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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칼럼] 캐나다 단풍잎과 한강의 기적

캐나다가 뜨겁다. 급락하던 집값이 반등하고 소비는 견조하며 실업률은 낮다. 0% 수준이던 금리를 4% 중반대로 올려놓았음에도 경제활동이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있다. 이에 캐나다 중앙은행은 중단했던 금리인상을 다시 시작했고 필요할 경우 더 올릴 수 있다는 메시지까지 전달했다. 무엇이 캐나다 경제를 과열로 이끌고 있을까?   답은 적극적인 이민 정책에 있다. 최근 캐나다 인구는 4000만명을 넘어섰다. 작년 캐나다 인구증가분의 75%가 이민자인데, 2036년경에는 인구의 30%를 이민자가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민자의 대부분이 숙련노동자라는 점도 중요하다. 캐나다는2025년까지 145만명의 이민자를 받을 계획을 작년에 발표했는데, 이중 약 60%를 숙련 노동자에게 할당했다.     이러한 이민 정책 덕분에 은퇴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노동가능인구가 증가하고 취업자수도 증가하고 있다. 이민자들은 노동시장에 참가해 얻은 소득으로 소비를 하고 주택을 구입한다. 이는 다시 재화 생산과 주택 건설로 이어지면서 일자리가 생겨나는 선순환의 고리가 형성됐다. 고금리에도 캐나다 경제를 성장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이민자들이 맡고 있다.     캐나다의 성장은 한국과 비교된다. 한국은행은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4%로 재차 낮췄다. 지난해말 제시했던 1.7%에서 두 차례 수정되면서 낮아진 것인데, 한국이 2%보다 낮게 성장했을 때는 글로벌 위기나 침체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이러한 암울한 전망은 부동산가격이 높고 부채의 대부분이 변동금리인 상황에서 고금리가 한국경제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 상당 부분 기인한다. 한국은 미국만큼 금리 수준을 올리지도 못했고 금리인상 기간도 짧았다.     그럼에도 금리 상승이 주택담보대출의 이자비용 부담으로 이어지고 주택가격 하락과 맞물리면서 전세시장이 타격을 받는 등 가계 부문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기업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은데 단기로 조달해 장기로 투자하는 상업용 부동산, 재건축 사업장 곳곳에서 사업이 지연되는 등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외에 수익성이 낮음에도 저금리 덕에 연명하던 한계기업들도 고금리가 지속되면 살아남기 힘들어 보인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러한 저성장이 비단 고금리 때문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한국은 이미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만으로 경제를 부양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장기 저성장 구조에 진입했다. 연금, 노동, 교육을 포함한 전부문에서 과거의 고성장시대와 다른 구조로의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선 노령화와 인구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출산율을 높이는 방안과 함께 정교한 이민정책이 필요하다. 단일 민족 프레임을 고수하기 보다는 철저하게 우리나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민자를 선별해야 한다. 캐나다도 과거에는 순수한 백인 정착지를 표방하며 인종 차별적인 이민정책을 시행하다가 출산율이 하락하고 숙련 기술자가 부족해지자 이민 점수제를 도입하고 자국의 경제적 발전에 이익이 될 사람들을 선별하는 정책으로 이민정책을 변경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행인 것은 최근 정부가 이민 정책에 대한 공론화를 진행할 것이라고 천명했다는 점이다. 이민청 설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최근 불거진 외국인 투표권 문제와 필리핀 가사도우미 문제는 우리 정부의 이민에 대한 접근의 단면을 보여준다. 여전히 낮은 다문화 수용성도 걸림돌이다. 이민자들이 갈등요소로 자리 잡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렵다고 포기하거나 외면해서는 안된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낸 우리나라가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소멸되는 국가가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 나서야 할 때다. 김태현 /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과장한국은행 칼럼 캐나다 단풍잎 고금리가 한국경제 캐나다 경제 캐나다 중앙은행

2023-07-04

[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김학수 '경동시장'

동대문구 제기동과 청량리 사이에 있는 경동시장의 오래 전 모습이다. 경동상회의 기와 지붕과 바나나를 주렁주렁 걸어놓은 모습 그리고 장 보러 온 아주머니들의 옷이 70년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림이다. 경동시장의 출발은 노점시장이었다. 한국전쟁 후 일상생활이 회복되기 시작하자 경기도와 강원도의 농촌 주민들이 경춘선.경의선.경원선.중앙선에 농산물과 야채를 싣고 성동역(지금의 미도파백화점 청량리점)과 청량리역에서 내려 좌판을 벌였다. 야채 값이 싸고 싱싱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들의 발걸음이 늘자 역 부근에 노점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장사는 소문'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리라.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돈 냄새가 나면 큰 돈 가진 사람이 움직인다. 1960년 6월 노점시장 부근에 '경동공설시장'이 문을 열었다. '서울(京 경)의 동쪽에 있는 시장'이라는 뜻으로 경동시장이라고 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인정이 있던 세상이라 노점상들에게 시장 안에서 장사할 수 있는 혜택을 줬다. 경동시장은 문을 연 얼마 후부터 서울시내에서 모든 농산물과 야채 과일을 가장 싸게 파는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시장의 특성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예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도 그런 경동시장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혜촌 김학수(1919 ~ 2009) 화백은 역사풍속화를 많이 그렸는데 '경동시장'은 그가 조선시대 시장풍경을 재현해서 그린 '남대문 밖 칠패시장' 과 '종로 육의전(六矣廛)'의 맥을 잇는 '시장 풍속화' 다. 활발한 생동감 살아있는 삶의 현장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가게와 좌판상인의 '공존'이다. 그 이유에 대해 오래된 가게 주인들은 좌판상인들의 매상이 가게와 비교가 안 될 뿐 아니라 가게에서 취급하지 않는 품목을 많이 취급하기 때문에 '공존'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경동시장은 이렇게 가게와 좌판이 지혜롭게 공존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소비자의 취향을 따라갔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고추.마늘.옥수수 등 밭 작물과 버섯.고사리.도라지 등의 산채류 그리고 밤.대추 등의 견과류가 산지에서 직접 모여들 수 있도록 가게수를 늘렸고 이런 과정을 통해 '곡물과 야채는 경동시장'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아무리 경기가 나빠도 특성화된 품목에 대해 일등을 할 수 있으면 망하지 않는다 라는 '장사 원칙'을 아는 시장경영이었다. 1970년대는 양념류.제수용품(祭需用品)과 한약재 전문시장으로 위치를 굳혔고 건어물(乾魚物) 상가도 자리를 잡았다. 1983년부터는 인삼.수삼.꿀까지 취급하기 시작하여 경동시장 구관 2층을 중심으로 60여 개의 점포가 개설됐다. 경동시장은 이 그림이 완성된 1989년 이후에도 계속 확장했고 기와지붕이던 경동상회도 현대식 상가로 바뀌었다. 야채와 과일은 가락동시장의 개장으로 전에 비해 침체됐지만 '엄마표' 야채를 찾는 손님들의 발길은 계속된다. 그림 속의 경동시장 모습과 지금의 경동시장 모습을 비교하면 한국 경제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변하고 발전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 자본주의 경제는 매일매일 진화하고 소비자의 취향도 시시때때로 변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사하는 상인은 세상의 흐름을 눈여겨보면서 그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미리미리 해야 한다. '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연재는 오늘이 마지막 회다. 그동안 격려와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소설가 이충렬

2010-11-29

[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화성능행도'

‘화성능행도’는 정조 대왕이 1795년(정조 19년)에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8일 동안 일정 중 중요한 행사 장면을 8폭 병풍에 그린 그림이다. 이 병풍은 정조의 어명을 받아 왕실용으로 그렸고, 당시 8폭 병풍을 그릴 때는 도화서 화원들이 한 두 폭씩 나눠 그렸다. 미술사학계에서는 당시 화원이던 단원 김홍도가 전체에 대한 감독을 하면서 ‘시흥환어행렬도’는 직접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인물의 표현에서 김홍도 특유의 필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실용 제작 그림에는 화원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정일 뿐이다. ‘시흥환어행렬도’는 8폭 병풍 중, 정조 대왕과 혜경궁 홍씨 행렬이 음력 윤 2월 15일 오전 8시 45분에 화성 행궁을 출발하여 서울로 올라오다가 하룻밤 묵을 시흥 행궁(始興行宮) 앞에 도착하는 모습이다. 이 그림을 보면, 임금님 행차 때는 길을 가던 백성들이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오늘 이 그림을 소개하는 이유는, 그림의 위와 아래에 장사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먼저 윗부분 오른쪽에 보면 술을 파는 하얀 천막이 두개가 있다. 아래 오른쪽 부분에도 술파는 천막이 있고, 그 왼쪽에는 천막 없이 뙤약볕 아래서 술파는 아낙의 모습이 세 명이나 보인다. 들판에서 술을 판다고 해서 ‘들병이’라고 불리는 여인들이다. 그리고 ‘들병이’ 아낙 왼쪽에는 나무판을 들고 다니며 장사하는 소년이 두 명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잔술을 팔고, 아이들이 나무판을 들고 다니며 장사하는 모습은 조선 후기의 여러 그림에서 볼 수 있다. 단원 김홍도의 유명한 풍속화 ‘씨름’에도 나무판을 들고 구경꾼 사이를 오가는 소년이 있고, 개성에서의 잔치하는 모습을 그린 ‘기로세련계도’에는 소나무 숲 아래에서 잔술을 파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태껸 시합을 하는 모습과 구경꾼을 그린 필자 미상의 ‘대쾌도’에서는, 잔술을 파는 남자 ‘들병이’의 모습과 나무판을 들고 다니는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에 보면 나무판에 있는 물건이 자세히 그려져 있고, 여러 음식 연구자들은 나무판에 있는 노란색이 엿이나 과자가 아니라 떡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그림이 그려진 18세기 중엽에는 전국에 1000여 곳의 5일 장이 있었다. 따라서 장터를 찾아다니며 잔술을 파는 ‘들병이’와 떡장수들이 많았고, 그들은 장터뿐 아니라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이 행차 때만 장사하기 위해 천막과 떡판을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숭상하는 ‘선비의 나라’였기 때문에 장사하는 사람들을 ‘장사치’라고 부르며 천시했지만, 태종 12년인 1412년에 설립된 ‘육의전’을 가게를 중심으로 꾸준하게 상업 활동이 이뤄졌다. 조선 후기에는 화폐유통이 활성화 되면서 ‘육의전’ 상인들 중에서 부자가 많아지기 시작했고, 일부 상인은 세도가와 결탁한 ‘매점매석’으로 ‘거상’이 되었다. 이렇게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 잘 유지되던 ‘육의전’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은 1883년 인천항의 개항 때문이다. 미국, 유럽, 일본에서 도착하는 증기선에서, 값 싸고 질긴 서양 옷감, 튼튼하고 편리한 독일제 바늘, 사용이 간편한 성냥, 등잔용 석유 등 눈이 휘둥그레지는 ‘개화 물품’이 내려졌고, 그 물건들은 막 개통된 기차에 실려 서울로 쏟아져 들어왔다. 상술이 무엇인지 알고 있던 서양 상인들은 조선인들의 반감을 피하기 위해 회사이름을 조선식 이름으로 만들었다. 독일인 에드바르트 마이어는 1883년 인천에 ‘조선 세창양행’이라는 바늘 수입회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바늘 봉투 겉면에, 갓 쓴 조선인 두 명을 그린 다음 그 사이에 한문으로 ‘세창’이라고 써넣었다. 당시 유일한 신문인 ‘한성순보’에 광고도 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일본 담배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생긴 담뱃갑에 한글로 ‘상등지 천연쵸(좋은 종이에 담겨있는 천연 연초)’라고 쓰고, 담배 이름도 한글과 영어로 '리리이(Lyly)', '수디이(Star), ‘채리이(Cherry)'로 표기했다. 일본어는 옆에다 조그맣게 표기했을 뿐이다. 누가 대장간에서 만든 바늘을 사겠는가. ‘육의전’ 상품들은 경쟁력을 잃었고, 조선 상인들은 하나 둘 종로를 떠났다. ‘육의전’의 몰락은 조선왕조 경제의 몰락이었고, 경제력이 허약해진 조선은 결국 나라를 잃었다. 소설가 이충렬

2010-11-22

[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김기창 '복덕방', 1900년대 땅투기·사기 빈번하자 감시자 역할

불과 20 ~ 30년 전까지만 해도 동네 어귀에는 어김없이 복덕방 간판이 있었다. 모시적삼을 입은 동네 어르신들이 장기나 바둑을 두며 한 수 물러라, 싫다면서 옥신각신 하다가도, 손님이 오면 '복덕방'이라고 쓰여진 포렴(布簾)을 걷고 '사무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집을 사려는 건지, 전세인지, 월세인지를 물어본 후 헛기침을 하면서 앞장섰다. 그렇게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여러 집을 보여줬는데도 마음에 드는 집이 없다고 그냥 가면, 헛품 팔았다고 입맛을 다시며 복덕방 앞 의자에 힘없이 걸터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러나 보여준 집이나 방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 함께 사무실로 와서 계약서를 꺼내며 흥정을 시작 했다. 많은 이들은 '복덕방 할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얼마 동안까지는 '집주름'이라고 불렀다. '집에 대한 흥정을 붙여 주고 보수를 받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복덕방(福德房)이라는 단어는 생기복덕(生氣福德, 복과 덕을 가져다 주는 곳)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복덕방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건 1905년이다. "미동에서 복덕방을 하는 집주름이 조규칠 씨 집문서를 분실하였기에 이를 휴지로 친다."라는 6월 24일자 '황성신문' 광고에서다. 일제강점기 때의 복덕방 풍경은 이태준이 1937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복덕방'에 잘 나타나 있다. 복덕방 주인은 구한말에 훈련원의 참위로 봉직했던 서 참위다. 안 초시는 여러 차례에 걸친 사업 실패로 몰락하여 서 참위의 복덕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 무용가로 유명한 딸이 있으나, 딸에게 짐이 되기 싫어 재기하려는 꿈을 안고 살아간다. 박 영감은 훈련원 시절 서 참위의 친구이다. 재판소에 다니는 조카를 빌미로 대서업을 한다고 일어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는 재기를 꿈꾸던 안 초시에게 부동산 투자에 관한 정보를 일러 준다. 안 초시는 딸이 마련해 준 돈을 몽땅 부동산에 투자한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도 새로운 항구의 건설이라든가, 땅 값이 오른다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박 영감에게 정보를 전해 준 사람이 자신의 땅을 처분하기 위해 사기극을 벌인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충격을 받은 안 초시는 음독자살을 한다. 이 소설은 당시 노인들의 삶의 모습뿐 아니라, 그때에도 땅에 대한 투기와 사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복덕방도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피해자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때론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1939년 5월 3일자 '매일신보'에 보면 '복덕방에서 집값이나 집세에 대해 농간을 피워서 감시를 철저히 하려고 한다.'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때 복덕방 '복비'는 어느 정도였을까? 1899년 5월 23일자 '독립신문'에 의하면 "백 냥 머리에 일냥"이라고 했으니, 거래가격의 1 퍼센트다. 그러나 '독립신문'은 "집주름들이 양쪽에서 5,6냥씩을 받아 모두 열 냥 이상을 챙기고, 한성부에 가서 집문서의 이름을 바꿔주는 일을 대행해주면서 이런저런 핑계로 또 다시 5, 6냥씩을 챙기고 있다."라면서 집주름의 악습을 고발하는 기사를 썼다. 기사에서 5,6냥은 백 냥에 대한 계산이라고 봐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집주름'은 '가쾌'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의 문인 유만주(1755∼1788)가 13년 동안 쓴 일기책인 <흠영>에 보면 "집주름(가쾌)을 데리고서 공동(公洞)에 있는 집을 봤는데 여섯 가지의 단점이 있었다. 한양 사대부의 집 중에서 제일 값이 많이 나가는 것이 입동에 있는 이은의 집인데, 그 규모가 무릇 380여 칸이고, 집값이 상평통보로 환산하면 2만여 냥쯤 된다고 했다." (안대회 번역)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29년(1753) 7월 5일자 에 보면 “윤성동은 집주름 노릇을 생업으로 삼았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집주름'이 존재했음이 국가와 개인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일부 자료에는 '고려시대에 객주가 부동산을 중개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라면서, 집주름이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정확하게 어느 문헌이라고 밝히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집 거래를 알선했던 '집주름'은 아파트 건설과 함께 불어 닥친 '부동산 광풍'에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집값이나 땅값이 도포자락 휘날리면서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폭등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소설가 이충렬

2010-11-15

[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조영석 '젖짜는 어미 소와 송아지'

조선 영조시대의 화가 관아재(觀我齋) 조영석(1686 ~ 1761)의 이 그림이 세상에 공개된 건 1984년 12월이다. 이 그림을 포함해 당시의 풍속을 그린 14점을 화첩으로 만들어 '사제첩(麝臍帖)'이라고 이름 한 후 겉면에다 '남들에게 보이지 말라 이를 범한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라는 '금기'를 써놓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이런 풍속화를 '속화(俗畵)'라고 부르며 천시했다. 그래서 조영석은 '속화'를 공개했을 경우 자신의 명예에 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 금기를 만들었고 화첩 이름도 '사제첩'이라고 한 것이다. '사제'는 '사향노루 배꼽의 향기'라는 뜻으로 옛 선인들은 사향노루가 사냥꾼에게 잡히는 이유가 배꼽에서 나는 향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제'는 '본인에게는 향기롭지만 남에게 알려지면 크게 곤욕을 치른다.'는 경계의 의미로 사용한 단어다. 이 그림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조선시대에도 우유를 짰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때만 해도 조선왕조실록의 전산화는 커녕 국역 작업도 완성되지 않아 우유에 대해 어떤 기록이 있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인이 아닌 갓 쓴 양반들이 직접 소에서 우유를 짠다는 사실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 왕명의 출납을 기록한 '승정원일기' 현종 8년(1667년) 9월 14일자에 보면 "타락죽을 10월 1일부터 올려야 하므로 우유(당시 표기는 乳牛)를 사복시(司僕寺)로 하여금 대령케 하였음을 아뢰는 내의원(內醫院)의 계가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타락죽은 우유에 찹쌀가루를 넣고 끓인 죽으로 조선시대 궁중에서 10월부터 먹는 보양식이었다. 사복시(司僕寺)는 조선시대 왕이 타는 말 수레 및 마구와 목축에 관한 일을 맡던 관청으로 관원으로는 사복시제조(정1품에서 종2품사이의 당상관이 겸직) 정3품 당하관인 정(正) 종3품의 부정(副正) 종4품의 첨정(僉正) 종5품의 판관(判官) 종6품의 주부(主簿)가 있었다. 따라서 그림 속의 양반은 사복시 관원으로 임금께 올릴 타락죽을 만들기 위한 우유를 짜는 모습이다. 어미 소 옆에 송아지가 있는 이유는 송아지가 옆에 있어야 어미 소가 모성애를 발동해서 젖을 많이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조영석이 사복시 주부(主簿)로 근무했던 영조 2년(1726) 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역사에서 우유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발견된다. '삼국유사'와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우왕때 국가에서 유우소(乳牛所)라는 목장을 설치했고 그곳에서 나오는 우유를 왕실과 귀족들에게 공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때부터 우유와 타락죽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나라에 기근이 들었으니 각전에 공상하던 우유의 수량을 감하라" -태종 16년(1416) 3월 10일 "충청도 감사에게 전지(傳旨)하기를 청주(淸州)에 있는 국고(國庫)의 묵은 쌀과 콩으로 젖 짜는 소를 사서 날마다 우유를 받아 양녕대군에게 먹이도록 하라." -세종 5년(1423) 4월 4일 "상의 옥체가 몹시 쇠약하고 몹시 손상되시어 약으로는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열(心熱)이 이미 일어났는데 다른 증세가 또 일어날까 염려스러워 신들은 몹시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전에 아뢴 타락(駝酪)을 이제는 반드시 드셔야 하겠습니다." -인종 1년(1545) 2월 10일 이런 기록은 고종 때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조선시대 때 우유는 약용 또는 보약으로서 왕이나 왕족만 먹을 수 있는 식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일반인이 우유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902년에 프랑스인 쇼트(Shorte)가 도입한 홀스타인종 젖소 20여두에서 우유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그리고 1937년 7월 현 서울우유협동조합의 전신인 경성우유동업조합이 문을 열면서 우유가 시판되기 시작했다. 물론 규모는 크지 않았다. 이렇게 소규모에 머물러 있던 우유 산업은 1962년부터 시작된 축산진흥 5개년 계획에 힘입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67년에는 조제분유를 생산하게 되었고 1968년에는 '초코우유'가 개발되었다. 그 후 우유회사에서는 매일 아침 각 가정으로 배달하는 유통 시스템을 개발했고 한국의 우유 산업은 그때부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소설가 이충렬

2010-11-08

[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김상구 '르네상스 음악감상실'

칠판에 곡명을 적은 후 음악이 흘러나왔고, 신청곡을 받기도 했다. 떠들며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었기에, 실내에는 음악 소리뿐이었다. 그렇게 음악을 듣는 곳이기에 슬그머니 들어가 아무 빈자리나 앉으면 됐고,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주변사람들은 관심 없고 오로지 음악만 들으러 왔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폼을 잡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생전 처음 보는 여학생 옆에 슬그머니 가서 앉아도 되는 '선택적 합석'이 가능한 유일한 곳이었고, 장안의 청춘남녀에게 인기가 많았다. 르네상스 주인은 험상궂게 생긴 왕년의 권투선수였는데 많은 이들은 까맣게 물들인 군복 윗도리를 입고 한쪽 눈에 까만 안대를 한 '애꾸'가 주인인줄 알았다. 시벨리우스와 말러 베토벤의 교향악을 황홀경에 빠져서 지휘하면서 주인 행세를 했기 때문이었다. 르네상스 외에도 신세계 백화점 안에 있었던 '에스에스' 을지로 입구 부근의 '아폴로' 명동에 있었던 '돌체' '쎄씨봉' '티롤' '여왕봉' '본전 다방'도 청춘남녀가 즐겨 가는 다방과 음악감상실이었다. 그리고 에어컨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커다란 선풍기를 틀었다. 한국 최초의 다방은 1903년 대한제국 시절 정동에 세워진 손탁호텔 1층에 있던 다방이다. 손탁호텔은 고종이 황실 전용 호텔로 지은 후 러시아 공사의 인척인 손탁에게 운영권을 준 서양식 호텔로 1층에 객실 식당 다방이 있었고 2층에는 고종과 귀빈들을 위한 특별실이 있었다. 당시 손탁호텔 식당과 다방은 각국의 외교사절과 대한제국 외교관이나 개화파들의 사교장 역할을 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자 러시아인 손탁은 이 호텔을 프랑스인에게 팔았다. 그 후 1917년 이화학당이 학생들 기숙사로 사용하기 위해 이 호텔을 구입했고 1922년에 건물을 헐었다. 한국 최초의 다방과 건물은 이렇게 사라졌다. 다방은 일제강점기 때 종로를 비롯해 소공동 충무로 명동 곳곳에 생겨났다. 당시 다방의 명칭은 '끽다점'이었는데 담배 피고 차 마시는 곳이라는 뜻이다. 시인 이상 역시 광화문 네거리 종각 부근에 '제비다방'을 차렸었다. 동거하던 기생 금홍과 관계가 나빠지자 그녀를 곁에 두려고 차렸으나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이상의 다방은 이렇게 망했지만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다방은 운영만 잘하면 큰 돈을 버는 장사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다방에서는 선전 수단으로 다방 이름이 인쇄된 조그만 성냥을 나눠줬는데 이런 관행은 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성업 중이던 다방은 1941년 미국과의 전쟁으로 설탕과 커피를 더 이상 수입하지 못하게 되면서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렇게 문을 닫았던 다방은 광복 후 다시 문을 열었고 한국전쟁 후에는 명동과 종로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생겨났다. 텔레비전 있는 집이 별로 없던 60년대에는 텔레비전을 갖춘 다방이 생겼고 장영철이나 김일이 프로레슬링 시합을 하는 날 프로 복싱 선수 김기수가 세계챔피언전을 하던 날 월드컵 예선전 때에는 다방 앞에 중계방송을 알리는 입간판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다방에는 시합 한 시간 전부터 좋은 자리에 앉으려는 손님이 몰려들었다. 이런 70년대가 지나자 집에서 텔레비전을 볼 수 있고 커피를 직접 타서 마실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나이들은 사람과 젊은이들이 가는 다방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건물 임대료가 오르면서 커피 값이 오르는 건 당연했고 대부분의 다방은 '청춘사업'을 할 때는 돈을 아끼지 않는 젊은이들의 취향을 따라갔다. 이제 서울에서 '옛날 다방' 찾기는 쉽지 않다. 약간은 어두운 다방에서 인생을 이야기 하던 '옛날 연애'의 시대는 이렇게 흘러갔고 '별다방' '콩다방'에서 경쾌한 데이트를 즐기는 새로운 청춘들의 시대가 된 것이다. 다방의 역사는 이렇게 시대와 청춘의 흐름을 따라 변했다. 소설가 이충렬

2010-11-01

[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서동진 '뒷골목', 서울 골목길서 만난 추억속 풍경 '꽃나무 장수'

이제는 사라져 추억속의 풍경이 된 꽃나무 수레가 보이는 그림이다. 바퀴가 고무바퀴가 아니고 크기 때문에 손수레라기보다 마차의 짐 싣는 부분같이 보인다. 여자는 키가 수레 속까지 닿지 않아 바퀴에 올라서서 수레 속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으니 꽃장수의 부인이다. 손님이라면 그런 포즈로까지 꽃을 고르지는 않을 것이고 자세히 보면 앞치마를 둘렀기 때문이다. 그림은 이렇게 자세히 볼 때 보는 재미가 더한다. 꽃나무 장수가 두툼한 옷을 입었고 뒷모습만 보이는 아주머니도 스카프를 썼으니 초봄인 듯하다. 배경으로 보이는 큰 나무들도 제법 짙은 초록빛을 띠고 있으니 가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수레 속 꽃은 화분에 담긴 노란색 수선화이거나 글라디올러스로 보인다. 물론 다른 꽃나무나 화분일 수도 있다. 60년대만 해도 서울 골목길에는 꽃나무 장수가 심심치 않게 다녔다. 거주공간이 아파트가 아니라 한옥이나 양옥 단독주택이라 마당에 꽃나무를 심는 집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꽃나무 장수들은 산에서 나무를 캐다가 팔았다. 손수레가 없는 이들은 지게에 지고 다니며 팔거나 소공동 거리와 명동 어귀에서 모여서 '꽃나무 장터'를 형성했다. 그래서 동네에 다니던 손수레에서 원하는 나무를 찾지 못하면 '꽃나무 장터'에 가서 원하는 나무를 구하는 '극성파'도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고 최순우 선생은 '꽃보다 아름다운 열매'라는 수필에서 꽃나무를 사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 해 봄 나는 개두릅나무 한 그루와 찔레 덩굴을 자전거에 싣고 온 시골 청년에게 구하고 싶었던 돌배(산배)나무 개암나무 사시나무 자작나무 그리고 너도밤나무를 꼭 한 그루씩 구해 오라고 일러 보냈더니 그 청년은 그 이튿날 아침 몇 그루의 산 나무들을 리어카에 싣고 어김없이 내 집 문을 두드렸다. 그 청년이 고마워서 나는 아침상을 차려 주라 했고 그 청년은 그것이 고마워서 곧바로 내 뜰 허전한 구석에 시키는 대로 그 나무들을 심어주고 돌아갔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선비와 화가들이 꽃나무를 사랑했다.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인 조희룡( 1797~?)은 중인 화가 승려 등 43인의 삶의 이야기를 엮은 '호산외사'에서 조선시대의 화가 단원 김홍도(1745 ~ 1806년 경)의 꽃나무 사랑을 이렇게 기록했다. "단원은 살림이 늘 가난해서 아침저녁으로 끼니 걱정을 하는 때가 많았지만 어느 날 좋은 매화 한 그루를 보고 이것을 사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때마침 그의 그림을 찾는 사람에게 그림 값으로 3천 냥을 받게 되었다. 그중 2천 냥으로 매화를 사고 8백 냥으로 술을 받아서 친구들과 시를 읊으며 마시고 남은 돈 2백 냥으로 양식을 샀다고 한다." 당시 2백 냥이면 불과 2~3일 거리의 양식밖에 살 수가 없었다고 하니 요즘 계산으로 따지면 그림 한 점을 3백만 원 받고 판 후 2백만 원 주고 매화나무를 산 후 친구들과 술을 80만원어치 마시고 20만원을 생활비로 내놨다고 할 수 있다. 김홍도는 자신이 살던 집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마당에는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키웠고 파초를 비롯해 오동나무 소나무를 심었다. 연못 옆에는 괴석을 관상용으로 들여 놓았고 마당에서는 학을 키우면서 풍류를 즐겼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제가(1750~1805)의 시 '장경교(長慶橋)'에도 "혜화문 밖에는 수레와 말이 적은데 / 빗속에 이따금 꽃 파는 이 보이네"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지금의 삼선동에서 성북동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 꽃나무 장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던 꽃장수는 아파트 건설이 본격화 되고 주거공간에 마당이 없는 아파트로 바뀌는 80년대 초반 이후에는 찾기 힘들게 되었다. 그 대신 아파트에서 키울 수 있는 화분 꽃이나 선물용 꽃을 재배하는 화훼농가가 생기기 시작했고 아파트 단지 상가에는 꽃집이 들어섰다. 이렇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며 진화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다. 이충렬 소설가

2010-10-25

[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엘리자베스 키스 '갖바치(Shoemaker)'

신발 만드는데 열중하고 있는 얼굴표정과 능숙한 손놀림에서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이 할아버지들이 바로 조선시대에 '갖바치'라고 불리면서 신발을 만들던 분들로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나막신과 비단신 가죽신에 대한 수요가 있어 이런 가내수공업 작업장이 존재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와 근대의 작품 중에서 짚신 삼는 풍속화는 몇 점 있지만 비단신 가죽신 나막신을 만드는 작업 모습이 보이는 그림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가 그린 이 작품이 유일하다. 키스는 일제 강점기 때 한국의 삶의 모습과 풍광을 화폭에 담은 영국 화가다. 삼일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8일에 처음 한국을 방문해 6개월을 머물렀고 그 후 1940년까지 여러 차례 더 들렸다. 그녀는 서울에만 머무르지 않고 함흥 원산 평양 등 북녘도시들도 열심히 다니며 수채화 목판화 동판화 드로잉 등 많은 그림을 남겼다. 키스는 자신의 그림과 작업 노트를 소개한 책 〈옛 한국(Old Korea) : 1946년 영국 발행>에서 자신은 한국 신발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그래서 신발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고 싶어 작업장을 찾아갔다고 밝혔다. 키스는 명성황후의 조카딸을 그린 '민씨가의 규수'와 '신부'에서 비단신을 맵시 있게 표현했다. 한국에서 신발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와 백제의 고분에서 청동으로 만든 신발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신발의 제조와 유통에 대한 기록이 없다. 고려시대 문헌에는 짚신과 미투리의 모양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그러나 누가 어디서 만들었고 어떻게 유통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신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처음 보이는 문헌은 '조선왕조실록'으로 세종 8년(1426년) 1월 26일 자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계급에 따라 의복 제도가 모두 등급이 있어서 뚜렷한 형식이 갖추어졌는데 다만 신발에 대한 제도가 아직껏 상세히 제정되지 아니하여 심지어는 시장의 공인이나 상인과 천민까지도 모두 가죽신을 신으며 벼슬이 없거나 직업이 없는 사람까지도 모두 투(套 : 비 올 때에 신는 반장화)를 신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하 계급의 구별이 없게 되옵니다. 바라옵건대 예조에 명하시어 상세한 제도를 제정하여 상하의 구별을 밝히게 하소서." 사헌부에서 세종대왕에게 건의한 내용이다. 세종대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고 이때부터 가죽신은 공조와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되어 있는 장인 30명이 만들었고 6품 이상의 고위관료만 신을 수 있었다. 신발이 신분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수단이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들어와 사회가 혼란해지고 중인들이 상권을 장악하면서 돈만 있으면 누구나 가죽신을 신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울에는 신발을 만드는 가내 수공업소 백여 곳이 생겼고 설날 전에는 비단신과 가죽신의 주문이 밀려 일하는 사람들이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당시 신발값은 쌀 한 가마니에서 한 가마니 반 값 정도로 비싸서 일반 서민은 나막신 짚신 삼신 등을 신었다. 그래서 시골에 사는 소녀들에게 비단신은 '꿈의 신발'이었고 '오빠생각'이라는 동요 가사에 '오빠가 비단구두 사갖고 오신다더니……'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였다. 비단신과 가죽신의 수요가 사라진 이유는 고무신의 등장 때문이다. 한국에 고무신이 등장한 건 1910년 중후반이었는데 일본에서 만든 제품이었다. 처음에는 투박한 배 모양의 고무신이 들어와 인기가 없었으나 1920년경에 사람들의 눈에 익은 비단신 모양의 고무신이 나오면서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고무신이 인기를 끌자 고무신 공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고 1923년에는 서울뿐 아니라 각 지방에도 생겨 그 숫자가 20곳에 달했다. 그리고 공장들 사이에 가격경쟁으로 몇 년 사이에 고무신 값은 반값으로 떨어졌고 이때부터 고무신은 도시뿐 아니라 시골까지 보급되었다. 결국 갖바치가 공방에서 만들던 비단신과 가죽신은 1930년대에 이르러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제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장인에 의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충렬 소설가

2010-10-18

[그림으로 보는 한국 경제] '소금보다 짠 눈물이 있는 새벽 어시장'

항구의 아침은 새벽 어스름을 가르며 들어오는 고깃배와 함께 시작된다. 배가 부두에 도착하면 밤새 어두운 바다에서 파도와 씨름하며 잡아 올린 싱싱한 생선이 내려진다. 펄떡이는 줄돔 광어 도다리 대구 삼식이 도치 장치 놀래미 참돔 고도리 숭어 방어 참가자미 복어를 놓고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목소리를 돋우며 흥정을 시작한다.  '남해 어시장'은 대구에서 활동하는 남충모 화백이 1986년에 그린 작품인데 손님을 부르는 억센 경상도 말씨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남해 부둣가의 좌판 어시장은 요즘도 새벽 4시부터 열리고 있는데 만원 이만 원이면 싱싱한 활어를 푸짐하게 살 수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국에서 어로작업이 이루어진 시기는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 경상남도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에는 향유고래 참고래 혹등고래 등 고래 46마리 이상이 그려져 있으며 고래를 잡기 위한 작살과 부구 낚싯줄이 보인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기원전 6000년부터 동해에서 고래 사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선사시대 이후인 청동기시대 유물인 패총에서도 낚싯바늘 작살 어망의 석추 등이 발견되기 때문에 상당히 발전된 형태의 어로작업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도 어업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많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어량(魚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하천이나 얕은 해안에 원시적이나마 고정적인 어구를 설치하여 어로작업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법왕(法王)은 즉위 원년(599)에 불교의 영향으로 살생을 금지하는 령을 내려 어업을 못하게 했고 신라에서는 법흥왕 16년(529)에 살생을 금지함과 동시에 어구를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에도 활발한 어업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 수익성높아토지와같은경제가치  고려시대에도 어업은 활발했다. 1123년 송나라 사신으로 와서 개성에서 1개월 머물다가 송나라로 돌아간 서긍은 '고려 방문기'인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출판했는데 '고려인들은 해조류나 조개류를 먹는다.라고 기록했다. 고려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에도 '어업은 수익성이 높았기 때문에 토지와 다름없는 경제적 가치를 지녔으며 또 하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 - 국가 통제 벗어난 어업유통 급증  조선시대에는 어업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기관인 사재감(司宰監)에서 어업을 관장케 하였고 불법으로 어업을 하는 자는 곤장 80대에 처한다는 법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화폐경제의 발달로 국가통제를 벗어난 어업과 유통은 급증했다.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는 당시 어업과 유통현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조기가 산더미처럼 많이 잡혀 어선에 실을 수가 없다.'라고 했다. 남해안에서는 멸치가 많이 잡혔는데 미처 말리지 못하면 비료로 쓰고 마른 멸치는 지금처럼 반찬으로 사용하였고 명태와 청어의 수요가 많아 원산에서 명태를 싣고 가는 배와 말의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사람의 입맛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활발했던 조선시대 어업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대자본가들에게 '황금 어장'을 빼앗겨 발전하지 못했다. 광복 후에는 어민들의 자본 부족으로 어선의 크기가 작았을 뿐 아니라 가공시설도 미비했다. 현대 - 영세어민에겐 '부의혜택' 못돌아가 그러나 6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어업이 수출산업으로 인정받아 어선의 건조가 활발해졌고 70년대 후반에 들어와 원양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어획물 처리가공시설이 확충되었다. 이때부터 한국 어업과 수산물 유통은 현대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수산물 유통의 현대화는 도시인들에게 싱싱한 생선을 대량 공급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영세한 어민들에게는 부의 혜택이 돌아가지 못했다. 대형 유통업자들이 생선가격을 쥐락펴락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통구조 때문에 어민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팍팍하다. 남자는 밤새 검은 바다에서 거친 파도와 싸워야 하고 여자는 새벽부터 어시장에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바닷가에는 소금보다 짠 땀과 눈물이 있다'라는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충렬 소설가

2010-10-11

[그림으로 보는 한국 경제] 혜원 신윤복이 그린 조선시대의 술집

'장사 중에서는 물장사가 최고'라는 말이 있다. 물은 술이라는 뜻이고 장사 중에서는 술장사가 이익이 제일 많이 남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그래서 서울뿐 아니라 LA에도 수많은 술집이 있고 이 술집들은 밤의 경제를 이끌어 간다.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한국 최초의 술집은 고려 성종 2년인 983년에 당시 수도인 송도(개성)에서 문을 열었다. 희빈 옥장 낙빈 연령 등 여인의 이름을 상호로 사용했다고 했으니 귀족을 위한 기생집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민을 위한 술집이 나타난 것은 고려 숙종 7년인 1102년이었고 2년 후인 1104년에는 각 고을에 주점을 여는 것을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숙종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해동통보(海東通寶)를 만들었는데 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사용을 기피하자 주점의 개설을 통해 돈의 유통을 활성화하려고 한 것이다.  한국의 주점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주점과 양조업은 고려 숙종의 예상대로 나라 경제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선술집'은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바람의 화원' 주인공 혜원 신윤복(1758- ?)의 작품으로 현재 전해지는 조선시대 그림 중 유일한 술집 그림이다.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이라는 화첩에 있는 30점 풍속화 중의 한 점인데 조선시대 술집을 사진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술집은 앉아서 마시는 술집이 아니라 서서 마시는 술집이다. 지금은 사라진 이런 술집을 선술집 다른 말로는 목로주점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화가이자 시인인 조희룡(1789-1866)은 당시 중인들의 삶을 기록한 〈호산외기>에서 "협객 김양원은 계집을 사서 목로에 앉히고 술장수를 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조선시대 술집은 주먹 쓰는 자와 가까운 관계였음을 알 수 있고 이 그림에서 보이는 여인 역시 고용된 주모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선술집에 오는 손님은 누구였을까? 그림 가운데에서 노란 초립을 쓰고 붉은 옷을 입고 안주를 집는 사람은 무예별감(武藝別監 : 요즘의 청와대 경호관쯤 되는 직책)으로 당시 술집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는 기록이 있다. 별감 뒤에 서있는 흰 도포 입은 남자는 벼슬이 없는 양반이고 그 오른쪽 회색 도포를 입은 남자 역시 양반인데 허리춤에서 돈을 꺼내려는 듯 보이는 모습이 어쩌면 무예별감의 '스폰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림 맨 오른쪽에 깔때기 모자를 쓰고 까치등거리를 걸쳐 입은 사내는 의금부 나장이다. 의금부 역시 왕명을 받드는 곳이기에 이곳의 나장도 정보와 여론을 수집하기 위해 선술집과 기방을 드나들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술청 왼쪽에서 팔소매를 반쯤 걷어 올리고 서있는 홑상투 청년의 정체도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술집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아궁이에 불도 때는 '중노미'인데 그가 주모의 '기둥서방'인지 아닌지는 두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트레머리를 한 주모가 술을 퍼내는 술구기 술이 담겨있는 백자 푼주 누런 술단지와 안주 그릇 술청 왼쪽의 오층 찬탁 대청 오른쪽의 삼층 찬장과 뒤주를 통해 당시 선술집 살림살이를 살필 수 있는 것도 이 그림을 보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그림 왼쪽에 한문으로 쓴 '제화시'를 풀이하면 "술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술항아리를 끌어안고 맑은 바람을 대한다."이다. 따라서 선술집 풍경은 달빛이 훤한 저녁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이 들어있는 〈혜원전신첩>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유출되었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이 일본에 가서 당시 서울 시내 8칸짜리 기와집 20채 값을 치르고 되찾아왔다. 1934년의 일이었고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재산을 들여 한국 문화재를 지킨 분이다. 이렇게 되찾아온 〈혜원전신첩>은 광복 후 조선시대 풍속화의 백미(白眉)로 인정받아 국보 제135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충렬 소설가

2010-10-04

"그림 통해 다양한 시대상 묘사…독자의 경제상식·추억 되살려"

매주 화요일 본지에 게재되는 '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림을 소재로 경제 이야기를 끄집어 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는 반응이다. 집필자인 소설가 이충렬씨(사진)의 재미있는 문체에 매니아층이 형성되고 있을 정도다.  "자본주의의 꽃은 경제입니다. 그리고 경제는 바로 삶의 모습입니다. 화가들이 이같은 삶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해 흔쾌히 시작했습니다."  '그림경제'는 1950년대 한국 재래시장의 소금가게 풍경을 묘사한 윌리 세일러의 '빈틈없는 계산'을 시작으로 근대화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한강의 황포돛배를 그린 릴리안 밀러의 '한강의 황포돛배' 한국전쟁당시 피난시절 구멍가게의 모습을 담은 운보 김기창의 '구멍가게' 등 3회가 소개됐다.  이충렬 작가는 이같은 작품을 통해 당시의 경제상황 및 시대상까지 상세히 묘사해 독자들에게 경제상식은 물론 옛 추억까지 떠올리게 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근대의 조선은 물론이고 현대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 다양한 시대상과 삶 경제활동 모습을 담겠습니다. '그림경제'를 통해 독자들이 그림과 더욱 가까워지고 조상들의 삶을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작가는 앞으로 꼬막장수 어시장 새벽시장 풍경 손수레 꽃장수 꽃파는 처녀 행상 등 한국인의 정서와 경제 발달사를 꿸 수 있는 작품들을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지금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그림과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화요일에 게재되는 만큼 한 주를 밝게 시작하자는 의미에서 밝은 그림 위주로 선택할 생각입니다."  "그림은 삶의 표현이고 시대의 표현입니다. 같은 이민자로서 동질성 회복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하는 노력이 바로 '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입니다." 이충렬 씨는 애리조나주의 한 소도시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며 그림 및 문화분야 관련 글과 저서를 발표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설 '간송 전형필'을 출간하기도 했다. 내년 초에는 김영사에서 '그림으로 보는 우리 근대'라는 저서를 출간할 예정이다. 김병일 기자 mirsol@koreadaily.com

2010-10-04

[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김기창 '구멍가게'···자식들 공부 밑천이었던 경제터전 '구멍가게'

동네 구멍가게는 가난한 시대를 살아가던 서민들의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다. 돈이 없으면 어머니들이 월급 나오면 갚겠다며 외상으로 봉지 쌀 연탄 라면 등 생활필수품을 갖고 올수 있는 곳이었고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담배나 소주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보내던 곳이었다. 그리고 가게 주인에게는 '티끌모아 태산'은 아니더라도 자식들 공부시키면서 근근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삶의 경제터전이었다. 이 그림은 운보 김기창이 군산의 처가에 피난 가있던 시절에 그린 작품이다. 당시 그는 군산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면서 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여러 점 그렸다. 이 작품도 그때 그린 '서민 시리즈' 중의 한 점으로 판잣집처럼 생긴 구멍가게 모습이 담겨있는 '현대 풍속화'라고 할 수 있다. 운보가 이 그림을 그린 1952년은 6.25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전선은 38선 부근으로 좁혀졌을 때다. 후방의 도시들은 조금씩 활기를 찾기 시작했고 집에 돈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사람들은 가게를 차렸다. 부산에 국제시장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고 각 지방에 있는 재래시장도 다시 문을 열었다. 시장에서 점포를 차릴 재력이나 나이가 너무 들어 시장판으로 나갈 근력이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집 앞을 개조해서 구멍가게를 차렸다. 그리고 오징어와 눈깔사탕 등 술안주와 아이들의 군것질거리를 팔았다. 이 그림에서 동생을 업고 온 누나는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니 고무신조차 귀하던 시절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는 할머니의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이다. 좋은 화가는 이렇게 주인공의 표정에 시대의 모습을 담아낸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그렇다고 끝난 것은 아니었으니 무슨 기뻐할 일이 있었겠는가. 어쩌면 늙은 아들이나 손자가 아직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면서 물끄러미 세상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탁월한 표현이고 동시대의 아픔을 담은 표정이라고 할 수 있다. 판잣집처럼 생겼던 구멍가게는 60년대로 들어오면서 규모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연탄 쌀 라면과 같은 생활필수품을 비롯해 야채와 생선도 팔았고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끈 삼립 빵과 여러 종류의 과자류도 취급했다. 70년대부터는 구멍가게에도 냉장고와 냉동 '아이스크림 통'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시원한 맥주 콜라 사이다 오란 씨 그리고 '삼강 하드' '브라보콘'과 같은 아이스크림이 매상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국민 안주' '국민 과자'로 불리는 새우깡이 구멍가게에 나타난 것도 1971년이었다. 따라서 구멍가게는 크기는 작았지만 워낙 숫자가 많아 한국 양조산업과 과자산업 그리고 아이스크림사업이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0~70년대를 살아온 중장년층에게는 구멍가게에 대한 추억이 몇 가지씩 있다. 그래서 LA에서 활동하는 이정아 작가는 구멍가게로 아버지 소주 심부름 다니던 추억을 소재로 '외상장부'라는 수필을 썼다. "동네 구멍가게인 평화수퍼에는 외상장부가 있었다. 가게주인 아주머니가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쓰던 손바닥만한 공책이었다. 겉표지엔 '신문사 집'이라고 적혀있고 한 달에 한번 아버지 월급날에 외상값을 정리하곤 했다. 다른 집은 그 당시의 흔한 반찬거리인 두부나 콩나물이 주종이었는데 우리 집은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주2 소주4' 이거나 아예 같다는 표시로 땡땡점 두개만 주욱 찍혀있었다. 2홉들이 인지 4홉들이 소주인지만 구별하면 외상값 계산은 쉬웠다." ('퓨전수필' 2010년 여름호) 이렇게 훈훈한 인정이 오가던 동네 구멍가게는 아파트 건축을 위한 재개발과 24시간 편의점 그리고 대규모 할인점의 등장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으면서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게 한다. 이충렬 소설가

2010-09-27

[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근대화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한강 '황포돛배'

미국의 여류화가 릴리안 밀러(1895-1943)는 1920년 초부터 1932년까지 서울주재 미국영사를 역임한 랜스포드 밀러의 딸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영사로 재직하던 10년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생활을 하면서 〈한강의 황포돛배>뿐 아니라 이제는 사라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금강산 마하연 대동강의 장엄한 황포돛배 선단 한강 나루터 혜화문 등 한국 근대의 풍경과 삶의 모습이 담긴 작품 40여 점을 남겼다. 그 작품들은 1998년 8월 19일부터 1999년 1월 3일까지 패사디나의 패시픽 아시아 박물관에서 개최된 '릴리안 밀러 회고전 -두 세계의 사이에서'가 열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조선 후기 한강주변 포구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경강상인(京江商人)은 서울의 객주에서 구입한 물품을 황포돛배에 싣고 강원도나 충청도에 가서 팔고 그곳에서 쌀이나 소금 나무 숯 생선 등을 싣고 와 포구와 서울의 객주에게 팔았다. 객주는 객상주인(客商主人)의 줄임말로 지금의 도매상인이다. 그들은 각 지방 관아에 일정한 세금을 내고 장사를 했는데 경강상인(강상)과 보부상 사이의 거래를 중개하거나 일부 품목을 독점해서 팔면서 부를 축적했다. 조선 후기 기록을 보면 한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의 수는 하루 평균 100척이었고 배 한 척에 대략 30가마니의 쌀이나 소금을 실었다. 밀러의 작품에 보이는 자루의 숫자도 그쯤 되어 보이니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경강상인의 후예들은 존재했고 그들이 갖고 다니던 물목도 조선시대와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근대에 한강을 오가던 황포돛배에 대한 기록은 1894년부터 1897년까지 네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이 쓴 방문기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도 볼 수 있다. 비숍은 당시 배를 타고 한강 물길을 따라 충청도 단양까지 갔다온 후 "조선에서는 소금을 비롯한 많은 물품이 한강에서 배를 통해 포구로 운반되고 포구의 상인들은 소나 말 지게 등을 이용해서 도시의 장터로 옮긴다."라고 기록했다. 당시 비숍이 본 배가 바로 오늘 소개하는 작품에 보이는 황포돛배다. 배의 돛대에 흰 광목이 아니라 황색인 이유에 대해 황포돛배 제작자인 김귀성 인간문화재는 "흰 광목에 단순한 황색을 물들인 것이 아니다. 광목에 진흙을 풀어 만든 황톳물을 들인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야 좀을 방지하고 질기며 비바람을 맞아도 변하거나 썩지 않기 때문"이라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밀러는 작품의 제목을 〈한강의 황포돛배(Orange - Sailed Junk of the Han Korea)>라고 함으로써 배경이 한강임을 확실하게 밝혔다. 그리고 작업노트에 "이 나루터 근처에 연꽃이 많은 연못이 있다."라고 기록해 양수리 나루터 풍경임을 추정할 수 있게 했다. 양수리(두물머리)에는 팔당 댐이 완공되기 전까지 나루터가 존재했고 근처에 연꽃 연못인 '연지'가 있다. 그리고 양수리 나루터 자리에서 강을 바라보면 위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작은 섬이 보인다. 당시 충청도나 강원도에서 온 황포돛배는 양수리 나루터에 들렀다가 현재 워커힐 호텔이 있는 광나루 뚝섬 근처 송파나루 노량진 마포나루를 거쳐 양화나루(현 성산대교 옆 절두산 성당 부근)까지 갔다. 한강의 황포돛배는 근대화와 함께 나타난 기차와 트럭에 운송품을 뺏기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시대가 어떻게 변하고 경제 흐름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읽고 있던 일부 눈치 빠른 객주와 강경상인들은 근대화의 흐름 속에 무역과 유통의 중심지가 된 인천과 부산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한국 근대의 수입상과 무역상으로 발돋움하면서 큰 부자가 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아는 상인은 존재했고 황포돛배로 한강을 오르내리던 강상과 그들과 함께 포구에서 장사를 하던 객주들이 바로 그런 지혜를 가진 상인들이었다.

2010-09-20

[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윌리 세일러 '빈틈없는 계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이 돈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 옛날이나 지금 서양이나 동양 모두 마찬가지다. 이 세 가지 중 가장 많은 변화를 거치며 발전한 경제수단은 장사다. 한국의 경우 장사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장사가 서민들의 본격적인 경제수단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이 끝난 후부터였다. 직장이 많지 않아 남자들의 취직이 쉽지적않던 시절이라 아낙네들이 재래시장에 나가 좌판 혹은 가게 터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남대문시장 중부시장 동대문시장 평화시장 경동시장 부산 국제시장 등이 바로 그곳이다. 재래시장은 6ㆍ25전쟁 이후 근 30여 년 동안 모든 국민이 이용할 정도로 한국 유통 경제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했고 많은 상인들은 그곳에서 성공과 좌절을 겪었다. 그래서 재래시장에는 서민들의 희망과 애환이 서려있다. 〈빈틈없는 계산>은 윌리 세일러(Willy Seiler)라는 독일 태생의 미국인 화가의 작품이다. 그는 1956년부터 1960년 6월까지 3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13점의 한국소재 동판화를 남겼다. 〈빈틈없는 계산>은 '한국시리즈' 중의 한 점으로 50년대 재래시장에서의 장사와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아주머니가 파는 품목은 소금이다. 소금은 고대국가에서는 전략물자의 하나로 취급되었고 인구가 많던 중국에서는 제나라 때부터 소금으로 거상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소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식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품목이다. 한국 역사책에서도 소금장수 이야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부터 나올 정도로 오래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소금이 국가의 전매물이었을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그후 일제강점기 때는 소금 섬을 지고 다니며 팔던 소금장수가 생겼고 1930년경부터는 5일장을 통해서 소금 거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소금은 생필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식탁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5일장이나 재래시장에서 소금가게를 하던 사람들은 많은 부를 축적하는 부류에 속했다. 그들은 자본을 갖고 소금을 사들여 박리다매로 팔았기 때문에 영세 상인들이 감히 경쟁하기 힘들었고 소금장수들은 이런 독점적 위치를 이용해 폭리를 취하기도 해서 '소금값이 금값이다'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금반지를 낀 손에서 부유함이 엿보이는 아주머니는 주인인듯 장사는 일군들에게 맡기고 느긋하게 담배를 피며 짙은 초록색 전대에 손을 넣어 돈을 세고 있다. 아주머니 뒤에 보이는 종업원들의 모습에서는 당시 고달픈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발하기도 쉽지 않던 시절이라 머리를 짧게 깎았고 장갑도 귀하던 시절이라 맨 손으로 소금을 퍼내고 있다. 당시 유행하던 애교머리를 하고 장을 보러 나온 아주머니와 돈을 받는 종업원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당시의 빈부차이를 볼 수 있다. 돈이 귀하던 시절이어서인지 손님이 내는 돈을 바라보는 다른 두 명의 아주머니 표정이 절묘하다. 아니 이렇게 많은 지폐를 건네는 아주머니가 부러웠을 것이다. 당시는 종업원 월급의 액수가 형편없었다. 그래서 전차비나 버스비를 아끼려고 일하러 가거나 일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올 때도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으니 돈 없는 사람들의 삶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재래시장은 한국 경제가 근대에서 현대로 오던 과정에서 많은 서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던 장사 터였고 일터였다. 그래서 50여 년 전 재래시장의 모습과 삶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보는 사람들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2010-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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