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한국 경제] 혜원 신윤복이 그린 조선시대의 술집
돈 인식 부족해 사용 피하자 '주점'으로 유통 활성화
고려 숙종 각 고을에 주점 여는것 허락
주점·양조업 나라 경제의 한부분 차지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한국 최초의 술집은 고려 성종 2년인 983년에 당시 수도인 송도(개성)에서 문을 열었다. 희빈 옥장 낙빈 연령 등 여인의 이름을 상호로 사용했다고 했으니 귀족을 위한 기생집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민을 위한 술집이 나타난 것은 고려 숙종 7년인 1102년이었고 2년 후인 1104년에는 각 고을에 주점을 여는 것을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숙종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해동통보(海東通寶)를 만들었는데 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사용을 기피하자 주점의 개설을 통해 돈의 유통을 활성화하려고 한 것이다.
한국의 주점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주점과 양조업은 고려 숙종의 예상대로 나라 경제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선술집'은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바람의 화원' 주인공 혜원 신윤복(1758- ?)의 작품으로 현재 전해지는 조선시대 그림 중 유일한 술집 그림이다.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이라는 화첩에 있는 30점 풍속화 중의 한 점인데 조선시대 술집을 사진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술집은 앉아서 마시는 술집이 아니라 서서 마시는 술집이다. 지금은 사라진 이런 술집을 선술집 다른 말로는 목로주점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화가이자 시인인 조희룡(1789-1866)은 당시 중인들의 삶을 기록한 〈호산외기>에서 "협객 김양원은 계집을 사서 목로에 앉히고 술장수를 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조선시대 술집은 주먹 쓰는 자와 가까운 관계였음을 알 수 있고 이 그림에서 보이는 여인 역시 고용된 주모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선술집에 오는 손님은 누구였을까? 그림 가운데에서 노란 초립을 쓰고 붉은 옷을 입고 안주를 집는 사람은 무예별감(武藝別監 : 요즘의 청와대 경호관쯤 되는 직책)으로 당시 술집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는 기록이 있다. 별감 뒤에 서있는 흰 도포 입은 남자는 벼슬이 없는 양반이고 그 오른쪽 회색 도포를 입은 남자 역시 양반인데 허리춤에서 돈을 꺼내려는 듯 보이는 모습이 어쩌면 무예별감의 '스폰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림 맨 오른쪽에 깔때기 모자를 쓰고 까치등거리를 걸쳐 입은 사내는 의금부 나장이다. 의금부 역시 왕명을 받드는 곳이기에 이곳의 나장도 정보와 여론을 수집하기 위해 선술집과 기방을 드나들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술청 왼쪽에서 팔소매를 반쯤 걷어 올리고 서있는 홑상투 청년의 정체도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술집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아궁이에 불도 때는 '중노미'인데 그가 주모의 '기둥서방'인지 아닌지는 두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트레머리를 한 주모가 술을 퍼내는 술구기 술이 담겨있는 백자 푼주 누런 술단지와 안주 그릇 술청 왼쪽의 오층 찬탁 대청 오른쪽의 삼층 찬장과 뒤주를 통해 당시 선술집 살림살이를 살필 수 있는 것도 이 그림을 보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그림 왼쪽에 한문으로 쓴 '제화시'를 풀이하면 "술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술항아리를 끌어안고 맑은 바람을 대한다."이다. 따라서 선술집 풍경은 달빛이 훤한 저녁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이 들어있는 〈혜원전신첩>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유출되었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이 일본에 가서 당시 서울 시내 8칸짜리 기와집 20채 값을 치르고 되찾아왔다. 1934년의 일이었고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재산을 들여 한국 문화재를 지킨 분이다. 이렇게 되찾아온 〈혜원전신첩>은 광복 후 조선시대 풍속화의 백미(白眉)로 인정받아 국보 제135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충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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