관공서까지 프로그램에 참여해 세미나를 했다.   90년대 들어서도 일본의 폭풍 성장은 멈춤이 없었다. 세계 시장을 다 흡수할 기세였다. 아프리카에 여행을 가 아프리카 토착민 예술품을 잔뜩 사 들고 미국으로 돌아와 보니 모든 게 거의 다 ‘made-in-Japan(메이드 인 재팬)’이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미국 신문 톱 뉴스로 나올 정도였다.     무엇보다 일본 상품이라면 모두 품질을 신뢰했다.     미국은 아예 일본을 두고 ‘Japan Inc.(일본기업)’라고 불렀다. 미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기업문화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있다. 마쓰다 자동차를 싣고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던 수송선에 이상이 생겨 바닷물이 배에 스며들었다. 이 사고로 물에 잠긴 수백 대의 자동차에 녹이 슬어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자 책임을 통감한 배의 선장이 할복자살했다.     미국 기업들에 이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책임감이 강하다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말이 되나?’ 미국인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도대체 기업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경영하는 것일까’ ‘직원들이 회사에 누를 끼쳤다며 자살하는 문화는 무엇인가.’ 돈 몇백 달러 더 준다고 회사를 쉽게 옮겨 다니는 미국의 직장인 문화와는 너무나 다른 세계였다. 회사에 죽음으로 충성할 미국인이 있을까?     분명한 것은 일본 기업문화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일본식 경영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3대가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아이들 교육비까지 회사가 책임진다. 당시 일본 기업문화였다. 미국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내가 초선 의원이었을 때 지역구 주민이 많이 제기한 불평 가운데 하나가 하와이에 관한 것이었다. 하와이 여행을 할 때마다 마치 일본 영토에 갔다 온 듯하다는 것이었다. 현지 호텔을 일본인이 대거 사들이면서 생긴 일이었다. ‘미국이 2차 대전에서 일본에 승리한 게 맞나’ 자문할 정도였다. 일본 땅을 팔면 미국 땅을 통째로 다 사고도 남는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와이뿐만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페블비치 골프링크도 시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샀다. 지금도 여전히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 LA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건물인 빌트모어 호텔, 할리우드 배우들이 많이 가는 리비에라 컨트리클럽, 뉴욕의 상징인 록펠로 센터 등 미국의 자존심이 서린 건물들이 다 일본인 소유로 넘어갔다.     할리우드 상징 중 하나인 콜롬비아 영화사가 소니에 넘어가면서 미국인들의 일본을 향한 위기의식과 반감은 극에 달했다. 미국이 전방위로 일본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이었다.   의회에선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RB)의 폴 볼커 의장을 불러 청문회까지 열었다. “일본이 부동산을 마구 사들이며 미국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것을 대책 없이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자유시장 원리상 법으로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금융경제 정책을 통해 국제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견제할 방법은 없는가?”     날카로운 질문들이 쏟아졌다. 볼커 의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를 믿고 지켜봐 달라.”     미국이 대반격에 돌입했다. FRB는 연방 이자율을 0.25% 인상한 데 이어 여섯 번에 걸쳐 이자율을 계속 올렸다. 그 바람에 부동산 시장이 침체했다. 일본인 부동산 투자가들이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 70%를 미국 은행에서 융자받고, 나머지 30%의 직접 투자는 일본 은행의 부동산 담보 투자여서 별안간 20%까지 부동산이 급락했다. 일본에 계속 잽을 맞았던 미국. 그런데 KO 펀치 한 방으로 일본을 휘청이게 한 것이다.     한 부동산을 담보로 다른 부동산 2~3개를 문어발식으로 매입한 일본인들은 돈을 갚으라는 미국 은행 요구에 진땀을 흘렸다. 결국 일본인들은 미국 내 부동산을 구매 가격의 3분의 2 정도인 헐값에 팔아야 했다. 이때 충격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일본은 이후 약 25년의 경기 침체에 빠졌다. 이를 놓고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혹은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부른다.     당시 볼커 의장이 “지켜봐 달라”며 자신 있어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일본은 소형차와 라디오, 텔레비전, 카메라 등을 수출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 미국을 너무 얕본 것이 그들의 커다란 실책이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일본 폭풍성장 유해 발굴 미군 유해 부동산 가격

2021-12-01

[김창준] 의원 모두 가기 싫어한 베트남, 달랑 혼자 가다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3〉깅그리치 부탁 미군 유해 발굴 현장에 초라한 하노이 보며 6·25 때 서울 떠올라 대우건설의 초현대식 호텔서 묵으며 뿌듯  어느 날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보고 베트남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 발굴 작업에 연방의회를 대표해 참석해 달라고 했다.     좀 화가 났다. 보낼 의원이 없어서 나보고 가라는 것 같았다. 내가 아시안이라 적격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직감은 맞았다. 아시아태평양 소위 위원 중 베트남에 가겠다는 의원이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으면 당연히 내가 가는 것인가?’ 깅그리치 의장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연방하원 의장 부탁이라 고사할 수 없었다. 보통 베트남처럼 먼 곳은 의원들이 단체로 간다. 그런데 다른 의원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면서 나만 가는 꼴이 됐다. 보좌관 한 사람만 데리고 그렇게 떠났다.   혼자 간다고 생각하니까 다른 의원들 행동이 더 얄밉게 느껴졌다. 유럽이나 캐나다, 남미라면 서로 가겠다고 난리 치는 의원들이다. 그런데 베트남은 인기가 없었다. 나라고 내킬 리 없었다. 좋게 마음먹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베트남으로 향했다.       비행기를 두어 번 갈아탄 끝에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활주로를 바라보니 여기저기 군인들이 총을 어깨에 메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6·25 전쟁 때 북한에 의해 함락된 서울에서 봤던 인민군을 다시 보는 기분이 들어 언짢았다.     마른 체격의 베트남 군인들은 키도, 군복도 어쩌면 그리도 그때 본 인민군들을 닮았던지….   초라한 비행장에 착륙해 트랩을 내려서자 성조기를 단 미국산 검은색 세단이 다가와 나를 태웠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해병대원들의 깍듯한 경례와 경호를 받으면서 ‘오길 잘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순간 상황 따라 금방 기분이 바뀌는 나 자신을 보며 실망했다. ‘나도 별수 없구나.’       차 안에서 바깥을 내다봤다. 초라하고 가난한 시가지 모습이었다. 하노이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중심가인데 시커먼 5층짜리 빌딩 두어 개가 전부였다. 건물 오른쪽에 대리석으로 만든 초현대식 고층건물이 보였다. 주위가 초라한 탓에 유난히 돋보인 그 빌딩이 내가 머물 호텔이었다.     미국 대사관은 그 호텔만을 사용한다고 했다. 한국의 대우건설이 그 호텔을 건축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우건설이 옆의 고층 사무실 빌딩도 모두 소유하고 운영한다는 말을 들었다. 한인으로서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날이 마침 미 대사관저가 새 건물로 옮긴 첫날이었다. 내게 입주 환영 테이프를 끊어달라고 했다. 테이프를 끊고 사진을 찍은 뒤 안에 들어가 보니 좁은 4층 빌딩에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설마 4층까지 걸어가라고?     걸어 올라가야 했다. 층계를 통해 올라가느라 숨이 가빴다. 점심 먹고 옛 미 대사관으로 향했다. 이곳저곳 허물어진 곳을 감쪽같이 수리해서 박물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미 공관에서 일했던 베트남 직원들이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미군 헬리콥터에 매달려 가다가 떨어졌다. 얼마 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면서 카불 공항에서 C-17 수송기 매달렸다가 떨어져 죽은 아프간인들처럼. 일반인들이 필사적으로 대사관 담장을 넘는 처절한 광경이 연출된 장소가 이곳이다. 당시 현장은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그날 저녁 대사관 주최로 어느 베트남인이 운영하는 최고급 프랑스 식당에서 만찬을 했다. 베트남은 1858년부터 1954년까지 거의 100년 동안 프랑스 식민지였다. 그래서 프랑스 식당이 많았다. 지금은 1억 가까이 되는 인구를 가진 베트남 역사는 한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이튿날 아침 커피를 마시러 아래층에 내려왔을 때 김우중 회장의 부인을 소개받았다. 그 당시 김우중 회장 부부가 호텔을 운영했다. 부인은 키가 훤칠하게 큰 미인이었다.     호텔 뒤뜰에는 호사스러운 시설을 갖춘 수영장이 있었다. 베트남인들은 너무 비싸 못 들어왔다. 호텔 고객들은 한국과 미국에서 여행 온 투숙객이 대다수였다. 그러다 보니 손님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날 아침 검은색 대형 포드 SUV를 타고 대사관 직원과 경호원을 대동하고 산길을 따라 미군 유해발굴 장소로 향했다. 가는 도중 신호등에 걸려 차가 정지하면 아이들과 아낙네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이들은 안을 들여다보며 껌을 팔려 했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도 좀 달라고 했다. 성조기를 달고 있는 미 관용 차량에 달려들어 구걸하는 것을 보면서 6.25 직후 한국의 가난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돈을 주려고 지갑을 꺼냈다. 그랬더니 직원 한 명이 ‘사람들이 더 몰려들면 운전하기 어려워지니 아이 한 명에게만 얼른 1달러만 주고 가자’고 했다. 1달러를 줬다. 아니나 다를까. 움직이는 차에서 뒤를 바라보니 수십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   연희동 세 번 초대…만날 때마다 통일 강조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인연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세 번 만났습니다.     첫 만남은 김일성이 사망(1994년 7월 8일)한 직후였습니다. 또 김정일 사망(2011년 12월 17일) 직후에도 전 대통령 연희동 집에 초대받았습니다. 제가 본 전 대통령은 말을 대단히 잘하는 분이었습니다. 군 출신답게 씩씩하게 말하고, 대화 주도권을 가져가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저도 말하는 걸 좋아하지만 전 대통령과 세 번 만남 모두 거의 그분 말을 듣는 데 치중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분 말이 기억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시기가 그래서인지, 대화 주제가 세 번 모두 같았습니다. ‘통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미관계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김 의원, 통일이 빨리 돼야 합니다. 미국과 협력해서 통일을 이뤄야 합니다.” 그분 말이 절실하게 들릴 정도였습니다.       전 대통령에 대한 논란이 많다는 것은 다 알 겁니다.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끌고, 88 올림픽 유치 등은 그분의 치적입니다. 하지만 민주화가 되면서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박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 학살에 책임이 있습니다. 또 그분이 법정에서 “전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고 한 것을 보며 실망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중앙일보 ‘남기고 시리즈’를 하면서 전 대통령 두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평가는 엇갈리지만 두 분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한 시대가 끝났습니다. 전 대통령의 안식을 기원합니다. 유가족에게도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베트남 베트남 직원들 베트남 군인들 초현대식 호텔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1-11-24

[김창준] 친중국 성향 알려지자 대만서 ‘공공의 적’ 돼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1〉대만 핵 쓰레기 북한 유입 막다   판문점 인근 매립설 오염 문제 파고들어   특별 결의안 통과시켜 거래 중단 끌어내 나를 도와준 대만계 중국인 다섯 명이 대만을 방문하자고 했다. 이들은 이등휘 대만 총통의 정중한 초청장까지 들고 왔다.     그때처럼 융숭한 대접을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비행장에 마중 나온 수십 명 환영객과 기자들에 둘러싸였다. 인기 스타라도 된 기분이었다.     대만은 미국에서 로비 활동을 가장 열심히 하는 나라 중 하나다. 이스라엘 다음일 것이다.     저녁 초대를 받아 식당에 갈 때도 경찰이 오픈카를 타고 앞장서 교통정리를 해 가며 안내해 준다. 외국 국빈들을 극진히 대접하기로 유명하다. 대만에 한 번 다녀온 이들은 대만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대만은 사실 국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도 미국과 함께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고 선언했다. 대만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만은 친미 성향이 강하다. 지금도 잘 살지만, 당시에는 중국 본토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부유했다.     대만의 현안은 친 중국파와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대만 독립파의 대립이었다. 이 두 파가 갈라져 서로 대결하는 모습은 치열하다. 내 지역구 안에서도 같은 대만인끼리 두 파가 갈라져 치고받는 일까지 벌어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한 명이 맞아 죽기도 했다. 나도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언젠가는 대만이 중국에 흡수당할 것으로 봤다. 자고로 대국 편을 드는 것이 정치적으로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나의 친중국 성향이 알려지면서 대만은 불편한 심기를 나타냈다. 대만 독립신문으로부터 연일 집중포화를 받았다. 반면 중국 본토에서는 반겼다. 당시 중국 편을 들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이 오늘날 같은 경제 대국이 될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때다.     오히려 중국이 머지않아 5개 독립국(대만, 홍콩, 티베트, 관동, 중국)으로 분열될 것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이듬해 뉴트 깅그리치 연방하원 의장과 함께 두 번째로 대만에 방문했을 때 일이다. 대만의 이등휘 총통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제일 먼저 대만을 중국 영토로 인정하고 대만과 국교를 단절했던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노골적으로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나는 미국 연방하원 의원 자격으로 방문한 것이라고 못 박았다.     물론 대만이 대단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조그만 섬나라지만 당시 무역으로 세계를 휘어잡으며 ‘메이드 인 타이완(Made in Taiwan)’이 판을 쳤다.     김영삼 대통령 때 일이다. 대만 정부가 북한에 핵 쓰레기를 팔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하려는데 이를 자세히 알아보고 미국서 도와줄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요청이 왔다.     대만은 전력 공급의 100% 가까이를 핵 발전소에 의존한다. 첨단기술 산업의 급속한 성장으로 전력수요가 많이 늘어나면서 기존 핵 발전소로는 이를 충당할 길이 없었다. 대형 핵 발전소 하나를 더 만들려 했다. 문제는 여기서 나오는 핵 쓰레기 처리였다. 조그만 섬나라에서 핵 쓰레기를 해결할 수 없었다.     대만은 궁여지책 끝에 이 핵 쓰레기를 수천만 달러를 주고 북한에 팔아넘기기로 한 것이다. 외화난에 시달리는 북한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돈이 급해도 남의 나라 핵 쓰레기를 받으려는 북한도 그렇지만 돈 좀 있다고 핵 쓰레기를 남의 나라에 막 팔아넘기려는 대만도 문제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핵 쓰레기가 북한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내 머릿속은 계속 해답 찾기에 바빴다. 초선의원인 내 힘으로 해결하기 버거운 문제로 여겨졌다.       내 정치활동에서도 굉장히 예민한 문제였다. 내가 한인이라 자칫 지역구 주민은 안 챙기고 조국인 한국 일을 우선시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LA타임스 등 진보진영 기자들이 소수계 공화당원인 나를 껄끄럽게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쫓아내려 하는 판국이었다. 더 약점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그들에게 자칫 떡밥 하나만 더 주는 셈이었다. 내가 주류언론 타깃이 된 것은 이미 당내에서 공공연한 얘기였다.     고심 끝에 내가 아는 의원 중 가장 막강한 권력이 있는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깅그리치 의장은 북한과 대만 두 나라 협상에 있어 제삼자인 미국이 간섭하는 것은 모양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반대 명분이 없다는 지적이었다.     낙심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다른 의원들을 설득하려면 명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한국에 전화해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아무래도 내 힘으론 힘들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명분 찾기에 골몰하다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뉴스를 보니 유조선 씨프린스호가 전남 여수 앞바다 암초에 충돌해 기름이 새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톱뉴스로 나왔다. 환경보호단체들이 펄펄 뛰었다.     ‘바로 이거다!’ 속으로 외쳤다.       수천 드럼 핵 쓰레기를 선박으로 운송하는 도중 사고가 날 경우 바다가 온통 방사능으로 오염될 수 있다고 하면 깅그리치 의장도 고개를 끄덕일 거라 생각했다. 북한이 핵 쓰레기를 판문점 근처에 깊이 묻기로 결정했다고 하니, 만일 여러 가지 예측 못 한 이유로 파손돼 지하수를 통해 불과 1마일도 되지 않는 한국 내 지하수가 오염되면 이를 식수로 사용하는 미군들 건강에도 심각한 위협이 초래될 것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또 핵 쓰레기를 국가 간 사고파는 전례가 있어선 안 된다고 했다. 그 내용 그대로 결의안을 작성했다. 여러 번 읽어도 빈틈없는 결의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깅그리치 의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결국 내가 발의한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동일 결의안(Concurrent Resolution)으로 불리는 이 특별 결의안은 단지 연방의회 의견(Sense of Congress)을 표현할 뿐, 강제성이나 구속력은 없다. 메시지 성 결의안이었다.       효력이 바로 나타났다. 통과 다음 날 결의안이 대만 정부에 전달됐고 결국 북한 측과 거래가 중단됐다. 이때 내가 느꼈던 성취감은 어마어마했다.     결의안을 상정했을 때 GE 회장이 부회장 등 5명을 대동하고 직접 내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수억 달러에 달하는 대만의 핵 발전소 건설을 자기네가 맡았는데 왜 미국 연방하원 의원이 미국경제에 큰 도움이 되는 공사를 막았냐며 노발대발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한국 정부에서 혹시 부탁한 것 아니냐고 따질까, 솔직히 속으로 조마조마했다.     나는 결의안이 핵 발전소 건설에 대한 게 아니라 핵 쓰레기만을 다룬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그들은 결의안 폐기를 거듭 요구했다. 그런데 아닌 것은 아니다. 한국과 미군 생명은 물론, 바다의 방사능 오염은 모두가 걱정해야 할 문제다. 한 기업의 이윤이 이를 넘어설 수는 없다. 정중히 거절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북한 중국 대만 독립신문 대만 정부 깅그리치 연방하원

2021-11-10

[김창준] 김대중 대통령의 의회 연설, 감동의 기립박수

 1998년 6월 10일. 김대중 대통령이 연방의회에서 상하원 합동 연설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합동 연설 때는 내가 직접 관여했다. 그래서 연설문 내용을 상세히 알았고, 비교적 잘 해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는 분위기가 달랐다. 우선 합동 연설 참석 의원 수가 적었다. 하원의원 435명 중 공화당 의원 20명과 민주당 의원 30명 등 50여명 정도만 참석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도 한국 대통령 연설인데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직접 나섰다. 더 꽉 찬 느낌을 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각 사무실 인턴들과 보좌관들에게 연락했다. 상원에서는 100명 의원 중 15명 정도만 참석했다. 이래저래 수소문해 350명 이상 의회에 나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일단 TV화면으로 의사당이 꽉 차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2층에는 가족과 수행원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대충 사람이 많아 보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으며 입장했다. 간단한 인사 뒤 연단에 오른 김 전 대통령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당연히 한국어로 할 줄 알았는데 영어로 연설했다.     외국 대통령이 연방의회 합동 연설에서 영어로 연설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스라엘 수상 베냐민 네타냐후는 14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에 와 펜실베이니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해 영어가 모국어처럼 유창하지만 의회 연설 만큼은 이스라엘어로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과감하게 영어를 택했다. 연방 의원과 인턴, 보좌관 등 참석자들은 이미 영어로 쓴 연설문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따라 읽어 내려가면서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연설문 내용은 근사했다. 그런데 영어로 연설한 데 대한 부정적 반응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김 대통령 발음이 썩 좋지 않아 연설문 없이 2층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연설 내용을 거의 못 알아들었다는 불평이 나왔다. 김 대통령의 영어 실력은 출중하지만, 발음에 악센트가 강했다.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란 내 처제도 2층에서 경청했지만, 못 알아들었다고 불평했다. 왜 우리 말로 하지 않고 서툰 영어로 했는지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하는 걸 보면 그의 연설 내용은 분명 좋았다.     과거 한국 군사정권이 자기를 바다에 던져 죽이려는 순간 미군 헬리콥터가 와서 살려줬다면서 “미국은 내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한 대목이 하이라이트였다. 본인도 감격에 벅차 잠시 말을 멈추었고, 참석자들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모두 벌떡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나도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박수에 동참했다. 2층 방청석에서도 그 말은 알아들었는지, 열렬한 박수가 쏟아졌다.     김 대통령은 탄탄한 한미 우호 관계를 약속하면서 합동 연설을 마쳤다.     김영삼 전 대통령 연설이 오버랩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 연설도 내용이 좋아 박수는 많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 때의 감동적인 기립박수는 나오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 연설은 의회에서 한동안 화제가 됐다. 워싱턴 정가는 앞으로의 한미관계를 낙관하면서 한국은 역시 미국과 피를 나눈, 아시아의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맹국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불행히도 대통령에 취임한 뒤 불과 1년이 채 안 돼 한미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으로 불린 대북정책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가 북한에 보내는 식량이 굶주린 주민들에게 가지 않고 군용으로 전용된다는 증거를 확보한 미국 측은 불평을 제기했다. 그러면서도 자칫 잘못 대응했다가는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이 나올까 매우 신중한 태도였다. 증거가 있는 만큼 이런 미국 정부 입장을 김 대통령 측에 조심스럽게 전달했다.     당시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여부도 큰 주목을 받았다. 미국 정부는 김 대통령의 수상을 방해한다는 인상을 극히 꺼렸다. 미국은 햇볕정책에 대한 의사 표명을 중단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햇볕정책에 힘입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었다. 햇볕정책에 대한 찬반을 떠나 평생 민주화를 위해 몸을 바친 그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미주 한인들도 너무도 기뻐했고 자랑스러워 했다. 미국 정부도 축하문을 보냈다.   햇볕정책 성공 여부는 역사가 판명할 일이다. 미국은 햇볕정책에 공식적으로 반대한 적은 없다. 연방의회 안에서 햇볕정책을 공격하는 의원들을 본 기억이 없다. 다만 북한에 지원한 식량이 의도와 달리 북한 군부에 넘어가는 데 우려를 표명했고, 미국과 긴밀한 협의 없이 김 대통령이 거의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한 데에 실망한 것 또한 사실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반미 친북 인사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 들려 우려가 됐다. 미국에선 특히 ‘우리는 하나’라면서 금세라도 통일이 될 듯 국민을 들뜨게 하는 반미 친북 인사들과 말끝마다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이들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한미 동맹관계가 심각하게 금이 가기 시작한 건 김대중 정부가 아니라 노무현 정부 때였다.   의회 내 일각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반미정서를 타고 당선됐다는 비판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미국 대통령보다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한국 방문을 더욱 갈망하는 이들을 보며 앞으로의 한미관계가 걱정됐다. 일본은 이 틈에 미국에 바짝 붙어 동맹관계를 튼튼히 다졌다. 결국 이때 미국의 도움으로 세계 제1의 자동차 생산국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원용석 기자김대중 기립박수 대통령 연설도 한국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남기고 싶은 이야기 김창준

2021-11-03

[김창준] 30년 만에 간 한국 천지개벽, 눈물이 흘렀다

    2009년 어느 날 한국 신문 1면에 노태우 전 대통령의 초췌한 모습이 나와서 충격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친동생 재오 씨와 재산문제로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기사였다. 노 대통령이 소뇌 위축증과 투병 중이라는 뉴스도 나왔다. 소뇌 위축증은 소뇌 크기가 점점 작아지는, 치료가 불가능한 희소병이다. 운동신경 장애와 함께 손과 발, 안구, 언어 장애에 어지럼증세까지 가져온다고 한다. 심하면 보행이 어렵고 시력 또는 청력을 잃을 수 있다.       슬픔이 밀려왔다. 그분 사진을 보는데 한국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던 분의 얼굴이라고 하기 힘들다고 할 정도로 많이 변해 있었다. 나와 면담했을 때 모습과 너무 달랐다. 순간 인생무상을 느꼈다. 미납한 추징금 340억원을 내기 위해 친동생과 조카, 조카의 장인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는데 마음고생을 하는 게 그분 얼굴에서 묻어 나왔다.       노태우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1992년 2월이었다. 노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에 초청받았다.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 중 처음으로 미국 도시 시장이 된 것을 치하한다는 취지에서 초청했다는 설명이었다. 그 덕에 30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1961년 당시만 해도 한국은 부패가 굉장히 심한 나라였다. 문교부 시험부터 출국 수속까지, 뇌물을 줘야 일이 풀렸다.       이러한 부정부패에 신물이 났다. 그래서 김포 공항을 떠날 때 두 번 다시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이역만리 미국에 와서 일주일도 채 되기 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비행기에서 30년 만에 서울 하늘을 내려다보며 마음이 설렜다. 아, 얼마나 오랜만에 밟아보는 조국 땅인가.     상공에서의 서울 모습은 내가 떠났을 때와 딴판이었다. 고층건물이 빽빽했다. 드디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깜짝 놀랐다. 기자가 대거 몰려와 나를 향해 연이어 질문했다. 꽃다발도 받았다. “30년 만에 고국에 온 기분이 어떠냐?” “시장 된 기분이 어떠냐?”     “너무 감격스럽다”고 답변했더니 “어찌 그리 한국말을 잘하느냐”고 기자들이 물었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생활하고 20대에 미국에 간 백그라운드를 모르고 왔나. 속으로 웃었다.       한국 정부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내가 알던 여의도와 너무 달랐다. 차창 밖을 보면서 한국의 눈부신 발전을 느꼈다. 내가 떠날 당시 여의도는 미군 기지였고 허허벌판이었다. 마포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갔었다. 30년 사이 한국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나….       “이제 서대문을 지나고 있습니다.” 운전기사가 말했다. 광화문과 옛 국회의사당, 시청, 덕수궁 담을 보니 어린 시절 친구들 생각이 났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감격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웅장하고 화려해 보이던 국회의사당이 이제는 초라해 보였다. “이제 저곳은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쓰입니다.” 기사가 설명했다. 서울 시청은 30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단지 색깔이 공기 오염으로 누렇게 변해 있었다.     숙소인 롯데호텔에 도착했다. 옛날 반도호텔 자리였다. 곳곳을 대리석으로 장식해 으리으리했다. 호텔 라운지에 폭포를 갖춘 호사스러움이 대단했다.       이튿날 아침 청와대에 들어갔다. 드디어 노태우 대통령을 만났다. 노 대통령이 활짝 웃으며 나를 환영했다. 인상이 대단히 좋으신 분이었다. 그를 직접 아는 분들이라면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날 밤 ‘강남’이라는 곳에 갔다. 세련된 모습에 놀랐다.   지금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히트하면서 전 세계에서 강남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내가 떠났을 당시엔 강남이라는 곳이 없었다. 질서 있게 늘어선 멋진 건물들부터 거리에 다니는 키 큰 젊은 여성들이 마치 내게 ‘한국이 그동안 얼마나 바뀌었는지 알아?’하고 알려주는 듯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었다.     잘사는 나라가 된 한국을 보면서 북한 생각이 절로 났다.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북한 사람들은 영양실조로 키도 작고 못사는데….’     나 자신에게 ‘어떻게 이렇게 달라지나’를 계속 되풀이했다. 전쟁의 잿더미 폐허는 완전히 사라지고 화려한 거리가 가득했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긍지도 이때 처음 생겼다. 내가 떠났을 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중 하나였다.     이제 한국 사람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해 12월 초. 나는 이번에 연방하원 의원 당선인 자격으로 노태우 대통령의 초청을 다시 받았다. 그래서 한국 하면 나는 노태우 대통령이 절로 떠오른다. 그분께 항상 감사한 마음뿐이다.       내 일처럼 기뻐하던 모습 떠올라  노 전 대통령 별세 소회   내가 다이아몬드바 시장으로서 연방하원 의원에 당선된 1992년에 노태우 대통령이 나를 초청해 잠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당선 직후였기에 당시 한국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이때 만났던 노 대통령에 대한 인상은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나의 연방의회 진출이 한국인 전체 영광이며 미주 한인 사회도 사기가 크게 높아졌을 것이라는 인사로 당선을 축하해 주셨습니다. 대통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온화하셨습니다.     오래된 친구처럼 악수하며 마치 자기 일인 듯 기뻐했습니다. 어제 서거 소식을 접했을 때 당시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안식을 기원하며, 유가족에게도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천지개벽 한국 한국 대통령 노태우 대통령 한국 정부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1-10-27

[김창준] 클린턴 탄핵, 개인적 친분-당론 사이서 고심 거듭

'왜 무기명 투표 안하나' 생각했을 정도 대배심 위증·공무집행 방해에 찬성표 빌 클린턴 대통령 탄핵 이슈로 전국이 떠들썩했다. 나도 이 때문에 큰 고민에 빠졌다. 개인적으로 클린턴을 좋아했다.     탄핵 표결을 앞두고 ‘왜 미국 의회에는 무기명 투표가 없나’하고 원망했다. 여자 문제로 한 국가의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가. 계속 자문했다. 물론 클린턴이 모니카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고 한 것은 분명 위증 행위다. 그런데 대통령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거짓말이었다. 이를 놓고 그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는 논란이 거셌다.   무엇보다 나는 클린턴이 자수성가 대통령이라 존경했다.     1946년 8월 19일생인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난폭한 술주정뱅이 의붓아버지 밑에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1963년 청소년 대표로 백악관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를 하면서 정치인의 꿈을 키웠다. 워싱턴에 있는 조지타운 대학에서 국제정치 학사 학위를 받았고, 로즈 장학생으로 1968년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에서 1년을 보냈다.   이듬해 육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을 받았지만, 영국으로 돌아가 그곳 미국대사관 앞에서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을 벌였다. 나중에 귀국해 예일대학 법과대학원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힐러리와 운명의 만남을 가졌다. 힐러리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이후 아칸소 주 검찰총장을 거쳐 36세로 역사상 최연소 주지사에 당선됐다.   클린턴 대통령을 여러 번 만났다. 내가 공화당 출신임에도 그는 만날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 내 가족 이름까지 기억하는 그에게 호감이 갔다. 사실 클린턴 주위에 미녀가 즐비하다는 말은 사실이다. 클린턴 정부 시절 백악관에 미녀가 유독 많았다는 말도 워싱턴 정가에서 나돌았다.     또 클린턴과 실제로 내연의 관계를 가진 미녀도 한둘이 아니다. 백악관 집무실에서 어린 인턴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당시 22세)와의 오럴 섹스가 국가적인 문제가 될 정도였다. 그의 오래된 바람둥이 기질이 결국 백악관에서 문제가 된 것이다.     클린턴은 민주당 출신으로는 루즈벨트 이후 처음으로 8년을 재임한 대통령이다. 그런데 재선 도전을 선언했을 당시 그는 성 추문으로 위신이 만신창이가 된 처지였다.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알려지자 여기저기서 여자들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당했다고 나섰다.   폴라 존스가 성희롱 당했다고 캐서린 와일리는 클린턴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했다. 클린턴에게 성희롱·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성만 족히 10명은 나왔다. 이중 엘리자베스 그레이슨이라는 여성은 힐러리 여사에게 클린턴과 성관계를 맺은 사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기도 했다.   이때 힐러리의 역할이 빛났다. 그가 훗날 연방상원의원, 국무장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는 데 있어 당시 그의 행동이 결정적이었다고 보는 이가 많다. 힐러리는 많은 여성이 앞다퉈 클린턴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밝혔음에도 끝까지 남편 곁을 지켰다. 그는 “나는 내 남편을 믿고 사랑한다”고 두둔하면서 “이 모든 스캔들은 남편을 끌어내리려는 우파 진영의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섹스 스캔들이 줄줄이 나오자 공화당 의원들이 탄핵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역대 대통령의 명예를 더럽히고 성스러운 백악관에서 대통령 답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 사실상의 탄핵 이유였다. 드디어 1998년 12월 19일 연방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됐다. 네 가지 죄목 중 두 개는 부결됐고, 나머지 두 개(대배심 위증, 공무집행 방해)는 통과됐다. 나 역시 고심 끝에 당론에 따라 클린턴의 대배심 위증과 공무집행 방해건에 찬성표를 던졌다.     하나만 통과돼도 탄핵이 가능했다. 통과된 두 가지 탄핵 조건을 연방상원에 통보했다. 마지막 결정권을 가진 상원에서 클린턴을 탄핵하기 위해서는 전체 의석 중 3분의 2인 67표의 찬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하원에서 통과된 두 죄목이 상원에서 모두 부결됐다. 클린턴은 그렇게 탄핵을 모면했다. 하지만 위증을 했기 때문에 변호사 자격증은 박탈됐다.   정치적 위기와 달리 그의 국민적 인기는 대단했다. 지지율이 70%에 육박했다. 미국에서 대통령을 탄핵하기란 매우 힘들다. 그동안 미국에서 여러 차례 대통령 탄핵안이 나왔지만, 모조리 부결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탄핵 위기에 몰렸지만 모두 상원 부결로 끝났다. 이 말은 하고 싶다. 트럼프 탄핵안을 지켜보면서 민주당이 정말 더티한 정치 게임을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민주당은 내 의원 시절 민주당과 너무 차이가 크다.     그들은 트럼프-러시아 내통 스캔들을 사실상 조작했음에도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트럼프를 탄핵하려 했다. 현재 존 듀럼 특검이 트럼프-러시아 내통 스캔들 조작에 누가 가담했는지 수사하고 있는데 정의가 반드시 구현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를 포함해 보수진영이 지금 간절히 원하는 게 바로 듀럼 특검의 공명정대한 수사다.     어쨌든 당시 공화당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도 불륜 스캔들에 휘말리는 아이러니함을 보였다. 그는 스태프였던 20대 젊은 여성 칼리스타 바이셀과 불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를 깅그리치의 부인이 알아채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깅그리치의 부인은 기자회견까지 열어 남편을 비난했다. 깅그리치에게 여러모로 망신이었다. 그녀는 법원에 이혼을 신청했다.     힐러리 여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정치적 야망이 있었던 힐러리는 (최소한 대외적으로는) 남편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였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의 용서로 남편을 살리면서 자신의 선출직 꿈을 펼칠 수 있는 교두보까지 마련하는 일석이조 효과를 봤다. 힐러리가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반면 수십년 만에 하원 다수당을 만든 대단한 치적을 세운 공화당의 영웅 깅그리치가 오히려 정치적 궁지에 몰렸다. 탄핵 실패 역풍과 불륜 스캔들에 따른 이혼으로 체면을 구겼다.     깅그리치는 칼리스타와 6년간 불륜 관계를 가진 뒤 결국 결혼을 했다. 그의 세 번째 부인이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클린턴 사이서 대통령 탄핵 탄핵 표결 자수성가 대통령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1-10-20

[김창준] 대통령의 단독면담 요구, 바뀐 위상 실감

    반대 부딪친 북미자유무역협정에 찬성 부탁 오랜 친구처럼 대하는 놀라운 친화력에 감동  1993년 11월 어느 날이었다. 의회 사무실에서 지역구로부터 올라온 여론조사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갑자기 비서가 내게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누구길래 저렇게 호들갑인가.’ 속으로 생각했다. 백악관에서 온 전화였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나와 직접 통화하고 싶다고 했다. 오후에 백악관 집무실에서 만나자는 초청이었다.   백악관에서 보낸 리무진을 타고 대통령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경호원들의 절도 있는 경례와 대통령 비서실 직원들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집무실로 이어지는 복도를 걸어갔다. 머릿속에 그동안의 힘들었던 이민생활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30여 년 전 세계에서 10번째로 가난한 나라에서 단돈 500달러를 들고 혈혈단신 이역만리 말도 통하지 않는 미국 땅을 밟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일본 제국주의에 주권을 송두리째 빼앗긴 나라에서 태어나 동족상잔의 전쟁을 직접 경험하고,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에서 이민 와 겪은 온갖 고난을 뒤로하고 당당히 세계 최강국 미국의 연방 하원의원이 된 나를 돌아봤다.     내 인생이 미국에 와서 드라마틱하게 변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내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긴 이뤘구나.’ 새삼 자부심과 긍지도 느꼈다.   미국은 세계 제1의 정치, 경제, 군사 강국이다. 미국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바쁜 인물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반갑게 맞이하며 내 손을 잡았다. 그 전에도 클린턴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지만, 독대는 처음이었다. 미국 대통령과의 단독 면담이라 다소 긴장됐다. 클린턴은 그런 나를 배려한 듯, 자리에 앉아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골프와 내 가족 얘기부터 했다.     자신과 반대 정당 초선 의원인 나를 편안하게 해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또 이미 나에 대한 중요 정보는 다 파악한 모습이었다. 내 골프 핸디가 ‘20’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내 샷 비거리가 좀 짧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비거리를 낼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줬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아, 이게 빌 클린턴의 매력이구나. 괜히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람이 아니구나.’     내 아이들 이름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족 안부를 물었다. 대통령이 처음 마주 앉은 초선 하원의원 자녀들 이름까지 외워 언급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어젠다를 위해 내 표가 필요했다. 그러려면 내 마음부터 잡아야 했다. 하지만 경위야 어쨌든 그 성의와 기억력에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클린턴은 집무실에 장식해 놓은 각종 그림과 조각에 관해 설명해 나갔다. 중간중간 특유의 유머도 섞어가면서. 나를 보면서 “미국 역사상 유일한 한인 의원인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연거푸 칭찬했다.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주는 화술이 대단했다.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를 집무실까지 부른 이유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비준안 때문이었다.     취임 첫해를 맞은 클린턴에게 NAFTA는 그의 정치운명을 건 이슈였다.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노조 편이다. 전국에 퍼져 있는 각종 노조 힘은 어마어마했다. 이들은 NAFTA가 통과되면 멕시코의 저렴한 노동력이 밀려들어와 미국인들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란 이유로 협정에 강력히 반대했다. 노조 지지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많은 민주당 의원이 줄줄이 NAFTA 반대 성명을 내던 때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민주당 소속의 클린턴 대통령이 앞장서 NAFTA 지지를 선언하면서 반전이 이뤄졌다. 민주당 의원들은 당황했다. 클린턴은 급진 정치인이 결코 아니었다. 진보와 보수 성향이 적절하게 섞인 중도파 정치인이었다. 경제정책에서는 보수에 가까웠다. NAFTA를 보면 오히려 그는 표밭인 노조에 타격을 준 셈이었다.     물론 이러한 클린턴의 결정이 먼 훗날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됐다. NAFTA로 직격탄을 맞은 러스트벨트와 다수의 노조가 훗날 공화당 소속의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몰아줘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게 정치다.     당시에는 클린턴이 전통적 민주당 이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호평을 받았다. 또 지금도 NAFTA가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는 경제학자가 많다. 사회복지 분야에서는 철저하게 민주당 이념에 충실하면서도, 경제와 국방에서는 공화당 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실용주의 정책을 추구한 클린턴 인기는 대단했다.     NAFTA는 민주당 지도자들과 의원들, 민주당의 정치적 기반인 노조 등의 맹렬한 반대와 비난을 자초하는 일이었음에도 클린턴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만큼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NAFTA에 전반적으로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보니 클린턴이 속한 민주당 의원들은 대부분 반대하고 거꾸로 야당인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대부분 찬성하는 보기 드문 정치풍경이 연출됐다.     사실 NAFTA에 필요한 모든 기초공사는 전임인 조지 H. 부시 대통령 때 마련됐다. 따지고 보면 클린턴은 부시 전 대통령이 다져 놓은 국가적 중대사를 마무리한 것이다. NAFTA를 통과시킨 주인공은 클린턴 대통령이었기에 지금은 NAFTA 하면 클린턴 얼굴부터 떠오른다.     이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 클린턴은 11월 넷째 목요일인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의회가 휴회에 들어가기 전 NAFTA 비준안이 처리될 수 있도록 의원들 설득에 ‘올인’하고 있었다.   나는 NAFTA 비준 표결이 임박한 시점에 찬반 입장을 확실히 내놓지 않았다. 지역구가 멕시코 국경에서 멀지 않은 탓에 지역 구민 반응을 좀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만큼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다. 클린턴 대통령이 나를 백악관에 초청한 것은 내가 NAFTA 비준안에 관해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30명 정도에 달하는 미결정 의원들 선택이 비준안 통과에 결정적이라고 본 클린턴은 나를 초청해 단독 회담을 갖기로 한 것이다.   결국 나는 찬성표를 던졌다. 클린턴과 전임인 부시가 모두 그토록 원했던 NAFTA는 통과됐고 수십 년 동안 협정이 유지됐다. NAFTA가 논란이 많고 이로 인해 피해를 본 국민도 많다는 점을 인정한다.     기업들은 큰 이익을 봤지만 우려했던 대로 미국 제조업과 러스트벨트 상권이 무너졌다. 트럼프는 대선 캠프 때 줄기차게 NAFTA를 비난하며 즉각 폐기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26년 만에 NAFTA는 트럼프 손에 의해 폐지됐다. 트럼프는 무역수지에 있어 미국에 여러모로 더 유리하면서 캐나다와 멕시코에는 상대적으로 불리해진 내용의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을 통과시켰다. USMCA가 지난해 7월 1일 발효되면서 NAFTA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원용석 기자

2021-10-13

[김창준] 기사 한 꼭지에 돌이킬 수 없게 된 정치인생

선배 의원의 ‘언론 조심’ 조언 경청 안 한 탓 기도 끝에 꿋꿋하게 공격에 맞서기로 결심 내가 만약 공화당원이 아니고 민주당원이었다면 나를 향해 LA타임스가 공격했을까. 나 스스로 골백번도 넘게 물었다. ‘큰 통에 들어있는 잉크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You can not beat the barrel of ink)’는 말이 있다. 무한정 글을 쓸 수 있는 언론을 상대로 싸워 봤자 본전도 뽑지 못한다는 얘기다. 미국 주류언론 절대다수가 좌성향이 강하다. 특히 보수진영, 공화당원 사이에서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LA타임스는 '급진좌파 언론' 혹은 '안티 보수 언론'으로 통한다. 괜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이들 언론 사설은 민주당원들의 연설 내용과 싱크로율 100%에 가깝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 기사도 대단히 편향적이다. 지금은 언론의 편향성이 극에 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들 언론이 나에 대한 빌미를 찾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주류언론이 아시안 공화당원을 가만히 놓아둘 리 없을 것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공화당 선배들로부터 각별히 조심하라는 충고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TV 방송사 중에서는 CBS와 NBC를 조심하라” 등과 같은 조언이었다. 이들 방송국이 철저하게 민주당 편에 서 있다는 설명이었다. 솔직히 나는 무지했다. 당시 공화당 선배들이 왜 입만 열면 그렇게 언론 얘기를 자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나는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있었던 사람이다. 한국에서 어렵게 자랐던 시절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CNN 등 언론들은 이름만 들어도 상당한 무게감을 줬다. 막연하지만 뭔가 격이 높고, 수준이 높은 느낌을 줬다. 최고 선진국인 미국은 언론도 당연히 최고겠지 생각했다. 그래서 선배 공화당 의원들의 조언을 새겨듣지 않았다. 나한테는 해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잔소리 같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지금은 땅을 치고 후회한다. 당시 나는 매일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최초의 공화당 아시안 이민자 의원’ ‘최초의 한인 연방하원 의원’이라는 타이틀 구름 위에 붕붕 떠 있었다. 당선된 지 얼마 안 돼 기분이 들뜬 상태였다. 내가 손대면 모든 게 술술 풀릴 것 같았다. 기자들과도 좋게 지내면 기사가 좋게 나올 것으로 봤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미국 언론의 생태계와 편향성을 알아야 하는 것은 공화당 정치인으로서 기본이었다. 이민자 사업가였던 내가 이런 점을 너무 모르고 정치 무대에 뛰어들었다. 대다수 한국과 한인 언론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편향보도로 뒤덮인 주류언론이 공정하다고 많이 착각하고 있다. 제발 우파 언론과 대안 언론 등을 보고 공부하라고 당부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는 한쪽 얘기만 듣고 보도하는 것이다. 그러니 많은 한국인과 한인 이민자가 미국의 절반만 알고 다른 절반은 모르고 살고 있다. 뉴욕타임스 보도 내용이나 오피니언이 신이 말한 것인 양 무조건 떠받드는 관습은 아주 잘못됐다. 언론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내 말을 액면 그대로 기사화하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에 자기 의견을 넣어 기사를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 특히, 치명적인 것은 앞뒤 맥락을 거두절미한 글이다. 한 번은 불우 학생들을 돕는 단체에 100달러를 기부하면서 “내가 부자라면 100달러가 아니라 1000달러를 기부하고 싶지만 안타깝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다음 날 신문에 “김 의원이 앞으로 1000달러씩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싶다고 했다”고 보도됐다. ‘내가 부자라면’이라고 말한 전제 부분은 빼버리고 1000달러를 기부하겠다는 말만 보도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 보도 뒤 여러 자선단체로부터 1000달러씩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래서 기사를 쓴 기자에게 전화로 따졌더니 그 이튿날 신문에는 “김 의원이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발뺌했다”고 보도했다. 따지면 따질수록 나만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언론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수많은 정치인이 언론을 상대로 명예훼손 등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승소한 적이 거의 없다. 언론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자가 고의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그런 기사를 썼다는 증거가 없으면 소송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고의로 썼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측근들은 내 정치인생도, 연방의회 활약상도 LA타임스 기자 한 번 잘못 만나면서 돌이킬 수 없는 형국이 됐다고 한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미국의 거대 주류언론들은 진보 성향이 뚜렷했지만 한국의 대형 언론들은 보수 성향이 강했다는 점이다. 또 미국 언론들은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반면, 한국 언론들은 그래도 인정사정없이 공격하는 기사는 피하려는 노력이 역력히 보인다. 리처드 닉슨(공화) 대통령을 하야시킨 워터게이트 사건은 기자들의 취재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은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이 사건을 백일하에 드러내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퓰리처상을 탔을 뿐만 아니라 단번에 유명인사에 백만장자가 됐다. 미국 주류언론은 인기주의로 쏠리는 경향이 크다고 본다. 그러다 보니 언론들은 독자를 흥분시킬 수 있는 흥미진진한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사냥을 다니는 굶주린 늑대와 다르지 않게 됐다. 이제 막 의회 생활을 했는데 연방수사국(FBI) 조사를 받는 처지에 놓인 게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다. 오랜만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동안 하나님을 잊고 살아온 나의 오만함을 용서해주세요.” 한참을 기도하고 나니 마음속에 평안함이 왔다. 기운을 차렸다. 나를 향한 공격에 꿋꿋하게 맞서기로 했다. 선거법을 잘 모르고 잘못한 게 있다면 나의 실수로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했다. 원용석 기자 won.yongsuk@koreadaily.com

2021-09-29

[김창준] '이겼다'…나는 멍하니 팔만 높이 들었다

전국 휩쓴 클린턴 열풍 불구 압도적 승리 200불 들고 미국행 32년만에 일군 성과 예비선거 3주 전. 신문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가 또 1위였다. 척 베이더가 2위 짐 레이시가 3위였다. 두 후보 캠프에 비상이 걸렸다. 서로를 향한 공격에 혈안이었던 이들은 나를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선거의 고비는 마지막 일주일이다. 각 후보가 끝까지 쥐고 있던 비장의 카드를 던지는 타이밍이다. 한순간에 모멘텀을 타거나 잃을 수 있다. 선거 참모들과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작전을 짰지만 마음이 불안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마지막 일주일 하루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드디어 투표일. 가장 최근 여론조사에서 내가 1위를 했지만 진짜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이다. 개표에 앞서 스스로에게 마음을 비우자고 했다. 초반부터 치열했다. 베일러 후보와 막상막하였다. 밤 11시가 넘어 부재자 투표함이 집계되면서 내가 베일러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격차는 더 벌어졌다. 순간 선거 캠페인 운동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결국 내가 베일러 후보를 10% 포인트 차로 누르고 공화당 후보로 선출됐다. 하원의원 본선은 11월 첫째 주 화요일이었다. 그해 대통령 선거도 열려 관심은 뜨거웠다. 내가 출마한 41지구는 공화당 우세 지역이라 처음에는 안심했다. 그런데 선거가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빌 클린턴의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의 인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공화당원인) 내 선거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런데 기우였다. 선거일에 나는 49% 득표율로 민주당 후보를 완파하고 당선됐다. 한인사회가 그토록 염원하던 최초의 한인 연방하원의원의 꿈을 이룬 것이다. 승리가 확정된 순간 너무 기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두 팔을 높이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한인사회는 물론 한국 언론에서도 나를 두고 '역사를 장식한 영웅'이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지금 와서 솔직히 말하건대 운이 좋아 당선됐다. 모든 여건이 내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당선 배경에는 열심히 도와준 많은 친구와 자원봉사자 그리고 한인 힘이 더 컸다. 1993년 1월4일. 워싱턴DC 연방의회 의사당 앞에 섰다. 겨울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가슴 속엔 뜨거운 열정이 넘쳤다. 단돈 200달러를 들고 태평양을 건너온 지 32년. 식당에서 접시를 닦던 내가 이렇게 미국을 대표하는 연방하원의원으로 등원하는 첫날이었다. 내 가슴에는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와 숫자 '103'이 새겨진 의원 배지가 달려 있었다. 103차 의회라는 뜻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을 떠나 빈털터리로 낯선 이역만리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디딘 지 꼭 32년. 연방하원의원 배지를 달고 미합중국 수도 워싱턴DC에서 관광객이 아닌 의원 자격으로 의사당을 향해 걸어가는 내 마음속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날 폴리 하원의장이 주관한 취임선서에서 처음 선서를 한 초선의원은 나를 포함해 모두 110명.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숫자였다. 의사당을 방문해 본 사람들은 그 웅장함에 절로 탄성을 자아낸다. 가운데 우뚝 솟은 돔을 중심으로 양쪽에 두 개의 작은 돔이 있고 그 양 옆에는 하원의사당(남쪽)과 상원의사당 (북쪽)이 있다. 돔 밑은 로툰다(Rotunda: 둥근 천장의 홀)가 있다. 천장과 벽은 온통 미국 역사를 설명하는 그림으로 채워져 있고 양쪽에 있는 조그만 로툰다 내부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의 동상이 가득 자리 잡고 있다. 이 어마어마하게 웅장한 건물이 160여년 전인 1846년에 준공됐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컴퓨터는 물론 전기 전화도 없던 그 시대에 말과 밧줄로 이처럼 웅장한 건물을 세웠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남쪽 길 건너에는 세 개의 하원 건물 북쪽에는 세 개의 상원 건물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동쪽에는 연방대법원이 웅장하게 서 있고 그 옆에는 두 개의 의회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이 모든 건물은 지하로 연결돼 있는데 지하 벽은 원자폭탄에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두껍고 견고하게 만들었다. 또한 워낙 오래된 데다가 통로가 너무도 복잡해 지하에서 헤매는 관광객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나도 첫 3개월 동안에는 지하통로에서 계속 방향을 잃고 헤맸다. 상원과 하원 건물들은 모두 지하 전기 기동차로 연결돼 있다. 본당에서 투표가 없는 한 관광객들도 이것을 탈 수 있는데 항상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의사당 빌딩 안은 항상 관광객으로 붐빈다. 의회 등원 첫날. 나는 공화당 의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의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2층 방청석도 꽉 찼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본회의장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온 의원이 많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대개 아버지 옆에 서 있었지만 팔에 안긴 아이들도 있었다. 회의장 안 분위기는 도떼기 시장 같았다. 신성한 의사당에서 엄숙한 개회식을 예상했던 탓인지 그 분위기에 더 놀랐다. 7년 전 사업관계 일로 워싱턴에 왔다가 관광 겸 의사당에 들렀던 적이 있다. 그때 2층 방청석에서 웅장하고 화려한 본회의장을 내려다봤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의원이 돼 아래층 의사당에서 2층 방청석을 올려다보게 되다니 정말 사람의 팔자는 알 수 없다는 말이 실감 났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국산 싸구려 여행 가방을 들고 왔다가 LA 국제공항 바닥에서 가방이 터지면서 짐이 모조리 쏟아졌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머님이 정성스레 볶아 챙겨주신 고추장 병이 터지고 김이 사방으로 날렸는데 이를 하나씩 집느라고 정신을 못 차렸다. 그때의 망신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나는 연방의원으로서 성심껏 제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나는 선서를 하기 위해 토머스 폴리 하원의장 앞에 섰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하원의장이 오른손을 들었다. 나도 심호흡을 하며 오른손을 들었다. "당신은 미국 헌법을 지지하고 국내외 모든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것이며 직무를 훌륭하고 충실하게 집행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합니까?" "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저와 함께 동행해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게 다 하나님 뜻이었다. 나는 시의원과 시장을 거치면서 단 한 번의 낙선 없이 공직에 줄줄이 당선됐다. 취임선서가 끝나고 공화당 원내대표 권고로 103차 회기 개원 첫 발언을 했다. 원용석 기자 won.yongsuk@koreadaily.com

2021-09-15

[김창준] 진심 담긴 연설에 단박에 지지율 꼴찌서 1위로

'이민자 영어' 불구 진솔한 내용에 청중들 감동 선거 기간 LA폭동…'강한 한인' 이미지 덕 봐 첫 유세장. 나는 유학생으로 미국에 왔고 직업이 엔지니어라고 나를 소개했다. 뜻밖에 그 대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엔지니어는 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흥미롭게 나를 지켜봤다. 나는 회사를 운영하는 CEO이며 공항 건설을 공약을 내걸었다. 시장으로서 내 치적도 얘기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해서 시민권을 땄다고 했다. 시민권을 받은 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자 청중이 출렁였다. 그 대목에서 가슴이 벅차올라 나도 눈물샘이 터졌다. 청중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미국 시민권을 받고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후보 중 누가 애국심이 가장 강한지, 비교해 보십시오. 시민권을 받고 이렇게 감동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곳곳에서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닦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음 여론조사가 실시됐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1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서툰 영어가 오히려 제대로 먹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안 하는 얘기가 분명 어필했다. 다른 후보들은 다 어떤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느니, 변호사로서 이런저런 활동을 했다느니 하는 얘기만 늘어놓았다. 연설 내용이 워낙 대조적이었고 말도 짤막짤막하니까 오히려 심금을 울렸던 모양이다. 가장 걱정했던 토론은 오히려 내게 용기를 준 계기가 됐다. 솔직한 게 역시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평생 ‘거짓말쟁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욕을 먹건 말건, 무조건 솔직하게 얘기하자’가 내 신조였다. 토론을 하면서 앞으로도 일생을 그렇게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그때 이후 연설이나 토론 때 솔직하게 말하는 용기가 생겼다. 그런데 선거운동에 한창 몰두하던 중 LA 폭동이 터졌다. 출마 후 내게 닥친 첫 번째 정치 시험대였다. 이 사건에 대한 대처는 선거 캠페인에 상당한 탄력을 줬다. 무엇보다 폭동은 한인들에게 미국사회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가져다준 사건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1992년 4월 29일. 나는 마침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다이아몬드바 시 집무실에 앉아 다음 주로 예정된 공청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운영하는 토목 설계회사 ‘제이 김 엔지니어스(Jay Kim Engineers, Inc.)’ 경리부에서 전화가 왔다. 회사 직원들 급여가 은행 계좌에 아직 입금이 안 됐으니 빨리 사무실로 와 달라는 급한 전화였다. 그런데 사무실 밖에는 화가 잔뜩 난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시장이 뭘 하는 거냐” “어째서 우리 동네는 길 청소를 하지 않느냐” “길이 얼마나 더러운지 지금 같이 가서 보자” 등 막무가내로 내게 항의했다. 그렇게 복도에서 한동안 왈가왈부 실랑이를 하는데 갑자기 비서가 경찰서장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다고 했다. 경찰서장은 LA 다운타운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다이아몬드바 시는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LA에서 불과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 우리 시에서도 긴급회의를 열어 대책을 세워야 했다. 속으로 ‘오늘은 계속 뭔가 안 풀리는 날이구나’ 하며 달력을 봤다. 4월 29일이었다. 불현듯 어려서 서울에서 본 4·19혁명 생각이 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뛰어다니던 대학생들의 모습. 이승만 대통령의 오른팔인 이기붕씨의 서대문 집에 들어가 가구들을 모두 끌어내 불을 지르고, 이기붕씨 아들이자 이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했던 끔찍한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론 4·29 폭동은 우리의 4·19 혁명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그날 오버랩이 됐다. 나는 LA 경찰만으로는 폭동 진압이 어려울 것에 대비해 주변 도시들에 도움을 요청하고 우리 시 경찰도 비상대기 상태에 있도록 지시했다. 경찰차를 타고 바로 LA로 향했다. 한인타운 올림픽 가에 도착하니 ‘대한민국 해병대’라고 적힌 머리띠를 두르고 해병대 군복에 공기총을 든 한인 젊은이들이 달려와 나를 에워싸며 환영했다. 이들은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해병대 출신 한인들이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LA 한인 상가는 올림픽 가를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퍼져 있어 마치 남쪽에 사는 흑인들이 북쪽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백인들을 향해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흑인 폭동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한인 상가들이었다. 한인 상가는 식당과 가발 가게, 세탁소, 주유소, 가구점 등으로 라틴계의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하는 업소가 주를 이뤘다. 흑인들이 남쪽에서 북쪽의 백인 지역으로 올라오려면 한인 타운을 통과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남미 출신 주민들도 한인 상가를 부수고 맥주와 의류, 텔레비전 등을 약탈해 가는 모습이 뉴스를 통해 계속 나왔다. 한인 상가는 난장판이 됐고 사방이 불바다였다. 해병대 복장을 한 ‘한인타운 지키기’ 결사대들이 건물 지붕 위에 올라가 공기총을 쏘면서 한인 상점들을 보호하는 장면도 텔레비전에서 중계됐다. 마치 6·25 때 시가전을 보는 것 같았다. 이것이 미국이란 말인가. 많은 미국인은 이 장면을 보면서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삶의 터전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나선 용감한 한인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나는 이들 덕에 단지 한인이라는 이유로 덩달아 영웅 취급을 받았다. 내 선거운동도 이 사건으로 더 탄력을 받았다. 한인들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와 피해를 안겨준 미 역사상 최악의 흑인 폭동. 그런데 그 사건이 내게는 연방 정치무대 진출을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나는 억수로 운이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원용석 기자 won.yongsuk@koreadaily.com

2021-09-08

[김창준] 한인 첫 연방의원, 난 역사에 도전장을 던졌다

'庶政刷新(서정쇄신)'. 정치적 폐단을 고쳐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애초 그가 정치무대에 뛰어든 이유다. ‘다이아몬드바 최초의 아시안 시장’ ‘한인 최초 연방하원의원’은 목적지를 향한 과정에서 따라붙은 수식어지 목표가 아니다. 김창준(82) 전 공화당 연방하원의원은 1939년 3월 27일 서울시 청운동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4·19 혁명 등 격동의 시기를 겪으며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어려서부터 남다른 끼는 있었다. 중학교 시절 배우 이순재와 연극도 했고, 명동 한복판에서 지루박을 추며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1958년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 그는 군 제대 후 1961년 유학길에 올랐다. 단돈 500달러를 들고 캘리포니아로 온 그는 낮에는 채피 칼리지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식당에서 일했다. 이민생활은 어려웠다. 서툰 영어는 모든 환경을 어렵게 했다. ‘내가 뭐하러 미국에 왔나.’ 입버릇처럼 하던 자문은 곧 후회로 돌변하곤 했다. USC에서 토목공학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전국에 하수처리장을 설치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1976년에 고속도로와 하수처리 사업 설계 전문 회사인 ‘제이 킴 엔지니어스’를 설립했다. 1990년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이듬해 시장에 당선됐다. 1992년 한인 최초의 연방하원의원으로 당선된 뒤에는 3선에 성공했다. 이후 20년간 연방의회에 한인이 없었다. 그가 한인 정치의 선구자였음을 방증한다. 지금은 한국에서 정치, 경제 선진화 취지로 김창준정경아카데미를 설립해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새로운 환경은 거센 풍랑이다. 이를 타고 넘어갈 때 기회가 온다”는 그의 인생 스토리에 들어가 본다. 다이아몬드바 시장 시절 지역구 신설 용기 지지율 꼴찌·영어 핸디캡, '정직'으로 돌파 1992년 2월 초. 나는 연방하원 선거 출마를 결심했다. 당시 인구 8만의 작은 백인 도시였던 LA 동부 지역 다이아몬드바(Diamond Bar)에서 최초의 아시아계 시장으로 선출돼 1년간 재직하면서 행정 경험이 있던 나는 더 큰 무대로 나가고 싶은 열정이 생겼다. 또 이민 1세 한인으로 사상 최초의 연방하원 당선이라는 새 역사에 도전할 욕심도 솔직히 있었다. 우리라고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연방하원 지역구는 인구 60만명을 대변한다. 마침 절호의 기회가 왔다. 가주 인구가 해마다 늘어나 연방 하원의원 의석이 2개 늘었다. 한 석은 북가주, 한 석은 남가주에 추가로 배정됐는데, 내가 시장으로 있는 지역구였다. 현역 의원이 없는 새 지역구가 구획된 것이다. 선거전략을 세워야 했다. 캠페인 매니저부터 찾는 게 급선무였다. 과거 몇 명의 후보를 당선시켰는지 기록을 꼼꼼히 살핀 뒤 밥 구티라는 베테랑 선거 전문가를 채용했다. 구티를 만나보니 체격이 작으면서도 체중은 많이 나가는 친구였다. 공격적인 선거전략가로 소문난 인물답게 인상이 예리했다. 바로 상대 후보 분석에 돌입했다. 가주 하원의원인 정치 베테랑 척 베이더를 유력 후보로 지목했다. 변호사 짐 레이시도 만만치 않은 후보라고 했다. 연방 상무부 소속 변호사 출신으로, 언변이 뛰어났다. 연방 정부 제도에 대한 지식도 풍부했다. 이외 4명의 후보가 더 있었다. 첫 번째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참담했다. 내가 꼴찌였다. 그것도 한참 뒤처졌다. 베이더가 70%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1위를 달렸고, 짐 레이시가 20%로 2위였다. 나는 지지율 5%로 3위, 꼴찌였다. 순간 앞이 캄캄했다. ‘괜히 출마해서 망신만 당하는 것 아닐까’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오기가 발동했다. 처음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안 좋게 나왔다고 포기하는 것은 더 웃긴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론조사 결과에서 희망을 봤다. 유권자들이 직업 정치인과 변호사들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다고 응답한 것이다. 나는 직업 정치인이 아니고 언변으로 먹고사는 변호사도 아니었다. 내 직업은 엔지니어였다. 당시 연방의회에는 엔지니어 출신 의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내 직업을 어필하기로 했다. 선거 공약은 크게 2개로 압축했다. 첫째는 ‘정부도 민간기업 같이 운영해야 한다’는 것. 기업은 적자로 부도가 나면 문을 닫는다. 그런데 정부는 적자가 나면 ‘돈을 더 찍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기업이 적자가 나면 물건값을 올리는 대신 비용을 줄이는 게 맞다. 그렇다면 정부도 적자가 나면 세금을 올릴 게 아니라 지출을 줄여야 한다. 둘째는 워싱턴 DC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연방 하원의원이 너무 오랫동안 워싱턴에 머물면 타성에 젖는다. 또 게을러지기 마련이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새 사람을 선출해야 한다. 그래서 3선 이상은 출마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임기 제한(term limit)’을 지역민에게 약속했다. 내 선거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됐다. ‘수십 년을 정치로만 소일한 낡은 정치인을 워싱턴으로 보낼 것이냐 아니면 70% 이상이 변호사인 연방 의회에 또 한 명의 변호사를 보탤 것이냐. 그럴 생각이 아니라면 직업 정치인도, 변호사도 아닌 CEO 출신의 나를 의회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마침 미국은 1990년대 초반부터 CEO 출신 정치인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 또 여론조사 2위를 달리던 레이시는 내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1위로 앞서가던 베이더 의원만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인신공격을 일삼았다. 나는 이런 두 사람의 다툼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손뼉을 치며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나는 정부도 개인이 사업하듯 운영한다면 천문학적 규모의 적자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이아몬드바 시장으로서 내 업적을 내세웠다. 인구 8만명 규모의 도시면 보통 공무원이 200여 명 정도 된다. 그런데 우리 도시는 모든 서비스를 개인회사에 하청(outsourcing)해 시 직원이 20명 남짓했다. 특히 다른 도시들이 재정적자에 허덕일 때, 우리 시는 남은 예산을 은행에 예금할 정도였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이것이 바로 정부를 개인기업 같이 운영한 결과임을 강조했다. 그래도 내심 항상 불안했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토론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토론이 아니라 영어였다. 나는 한인 2세도 아니고 1세다. 또 백인 동네에서 거주하는 아시안이었다. 사실 ‘말’이라는 것은 어려서부터 해야 원활하게 나온다. 난 27세에 미국에 이민 왔다. 이민생활에서 영어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내 영어에는 한국어 억양이 강했다. 방법은 하나였다.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후보 토론회 날이 왔다. 800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대부분 백인이었다. 나는 유일한 아시안 후보라 절로 튀었다. 토론 시작도 전에 ‘이 사람 도대체 누구냐’는 웅성거림이 곳곳에서 들렸다. 앞에 먼저 자신을 소개한 후보들은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두 후보 모두 자기들이 그동안 어떤 일을 해왔는지를 끝없이 설명해 나갔다. 기가 죽었다. 몸이 얼어붙었다. 어느새 내 순서가 왔다. 원용석 기자 won.yongsuk@koreadaily.com

2021-09-01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