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엘리자베스 키스 '갖바치(Shoemaker)'
고무신 등장으로 사라진 비단신과 가죽신
조선 세종때부터 신분표시 역할
가죽신 경우 고위 관료만 신어
쌀한가마 가치…서민엔 '그림의 떡'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와 근대의 작품 중에서 짚신 삼는 풍속화는 몇 점 있지만 비단신 가죽신 나막신을 만드는 작업 모습이 보이는 그림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가 그린 이 작품이 유일하다.
키스는 일제 강점기 때 한국의 삶의 모습과 풍광을 화폭에 담은 영국 화가다. 삼일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8일에 처음 한국을 방문해 6개월을 머물렀고 그 후 1940년까지 여러 차례 더 들렸다. 그녀는 서울에만 머무르지 않고 함흥 원산 평양 등 북녘도시들도 열심히 다니며 수채화 목판화 동판화 드로잉 등 많은 그림을 남겼다.
키스는 자신의 그림과 작업 노트를 소개한 책 〈옛 한국(Old Korea) : 1946년 영국 발행>에서 자신은 한국 신발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그래서 신발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고 싶어 작업장을 찾아갔다고 밝혔다. 키스는 명성황후의 조카딸을 그린 '민씨가의 규수'와 '신부'에서 비단신을 맵시 있게 표현했다.
한국에서 신발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와 백제의 고분에서 청동으로 만든 신발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신발의 제조와 유통에 대한 기록이 없다. 고려시대 문헌에는 짚신과 미투리의 모양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그러나 누가 어디서 만들었고 어떻게 유통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신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처음 보이는 문헌은 '조선왕조실록'으로 세종 8년(1426년) 1월 26일 자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계급에 따라 의복 제도가 모두 등급이 있어서 뚜렷한 형식이 갖추어졌는데 다만 신발에 대한 제도가 아직껏 상세히 제정되지 아니하여 심지어는 시장의 공인이나 상인과 천민까지도 모두 가죽신을 신으며 벼슬이 없거나 직업이 없는 사람까지도 모두 투(套 : 비 올 때에 신는 반장화)를 신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하 계급의 구별이 없게 되옵니다. 바라옵건대 예조에 명하시어 상세한 제도를 제정하여 상하의 구별을 밝히게 하소서."
사헌부에서 세종대왕에게 건의한 내용이다. 세종대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고 이때부터 가죽신은 공조와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되어 있는 장인 30명이 만들었고 6품 이상의 고위관료만 신을 수 있었다. 신발이 신분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수단이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들어와 사회가 혼란해지고 중인들이 상권을 장악하면서 돈만 있으면 누구나 가죽신을 신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울에는 신발을 만드는 가내 수공업소 백여 곳이 생겼고 설날 전에는 비단신과 가죽신의 주문이 밀려 일하는 사람들이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당시 신발값은 쌀 한 가마니에서 한 가마니 반 값 정도로 비싸서 일반 서민은 나막신 짚신 삼신 등을 신었다. 그래서 시골에 사는 소녀들에게 비단신은 '꿈의 신발'이었고 '오빠생각'이라는 동요 가사에 '오빠가 비단구두 사갖고 오신다더니……'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였다.
비단신과 가죽신의 수요가 사라진 이유는 고무신의 등장 때문이다. 한국에 고무신이 등장한 건 1910년 중후반이었는데 일본에서 만든 제품이었다. 처음에는 투박한 배 모양의 고무신이 들어와 인기가 없었으나 1920년경에 사람들의 눈에 익은 비단신 모양의 고무신이 나오면서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고무신이 인기를 끌자 고무신 공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고 1923년에는 서울뿐 아니라 각 지방에도 생겨 그 숫자가 20곳에 달했다. 그리고 공장들 사이에 가격경쟁으로 몇 년 사이에 고무신 값은 반값으로 떨어졌고 이때부터 고무신은 도시뿐 아니라 시골까지 보급되었다. 결국 갖바치가 공방에서 만들던 비단신과 가죽신은 1930년대에 이르러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제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장인에 의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충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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