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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이겼다'…나는 멍하니 팔만 높이 들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3> 최초의 한인 연방 하원 되다

1992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김창준 의원이 캠페인 관계자들의 박수를 받으며 샴페인을 들고 자축하고 있다. 김 의원은 유일한 아시안 공화당 의원이자 한인 최초의 연방하원 의원이었다. [김창준 전 의원 제공]

1992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김창준 의원이 캠페인 관계자들의 박수를 받으며 샴페인을 들고 자축하고 있다. 김 의원은 유일한 아시안 공화당 의원이자 한인 최초의 연방하원 의원이었다. [김창준 전 의원 제공]

전국 휩쓴 클린턴 열풍 불구 압도적 승리
200불 들고 미국행 32년만에 일군 성과


예비선거 3주 전. 신문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가 또 1위였다. 척 베이더가 2위 짐 레이시가 3위였다. 두 후보 캠프에 비상이 걸렸다. 서로를 향한 공격에 혈안이었던 이들은 나를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선거의 고비는 마지막 일주일이다. 각 후보가 끝까지 쥐고 있던 비장의 카드를 던지는 타이밍이다. 한순간에 모멘텀을 타거나 잃을 수 있다. 선거 참모들과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작전을 짰지만 마음이 불안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마지막 일주일 하루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드디어 투표일. 가장 최근 여론조사에서 내가 1위를 했지만 진짜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이다. 개표에 앞서 스스로에게 마음을 비우자고 했다. 초반부터 치열했다. 베일러 후보와 막상막하였다. 밤 11시가 넘어 부재자 투표함이 집계되면서 내가 베일러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격차는 더 벌어졌다. 순간 선거 캠페인 운동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김창준 의원과 뉴트 깅그리치 전 연방하원 의장. [김창준 전 의원 제공]

김창준 의원과 뉴트 깅그리치 전 연방하원 의장. [김창준 전 의원 제공]

결국 내가 베일러 후보를 10% 포인트 차로 누르고 공화당 후보로 선출됐다. 하원의원 본선은 11월 첫째 주 화요일이었다. 그해 대통령 선거도 열려 관심은 뜨거웠다.

내가 출마한 41지구는 공화당 우세 지역이라 처음에는 안심했다. 그런데 선거가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빌 클린턴의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의 인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공화당원인) 내 선거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런데 기우였다. 선거일에 나는 49% 득표율로 민주당 후보를 완파하고 당선됐다.

한인사회가 그토록 염원하던 최초의 한인 연방하원의원의 꿈을 이룬 것이다. 승리가 확정된 순간 너무 기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두 팔을 높이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한인사회는 물론 한국 언론에서도 나를 두고 '역사를 장식한 영웅'이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지금 와서 솔직히 말하건대 운이 좋아 당선됐다. 모든 여건이 내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당선 배경에는 열심히 도와준 많은 친구와 자원봉사자 그리고 한인 힘이 더 컸다.

1993년 1월4일.

워싱턴DC 연방의회 의사당 앞에 섰다. 겨울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가슴 속엔 뜨거운 열정이 넘쳤다. 단돈 200달러를 들고 태평양을 건너온 지 32년. 식당에서 접시를 닦던 내가 이렇게 미국을 대표하는 연방하원의원으로 등원하는 첫날이었다. 내 가슴에는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와 숫자 '103'이 새겨진 의원 배지가 달려 있었다. 103차 의회라는 뜻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을 떠나 빈털터리로 낯선 이역만리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디딘 지 꼭 32년. 연방하원의원 배지를 달고 미합중국 수도 워싱턴DC에서 관광객이 아닌 의원 자격으로 의사당을 향해 걸어가는 내 마음속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날 폴리 하원의장이 주관한 취임선서에서 처음 선서를 한 초선의원은 나를 포함해 모두 110명.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숫자였다.

의사당을 방문해 본 사람들은 그 웅장함에 절로 탄성을 자아낸다. 가운데 우뚝 솟은 돔을 중심으로 양쪽에 두 개의 작은 돔이 있고 그 양 옆에는 하원의사당(남쪽)과 상원의사당 (북쪽)이 있다. 돔 밑은 로툰다(Rotunda: 둥근 천장의 홀)가 있다. 천장과 벽은 온통 미국 역사를 설명하는 그림으로 채워져 있고 양쪽에 있는 조그만 로툰다 내부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의 동상이 가득 자리 잡고 있다. 이 어마어마하게 웅장한 건물이 160여년 전인 1846년에 준공됐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컴퓨터는 물론 전기 전화도 없던 그 시대에 말과 밧줄로 이처럼 웅장한 건물을 세웠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남쪽 길 건너에는 세 개의 하원 건물 북쪽에는 세 개의 상원 건물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동쪽에는 연방대법원이 웅장하게 서 있고 그 옆에는 두 개의 의회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이 모든 건물은 지하로 연결돼 있는데 지하 벽은 원자폭탄에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두껍고 견고하게 만들었다. 또한 워낙 오래된 데다가 통로가 너무도 복잡해 지하에서 헤매는 관광객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나도 첫 3개월 동안에는 지하통로에서 계속 방향을 잃고 헤맸다. 상원과 하원 건물들은 모두 지하 전기 기동차로 연결돼 있다. 본당에서 투표가 없는 한 관광객들도 이것을 탈 수 있는데 항상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의사당 빌딩 안은 항상 관광객으로 붐빈다.

의회 등원 첫날. 나는 공화당 의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의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2층 방청석도 꽉 찼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본회의장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온 의원이 많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대개 아버지 옆에 서 있었지만 팔에 안긴 아이들도 있었다. 회의장 안 분위기는 도떼기 시장 같았다. 신성한 의사당에서 엄숙한 개회식을 예상했던 탓인지 그 분위기에 더 놀랐다.

7년 전 사업관계 일로 워싱턴에 왔다가 관광 겸 의사당에 들렀던 적이 있다. 그때 2층 방청석에서 웅장하고 화려한 본회의장을 내려다봤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의원이 돼 아래층 의사당에서 2층 방청석을 올려다보게 되다니 정말 사람의 팔자는 알 수 없다는 말이 실감 났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국산 싸구려 여행 가방을 들고 왔다가 LA 국제공항 바닥에서 가방이 터지면서 짐이 모조리 쏟아졌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머님이 정성스레 볶아 챙겨주신 고추장 병이 터지고 김이 사방으로 날렸는데 이를 하나씩 집느라고 정신을 못 차렸다. 그때의 망신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나는 연방의원으로서 성심껏 제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나는 선서를 하기 위해 토머스 폴리 하원의장 앞에 섰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하원의장이 오른손을 들었다. 나도 심호흡을 하며 오른손을 들었다.

"당신은 미국 헌법을 지지하고 국내외 모든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것이며 직무를 훌륭하고 충실하게 집행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합니까?"

"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저와 함께 동행해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게 다 하나님 뜻이었다. 나는 시의원과 시장을 거치면서 단 한 번의 낙선 없이 공직에 줄줄이 당선됐다.

취임선서가 끝나고 공화당 원내대표 권고로 103차 회기 개원 첫 발언을 했다.


원용석 기자 won.yongsuk@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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