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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대입 실패에 좌절 춤에 빠졌다 미국 유학 결심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한국말 했다고 뺨 맞다 해방 이후 한글 배워
연극반서 성격 바뀌고 '부잣집 도련님' 벗어나
 
선거에 떨어지고 나서 문득 내 조국 한국에 가고 싶었다. 어린 시절 거닐던 골목길이 자꾸 생각났다. 다시 그 길을 걷고 싶었다.  
 
나는 일본 식민지 지배 시절에 태어났다. 4대 독자로 부모님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 부모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엄마, 아빠에게 둘째를 낳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 사업 덕분에 기와집에서 편안하게 살았다. 나는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저 그런 보통 아이였다. 종로구 통인동 청운초등학교에 다녔다. 매일 아침이면 ‘일본 천황’이 있다는 동쪽을 향해 절을 했다. 일본어가 서툴러 한국말이 튀어나오면 즉시 일본인 선생에게 불려가 따귀를 맞았다.
 
학교에 들어간 이듬해였던 것 같다. 하늘에 비행기 소리가 자주 들렸다. 그럴 때면 공부를 하다 말고 책상 밑으로 숨었다. “깨졌다 싱가포르, 물러섰다 영∼국.” 학교에서 돌아오면 ‘천황 폐하의 선물’이라며 나눠 받은 고무공을 튕기면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노래를 이렇게 불렀다.  
 
어느 날 내 뺨을 때리던 일본인 선생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으스대던 일본인 학생들도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해방을 맞은 것이다. 학교에는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선생님 말씀이 지금도 기억난다. “우리는 이제 더는 일본말을 쓰지 않는다. 너희는 한국 사람이다.”
 
어렸지만 해방의 맛을 알았나 보다. 학교 가는 것도 즐거워졌다. 공부도 잘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권유로 보성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1년이 지나지 않아 한국전이 발발했다. 며칠도 안 돼 한강 다리가 끊어져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였다. ‘안심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게 문제였다. 서둘렀다면 우리도 건널 수 있었다.
 
당시 을지로에 살았다. 인민군들이 요란한 굉음을 내는 탱크를 타고 서울 거리로 밀려 들어왔다.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인민군들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짜고짜 우익정치단체에 아버지 이름이 올라 있다면서 “아버지 어디 있냐”고 물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이미 몸을 피하신 뒤였다.  
 
화가 난 인민군들은 우리 집에 빨간 딱지를 붙였다.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면 안 된다는 표시였다. 어머니와 나는 집안 물건들을 남몰래 내다 팔며 간신히 끼니를 해결했다. 인민군은 밤마다 어머니와 나를 불러냈다. 나는 완장을 차고 한강 변으로 나가 삽으로 매일같이 땅을 팠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올지도 모를 국군에 대항해 싸울 수 있도록 참호를 파는 일이었다.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던 국군이 석 달 만에 서울을 되찾았다. 하지만 우리 집은 폭격을 맞아 기둥이 무너지고 기와지붕도 내려앉았다. 겨울이 되자 중공군이 넘어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사람들은 피란을 떠났다. 우리도 봇짐을 꾸려 리어카에 싣고 피란길에 올랐다. 3대 독자인 아버지에게는 변변한 친척이 없었다. 아주 먼 친척이 살고 있다는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연극반에 들어갔다. 당시 난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대전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게 자신감이 됐다. 권투 선수였던 집주인 아들에게 권투를 배운 것도 도움이 됐다. 그렇게 나는 변해갔다. 나를 옭아매던 ‘4대 독자’ ‘부잣집 도련님’ 굴레를 조금씩 벗어던졌다.  
 
당시 연극반에는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배우 이순재 씨도 있었다. 지금도 종종 서로 안부를 묻는다. 교회에도 처음 나갔다. 밴드부 활동을 하면서 두 명의 친구와 가깝게 지냈는데 모두 착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이들의 권유로 종교생활을 했다. 성가대 활동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 가는 게 좋았다. 성가대에서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있었다. 매주 일요일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성경공부도 시작했다.  
 
활발해진 나의 대전 생활과 달리 현지에서 마땅한 사업을 찾지 못하셨던 아버지는 서울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대전고 2학년 때 다시 상경했다. 다시 온 서울은 활기가 넘쳤다.  
 
대학 입학시험을 치를 때가 됐다. 당시 학교 성적이 괜찮아 선생님은 나를 비롯해 7명에게 서울대 법대 원서를 써 주셨다. 합격을 장담했던 7명 중 나만 떨어졌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버지 강권에 못 이겨 후기대학에 시험을 치고 붙었지만 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머니한테 용돈을 얻어 양복 한 벌을 맞춰 입고 머릿기름을 발랐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명동에 있는 댄스클럽을 찾아갔다. 클럽을 가득 메운 남녀가 손을 맞잡고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이 신기했다. ‘슬로우 슬로우 퀵퀵∼.’
 
“저게 무슨 춤이야?” “지르박이란 거야. 요즘 최고 인기 춤이야.” 다음 날 나는 대학 입학금을 들고서 댄스 클럽을 다시 찾아갔다. 어차피 공부할 마음도 없었다. 연극에 몰입했던 것처럼 나는 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창준이 이놈, 도대체 뭘 하고 싸돌아다니는 거냐. 재수하든지 편입하든지 할 것이지. 허구한 날 모양만 내고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바지 주름을 잡으며 대문을 나서는 나를 향해 아버지 호통이 이어졌다. 매번 못 들은 척하고 나갔다. 춤에 일가견이 있었다. 클럽에서 나는 소문난 춤꾼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춤을 추면서도 마음이 영 편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막연히 미국 유학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법 공부보다는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기로 하고 공대 쪽으로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후원자를 찾기 위해 미국의 로터리 클럽에 편지를 보냈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그레이버씨에게서 답장이 오고, 그가 사는 동네의 채피 대학에서 입학허가서가 왔다. 변두리에 있는 대학이었다. 그런데 군 복무를 마치지 않으면 비자 받기가 힘들었다. 아버지에게 부탁해 당초 입대 예정일보다 6개월 먼저 입대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카투사를 훈련시키는 제2훈련소로 보내졌다. 어이없게도 군대에서도 춤바람이 한창이었다. 장교들은 쉬는 날이면 지르박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훈련소에 들어간 다음 날부터 장교들에게 춤을 가르쳤다. 훈련은 거의 받지 않았다. 그리고 두 달 만에 의무대로 발령이 났다.
 
어느 날 고참이 나를 찾았다. 링거 2병을 주며 대전 시내의 어떤 약국에 갖다 주라고 했다. 약사는 링거병을 받자마자 봉투를 내밀었다. 빳빳한 현금이 들어 있었다. 병사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수많은 약과 주사가 그렇게 빼돌려지고 있었다. 사회나 군대나 곳곳에 부정이 만연했다. 환멸을 느꼈다. 결심했다. 미국에 가기로.

원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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