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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한인 첫 연방의원, 난 역사에 도전장을 던졌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 연방의회 입성, 첫발을 떼다

1992년 캘리포니아주 연방하원 41지구에 출마한 김창준 후보의 출정식. 한인 1세인 김 전 의원은 선거 캠페인을 하면서 가장 걱정됐던 대목이 ‘영어’였다고 밝혔다. [김창준 전 의원 제공]

1992년 캘리포니아주 연방하원 41지구에 출마한 김창준 후보의 출정식. 한인 1세인 김 전 의원은 선거 캠페인을 하면서 가장 걱정됐던 대목이 ‘영어’였다고 밝혔다. [김창준 전 의원 제공]

김창준 전 의원은 연방하원 출마 당시 매일 이어지는 유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1992년 김 의원이 다이아몬드바 시에서 유권자들에게 한 표를 호소하고 있다고 회고했다. [김창준 전 의원 제공]

김창준 전 의원은 연방하원 출마 당시 매일 이어지는 유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1992년 김 의원이 다이아몬드바 시에서 유권자들에게 한 표를 호소하고 있다고 회고했다. [김창준 전 의원 제공]

'庶政刷新(서정쇄신)'.

정치적 폐단을 고쳐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애초 그가 정치무대에 뛰어든 이유다. ‘다이아몬드바 최초의 아시안 시장’ ‘한인 최초 연방하원의원’은 목적지를 향한 과정에서 따라붙은 수식어지 목표가 아니다.

김창준(82) 전 공화당 연방하원의원은 1939년 3월 27일 서울시 청운동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4·19 혁명 등 격동의 시기를 겪으며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어려서부터 남다른 끼는 있었다. 중학교 시절 배우 이순재와 연극도 했고, 명동 한복판에서 지루박을 추며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1958년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 그는 군 제대 후 1961년 유학길에 올랐다. 단돈 500달러를 들고 캘리포니아로 온 그는 낮에는 채피 칼리지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식당에서 일했다. 이민생활은 어려웠다. 서툰 영어는 모든 환경을 어렵게 했다. ‘내가 뭐하러 미국에 왔나.’ 입버릇처럼 하던 자문은 곧 후회로 돌변하곤 했다.

USC에서 토목공학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전국에 하수처리장을 설치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1976년에 고속도로와 하수처리 사업 설계 전문 회사인 ‘제이 킴 엔지니어스’를 설립했다.

1990년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이듬해 시장에 당선됐다. 1992년 한인 최초의 연방하원의원으로 당선된 뒤에는 3선에 성공했다. 이후 20년간 연방의회에 한인이 없었다. 그가 한인 정치의 선구자였음을 방증한다.

지금은 한국에서 정치, 경제 선진화 취지로 김창준정경아카데미를 설립해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새로운 환경은 거센 풍랑이다. 이를 타고 넘어갈 때 기회가 온다”는 그의 인생 스토리에 들어가 본다.

다이아몬드바 시장 시절 지역구 신설 용기
지지율 꼴찌·영어 핸디캡, '정직'으로 돌파


1992년 2월 초. 나는 연방하원 선거 출마를 결심했다.

당시 인구 8만의 작은 백인 도시였던 LA 동부 지역 다이아몬드바(Diamond Bar)에서 최초의 아시아계 시장으로 선출돼 1년간 재직하면서 행정 경험이 있던 나는 더 큰 무대로 나가고 싶은 열정이 생겼다. 또 이민 1세 한인으로 사상 최초의 연방하원 당선이라는 새 역사에 도전할 욕심도 솔직히 있었다. 우리라고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연방하원 지역구는 인구 60만명을 대변한다. 마침 절호의 기회가 왔다.

가주 인구가 해마다 늘어나 연방 하원의원 의석이 2개 늘었다. 한 석은 북가주, 한 석은 남가주에 추가로 배정됐는데, 내가 시장으로 있는 지역구였다. 현역 의원이 없는 새 지역구가 구획된 것이다.

선거전략을 세워야 했다.

캠페인 매니저부터 찾는 게 급선무였다. 과거 몇 명의 후보를 당선시켰는지 기록을 꼼꼼히 살핀 뒤 밥 구티라는 베테랑 선거 전문가를 채용했다. 구티를 만나보니 체격이 작으면서도 체중은 많이 나가는 친구였다. 공격적인 선거전략가로 소문난 인물답게 인상이 예리했다.

바로 상대 후보 분석에 돌입했다.

가주 하원의원인 정치 베테랑 척 베이더를 유력 후보로 지목했다. 변호사 짐 레이시도 만만치 않은 후보라고 했다. 연방 상무부 소속 변호사 출신으로, 언변이 뛰어났다. 연방 정부 제도에 대한 지식도 풍부했다. 이외 4명의 후보가 더 있었다.

첫 번째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참담했다. 내가 꼴찌였다. 그것도 한참 뒤처졌다.

베이더가 70%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1위를 달렸고, 짐 레이시가 20%로 2위였다. 나는 지지율 5%로 3위, 꼴찌였다. 순간 앞이 캄캄했다. ‘괜히 출마해서 망신만 당하는 것 아닐까’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오기가 발동했다.

처음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안 좋게 나왔다고 포기하는 것은 더 웃긴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론조사 결과에서 희망을 봤다. 유권자들이 직업 정치인과 변호사들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다고 응답한 것이다. 나는 직업 정치인이 아니고 언변으로 먹고사는 변호사도 아니었다. 내 직업은 엔지니어였다. 당시 연방의회에는 엔지니어 출신 의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내 직업을 어필하기로 했다.

선거 공약은 크게 2개로 압축했다.

첫째는 ‘정부도 민간기업 같이 운영해야 한다’는 것. 기업은 적자로 부도가 나면 문을 닫는다. 그런데 정부는 적자가 나면 ‘돈을 더 찍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기업이 적자가 나면 물건값을 올리는 대신 비용을 줄이는 게 맞다. 그렇다면 정부도 적자가 나면 세금을 올릴 게 아니라 지출을 줄여야 한다.

둘째는 워싱턴 DC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연방 하원의원이 너무 오랫동안 워싱턴에 머물면 타성에 젖는다. 또 게을러지기 마련이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새 사람을 선출해야 한다. 그래서 3선 이상은 출마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임기 제한(term limit)’을 지역민에게 약속했다.

내 선거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됐다. ‘수십 년을 정치로만 소일한 낡은 정치인을 워싱턴으로 보낼 것이냐 아니면 70% 이상이 변호사인 연방 의회에 또 한 명의 변호사를 보탤 것이냐. 그럴 생각이 아니라면 직업 정치인도, 변호사도 아닌 CEO 출신의 나를 의회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마침 미국은 1990년대 초반부터 CEO 출신 정치인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 또 여론조사 2위를 달리던 레이시는 내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1위로 앞서가던 베이더 의원만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인신공격을 일삼았다. 나는 이런 두 사람의 다툼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손뼉을 치며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나는 정부도 개인이 사업하듯 운영한다면 천문학적 규모의 적자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이아몬드바 시장으로서 내 업적을 내세웠다. 인구 8만명 규모의 도시면 보통 공무원이 200여 명 정도 된다. 그런데 우리 도시는 모든 서비스를 개인회사에 하청(outsourcing)해 시 직원이 20명 남짓했다.

특히 다른 도시들이 재정적자에 허덕일 때, 우리 시는 남은 예산을 은행에 예금할 정도였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이것이 바로 정부를 개인기업 같이 운영한 결과임을 강조했다.

그래도 내심 항상 불안했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토론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토론이 아니라 영어였다.

나는 한인 2세도 아니고 1세다. 또 백인 동네에서 거주하는 아시안이었다. 사실 ‘말’이라는 것은 어려서부터 해야 원활하게 나온다. 난 27세에 미국에 이민 왔다. 이민생활에서 영어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내 영어에는 한국어 억양이 강했다. 방법은 하나였다.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후보 토론회 날이 왔다. 800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대부분 백인이었다. 나는 유일한 아시안 후보라 절로 튀었다. 토론 시작도 전에 ‘이 사람 도대체 누구냐’는 웅성거림이 곳곳에서 들렸다. 앞에 먼저 자신을 소개한 후보들은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두 후보 모두 자기들이 그동안 어떤 일을 해왔는지를 끝없이 설명해 나갔다. 기가 죽었다. 몸이 얼어붙었다. 어느새 내 순서가 왔다.


원용석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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