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준] 의원 모두 가기 싫어한 베트남, 달랑 혼자 가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3〉깅그리치 부탁 미군 유해 발굴 현장에
초라한 하노이 보며 6·25 때 서울 떠올라
대우건설의 초현대식 호텔서 묵으며 뿌듯
어느 날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보고 베트남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 발굴 작업에 연방의회를 대표해 참석해 달라고 했다.
좀 화가 났다. 보낼 의원이 없어서 나보고 가라는 것 같았다. 내가 아시안이라 적격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직감은 맞았다. 아시아태평양 소위 위원 중 베트남에 가겠다는 의원이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으면 당연히 내가 가는 것인가?’ 깅그리치 의장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연방하원 의장 부탁이라 고사할 수 없었다. 보통 베트남처럼 먼 곳은 의원들이 단체로 간다. 그런데 다른 의원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면서 나만 가는 꼴이 됐다. 보좌관 한 사람만 데리고 그렇게 떠났다.
혼자 간다고 생각하니까 다른 의원들 행동이 더 얄밉게 느껴졌다. 유럽이나 캐나다, 남미라면 서로 가겠다고 난리 치는 의원들이다. 그런데 베트남은 인기가 없었다. 나라고 내킬 리 없었다. 좋게 마음먹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베트남으로 향했다.
비행기를 두어 번 갈아탄 끝에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활주로를 바라보니 여기저기 군인들이 총을 어깨에 메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6·25 전쟁 때 북한에 의해 함락된 서울에서 봤던 인민군을 다시 보는 기분이 들어 언짢았다.
마른 체격의 베트남 군인들은 키도, 군복도 어쩌면 그리도 그때 본 인민군들을 닮았던지….
초라한 비행장에 착륙해 트랩을 내려서자 성조기를 단 미국산 검은색 세단이 다가와 나를 태웠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해병대원들의 깍듯한 경례와 경호를 받으면서 ‘오길 잘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순간 상황 따라 금방 기분이 바뀌는 나 자신을 보며 실망했다. ‘나도 별수 없구나.’
차 안에서 바깥을 내다봤다. 초라하고 가난한 시가지 모습이었다. 하노이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중심가인데 시커먼 5층짜리 빌딩 두어 개가 전부였다. 건물 오른쪽에 대리석으로 만든 초현대식 고층건물이 보였다. 주위가 초라한 탓에 유난히 돋보인 그 빌딩이 내가 머물 호텔이었다.
미국 대사관은 그 호텔만을 사용한다고 했다. 한국의 대우건설이 그 호텔을 건축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우건설이 옆의 고층 사무실 빌딩도 모두 소유하고 운영한다는 말을 들었다. 한인으로서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날이 마침 미 대사관저가 새 건물로 옮긴 첫날이었다. 내게 입주 환영 테이프를 끊어달라고 했다. 테이프를 끊고 사진을 찍은 뒤 안에 들어가 보니 좁은 4층 빌딩에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설마 4층까지 걸어가라고?
걸어 올라가야 했다. 층계를 통해 올라가느라 숨이 가빴다. 점심 먹고 옛 미 대사관으로 향했다. 이곳저곳 허물어진 곳을 감쪽같이 수리해서 박물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미 공관에서 일했던 베트남 직원들이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미군 헬리콥터에 매달려 가다가 떨어졌다. 얼마 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면서 카불 공항에서 C-17 수송기 매달렸다가 떨어져 죽은 아프간인들처럼. 일반인들이 필사적으로 대사관 담장을 넘는 처절한 광경이 연출된 장소가 이곳이다. 당시 현장은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그날 저녁 대사관 주최로 어느 베트남인이 운영하는 최고급 프랑스 식당에서 만찬을 했다. 베트남은 1858년부터 1954년까지 거의 100년 동안 프랑스 식민지였다. 그래서 프랑스 식당이 많았다. 지금은 1억 가까이 되는 인구를 가진 베트남 역사는 한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이튿날 아침 커피를 마시러 아래층에 내려왔을 때 김우중 회장의 부인을 소개받았다. 그 당시 김우중 회장 부부가 호텔을 운영했다. 부인은 키가 훤칠하게 큰 미인이었다.
호텔 뒤뜰에는 호사스러운 시설을 갖춘 수영장이 있었다. 베트남인들은 너무 비싸 못 들어왔다. 호텔 고객들은 한국과 미국에서 여행 온 투숙객이 대다수였다. 그러다 보니 손님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날 아침 검은색 대형 포드 SUV를 타고 대사관 직원과 경호원을 대동하고 산길을 따라 미군 유해발굴 장소로 향했다. 가는 도중 신호등에 걸려 차가 정지하면 아이들과 아낙네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이들은 안을 들여다보며 껌을 팔려 했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도 좀 달라고 했다. 성조기를 달고 있는 미 관용 차량에 달려들어 구걸하는 것을 보면서 6.25 직후 한국의 가난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돈을 주려고 지갑을 꺼냈다. 그랬더니 직원 한 명이 ‘사람들이 더 몰려들면 운전하기 어려워지니 아이 한 명에게만 얼른 1달러만 주고 가자’고 했다. 1달러를 줬다. 아니나 다를까. 움직이는 차에서 뒤를 바라보니 수십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연희동 세 번 초대…만날 때마다 통일 강조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세 번 만났습니다.
첫 만남은 김일성이 사망(1994년 7월 8일)한 직후였습니다. 또 김정일 사망(2011년 12월 17일) 직후에도 전 대통령 연희동 집에 초대받았습니다. 제가 본 전 대통령은 말을 대단히 잘하는 분이었습니다. 군 출신답게 씩씩하게 말하고, 대화 주도권을 가져가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저도 말하는 걸 좋아하지만 전 대통령과 세 번 만남 모두 거의 그분 말을 듣는 데 치중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분 말이 기억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시기가 그래서인지, 대화 주제가 세 번 모두 같았습니다. ‘통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미관계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김 의원, 통일이 빨리 돼야 합니다. 미국과 협력해서 통일을 이뤄야 합니다.” 그분 말이 절실하게 들릴 정도였습니다.
전 대통령에 대한 논란이 많다는 것은 다 알 겁니다.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끌고, 88 올림픽 유치 등은 그분의 치적입니다. 하지만 민주화가 되면서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박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 학살에 책임이 있습니다. 또 그분이 법정에서 “전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고 한 것을 보며 실망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중앙일보 ‘남기고 시리즈’를 하면서 전 대통령 두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평가는 엇갈리지만 두 분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한 시대가 끝났습니다. 전 대통령의 안식을 기원합니다. 유가족에게도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원용석 기자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