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서동진 '뒷골목', 서울 골목길서 만난 추억속 풍경 '꽃나무 장수'
산에서 나무 캐 지게 지고 다니며 팔아
소공동·명동 어귀에 모여 장터 형성
아파트 건설 본격화로 도시서 사라져
꽃나무 장수가 두툼한 옷을 입었고 뒷모습만 보이는 아주머니도 스카프를 썼으니 초봄인 듯하다. 배경으로 보이는 큰 나무들도 제법 짙은 초록빛을 띠고 있으니 가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수레 속 꽃은 화분에 담긴 노란색 수선화이거나 글라디올러스로 보인다. 물론 다른 꽃나무나 화분일 수도 있다.
60년대만 해도 서울 골목길에는 꽃나무 장수가 심심치 않게 다녔다. 거주공간이 아파트가 아니라 한옥이나 양옥 단독주택이라 마당에 꽃나무를 심는 집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꽃나무 장수들은 산에서 나무를 캐다가 팔았다. 손수레가 없는 이들은 지게에 지고 다니며 팔거나 소공동 거리와 명동 어귀에서 모여서 '꽃나무 장터'를 형성했다. 그래서 동네에 다니던 손수레에서 원하는 나무를 찾지 못하면 '꽃나무 장터'에 가서 원하는 나무를 구하는 '극성파'도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고 최순우 선생은 '꽃보다 아름다운 열매'라는 수필에서 꽃나무를 사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 해 봄 나는 개두릅나무 한 그루와 찔레 덩굴을 자전거에 싣고 온 시골 청년에게 구하고 싶었던 돌배(산배)나무 개암나무 사시나무 자작나무 그리고 너도밤나무를 꼭 한 그루씩 구해 오라고 일러 보냈더니 그 청년은 그 이튿날 아침 몇 그루의 산 나무들을 리어카에 싣고 어김없이 내 집 문을 두드렸다. 그 청년이 고마워서 나는 아침상을 차려 주라 했고 그 청년은 그것이 고마워서 곧바로 내 뜰 허전한 구석에 시키는 대로 그 나무들을 심어주고 돌아갔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선비와 화가들이 꽃나무를 사랑했다.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인 조희룡( 1797~?)은 중인 화가 승려 등 43인의 삶의 이야기를 엮은 '호산외사'에서 조선시대의 화가 단원 김홍도(1745 ~ 1806년 경)의 꽃나무 사랑을 이렇게 기록했다.
"단원은 살림이 늘 가난해서 아침저녁으로 끼니 걱정을 하는 때가 많았지만 어느 날 좋은 매화 한 그루를 보고 이것을 사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때마침 그의 그림을 찾는 사람에게 그림 값으로 3천 냥을 받게 되었다. 그중 2천 냥으로 매화를 사고 8백 냥으로 술을 받아서 친구들과 시를 읊으며 마시고 남은 돈 2백 냥으로 양식을 샀다고 한다."
당시 2백 냥이면 불과 2~3일 거리의 양식밖에 살 수가 없었다고 하니 요즘 계산으로 따지면 그림 한 점을 3백만 원 받고 판 후 2백만 원 주고 매화나무를 산 후 친구들과 술을 80만원어치 마시고 20만원을 생활비로 내놨다고 할 수 있다.
김홍도는 자신이 살던 집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마당에는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키웠고 파초를 비롯해 오동나무 소나무를 심었다. 연못 옆에는 괴석을 관상용으로 들여 놓았고 마당에서는 학을 키우면서 풍류를 즐겼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제가(1750~1805)의 시 '장경교(長慶橋)'에도 "혜화문 밖에는 수레와 말이 적은데 / 빗속에 이따금 꽃 파는 이 보이네"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지금의 삼선동에서 성북동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 꽃나무 장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던 꽃장수는 아파트 건설이 본격화 되고 주거공간에 마당이 없는 아파트로 바뀌는 80년대 초반 이후에는 찾기 힘들게 되었다. 그 대신 아파트에서 키울 수 있는 화분 꽃이나 선물용 꽃을 재배하는 화훼농가가 생기기 시작했고 아파트 단지 상가에는 꽃집이 들어섰다. 이렇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며 진화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다.
이충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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