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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연방하원 4선 좌절…FBI 수사 5년 만에 종결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7〉 정치인 생활 끝나다
주거 제한·공화당 지원 끊긴 악조건 속 완패
"한국에서 사업가·정치인 경험 전하자" 귀국
 
연방하원 4선 도전을 놓고 고민이 많았다. 당시 정치자금 수사가 끝나지 않았다. 상당히 곤혹스러운 입장이었다.  
 
온갖 어려움 속에 캘리포니아 41 선거구 예비선거에 입후보했다. 같은 공화당 소속 후보들이 나를 공격했다. 상대 후보인 개리 밀러 주 의원은 내가 곧 감옥에 갈 것처럼 흑색선전을 늘어놓았다. 선거를 치르는 중 나는 정치자금 사건을 경범죄로 종결짓는 ‘플리바겐(plea bargain·사전형량조정제도)’을 마지못해 수락했다. 주거제한과 보호관찰형을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 예비선거 직후까지 선거구에 발도 디딜 수 없었다. 선거구에 가지 않는 조건으로 연방수사국(FBI)이 5년간의 수사를 끝내기로 했다. 악몽의 시간이었다. 나뿐 아니라 친구와 가족들도 너무나 힘들어했다. 대만 국적자로부터 후원금 5만 달러를 받은 것 등이 문제였다. 후원자들의 국적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또 진보 성향의 LA타임스가 나를 저격했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억울한 마음이 컸지만 할 수 없었다. LA타임스 여기자와 인터뷰 한 번 잘못해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다니. 내가 너무 순진한 마음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거제한과 보호관찰형을 선고받은 불리한 여건에서 캠페인 활동을 해야 했다. 당시 내 나이 59세였다. 경범죄는 기록에 남지 않는다는 변호사의 끈질긴 설득에 굴복하긴 했지만 그토록 힘든 시간을 견뎌 놓고 왜 마지막 순간에 양보했는지, 지금도 후회할 때가 많다.  
 
공화당은 중립을 내세웠다. 현역의원에게 관례로 돼 있는 일체의 지원도 끊었다. 선거운동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메일과 전화, 비디오 영상물 등을 통해 의정활동을 알리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손발을 다 묶인 처지에서 선거판에 나선 셈이었다. 결국 예선에서 완패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 나는 이렇게 끝나는구나.’ 허무했다. 그토록 애태우며 가꿔온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더티한 정치판에 내가 희생양이 됐다는 기분이었다.  
 
소리 내 울었다.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다이아몬드바 시의 시장이 되던 날의 기쁨과 연방 하원의원이 되던 날의 환호와 박수갈채.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나를 향해 몰리던 기자들.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기뻐했던 가족과 지지자들 얼굴이 떠올랐다.  
 
연방 하원의원 3선을 하는 동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한다. LA타임스와 오렌지카운티 레지스터 등 주류언론에서도 나의 치적과 활약상에 대해서는 모두 높은 평가를 했다.  
 
본회의 참석률 100%에다 최다 발언 기록을 남겼고 우수 의정상도 받았다.  
 
최근 내 뒤로 훌륭한 연방의원들이 나란히 탄생해 반가웠다. 같은 남가주에서 같은 소속인 공화당의 미셸 박 스틸과 영 김 의원이 올해 연방의회에 입성했을 때, 내 일처럼 기뻤다. 이들이 나를 반면교사, 타산지석으로 삼길 바란다. 내가 겪은 불이익과 고난을 뛰어넘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인 정치력을 더욱 키워나갈 것으로 믿는다.  
 
개인적으로 1994년도 뜻깊은 한 해였다. 뉴트 깅그리치 연방하원 의장의 노력으로 남부 민주당 의원 10여명이 탈당하고 공화당에 입당했다. 미국 정치사에 커다란 혁명이었다. 의사당 안에선 며칠에 한 번씩 공화당에 입당한 민주당 의원들을 환영하는 리셉션이 열렸고 나도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해 11월 공화당은 230대 204, 26석 차로 46년 만에 다수당이 됐다. 나도 여기에 일조했다는 기쁨이 크다. 덕분에 나도 건설교통 소위 위원장으로 선임됐다. 어렵게 잡은 다수당인 만큼 바쁘게 일했다. 밤새도록 의회가 계속될 때면 사무실 소파에 누워 틈틈이 새우잠을 잤다. 투표한다는 벨이 울리면 졸음을 참고 의사당에 들어가 투표했다. 밤에 배가 고프면 컵라면을 뜨거운 물에 데워 먹었다. 몇 달을 그렇게 밤마다 라면만 먹어서 체중이 많이 늘었다.
 
공화당은 수십 년 동안의 서러운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여전히 많은 한인이 잘 모르는 것 같다. 참고로 내가 등원했을 때 민주당이 82석이나 더 많았다.
 
연방의회를 떠나며 내 정치 인생도 마감했다. 시원섭섭했다. 성공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털어버리고 모든 걸 비웠다. 3선 연방하원의원 경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의 경험을 조국 젊은이들에게 돌려주자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다짐하니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언론에 칼럼도 쓰고 강연도 많이 했다. 한국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내가 경험한 실제 미국 정치를 한국 정치와 제도적으로 비교하면서 알려주고 싶었다. ‘김창준 정경아카데미’는 그런 취지에서 만들었다. 반세기 가까이 미국에 살면서 사업을 일구고 미국의 중앙정치 무대를 경험한 유일한 한인으로서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자는 마음이 컸다.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서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간과했던 주위 사람들이 소중해졌다. 감사함이 밀려왔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제니퍼 안(한국명 안진영), 바로 내 아내다. 실용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라 내가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용기를 북돋아줬다. 항상 명랑하게 웃고 여유가 있다. 토닥여주는 와이프와 살다 보니 툭하면 화를 내던 내 성격도 많이 수그러들었다.
 
아내는 10남매 중 넷째로 맏언니인 고 안진현 씨와 아주 가까웠다. 처형인 안진현 씨는 국민가수 조용필 씨의 부인이었다. 조용필 씨는 손윗동서이지만 내 나이가 더 많다며 항상 깍듯이 대접해줬다. 심장이 약했던 처형은 안타깝게도 2002년에 54세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아직도 조용필 씨가 처형 산소에 가서 벌초도 직접 하며 아내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볼 때 ‘국민가수 이전에 자상한 남편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으로 나를 가장 많이 도운 이는 뉴트 깅그리치 전 연방하원 의장이다.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항상 지켜준 사람이다. 그가 당시 남긴 유명한 말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맴돈다.  
 
“정치는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 마음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나를 따르는 지지자들을 더욱 견고히 단결시키고 한 명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원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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