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한국 경제] '소금보다 짠 눈물이 있는 새벽 어시장'
남충모 <남해 어시장>
배가 부두에 도착하면 밤새 어두운 바다에서 파도와 씨름하며 잡아 올린 싱싱한 생선이 내려진다. 펄떡이는 줄돔 광어 도다리 대구 삼식이 도치 장치 놀래미 참돔 고도리 숭어 방어 참가자미 복어를 놓고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목소리를 돋우며 흥정을 시작한다.
'남해 어시장'은 대구에서 활동하는 남충모 화백이 1986년에 그린 작품인데 손님을 부르는 억센 경상도 말씨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남해 부둣가의 좌판 어시장은 요즘도 새벽 4시부터 열리고 있는데 만원 이만 원이면 싱싱한 활어를 푸짐하게 살 수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국에서 어로작업이 이루어진 시기는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 경상남도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에는 향유고래 참고래 혹등고래 등 고래 46마리 이상이 그려져 있으며 고래를 잡기 위한 작살과 부구 낚싯줄이 보인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기원전 6000년부터 동해에서 고래 사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선사시대 이후인 청동기시대 유물인 패총에서도 낚싯바늘 작살 어망의 석추 등이 발견되기 때문에 상당히 발전된 형태의 어로작업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도 어업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많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어량(魚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하천이나 얕은 해안에 원시적이나마 고정적인 어구를 설치하여 어로작업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법왕(法王)은 즉위 원년(599)에 불교의 영향으로 살생을 금지하는 령을 내려 어업을 못하게 했고 신라에서는 법흥왕 16년(529)에 살생을 금지함과 동시에 어구를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에도 활발한 어업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 수익성높아토지와같은경제가치
고려시대에도 어업은 활발했다. 1123년 송나라 사신으로 와서 개성에서 1개월 머물다가 송나라로 돌아간 서긍은 '고려 방문기'인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출판했는데 '고려인들은 해조류나 조개류를 먹는다.라고 기록했다. 고려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에도 '어업은 수익성이 높았기 때문에 토지와 다름없는 경제적 가치를 지녔으며 또 하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 - 국가 통제 벗어난 어업유통 급증
조선시대에는 어업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기관인 사재감(司宰監)에서 어업을 관장케 하였고 불법으로 어업을 하는 자는 곤장 80대에 처한다는 법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화폐경제의 발달로 국가통제를 벗어난 어업과 유통은 급증했다.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는 당시 어업과 유통현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조기가 산더미처럼 많이 잡혀 어선에 실을 수가 없다.'라고 했다. 남해안에서는 멸치가 많이 잡혔는데 미처 말리지 못하면 비료로 쓰고 마른 멸치는 지금처럼 반찬으로 사용하였고 명태와 청어의 수요가 많아 원산에서 명태를 싣고 가는 배와 말의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사람의 입맛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활발했던 조선시대 어업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대자본가들에게 '황금 어장'을 빼앗겨 발전하지 못했다. 광복 후에는 어민들의 자본 부족으로 어선의 크기가 작았을 뿐 아니라 가공시설도 미비했다.
현대 - 영세어민에겐 '부의혜택' 못돌아가
그러나 6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어업이 수출산업으로 인정받아 어선의 건조가 활발해졌고 70년대 후반에 들어와 원양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어획물 처리가공시설이 확충되었다. 이때부터 한국 어업과 수산물 유통은 현대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수산물 유통의 현대화는 도시인들에게 싱싱한 생선을 대량 공급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영세한 어민들에게는 부의 혜택이 돌아가지 못했다. 대형 유통업자들이 생선가격을 쥐락펴락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통구조 때문에 어민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팍팍하다. 남자는 밤새 검은 바다에서 거친 파도와 싸워야 하고 여자는 새벽부터 어시장에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바닷가에는 소금보다 짠 땀과 눈물이 있다'라는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충렬 소설가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