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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볼커의 금리 인상에 무너진 일본의 폭풍성장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4〉기세 등등하던 일본과 미국의 위기의식
미국을 모두 사들일 듯 록펠로 등 전방위 매입
여섯 번 금리 올리자 부동산 가격 20% 폭락  
 
눈을 감았다. 비만이 많은 미국. 그런 반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베트남 사람들. 6.25 직후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던, 비참했던 우리 모습이 오버랩됐다. 내 인생을 돌아봤다. 미국 땅으로 건너와 비즈니스도 성공하고 미국을 대표하는 연방하원 의원으로 선출됐다. 감사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옆에서 대사관 직원이 나더러 괜찮냐고 물었다. “나도 어렸을 때 이렇게 가난한 나라에서 자라 마음이 울적하다”고 했다. 두 시간 남짓 울퉁불퉁 농촌 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발굴 현장에는 50명 남짓한 베트남 아녀자들이 조심스레 땅을 파헤치면서 열심히 뭔가를 찾고 있었다. 브리핑을 통해 들어 보니 언덕 너머 미군 전투기가 추락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동네 사람들 말에 따라 근방을 샅샅이 뒤지면서 전사자들 유품이나 목에 걸었던 인식표 등 뭐라도 찾기 위해 벌써 거의 한 달을 이곳에 있었다고 했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나온 게 없고 쇳조각 몇 개만 발견했는데, 그나마 비행기 잔해가 아니라는 실험 결과가 나와 일주일쯤 더 찾아본 뒤 다른 장소로 옮길 예정이라고 했다.
 
발굴 현장에서 일하는 아녀자들은 굉장히 밝은 표정으로 서로 웃어가며 수다를 떨었다. 이곳에서 하루에 버는 돈이 남편들 한 달 벌이보다 좋았다. 미 해병대원들과 함께 따뜻하게 데운 ‘깡통’ 음식을 점심으로 먹으며 들은 얘기에 따르면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을 봤다는 장소 열 군데 중 유골과 유품이 발견되는 경우는 한 곳 정도에 불과하다. 당시 미국은 발굴된 유해가 미군의 것임이 확인되면 베트남 정부에 유해 한 구당 100만 달러를 지급했다. 미국은 수천 구의 유해 발굴을 기대했지만, 실제 발굴된 유해는 극소수다.
 
그렇다면 미 정부는 왜 이처럼 엄청난 돈을 써가면서 베트남 산골짜기 곳곳을 뒤져 미군 유해를 찾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희생된 군인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지, 미국 국민에게 보여주려는 의도다.  
 
그동안 일시 중단됐지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덕에 미국은 북한 지역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전사하거나 실종된 미군 유해 55구를 송환했다. 내가 트럼프 전 정부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다.  
 
비용이 얼마가 들건 미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미국민 유해를 기어이 찾아내겠다는 미국 정부의 이런 노력은 군인들과 그 가족들의 사기를 높일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미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충성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런 정책들이 미국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베트남 이후 미국을 위협한 나라는 또 있었다. 바로 일본이다.  
 
1980년대 당시 일본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며 세계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 수출 대국이었다. 일본의 경영기술을 배우기 위한 IST란 프로그램이 미국 내에서도 유행했다. 기업체들은 물론 관공서까지 프로그램에 참여해 세미나를 했다.
 
90년대 들어서도 일본의 폭풍 성장은 멈춤이 없었다. 세계 시장을 다 흡수할 기세였다. 아프리카에 여행을 가 아프리카 토착민 예술품을 잔뜩 사 들고 미국으로 돌아와 보니 모든 게 거의 다 ‘made-in-Japan(메이드 인 재팬)’이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미국 신문 톱 뉴스로 나올 정도였다.  
 
무엇보다 일본 상품이라면 모두 품질을 신뢰했다.  
 
미국은 아예 일본을 두고 ‘Japan Inc.(일본기업)’라고 불렀다. 미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기업문화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있다. 마쓰다 자동차를 싣고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던 수송선에 이상이 생겨 바닷물이 배에 스며들었다. 이 사고로 물에 잠긴 수백 대의 자동차에 녹이 슬어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자 책임을 통감한 배의 선장이 할복자살했다.  
 
미국 기업들에 이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책임감이 강하다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말이 되나?’ 미국인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도대체 기업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경영하는 것일까’ ‘직원들이 회사에 누를 끼쳤다며 자살하는 문화는 무엇인가.’ 돈 몇백 달러 더 준다고 회사를 쉽게 옮겨 다니는 미국의 직장인 문화와는 너무나 다른 세계였다. 회사에 죽음으로 충성할 미국인이 있을까?  
 
분명한 것은 일본 기업문화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일본식 경영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3대가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아이들 교육비까지 회사가 책임진다. 당시 일본 기업문화였다. 미국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내가 초선 의원이었을 때 지역구 주민이 많이 제기한 불평 가운데 하나가 하와이에 관한 것이었다. 하와이 여행을 할 때마다 마치 일본 영토에 갔다 온 듯하다는 것이었다. 현지 호텔을 일본인이 대거 사들이면서 생긴 일이었다. ‘미국이 2차 대전에서 일본에 승리한 게 맞나’ 자문할 정도였다. 일본 땅을 팔면 미국 땅을 통째로 다 사고도 남는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와이뿐만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페블비치 골프링크도 시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샀다. 지금도 여전히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 LA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건물인 빌트모어 호텔, 할리우드 배우들이 많이 가는 리비에라 컨트리클럽, 뉴욕의 상징인 록펠로 센터 등 미국의 자존심이 서린 건물들이 다 일본인 소유로 넘어갔다.  
 
할리우드 상징 중 하나인 콜롬비아 영화사가 소니에 넘어가면서 미국인들의 일본을 향한 위기의식과 반감은 극에 달했다. 미국이 전방위로 일본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이었다.
 
의회에선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RB)의 폴 볼커 의장을 불러 청문회까지 열었다. “일본이 부동산을 마구 사들이며 미국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것을 대책 없이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자유시장 원리상 법으로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금융경제 정책을 통해 국제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견제할 방법은 없는가?”  
 
날카로운 질문들이 쏟아졌다. 볼커 의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를 믿고 지켜봐 달라.”  
 
미국이 대반격에 돌입했다. FRB는 연방 이자율을 0.25% 인상한 데 이어 여섯 번에 걸쳐 이자율을 계속 올렸다. 그 바람에 부동산 시장이 침체했다. 일본인 부동산 투자가들이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 70%를 미국 은행에서 융자받고, 나머지 30%의 직접 투자는 일본 은행의 부동산 담보 투자여서 별안간 20%까지 부동산이 급락했다. 일본에 계속 잽을 맞았던 미국. 그런데 KO 펀치 한 방으로 일본을 휘청이게 한 것이다.  
 
한 부동산을 담보로 다른 부동산 2~3개를 문어발식으로 매입한 일본인들은 돈을 갚으라는 미국 은행 요구에 진땀을 흘렸다. 결국 일본인들은 미국 내 부동산을 구매 가격의 3분의 2 정도인 헐값에 팔아야 했다. 이때 충격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일본은 이후 약 25년의 경기 침체에 빠졌다. 이를 놓고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혹은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부른다.  
 
당시 볼커 의장이 “지켜봐 달라”며 자신 있어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일본은 소형차와 라디오, 텔레비전, 카메라 등을 수출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 미국을 너무 얕본 것이 그들의 커다란 실책이었다.
 

원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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