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김상구 '르네상스 음악감상실'
장안의 청춘남녀 몰려 낭만 물씬 풍기던 '추억 다방'
일제강점기 운영 잘하면 큰 돈
명동·종로 시작으로 곳곳 생겨
1941년 미국과 전쟁으로 문 닫아
그렇게 음악을 듣는 곳이기에 슬그머니 들어가 아무 빈자리나 앉으면 됐고,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주변사람들은 관심 없고 오로지 음악만 들으러 왔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폼을 잡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생전 처음 보는 여학생 옆에 슬그머니 가서 앉아도 되는 '선택적 합석'이 가능한 유일한 곳이었고, 장안의 청춘남녀에게 인기가 많았다.
르네상스 주인은 험상궂게 생긴 왕년의 권투선수였는데 많은 이들은 까맣게 물들인 군복 윗도리를 입고 한쪽 눈에 까만 안대를 한 '애꾸'가 주인인줄 알았다. 시벨리우스와 말러 베토벤의 교향악을 황홀경에 빠져서 지휘하면서 주인 행세를 했기 때문이었다.
르네상스 외에도 신세계 백화점 안에 있었던 '에스에스' 을지로 입구 부근의 '아폴로' 명동에 있었던 '돌체' '쎄씨봉' '티롤' '여왕봉' '본전 다방'도 청춘남녀가 즐겨 가는 다방과 음악감상실이었다. 그리고 에어컨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커다란 선풍기를 틀었다.
한국 최초의 다방은 1903년 대한제국 시절 정동에 세워진 손탁호텔 1층에 있던 다방이다. 손탁호텔은 고종이 황실 전용 호텔로 지은 후 러시아 공사의 인척인 손탁에게 운영권을 준 서양식 호텔로 1층에 객실 식당 다방이 있었고 2층에는 고종과 귀빈들을 위한 특별실이 있었다.
당시 손탁호텔 식당과 다방은 각국의 외교사절과 대한제국 외교관이나 개화파들의 사교장 역할을 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자 러시아인 손탁은 이 호텔을 프랑스인에게 팔았다. 그 후 1917년 이화학당이 학생들 기숙사로 사용하기 위해 이 호텔을 구입했고 1922년에 건물을 헐었다. 한국 최초의 다방과 건물은 이렇게 사라졌다.
다방은 일제강점기 때 종로를 비롯해 소공동 충무로 명동 곳곳에 생겨났다. 당시 다방의 명칭은 '끽다점'이었는데 담배 피고 차 마시는 곳이라는 뜻이다.
시인 이상 역시 광화문 네거리 종각 부근에 '제비다방'을 차렸었다. 동거하던 기생 금홍과 관계가 나빠지자 그녀를 곁에 두려고 차렸으나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이상의 다방은 이렇게 망했지만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다방은 운영만 잘하면 큰 돈을 버는 장사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다방에서는 선전 수단으로 다방 이름이 인쇄된 조그만 성냥을 나눠줬는데 이런 관행은 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성업 중이던 다방은 1941년 미국과의 전쟁으로 설탕과 커피를 더 이상 수입하지 못하게 되면서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렇게 문을 닫았던 다방은 광복 후 다시 문을 열었고 한국전쟁 후에는 명동과 종로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생겨났다.
텔레비전 있는 집이 별로 없던 60년대에는 텔레비전을 갖춘 다방이 생겼고 장영철이나 김일이 프로레슬링 시합을 하는 날 프로 복싱 선수 김기수가 세계챔피언전을 하던 날 월드컵 예선전 때에는 다방 앞에 중계방송을 알리는 입간판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다방에는 시합 한 시간 전부터 좋은 자리에 앉으려는 손님이 몰려들었다.
이런 70년대가 지나자 집에서 텔레비전을 볼 수 있고 커피를 직접 타서 마실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나이들은 사람과 젊은이들이 가는 다방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건물 임대료가 오르면서 커피 값이 오르는 건 당연했고 대부분의 다방은 '청춘사업'을 할 때는 돈을 아끼지 않는 젊은이들의 취향을 따라갔다.
이제 서울에서 '옛날 다방' 찾기는 쉽지 않다. 약간은 어두운 다방에서 인생을 이야기 하던 '옛날 연애'의 시대는 이렇게 흘러갔고 '별다방' '콩다방'에서 경쾌한 데이트를 즐기는 새로운 청춘들의 시대가 된 것이다. 다방의 역사는 이렇게 시대와 청춘의 흐름을 따라 변했다.
소설가 이충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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