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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진심 담긴 연설에 단박에 지지율 꼴찌서 1위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2> 첫 유세에서 판세 뒤집다

1992년 연방하원에 출마한 김창준(가운데) 당시 다이아몬드바 시장이 LA 폭동 이후 복구작업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LA 폭동은 한인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김 후보의 선거운동은 탄력을 받았다. [김창준 전 의원 제공]

1992년 연방하원에 출마한 김창준(가운데) 당시 다이아몬드바 시장이 LA 폭동 이후 복구작업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LA 폭동은 한인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김 후보의 선거운동은 탄력을 받았다. [김창준 전 의원 제공]

김창준 연방하원 후보가 한인사회 각계의 리더들 앞에서 출마의 변을 밝히고 있다. 연방하원 출마 선언 후 첫 번째 공식 한인사회 미팅이었다. [김창준 전 의원 제공]

김창준 연방하원 후보가 한인사회 각계의 리더들 앞에서 출마의 변을 밝히고 있다. 연방하원 출마 선언 후 첫 번째 공식 한인사회 미팅이었다. [김창준 전 의원 제공]

'이민자 영어' 불구 진솔한 내용에 청중들 감동
선거 기간 LA폭동…'강한 한인' 이미지 덕 봐


첫 유세장. 나는 유학생으로 미국에 왔고 직업이 엔지니어라고 나를 소개했다. 뜻밖에 그 대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엔지니어는 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흥미롭게 나를 지켜봤다. 나는 회사를 운영하는 CEO이며 공항 건설을 공약을 내걸었다. 시장으로서 내 치적도 얘기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해서 시민권을 땄다고 했다. 시민권을 받은 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자 청중이 출렁였다. 그 대목에서 가슴이 벅차올라 나도 눈물샘이 터졌다. 청중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미국 시민권을 받고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후보 중 누가 애국심이 가장 강한지, 비교해 보십시오. 시민권을 받고 이렇게 감동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곳곳에서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닦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음 여론조사가 실시됐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1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서툰 영어가 오히려 제대로 먹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안 하는 얘기가 분명 어필했다. 다른 후보들은 다 어떤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느니, 변호사로서 이런저런 활동을 했다느니 하는 얘기만 늘어놓았다. 연설 내용이 워낙 대조적이었고 말도 짤막짤막하니까 오히려 심금을 울렸던 모양이다.

가장 걱정했던 토론은 오히려 내게 용기를 준 계기가 됐다. 솔직한 게 역시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평생 ‘거짓말쟁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욕을 먹건 말건, 무조건 솔직하게 얘기하자’가 내 신조였다. 토론을 하면서 앞으로도 일생을 그렇게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그때 이후 연설이나 토론 때 솔직하게 말하는 용기가 생겼다.

그런데 선거운동에 한창 몰두하던 중 LA 폭동이 터졌다. 출마 후 내게 닥친 첫 번째 정치 시험대였다. 이 사건에 대한 대처는 선거 캠페인에 상당한 탄력을 줬다. 무엇보다 폭동은 한인들에게 미국사회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가져다준 사건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1992년 4월 29일. 나는 마침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다이아몬드바 시 집무실에 앉아 다음 주로 예정된 공청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운영하는 토목 설계회사 ‘제이 김 엔지니어스(Jay Kim Engineers, Inc.)’ 경리부에서 전화가 왔다. 회사 직원들 급여가 은행 계좌에 아직 입금이 안 됐으니 빨리 사무실로 와 달라는 급한 전화였다. 그런데 사무실 밖에는 화가 잔뜩 난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시장이 뭘 하는 거냐” “어째서 우리 동네는 길 청소를 하지 않느냐” “길이 얼마나 더러운지 지금 같이 가서 보자” 등 막무가내로 내게 항의했다.

그렇게 복도에서 한동안 왈가왈부 실랑이를 하는데 갑자기 비서가 경찰서장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다고 했다. 경찰서장은 LA 다운타운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다이아몬드바 시는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LA에서 불과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 우리 시에서도 긴급회의를 열어 대책을 세워야 했다.

속으로 ‘오늘은 계속 뭔가 안 풀리는 날이구나’ 하며 달력을 봤다. 4월 29일이었다. 불현듯 어려서 서울에서 본 4·19혁명 생각이 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뛰어다니던 대학생들의 모습. 이승만 대통령의 오른팔인 이기붕씨의 서대문 집에 들어가 가구들을 모두 끌어내 불을 지르고, 이기붕씨 아들이자 이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했던 끔찍한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론 4·29 폭동은 우리의 4·19 혁명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그날 오버랩이 됐다.

나는 LA 경찰만으로는 폭동 진압이 어려울 것에 대비해 주변 도시들에 도움을 요청하고 우리 시 경찰도 비상대기 상태에 있도록 지시했다. 경찰차를 타고 바로 LA로 향했다. 한인타운 올림픽 가에 도착하니 ‘대한민국 해병대’라고 적힌 머리띠를 두르고 해병대 군복에 공기총을 든 한인 젊은이들이 달려와 나를 에워싸며 환영했다.

이들은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해병대 출신 한인들이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LA 한인 상가는 올림픽 가를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퍼져 있어 마치 남쪽에 사는 흑인들이 북쪽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백인들을 향해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흑인 폭동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한인 상가들이었다.

한인 상가는 식당과 가발 가게, 세탁소, 주유소, 가구점 등으로 라틴계의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하는 업소가 주를 이뤘다. 흑인들이 남쪽에서 북쪽의 백인 지역으로 올라오려면 한인 타운을 통과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남미 출신 주민들도 한인 상가를 부수고 맥주와 의류, 텔레비전 등을 약탈해 가는 모습이 뉴스를 통해 계속 나왔다.

한인 상가는 난장판이 됐고 사방이 불바다였다. 해병대 복장을 한 ‘한인타운 지키기’ 결사대들이 건물 지붕 위에 올라가 공기총을 쏘면서 한인 상점들을 보호하는 장면도 텔레비전에서 중계됐다. 마치 6·25 때 시가전을 보는 것 같았다.

이것이 미국이란 말인가. 많은 미국인은 이 장면을 보면서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삶의 터전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나선 용감한 한인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나는 이들 덕에 단지 한인이라는 이유로 덩달아 영웅 취급을 받았다. 내 선거운동도 이 사건으로 더 탄력을 받았다.

한인들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와 피해를 안겨준 미 역사상 최악의 흑인 폭동. 그런데 그 사건이 내게는 연방 정치무대 진출을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나는 억수로 운이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원용석 기자 won.yongsuk@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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