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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하수처리 전문 업체 창업 주류사회 진입 느낌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20〉사업가로 성공하며 미국 정착
 
신문 배달하며 USC서 토목공학 전공
한인정치협(KAPA) 조직 정치 눈 떠
 
유학생들이 모이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국제관계 연구 동아리였다. 그런데 모임에 가는 게 큰 부담이었다. 영어가 안되니까 그들의 토론내용을 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고 토론을 벌이며 무언가 개선하려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한국 교육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학생들은 각 나라 외교정책을 두고 토론을 벌였다. 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주제였다. 때때로 토론에서 코리아도 나왔다. ‘세계 속에 한국이 있구나.’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나는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 식민지 교육을 받았고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도 겪었다. 당시 한국 역사와 나의 존재를 놓고 고민한 적은 없었다. 부정선거에 항거해 목숨을 내걸고 구름 떼처럼 경무대(현 청와대)로 치닫던 학생들 무리를 보고서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먼 미국에 오니까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동아리 회장을 새로 뽑는다고 했다. ‘내가 나가봐야지.’ 새로 들어온 신입 회원의 출마 선언에 다들 생뚱맞은 표정이었다. 정견발표를 준비해야 했는데 영어 소통이 잘 안 됐던 나로서는 도움이 필요했다.
 
친절하게 대해주던 한 백인 여학생을 찾아갔다. 정견발표를 대신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며칠 뒤 학교 신문에 나와 그녀 사진이 크게 실렸다. 우리 팀은 교내에 화제를 불러 모았다. 결국 동아리 회장으로 덜컥 당선됐다. 그 여학생은 동아리 행사마다 나와 함께 늘 같이했다.  
 
우리 파트너십은 이런저런 이유로 2년 임기 중 7개월 만에 깨졌다. 나로서는 영어가 더 절실해졌다. 여긴 미국이었다. 영어를 제대로 해야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늦은 밤 집에 돌아오면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V와 F, TH, Z 발음이 가장 어려웠다.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어느 날 신문을 소리 내 읽었다. 신문에 실린 주요 기사를 몇 번씩 소리 내 읽었다. 그렇게 영어 공부에 매달리자 유학생활 1년 만에 영어 실력이 부쩍 늘었다. 하루가 다르게 귀가 열리고 말문이 터졌다. 그래도 특유의 악센트는 여전히 남아 있고 아직도 서툰 부분이 있다.
 
그 무렵 지역 신문사 보급소에 새 일자리를 얻었다. 새벽 시간에 일해 낮에 공부하기 좋았다. 수입도 좋은 편이었다. 신문 배달을 하는 동안 단 하루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걸 좋게 봤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역 책임자가 됐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수입이 늘었다. 병원 청소도 그만뒀다.  
 
신문 보급소 일을 하면서 내가 가고 싶었던 USC 토목공학과 2학년에 편입했다. 꿈이 실현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원대한 꿈을 가져야 한다고들 한다. 그때 내 삶은 원대한 꿈을 갖고 살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코앞에 닥친 현실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학부 공부를 하면서 미국과 미국 사회가 이해됐다. 그러다 보니 미국 친구도 사귀게 됐다.  
 
토목공학은 적성에 맞았다. 이 분야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내 성격이 엔지니어에 적합하다는 걸 몰랐다. 공학은 기준을 세우고 표준을 만드는 일이다. 모든 작업은 기준에 맞아야 했다. 그런 일이 내 성격과 잘 맞았다. 덕분에 좋은 성적으로 USC 졸업 뒤 곧바로 USC 대학원에 진학했다.
 
전공은 환경공학으로, 상하수도 물 정화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주경야독으로 조교까지 하면서 1969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 온 지 8년 만이었다. 학교에서는 박사과정을 권했지만, 연구직은 내게 맞지 않았다. 주류사회에 나가 사업가로 성공하고 싶었다.
 
마침 대학원을 마칠 무렵 미 전역에서 하수처리장 설치로 바쁠 때였다. 전공 분야라 좋은 직장에 금방 취직됐다. 신문사 아르바이트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던 빡빡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하수처리 컨설팅 업체인 ‘제임스 몽고메리’에서 경험을 쌓은 뒤 직접 회사를 차렸다.
 
하수처리장 짓는 일은 주정부에서 발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으면서 업무상 정부 관계자들을 자주 만났다. 하수처리장 수주를 잘 따기 위해 신문·잡지를 꼼꼼히 읽으며 정부에 관한 지식을 키워나갔다.
 
미 전역에서 동시다발로 폐수처리 사업이 이어지다 보니 일거리가 쏟아졌다. 하루가 멀다하고 비행기를 타고 서부 지역을 날아다녔다. 미국으로 건너와 처음으로 내가 뭔가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더는 이방인이 아니고 미국 주류사회 일원이 된 기분이었다.  
 
엔지니어로 왕성하게 일하면서 일본계가 만든 아시아기업가협회(AAA)에 나가 활동했다. 얼마 뒤 일본계를 제치고 내가 AAA 회장이 됐다. 그러면서 일본계가 어떻게 미국의 주류사회와 소통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인들과의 교분도 이어갔다. 한인이 늘면서 한인들을 위한 이익단체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무역업을 하던 배기성씨와 함께 1972년 한미정치협회(KAPA·카파)를 조직했다. 나는 2대 회장이 됐다. 우리는 카파의 첫 번째 사업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출마한 제리 브라운 당시 후보의 정치모금 파티를 열어 후원금을 걷어줬다. 브라운은 8년 동안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했다. 당시 최연소 주지사였던 그가 40년 뒤 다시 주지사직에 당선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카파 회원들은 정치 후원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게 됐다. 앞으로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2세들을 위해서라도 한인들이 더는 먹고사는 일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미국은 거대한 나라지만 그 거대한 나라를 움직이는 것은 지역구민들이 뽑는 주 의원, 시의원이라는 걸 실감했다.  
 
정치 모금은 한인사회 의견을 주지사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길이었다. 풀뿌리 민주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원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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