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근대화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한강 '황포돛배'
경강상인들, 한강주변 포구 상권 장악
그녀는 아버지가 영사로 재직하던 10년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생활을 하면서 〈한강의 황포돛배>뿐 아니라 이제는 사라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금강산 마하연 대동강의 장엄한 황포돛배 선단 한강 나루터 혜화문 등 한국 근대의 풍경과 삶의 모습이 담긴 작품 40여 점을 남겼다.
그 작품들은 1998년 8월 19일부터 1999년 1월 3일까지 패사디나의 패시픽 아시아 박물관에서 개최된 '릴리안 밀러 회고전 -두 세계의 사이에서'가 열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조선 후기 한강주변 포구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경강상인(京江商人)은 서울의 객주에서 구입한 물품을 황포돛배에 싣고 강원도나 충청도에 가서 팔고 그곳에서 쌀이나 소금 나무 숯 생선 등을 싣고 와 포구와 서울의 객주에게 팔았다.
객주는 객상주인(客商主人)의 줄임말로 지금의 도매상인이다.
그들은 각 지방 관아에 일정한 세금을 내고 장사를 했는데 경강상인(강상)과 보부상 사이의 거래를 중개하거나 일부 품목을 독점해서 팔면서 부를 축적했다.
조선 후기 기록을 보면 한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의 수는 하루 평균 100척이었고 배 한 척에 대략 30가마니의 쌀이나 소금을 실었다.
밀러의 작품에 보이는 자루의 숫자도 그쯤 되어 보이니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경강상인의 후예들은 존재했고 그들이 갖고 다니던 물목도 조선시대와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근대에 한강을 오가던 황포돛배에 대한 기록은 1894년부터 1897년까지 네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이 쓴 방문기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도 볼 수 있다.
비숍은 당시 배를 타고 한강 물길을 따라 충청도 단양까지 갔다온 후 "조선에서는 소금을 비롯한 많은 물품이 한강에서 배를 통해 포구로 운반되고 포구의 상인들은 소나 말 지게 등을 이용해서 도시의 장터로 옮긴다."라고 기록했다.
당시 비숍이 본 배가 바로 오늘 소개하는 작품에 보이는 황포돛배다.
배의 돛대에 흰 광목이 아니라 황색인 이유에 대해 황포돛배 제작자인 김귀성 인간문화재는 "흰 광목에 단순한 황색을 물들인 것이 아니다. 광목에 진흙을 풀어 만든 황톳물을 들인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야 좀을 방지하고 질기며 비바람을 맞아도 변하거나 썩지 않기 때문"이라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밀러는 작품의 제목을 〈한강의 황포돛배(Orange - Sailed Junk of the Han Korea)>라고 함으로써 배경이 한강임을 확실하게 밝혔다. 그리고 작업노트에 "이 나루터 근처에 연꽃이 많은 연못이 있다."라고 기록해 양수리 나루터 풍경임을 추정할 수 있게 했다.
양수리(두물머리)에는 팔당 댐이 완공되기 전까지 나루터가 존재했고 근처에 연꽃 연못인 '연지'가 있다.
그리고 양수리 나루터 자리에서 강을 바라보면 위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작은 섬이 보인다. 당시 충청도나 강원도에서 온 황포돛배는 양수리 나루터에 들렀다가 현재 워커힐 호텔이 있는 광나루 뚝섬 근처 송파나루 노량진 마포나루를 거쳐 양화나루(현 성산대교 옆 절두산 성당 부근)까지 갔다.
한강의 황포돛배는 근대화와 함께 나타난 기차와 트럭에 운송품을 뺏기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시대가 어떻게 변하고 경제 흐름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읽고 있던 일부 눈치 빠른 객주와 강경상인들은 근대화의 흐름 속에 무역과 유통의 중심지가 된 인천과 부산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한국 근대의 수입상과 무역상으로 발돋움하면서 큰 부자가 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아는 상인은 존재했고 황포돛배로 한강을 오르내리던 강상과 그들과 함께 포구에서 장사를 하던 객주들이 바로 그런 지혜를 가진 상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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