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조영석 '젖짜는 어미 소와 송아지'
너무 귀해 귀족·왕실에만 올리던 '우유'
고려시대부터 우유 대한 기록 발견
조선시대때는 약용·보약으로 사용
이 그림을 포함해 당시의 풍속을 그린 14점을 화첩으로 만들어 '사제첩(麝臍帖)'이라고 이름 한 후 겉면에다 '남들에게 보이지 말라 이를 범한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라는 '금기'를 써놓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이런 풍속화를 '속화(俗畵)'라고 부르며 천시했다. 그래서 조영석은 '속화'를 공개했을 경우 자신의 명예에 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 금기를 만들었고 화첩 이름도 '사제첩'이라고 한 것이다.
'사제'는 '사향노루 배꼽의 향기'라는 뜻으로 옛 선인들은 사향노루가 사냥꾼에게 잡히는 이유가 배꼽에서 나는 향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제'는 '본인에게는 향기롭지만 남에게 알려지면 크게 곤욕을 치른다.'는 경계의 의미로 사용한 단어다.
이 그림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조선시대에도 우유를 짰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때만 해도 조선왕조실록의 전산화는 커녕 국역 작업도 완성되지 않아 우유에 대해 어떤 기록이 있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인이 아닌 갓 쓴 양반들이 직접 소에서 우유를 짠다는 사실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
왕명의 출납을 기록한 '승정원일기' 현종 8년(1667년) 9월 14일자에 보면 "타락죽을 10월 1일부터 올려야 하므로 우유(당시 표기는 乳牛)를 사복시(司僕寺)로 하여금 대령케 하였음을 아뢰는 내의원(內醫院)의 계가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타락죽은 우유에 찹쌀가루를 넣고 끓인 죽으로 조선시대 궁중에서 10월부터 먹는 보양식이었다.
사복시(司僕寺)는 조선시대 왕이 타는 말 수레 및 마구와 목축에 관한 일을 맡던 관청으로 관원으로는 사복시제조(정1품에서 종2품사이의 당상관이 겸직) 정3품 당하관인 정(正) 종3품의 부정(副正) 종4품의 첨정(僉正) 종5품의 판관(判官) 종6품의 주부(主簿)가 있었다.
따라서 그림 속의 양반은 사복시 관원으로 임금께 올릴 타락죽을 만들기 위한 우유를 짜는 모습이다. 어미 소 옆에 송아지가 있는 이유는 송아지가 옆에 있어야 어미 소가 모성애를 발동해서 젖을 많이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조영석이 사복시 주부(主簿)로 근무했던 영조 2년(1726) 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역사에서 우유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발견된다. '삼국유사'와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우왕때 국가에서 유우소(乳牛所)라는 목장을 설치했고 그곳에서 나오는 우유를 왕실과 귀족들에게 공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때부터 우유와 타락죽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나라에 기근이 들었으니 각전에 공상하던 우유의 수량을 감하라" -태종 16년(1416) 3월 10일 "충청도 감사에게 전지(傳旨)하기를 청주(淸州)에 있는 국고(國庫)의 묵은 쌀과 콩으로 젖 짜는 소를 사서 날마다 우유를 받아 양녕대군에게 먹이도록 하라." -세종 5년(1423) 4월 4일 "상의 옥체가 몹시 쇠약하고 몹시 손상되시어 약으로는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열(心熱)이 이미 일어났는데 다른 증세가 또 일어날까 염려스러워 신들은 몹시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전에 아뢴 타락(駝酪)을 이제는 반드시 드셔야 하겠습니다." -인종 1년(1545) 2월 10일 이런 기록은 고종 때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조선시대 때 우유는 약용 또는 보약으로서 왕이나 왕족만 먹을 수 있는 식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일반인이 우유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902년에 프랑스인 쇼트(Shorte)가 도입한 홀스타인종 젖소 20여두에서 우유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그리고 1937년 7월 현 서울우유협동조합의 전신인 경성우유동업조합이 문을 열면서 우유가 시판되기 시작했다. 물론 규모는 크지 않았다.
이렇게 소규모에 머물러 있던 우유 산업은 1962년부터 시작된 축산진흥 5개년 계획에 힘입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67년에는 조제분유를 생산하게 되었고 1968년에는 '초코우유'가 개발되었다. 그 후 우유회사에서는 매일 아침 각 가정으로 배달하는 유통 시스템을 개발했고 한국의 우유 산업은 그때부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소설가 이충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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