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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좌절된 학자금 대출 탕감, 다음 수순은?

많은 한인 학생과 학부모들은 교육 때문에 미국에 온다고들 한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드림 스쿨’에 가더라도, 졸업한 후에는 학자금 대출 때문에 고민한다. 필자 역시 비교적 학비가 저렴한 주립대 로스쿨을 다녔지만, 등록금을 연방정부 학자금 대출로 충당한 기억이 새롭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다수 학생과 학부모들은 평균 수만 달러의 학자금 대출 빚(student debt)을 진다. 만약 사립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닌다면 수십만 달러의 빚을 질 수도 있다.   비단 한인 학생, 학부모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재 4500만 명의 미국인이 1조7000만 달러 규모의 학자금 대출을 갖고 있다. 비영리단체인 ‘대학교육기회와 성공연구소(The Institute for College Access and Success)’의 미셸 셰퍼드 잠피니 국장은 “매달 학자금 대출 상환액이 너무 많아 주거비, 식비, 육아비, 교통비 등 생활비 감당도 힘들다”며 “사회생활을 하는 졸업생들에게 학자금 대출 탕감 문제는 매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학자금 탕감안(student loan forgiveness initiatives)’을 야심 차게 제시했다. 학자금 대출자들에게 1만-2만 달러의 연방 학자금 대출을 탕감해준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공화당이 반발한 데다 보수 성향의 법관이 다수인 대법원이 이 정책을 ‘위헌’으로 판결함에 따라 물거품이 됐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의 학자금 대출 탕감 정책은 계속되고 있다. 새로운 두 가지 안을 또 마련한 것이다. 첫 번째는 ‘2003 히어로즈 법(Heroes Act of 2003)’이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 처할 경우 연방 교육부는 일부 학자금 대출 상환 규정을 완화할 수 있다’는 내용을 이용해, 수백만 명의 학생에게 최대 2만 달러의 학자금 대출 탕감 혜택을 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공화당은 위헌 소송을 제기했고, 연방 대법원은 지난해 6월 “히어로즈 법에 대규모 부채 탕감은 명시되지 않았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첫 번째 시도는 좌절됐다.   바이든 행정부의 새로운 학자금 대출 탕감 정책은 ‘고등교육법(Higher Education Act)’을 이용한 것이다. 특정 대출자의 대출금 상환 면제를 명시적으로 규정한 이 법은 올해 가을부터 실시될 예정이다.  학자금 전문 변호사 아담 민스키는 “이 법은 위헌 소송을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기존 학자금 대출 탕감 프로그램도 여전히 유효하다. 학자금 대출 후 20~25년간 상환이 불가능한 대출자들에게 탕감 크레딧을 제공하는 IDR 계정 조정, 10년간 정부, 비영리단체 근무자들의 학자금 대출을 탕감해주는 공공 서비스 대출 탕감(PSLF) 프로그램, 그리고 특정 소득 이하의 대출자들을 위한 납부 면제 및 일부 소득 초과 대출자들을 위한 탕감 기간 단축을 포함하는 세이브 플랜(Save Plan) 등이 있다. 그러나 공화당이 주 의회 등을 장악하고 있는 18개 주에서는 세이브 플랜에 대해서도 위헌 소송을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    한인 사회에도 바이든 행정부의 학자금 탕감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다. “학자금 대출을 탕감해주면, 열심히 일해서 대출을 다 갚은 사람들은 뭐가 되냐”는 이유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에게 소셜 시큐리티 제도가 시작될 때를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1960년대 린든 존슨 대통령이 소셜 시큐리티 제도를 처음 시작할 때도 많은 미국인이 “이전에 소셜 시큐리티 연금을 못 받은 사람에게는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 소셜 시큐리티 연금은 미국인의 노후 생활에 필수 존재가 됐다.  ‘개구리가 올챙이 때 생각하듯이’ 대출금 상황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정부가 도움 주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다.  이종원 / 변호사기고 학자금 좌절 학자금 대출자들 학자금 탕감안 연방정부 학자금

2024-05-15

[열린 광장] 죽음을 대하는 자세

 지난 해는 주위에서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시니어타운에 살다보니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매일 들려오는 장례식, 입원, 뇌졸중, 암 진단 등 우울한 소식들을 접한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남의 일처럼 생각했는데 그 시기만을 알지 못할 뿐 머지않아 내 경우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떤 태도로 맞아야 할까를 미리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직업상 수많은 죽음과 이별, 또 불치병 진단을 받았을 때의 반응 등을 보아 왔다. 그럴 때마다 위로의 말이라며 하지만 인사치레일 뿐 당사자의 진짜 심정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기에 경험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진짜 위로나 충고는 할 자격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당사자보다 밖에서 보는 사람이 주변 상황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황 없는 당사자보다 냉철한 제3자가 오히려 충고나 조언을 할 수 있는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내 자신의 불치병 진단이나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을 아무리 절실하게 상상해 보려 해도 실제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역시 이론일 뿐이다.   하지만 제3자의 객관적 입장에서 그리고 직업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기독교인으로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모든 것이 잘 되고 삶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실제 인생을 살아보면 항상 삶이 순탄할 수는 없다. 그런 과정 속에서 깨달음도 얻게 된다. 성경도 부족함이 없는 평안한 상황에서가 아닌 어려움과 고난이 닥쳤을 때에 인생의 참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경우 보이는 반응은 두 가지 중 하나다. 많은 사람은 재수 없이 이런 처지가 됐다며 불평과 비관, 좌절을 한다.   이에 반해 지혜로운 사람은 냉정을 찾으며 고난의 의미와 자신의 처지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내 자신도 언젠가 불행한 상황에 닥쳐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좌절도 하며 낫게 해달라 매달리는 기도도 하겠지만 가능한 한 빨리 냉정을 되찾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암환자들은 ‘암’이라는 진단이 계기가 되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게 된다. 삶도 중요하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은 필연적이다. 언젠가 찾아올 죽음에 대해 지혜롭게 생각하고 준비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김홍식 / 은퇴 의사열린 광장 죽음 불치병 진단 비관 좌절 장례식 입원

2022-01-10

[열린 광장] 죽음을 대하는 자세

 지난 해는 주위에서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시니어타운에 살다보니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매일 들려오는 장례식, 입원, 뇌졸중, 암 진단 등 우울한 소식들을 접한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남의 일처럼 생각했는데 그 시기만을 알지 못할 뿐 머지않아 내 경우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떤 태도로 맞아야 할까를 미리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직업상 수많은 죽음과 이별, 또 불치병 진단을 받았을 때의 반응 등을 보아 왔다. 그럴 때마다 위로의 말이라며 하지만 인사치레일 뿐 당사자의 진짜 심정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기에 경험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진짜 위로나 충고는 할 자격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당사자보다 밖에서 보는 사람이 주변 상황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황 없는 당사자보다 냉철한 제3자가 오히려 충고나 조언을 할 수 있는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내 자신의 불치병 진단이나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을 아무리 절실하게 상상해 보려 해도 실제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역시 이론일 뿐이다.     하지만 제3자의 객관적 입장에서 그리고 직업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기독교인으로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모든 것이 잘 되고 삶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실제 인생을 살아보면 항상 삶이 순탄할 수는 없다. 그런 과정 속에서 깨달음도 얻게 된다. 성경도 부족함이 없는 평안한 상황에서가 아닌 어려움과 고난이 닥쳤을 때에 인생의 참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경우 보이는 반응은 두 가지 중 하나다. 많은 사람은 재수 없이 이런 처지가 됐다며 불평과 비관, 좌절을 한다.     이에 반해 지혜로운 사람은 냉정을 찾으며 고난의 의미와 자신의 처지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내 자신도 언젠가 불행한 상황에 닥쳐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좌절도 하며 낫게 해달라 매달리는 기도도 하겠지만 가능한 한 빨리 냉정을 되찾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암환자들은 ‘암’이라는 진단이 계기가 되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게 된다. 삶도 중요하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은 필연적이다. 언젠가 찾아올 죽음에 대해 지혜롭게 생각하고 준비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김홍식 / 은퇴 의사열린 광장 죽음 불치병 진단 비관 좌절 장례식 입원

2022-01-05

[김창준] 연방하원 4선 좌절…FBI 수사 5년 만에 종결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7〉 정치인 생활 끝나다 주거 제한·공화당 지원 끊긴 악조건 속 완패 "한국에서 사업가·정치인 경험 전하자" 귀국   연방하원 4선 도전을 놓고 고민이 많았다. 당시 정치자금 수사가 끝나지 않았다. 상당히 곤혹스러운 입장이었다.     온갖 어려움 속에 캘리포니아 41 선거구 예비선거에 입후보했다. 같은 공화당 소속 후보들이 나를 공격했다. 상대 후보인 개리 밀러 주 의원은 내가 곧 감옥에 갈 것처럼 흑색선전을 늘어놓았다. 선거를 치르는 중 나는 정치자금 사건을 경범죄로 종결짓는 ‘플리바겐(plea bargain·사전형량조정제도)’을 마지못해 수락했다. 주거제한과 보호관찰형을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 예비선거 직후까지 선거구에 발도 디딜 수 없었다. 선거구에 가지 않는 조건으로 연방수사국(FBI)이 5년간의 수사를 끝내기로 했다. 악몽의 시간이었다. 나뿐 아니라 친구와 가족들도 너무나 힘들어했다. 대만 국적자로부터 후원금 5만 달러를 받은 것 등이 문제였다. 후원자들의 국적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또 진보 성향의 LA타임스가 나를 저격했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억울한 마음이 컸지만 할 수 없었다. LA타임스 여기자와 인터뷰 한 번 잘못해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다니. 내가 너무 순진한 마음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거제한과 보호관찰형을 선고받은 불리한 여건에서 캠페인 활동을 해야 했다. 당시 내 나이 59세였다. 경범죄는 기록에 남지 않는다는 변호사의 끈질긴 설득에 굴복하긴 했지만 그토록 힘든 시간을 견뎌 놓고 왜 마지막 순간에 양보했는지, 지금도 후회할 때가 많다.     공화당은 중립을 내세웠다. 현역의원에게 관례로 돼 있는 일체의 지원도 끊었다. 선거운동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메일과 전화, 비디오 영상물 등을 통해 의정활동을 알리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손발을 다 묶인 처지에서 선거판에 나선 셈이었다. 결국 예선에서 완패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 나는 이렇게 끝나는구나.’ 허무했다. 그토록 애태우며 가꿔온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더티한 정치판에 내가 희생양이 됐다는 기분이었다.     소리 내 울었다.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다이아몬드바 시의 시장이 되던 날의 기쁨과 연방 하원의원이 되던 날의 환호와 박수갈채.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나를 향해 몰리던 기자들.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기뻐했던 가족과 지지자들 얼굴이 떠올랐다.     연방 하원의원 3선을 하는 동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한다. LA타임스와 오렌지카운티 레지스터 등 주류언론에서도 나의 치적과 활약상에 대해서는 모두 높은 평가를 했다.     본회의 참석률 100%에다 최다 발언 기록을 남겼고 우수 의정상도 받았다.     최근 내 뒤로 훌륭한 연방의원들이 나란히 탄생해 반가웠다. 같은 남가주에서 같은 소속인 공화당의 미셸 박 스틸과 영 김 의원이 올해 연방의회에 입성했을 때, 내 일처럼 기뻤다. 이들이 나를 반면교사, 타산지석으로 삼길 바란다. 내가 겪은 불이익과 고난을 뛰어넘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인 정치력을 더욱 키워나갈 것으로 믿는다.     개인적으로 1994년도 뜻깊은 한 해였다. 뉴트 깅그리치 연방하원 의장의 노력으로 남부 민주당 의원 10여명이 탈당하고 공화당에 입당했다. 미국 정치사에 커다란 혁명이었다. 의사당 안에선 며칠에 한 번씩 공화당에 입당한 민주당 의원들을 환영하는 리셉션이 열렸고 나도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해 11월 공화당은 230대 204, 26석 차로 46년 만에 다수당이 됐다. 나도 여기에 일조했다는 기쁨이 크다. 덕분에 나도 건설교통 소위 위원장으로 선임됐다. 어렵게 잡은 다수당인 만큼 바쁘게 일했다. 밤새도록 의회가 계속될 때면 사무실 소파에 누워 틈틈이 새우잠을 잤다. 투표한다는 벨이 울리면 졸음을 참고 의사당에 들어가 투표했다. 밤에 배가 고프면 컵라면을 뜨거운 물에 데워 먹었다. 몇 달을 그렇게 밤마다 라면만 먹어서 체중이 많이 늘었다.   공화당은 수십 년 동안의 서러운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여전히 많은 한인이 잘 모르는 것 같다. 참고로 내가 등원했을 때 민주당이 82석이나 더 많았다.   연방의회를 떠나며 내 정치 인생도 마감했다. 시원섭섭했다. 성공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털어버리고 모든 걸 비웠다. 3선 연방하원의원 경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의 경험을 조국 젊은이들에게 돌려주자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다짐하니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언론에 칼럼도 쓰고 강연도 많이 했다. 한국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내가 경험한 실제 미국 정치를 한국 정치와 제도적으로 비교하면서 알려주고 싶었다. ‘김창준 정경아카데미’는 그런 취지에서 만들었다. 반세기 가까이 미국에 살면서 사업을 일구고 미국의 중앙정치 무대를 경험한 유일한 한인으로서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자는 마음이 컸다.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서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간과했던 주위 사람들이 소중해졌다. 감사함이 밀려왔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제니퍼 안(한국명 안진영), 바로 내 아내다. 실용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라 내가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용기를 북돋아줬다. 항상 명랑하게 웃고 여유가 있다. 토닥여주는 와이프와 살다 보니 툭하면 화를 내던 내 성격도 많이 수그러들었다.   아내는 10남매 중 넷째로 맏언니인 고 안진현 씨와 아주 가까웠다. 처형인 안진현 씨는 국민가수 조용필 씨의 부인이었다. 조용필 씨는 손윗동서이지만 내 나이가 더 많다며 항상 깍듯이 대접해줬다. 심장이 약했던 처형은 안타깝게도 2002년에 54세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아직도 조용필 씨가 처형 산소에 가서 벌초도 직접 하며 아내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볼 때 ‘국민가수 이전에 자상한 남편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으로 나를 가장 많이 도운 이는 뉴트 깅그리치 전 연방하원 의장이다.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항상 지켜준 사람이다. 그가 당시 남긴 유명한 말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맴돈다.     “정치는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 마음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나를 따르는 지지자들을 더욱 견고히 단결시키고 한 명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연방하원 좌절 정치인 경험 귀국 연방하원 공화당 지원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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