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준] 사업의 절정에서 가슴 속 뭔가가 꿈틀댔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신생도시 다이아몬드바 시의원 출마 결심
아무리 뛰어도 반응 냉랭…승리 나도 놀라
1977년에 회사 ‘제이킴 엔지니어스’를 설립했다. 상·하수처리장 등 도시개발 프로젝트 설계 회사였다. 중소기업청에서 지원 받은 10만 달러에 직장생활을 하며 번 돈을 합쳐 다이아몬드바에 사무실을 열었다.
직원은 파트타임 비서 한 명 뿐이었다. 낮에는 사업계약을 따내느라 동분서주하고 밤이면 주문받은 설계를 하느라 도면과 싸웠다. 다행히 일거리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서부 6개 주에서 일할 수 있는 면허증을 얻은 덕이었다. 나중에는 혼자서 일감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설계 직원을 더 채용했다. 시간이 지나니 고용할 사람은 더욱 많아졌다. 어느새 150명의 직원을 둔 회사로 컸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나만의 경영 전략을 세웠다. 첫째, 미국에서 사업하는 동안 한국적 사고방식을 버린다. 둘째, 미국 사회의 관습과 불문율을 기억한다. 셋째, 어떤 경우라도 경영자와 사원의 경계선을 지킨다. 넷째, 사원 모두가 내 회사라는 자긍심을 갖도록 애를 쓴다.
제이킴 엔지니어스는 설립 10년 만에 연 매출 1000만 달러를 올릴 정도로 급성장했다. 캘리포니아 500대 설계회사 중 하나로 떠올랐다. 서부지역에만 여덟 군데에 지사를 설립했다. 도시개발 전문가로 인정받으면서 LA타임스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나를 소개했다. 여기저기 강연 요청도 쇄도했다.
그러는 동안 마음 한켠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직 욕심이 생겼다. 2년 동안 이웃 도시인 샌디마스의 도시계획자문위원장으로 봉사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바로 왔다. 신흥 도시인 다이아몬드바의 두 번째 시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초대 시의원 3명 중 한 사람이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사임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가슴이 뛰었다. 마치 나를 위해 문이 열리는 듯했다. 그런데 ‘내 주제에 무슨 시의원 선거 출마냐’는 생각도 바로 엄습했다. 기대와 함께 괴로운 마음이 오버랩 됐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선거 출마를 놓고 고심했다.
설계 책상 위에 A4용지를 펼쳐 놓고 펜을 들었다. 종이 반을 접어 한쪽엔 ‘유리한 점’ 다른 한쪽엔 ‘불리한 점’이라고 썼다.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경우 나의 장단점도 써내려갔다. 불리한 점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다.
출마 결심을 하니까 머리가 말끔해졌다. 다이아몬드바 시에 대해 공부했다. 지역도서관에 가서 시의 역사와 주민 분포, 재정 상태 등에 대한 자료를 모조리 찾아 읽었다. 인구 8만 정도의 다이아몬드바는 독립한 지 1년밖에 안 된 신생도시였다. 도시가 새로 생기면 보통 4년 안에 도시 전체의 마스터플랜을 세운다. 마침 시의원 선거 출마 시점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릿속으로 다이아몬드바 시를 짓고 허물고를 반복했다.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나를 알리는 게 가장 중요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 주민의 85%가 백인인 이 도시가 과연 아시안을 대표로 선출할까. 속으로 여러 번 나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선거 기간 중 토론이 8차례 있었다. 최대한 쉬운 말로, 단순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
“정부와 개인기업이 공조해서 작지만, 효율 높은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여러분의 세금 부담을 확실히 덜어드리겠습니다. 도시계획 전문가로 일해 온 저의 경험과 노하우로 가장 합리적이며 안전한 도시를 만들겠습니다.”
이민자인 내가 변호사 출신인 다른 후보들을 토론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법은 오로지 하나였다. ‘단순하라.’ 그런데 주민들이 나를 주목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지역 언론 기자들도 나를 철저히 외면했다. 인터뷰 기회조차 없었다. 선거 전날까지도 그랬다.
이쯤 되니 당선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개표가 시작되니까 괜히 출마했다는 후회감마저 밀려왔다. 그런데 초반부터 충격적인 개표 결과가 나왔다. 개표 결과는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2위보다 1000표나 많았다. 밤 11시쯤 승리가 확정됐다. 나보다 놀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높이 들었다.
당시 미 전역에서 시의원에 출마했던 한인은 3명. 이중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나만 유일하게 당선됐다. 내 신분도 순간 확 변했다. 한인 언론과 한국 특파원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어떻게 위상이 이렇게 빨리 바뀌나.’ 이튿날 한인과 한국 언론에 ‘한인·한국 이민자 최초로 미국 시의원에 당선되다’라는 제목의 보도가 잇따랐다. 그날 이후 내 이름 앞에는 ‘최초’ ‘유일’이란 수식어가 계속 따라붙었다.
캘리포니아주의 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LA나 샌프란시스코처럼 큰 도시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시장이 모든 행정을 책임진다. 하지만 대다수 작은 도시들의 시장과 시의원들은 자기 직장이 따로 있다. 이들은 시의회에서 결정권만 쥐고 있으며 시 운영은 시티 매니저에게 맡긴다. 다이아몬드바도 그랬다. 나는 제이킴 엔지니어링을 운영하면서 매주 화요일 시의회에 참석했다.
시의원 임기는 4년이다. 그런데 시의원이 된 지 1년 반 만에 시장 자리가 공석이 됐다. 다이아몬드바 시장은 2년마다 5명의 시의원 중에서 선출한다. 다이아몬드바 시장 선출은 유권자가 아닌, 시의원들 투표로 결정된다. 나는 출마를 결심했다. 이어 또 다른 시의원 3명은 물론 나와 경쟁하려던 시의원까지 설득해 만장일치로 시장에 당선됐다. 시의원에 당선된 지 2년 만이었다. 최초의 한인 시장 당선이었다.
시장이 되고 나서 바빴다. 아침 8시면 집무실로 향했다. 8시부터 9시까지 시장 업무를 본 후에 제이킴 엔지니어링으로 출근했다. 파트타임 시장으로 일하면서 받는 급료는 600달러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봉사활동이었다.
공약대로 나는 작은 정부 만들기를 실행에 옮겼다. 시청사를 지으려던 계획을 없애고 빌딩에 세를 얻어 들어갔다. 시장실도 책상 하나 겨우 놓을 정도로 좁은 방을 빌려 썼다. 시의회도 별도 건물 없이 카운티 환경부 회의실을 임대해 사용했다. 시 공무원 채용도 중단했다. 다이아몬드바와 같은 규모의 시를 운영하려면 통상 150명 정도의 공무원이 필요하다. 나는 파트타임 직원 2명을 포함, 총 24명의 공무원만 채용했다. 이런 노력으로 연 1000만 달러의 예산을 줄였다.
다이아몬드바는 효율적인 재정관리로 흑자를 냈다. 또 경찰서를 두지 않고 매년 LA 카운티 셰리프국과 계약을 맺고 외주를 줬다. 예산 절약에 주민들은 크게 감격했다.
원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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