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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장애물

사람들은 왜 돈 명예 힘을 추구할까. 이러한 질문은 인생에서 한 번쯤은 던져봤을 법한 것이다. 돈 명예 힘 자체가 대단히 좋다기보다는 그 결과가 너무 달콤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3가지 모두 또는 이 중 하나만 있어도 내 자존감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이 존경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이 세 가지를 모두 포기하면서도 자신을 세우는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생을 떠나면서 자신의 책을 절판해달라는 그의 부탁은 많은 사람이 그의 책을 소유하고 싶게 만들었다. 사람의 심성에는 낮아지는 자에게 끌리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예수님은 돈 명예 힘을 모두 포기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누린 분이기에 많은 사람이 2000년 동안 추종을 했다. 오늘날 의사가 어떤 사람의 불치병을 고치면 당장 엄청나게 유명해져 거부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수 많은 사람이 추종했지만 이것을 명예와 힘으로 전환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날 어떤 정치인이나 유명인이 이렇게 추종자가 많다면 이를 반드시 자신의 명예와 힘으로 '현금화'하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은 달콤한 유혹을 포기하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선택했다. 얼마나 초라한 일인가. 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진 이가 자신을 세우기 위해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나는 그래서 예수의 추종자가 되기로 했다. 그가 했던 말과 행동을 기록한 복음서를 믿고 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 세상에 와서 많은 사람을 고치고 가르치고 선교했음을 믿는다. 그의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이 스스로 낮아지시려는 행위임을 믿는다. 그런데 만약 수억 분의 일(그 가능성을 믿지는 않지만)이라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가정할지라도 예수님은 내 삶에서 가장 쫓아갈만한 분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돈 명예 힘을 모두 내려놓은 법정스님 하버드대 박사학위를 받고 '학위'를 내려놓고 선교사가 된 이용규 선교사 이런 분들보다 더욱 큰 것을 내려놓은 이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인 예수님은 추종할만한 가치가 충분한 분이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수많은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이름을 더럽히고 그의 정신을 망각하고 그의 뜻을 저버리고 살고 있음을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크리스천 공동체에서는 여전히 돈 명예 힘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곳이고 주도권 싸움이 한창이다. 누구를 손가락질 하랴. 내 자신이 그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롭지 못 하다. 그렇기에 내 주변에서는 예수님을 따라보고 싶다는 사람이 속속들이 나오지 않고 '예수쟁이가 저것밖에 안 된다'는 말이 들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자랑하고 내놓기가 쉽지 않다. 나로 인해 가려진 예수님. 그의 추종자들로 인해 가려진 예수님. 그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데 장애물이 너무 많다. 나는 여러 장애물 중에 작은 하나다. 예수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2010-07-20

[성서인물열전] 디모데, 든든한 2세대 거목

신약성서시대 자녀들에게 신앙적 가르침을 베푸는 것은 주로 여성들의 몫이었다. 물론 당대의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가속(家屬)의 종교를 정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사항을 가장인 아버지가 결정했지만 말이다. 여성들은 스토리텔링식 교육을 통하여 자녀들의 종교와 의식세계 형성을 도왔다. 어릴 때부터 신실한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가 들려주던 구약성경 이야기를 배우며 자란 탓에 그의 이름 뜻 그대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루스드라(Lystra) 태생의 혼혈인 디모데였다. 경건한 가정에서 곱게 자란 디모데가 루스드라를 방문한 바울을 만남으로써 그의 생애는 큰 전기를 맞이하였다. 그 때 젊은 디모데의 눈에 비친 바울의 모습은 영적 거인(巨人)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버릴 정도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선교에 전력투구하고 있던 바울의 첫 인상은 디모데에게는 너무나 강렬했으리라. 이 만남을 계기로 하여 바울의 선교를 돕는 온유하고 충성스런 동역자로서 초기 교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지역교회를 맡은 목회 초년생으로 사려 깊으나 유약한 지도자였던 디모데는 바울이 루스드라 지역을 재차 방문했을 때 그는 지역교회 성도들로부터 크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디모데는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13개의 편지 가운데 6개 편지에서 공동저자로 등장하고 있고 바울의 이름으로 전달된 디모데전후서에서 목회의 지침을 특별히 받는 인물로 거명될 만큼 바울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다.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영적 아들로 삼았고 그를 향해 "그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바울은 젊지만 누구보다 신앙의 뿌리가 깊고 믿음직한 디모데를 전적으로 신임하여 여러 교회에 그를 파송하였다. 병치레가 많았던 디모데였지만 그러한 육체적 연약함이 그의 복음을 향한 열정과 헌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신앙 유산을 물려받아 성장한 후 바울을 닮은 자가 된 디모데. 이렇듯 가정과 교회에서 닮음(imitation)의 신앙교육이 연쇄적으로 일어날 때 디모데처럼 믿음의 2세들이 이 땅의 든든한 거목(巨木)으로 자라 이민교회의 역사를 새로 쓰지 않겠는가?

2010-07-20

[변화] '서툰 악역'

췌장암으로 마흔일곱의 짧은 생을 살다간 '랜디포시' 카네기멜론대학 교수가 남긴 '마지막강의'의 동영상이 전세계로 퍼지면서 천만이 넘는 사람들을 눈물짓게 만든바있다. 그의 '마지막 강의'(The last lecture)라는 책을보면 '장벽이 거기 서 있는 것은 가로막기 위해서가 아니며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를 보여줄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라고 강조한다. '장벽'을 무너뜨리려고만 애쓰던 우리들에게 그의 깊은 묵상은 인생의 장벽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게 한다. '장벽'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개인의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도 필요하다. 공동체안에서 문제가 생길 때 마다 등장하는 사람들이있다. 내가 총대를 메지 않으면 공동체가 무너진다 생각하여 '악역'을 자처하며 나서는 사람들이다. 드라마에서 '악역'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극의 갈등을 고조시켜 드라마틱한 모맨텀을 창조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다. 요즘도 방송국에는 '악역'에 대한 애청자들의 항의전화가 종종 온다고 한다. 악역이 등장할 때마다 이를 갈며 미워하지만 '악역'이 빠진 드라마는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악역'이 필요한가? 내가 나서서 '장벽'을 허물지 않으면 교회가 곧 문제가 생겨나고 좌초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교회를 더 시끄럽게 하고 갈등을 증폭시킨다는 것을 잘 모를 때가 많다. 그야 말로 '서툰 악역'인 것이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담임 목사의 착각 또한 갈등을 증폭시킨다. 문제가 생겨난 원인이 반드시 사탄의 계략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따져보자면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사탄에 의해 이용당한 것이니 원인 제공을 한 인간이 더 큰 잘못이다. 리더로써 갈등과 혼돈의 책임을 지고 왜 물러서지 못하는가? 목사를 따르지 않는 세력은 무조건 사탄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것처럼 뒤집어씌우는 현대판 '마녀사냥'은 중단되어야한다. 내가 사라져도 교회의 주인되신 하나님이 수습하시고 회복하실 것이다. '장벽'앞에 서있는가? 가로막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지를 시험해보기 위해 서있는 것이다. 서툰 악역을 자처하지 말고 기도하라!

2010-07-20

[사목의 향기] 조미료와 기도생활

군에 있을 때 저도 그랬습니다만 제 바로 밑의 졸병은 조미료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 당시 군대 밥은 맛 나는 식사도 아니었고 왕성한 식욕을 가진 장정들에겐 늘 모자라는 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맛없는 국이라도 조미료만 조금 넣으면 그 변해지는 맛이란 상상을 초월하기에 조미료는 아주 중요한 재산이자 보물 1호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하고 치사하기도 했지만 나만 아는 비밀 공간에 조미료를 숨겨두고 식사 때에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뿌려 먹던 그 맛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졸병이었던 그 친구는 두메산골 출신이라 군에 오기 전까지 조미료가 있었는지 조차 몰랐던 모양입니다. "김 상병님 이 가루는 요술쟁이래요. 싱거운 것에 넣으면 간이 맞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짠 것에 요것을 넣으면 싱겁게 되는 것은 이해가 안 돼요. 이거 정말로 요술가루에요." 소탈한 성격의 마음이 후한 친구였는지라 이 친구하고는 삭막한 군대 생활 안에서 조미료 뿐 아니라 많은 것들을 나누며 살았던 생각이 오늘따라 각별합니다. 음식에 갖은 양념을 해 맛을 내자면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듭니다. 거기에 비해 조미료를 넣어 음식 맛을 내는 것은 아주 쉽고 간편한 방법입니다. 오늘 성경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추억이 회상되어지는 것은 혹시나 나의 생활이 간편하고 쉬운 것만 고집하는 조미료 같은 생활이고 인스턴트식품 같이 편한 것만 기도하는 신앙이 아닐까 하는 반성 때문인가 봅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미국에서 늦깎이로 신학을 공부할 때와 처음 이곳 미국에서 피정자들에게 처음으로 영어 강론을 할 때 무척이나 절박한 마음이었다고 기억 됩니다. 하지만 이제 학교에서 하는 공부도 끝났고 영어로 강론하는 본당이나 수녀원에서 가끔씩 칭찬도 받으니 절박한 마음 대신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게으름이 자리 잡아 조미료 같은 신앙을 사는 것은 아닌지 슬며시 걱정되어집니다. 기도는 절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쉽고 맛있게 조리할 수 있는 조미료가 있다 고해서 아무 생각 없이 거기에 입맛을 맞추다보면 우리의 생활이 정성스러움 보다는 편함으로 흘러 절박한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부유한 마음과 여유로운 마음에서 간절한 기도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절박함 안에 살면서도 당장 발등에 불 떨어지지 않는다고 오늘로 내일로 미루며 사는 신앙의 한심함을 제 안에서 봅니다만 이런 한심한 신앙생활과 편한 것만 고집하는 탓에 조미료나 인스턴트식품으로 대치하려는 것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위의 말씀대로라면 구하면 받겠지만 이것 보다 먼저 내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해 줄 수 있을 때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기도란 그저 빌기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기만 해서도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오늘 성경말씀은 제게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비는 것과 믿는 것 보다 기도 하는 사람의 마음과 태도 또 바랄 것을 바라는 깨어있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가르치십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서 사랑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을 읽으면서 점심을 먹으면서 감사한 마음과 뿌듯한 마음과는 달리 모처럼 쉬는 날인데 갑자기 썰렁해진 날씨에 투정을 부리며 어떡하면 잘 놀고 쉴 수 있을까 하는 이 나태한 마음이 들켜버린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마치 조미료를 아무 생각 없이 쳐 먹고 인스턴트 음식을 애용하는 게으름 같아 그분께 죄송스런 마음입니다. 조미료! 무좀 치료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을 만큼 독한 조미료가 건강에 절대로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처럼 편 하려고만 하는 마음과 내가 바라는 것만 바라는 기도는 절대 우리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음은 자명한 일이겠지요. 무엇이든 빨리 이루어지고 간편하게 들여지는 기도와 신앙이 절대 우리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어머니 손맛을 탄 청국장 생각에 군침 흘리며 또 오래된 추억을 회상하며 배운 하루였지 싶습니다.

2010-07-20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불자' 아들 만드는 방법 알고싶어요

Q: 제 나이 56세인데요 80이신 어머니에게 늘 사랑받지 못했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 30인 아들도 제게 왜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냐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로 괴로워하다가 법문을 듣고 아들도 내 마음 같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불자로 만들고 싶어서 열성적으로 권유도 하는데 잘되지가 않으니 스님께 아들을 불자로 만드는 방법을 여쭙고 싶습니다. A: 논을 한 마지기 가진 사람과 99마지기 가진 사람이 누구에게 논을 달라고 하는지 아세요? 99마지기 가진 사람이 한 마지기 가진 사람 보고 달라고 합니다. 100마지기 채우려고 그럽니다. 그것처럼 본인이 부처님 법 만나서 깨우쳤잖습니까? 팔순 어머니에게는 사랑을 안 준다고 불만이었고 아들에게는 다 컸는데 왜 나에게 사랑을 요구하느냐고 불만이었는데 어머니를 향한 나의 불만스러운 마음이 아들의 마음이었음을 알 수 있었고 또 아들을 향한 내 마음이 지금 팔순 어머니의 마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뒤집어서 보니 어머니와 아들이 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내가 깨우치게 되면 어머니를 향한 나의 불만을 보면서 아들의 불만을 이해하게 되고 아들의 불만을 보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나를 괴롭히던 두 가지가 다 내 공부를 도와주는 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질문하신 분은 논이 한 마지기도 없던 사람이 99마지기를 장만해서 행복해야 되는데 한 마지기 더 채우려고 욕심 부리는 사람하고 똑같습니다. 우리 아들이 부처님 법 공부해서 마음이 편해졌으면 좋겠다 하는 것은 나의 원이지만은 우리 아들 불자 만들고 싶다 하는 것은 나의 욕심입니다. 어떻게 보면 불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 진리 같지만 결국은 내 원하는 대로 아들이 됐으면 좋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생각을 내려놔야 합니다. 그래야 나와 아들과의 사이에 긴장이 해소됩니다. 아들은 아들 고집대로 하고 나는 내 고집대로 하면 싸움이 멈추지 않습니다. 긴장 관계 속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있는 한 상대가 설득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굴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긴장이 있으면 이기고 지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교화가 안 됩니다. 그러니 먼저 내가 자식을 내 식대로 하려는 생각을 내려놔야 합니다. 전에는 내 식대로 하려고 했는데 부처님 법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게 잘못된 줄 알고 내려놔야지요. 그런데 그 내 식대로 하려는 까르마가 남아서 내 고집이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옷으로 딱 갈아입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부처님 법이라는 잣대를 내걸고 아들을 굴복을 시키려는 겁니다. 아집 대신 법집을 쥐고 이걸로 상대를 다시 굴복시키려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 전에는 아들이 나하고 싸웠는데 이렇게 되면 아들이 부처님하고 싸우는 게 되어버린 겁니다. 그리고 내가 부처님을 방패로 내세워놓고 싸우니까 아들은 불법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내 식대로 하겠다는 것은 아무리 좋아도 내가 좋은 거지 아들이 좋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들 다 극락세계가 좋다 하지마는 술꾼은 극락세계에도 술집이 있나 없나를 먼저 따질 겁니다. 술집 없다면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안 들 거예요. 이처럼 다 좋고 나쁨을 자기 좋은 대로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우선 나를 먼저 내려놔야 됩니다. 그래서 이 긴장을 해소시키고 그런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얘기가 오고가야 됩니다. 아들을 불자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불법을 말하지 말고 그냥 불법을 믿고 안 믿고는 아들의 문제지만 이런 좋은 법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수준에서 행하면 오히려 아들에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2010-07-20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독일 축구서 배우는 '파괴와 창조'

# 풍경 1 :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독일-아르헨티나 경기를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독일 축구는 그 동안 '수비 축구 방패 축구'였습니다. 그래서 지루하고 심심하고 잠그는 축구였죠. 한두 골 차로 승리와 실속을 챙길 뿐 축구팬들의 가슴을 콩닥콩닥하게 만들진 못했죠. 그런 독일 축구가 달라졌더군요. 차범근 해설위원도 깜짝 놀랄 정도였죠. "독일팀이 예전과 달리 기술 축구를 구사하고 있다. 공격수가 수비를 잘하고 수비수가 공격을 잘하는 첨단 축구를 보여주고 있다"고 풀더군요. 결국 독일은 우승후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를 4-0으로 대파했습니다. 이미 승리가 확정적임에도 독일은 마지막 순간까지 상대를 몰아치더군요. 독일 축구의 변화 거기에는 '성장의 이치'가 담겨 있었습니다. # 풍경 2 : 독일에서도 시끄러웠다고 합니다. "수비 지향의 독일 축구가 달라졌다. 오히려 공격 지향의 네덜란드 축구를 보는 느낌이다. 독일 축구가 이렇게 달라져도 되는 건가?"라는 논란이 거셌다고 하네요. '현문우답'은 거기서 두 가지 마음을 봅니다. 하나는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달라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축구뿐만 아닙니다. 일상을 사는 우리의 마음도 이런저런 조직도 기업도 국가도 마찬가지죠. 머무름과 달라짐 그 사이에서 늘 고민하죠. 그런데 유심히 보세요. 언제 사람들은 머물고 싶어할까요? 맞습니다. 먹고 살만 할 때입니다. "조직적인 수비 축구만으로도 먹고 살만 했다. 왜 독일 축구가 변해야 하는 거지?" 이런 의문이 솟구치는 거죠.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내가 좋았던 순간 기뻤던 순간 행복했던 순간 짜릿했던 순간이 지속 되길 바라죠. 그래서 그런 순간을 붙드는 겁니다. 기억을 돌이키고 다시 돌이키고 다시 돌이키면서 계속 머물고 싶어합니다. 이미 그 순간이 지나갔을 때조차 말입니다. 그래서 변화가 쉽지 않은 겁니다. '내가 머물고 싶은 순간'을 스스로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개인도 기업도 국가도 머무름에 집착하게 됩니다. 지금껏 앉아서 데워놓은 의자의 방석이 너무도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과 우주는 결코 머물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되풀이하며 변하고 있죠. 봄이 왔다가 봄이 가죠. 여름이 왔다가 여름이 가죠. 파괴-창조-파괴-창조가 끝없이 맞물려서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거고 그래서 생명이죠. 머물 건가 머물지 않을 건가는 사실 고민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고요? 세상과 우주의 끝없는 변화는 '이치'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할 일은 머무름의 이유를 찾아내는 겁니다. "세상은 변하는데 나는 왜 머물고 싶어하는가? 내가 머물고자 하는 집착의 뿌리는 무엇인가?" 그걸 찾아서 '머물고자 하는 나의 착각'을 걷어내면 되죠. 그걸 걷을 때 다시 세상의 이치 우주의 이치와 맞물려서 돌아가는 겁니다. 독일 축구는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겁니다. '과거의 전형'을 파괴하고 '오늘의 새로움'을 일궈낸 거죠. 물론 그런 변화의 과정이 늘 성공만 안겨주는 건 아닙니다. 둥가 감독이 시도했던 브라질의 실속 축구는 8강전에서 고배를 마시고 말았죠. 그러나 그 모든 성공과 실패는 거대한 진화의 과정 속에 있는 겁니다. 핵심은 독일의 축구도 브라질의 축구도 숨 쉬며 살아있다는 거죠. 파괴와 창조를 거듭하고 있다는 겁니다. 중국의 육조 혜능 대사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머무는 순간 화석이 되기 때문이죠. 그러니 물어야죠. 아직도 파괴되지 않은 내 삶의 상처 내 마음의 화석은 과연 뭔가?

2010-07-20

[생활 속에서] Just Say "No!"

창세기에 보면 사탄을 상징하는 뱀은 가장 간교한 존재라고 하였다(창 3:1) '간교하다'는 말은 "악한 쪽으로 지혜롭다. 죄를 짓는데 지혜롭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면 사람은 악한 쪽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이 간교한 사탄이 어느 날 아담과 하와에게 유혹의 초대장을 보냈다. 사탄의 초대장은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탄은 여기서 '참으로'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의심을 품게 하는 것이다. 사탄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접근한다. 한 가정주부가 있었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자녀를 키우는 재미에 흠뻑 빠져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낯 선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당신 남편이 정말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한번 유심히 살펴보라. 그러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화를 받은 후 남편을 의심할 만한 것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지나다 그 부인은 우연히 한 카페에서 자기 남편이 한 세련된 여성을 만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때 그 부인은 "남편이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 남편은 그 여성을 사업상 만난 것뿐인데 성급하게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다 의심은 더 깊어지고 결국 의부증에 걸려 남편과 이혼까지 하게 되었다. 우연히 걸려온 전화 한통이 가정을 파괴시킨 것이다. 남편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단지 그 아내가 혼자 의심하다가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사탄이 사람들을 유혹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축복은 다 잊어버리게 한다. 다만 그들에게 주시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그래서 감사 대신 불평을 믿음 대신 의심을 품게 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러기에 하나님 편에서 달라지신 것은 없다. 다만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탄의 유혹을 받는 것 그 자체는 죄는 아니다. 죄를 짓도록 하는 사탄의 유혹의 초대장을 받았을 때 단지 돌려주면 된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머뭇거리다 시험에 빠져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다. 사탄은 삶의 한 복판에서 긍정적인 것을 보게 하기 보다는 부정적인 것에 집착하게 한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을 감사하기 보다는 아직 주시지 않은 것을 불평하게 한다. 또한 조금만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스스로 의심을 키워 자신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사탄의 유혹의 초대장을 받고 즉시 돌려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의심을 하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무너지게 된다. 만일 사탄이 유혹의 초대장을 보내면 즉시 돌려주라. "Just say no!" 이것이 사탄에게 주어야 하는 경고이다.

2010-07-13

[변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지난 한주간 동안 캠핑을 다녀왔다.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들이 있는 세코야 파크는 여전히 웅장한 자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팔을 넓게 펴고 그 오랜 세월을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세코야 나무들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 사람들은 산의 웅장함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사실 인간의 죄의 결과로 땅은 심판을 받았고 노아 때의 홍수로 평평했던 지구에 높은 산들 깊은 계곡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섭리는 죄의 결과로 생겨난 험준한 산과 계곡 속에도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요즘 한국의 50대는 산속에서 만난다는 유행어가 있다. 건강을 되찾기 위해 산행을 택하는 중년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얼마전 '산 속에서 암을 고친 사람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쉼을 모르고 달리던 그들은 결국 삶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고 마지막 희망을 산에 걸었다. 세상을 잊고 산속에 파뭍쳐 십수년을 보내면서 암을 고쳤고 여전히 산이 좋아 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자연이 주는 그대로를 먹고 마시며 사는 사람들은 참으로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렇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 하나님의 것이 보존되어 있는 곳에서는 여전히 많은 생명이 회복되고 있다. 산 속에서 한 주간을 보내고 오니 행동도 생각도 느려진 듯 했다. 예전 같으면 신호등이 바뀌기가 무섭게 질주했는데 이제는 좀 더 느긋하게 운전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가끔씩 쉼을 가져야 사고도 덜 나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쉼'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 아니라 '의무'이다. 하나님은 6일을 일하시고 7일째 쉬시면서 인간이 반드시 이를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출31:16) 쉬지 않고 일에 미쳐있는 사람을 영웅시하는 세상의 분위기를 따라하다가는 완성은커녕 결코 long run하지 못할 것이다. 휴가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쉼'은 일을 위해 있는 것이다. 빨리 은퇴하고 남은 여생을 휴가로 보내고자 하는 잘못된 생각이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있다. 휴가를 위해 일하지 말고 일을 위해 휴가를 즐길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열심히 일한 당신! 어디든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곳으로 지금 떠나라!!"

2010-07-13

[사목의 향기] 오그라진 마음 펴지는 날

오늘 성당에 앉아 아침 기도를 드리면서 기쁨의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며칠 전에 돌아가신 Thomas more 신부님이라고 제가 다니던 학교 교수 신부님이셨고 멀리 이방의 땅에서 온 저를 늘 미소로 맞이하시던 그분의 미소가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입니다. 아침기도가 끝난 다음 저희 수도자들이 사목하고 있는 무염시태(원죄 없으신 성모)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를 드리면서 마르코 복음을 읽는데 왠지 모르는 부끄러움이 달아오르더군요. 오늘 복음에서 안식일임에도 예수님께서 오그라진 손을 가진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거기에 함께 있던 오그라진 마음을 가진 이들이 그들의 오그라진 마음은 보지 못한 채 오그라든 손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그라져 있는 그들의 마음에 큰 분노를 느끼셨던 모양입니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사람을 살려야 하는가 아니면 죽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사실 위독한 사람이 있으면 안식일이라도 그 사람을 살려야지 죽도록 내버려두어선 안 되는 것이 유다교의 법 해석입니다. 결국 그분은 오그라진 손을 가진 사람의 손을 펴주시지만 오그라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마음은 펴주시지 않습니다. 그분의 치유는 믿음을 바탕으로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인데 오그라진 마음의 소유자들은 무엇이 그들에게 필요한지 조차 알지 못하니 치유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겠지요. 오히려 '어떻게 저 사람을 없애버릴까'하고 헤로데 당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그분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힘없는 사람들에게 힘 있는 사람들의 오그라진 마음은 참으로 두렵고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사 강론 중 나는 오그라진 손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오그라진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행여 오그라진 손을 가지고 있다면 천만다행이겠지만 행여 오그라진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하나? 라고 자문한 뒤 오그라진 마음이란 내가 하는 일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내 것만을 고집하는 폭력이라고 말하는 순간 스스로 화들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헤로데 당원들과 바리사이파들의 오그라든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을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성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세속적 표현부터 내가 하면 거룩한 희생이고 네가 하면 형편없는 바보짓이라는 종교적 표현까지 나를 포함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것만을 고집하며 오그라진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새삼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 말씀으로 인해 오늘은 다른 사람의 말에 더욱더 귀기우리고 이웃의 생각에 더 집중하는 하루를 살게 되었습니다. 제게 울린 말씀을 통해 성경의 말씀은 이천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지만 현실에서 열매 맺는 살아있는 말씀임을 체험한 하루였습니다. 해서 저에게 오그라진 마음을 갖지 않도록 노력하는 하루였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이 오그라진 마음을 갖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더욱이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의 지도자들이 오그라진 마음을 펴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점점 커지는 하루이기도 했습니다.

2010-07-13

[지혜의 향기] 불교의 발상지 인도…신자는 어디에?

불교가 처음 인도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인도 사람들 가운데 불교도는 거의 없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아주 없지는 않다. 달라이라마의 지도 아래 티베트에서 넘어온 망명 정부도 다름살라에 자리를 잡고 있고 본토박이 신자들도 800만 명 가량 된다. 하지만 11억이 넘는 인구 대국에다 그 종교의 발상지에서 이 정도 뿐이라니 없는 거나 비슷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크고 길게 보면 세상사 덧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게 바뀐다. 산천초목도 민족도 인종도 다 바뀐다. 종교라고 결국 안 바뀔 재간이 있으랴. 이 세상 삼라만상은 어떤 계기와 인연으로 생겨나 어느 정도 머물다 부서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허물어져 텅 비고 만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진리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우리 마음이나 생각도 마찬가지다. 한 가닥 문득 일어난 생각은 한 동안 머물다 옅어져 가고 이윽고 사라진다. 생주이멸(生住離滅)이다. 그건 그렇더라도 그다지도 번성하던 인도 불교는 왜 자신의 땅에서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던가? 아무리 성주괴공이라지만 순환 주기가 너무 빠르지 않은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인도 불교는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 왕이라는 전륜성왕을 거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대학만 해도 그렇다. 세계 최초의 종합대학이 어딘지 아시는가? 영국의 켐브릿지나 옥스포드? 아니면 이탈리아의 불로냐 대학? 설마 미국의 하바드나 예일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카이로의 어느 이슬람 대학인가? 고구려 때 세웠다는 태학에까지 연줄이 닿는다는 서울의 성균관대학이 후보에 드는가? 지금은 사라진 인도의 나란타 대학이 세계 최초의 종합대학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기원전 5세기에 시작되어 무려 1600여 년 동안이나 이어오다 1119년 이슬람의 침입으로 잿더미가 된 후 다시는 복구 되지 못했다. 항상 1만여 명의 학승들이 기거하며 날마다 100여 개의 강좌가 열렸다. 불교 경전과 베다 의술 음악 등 온갖 학문이 연구 되었다. 신라의 혜초 스님도 여기서 공부하려고 먼 길을 떠나왔으나 막상 도착해 보니 대학은 이미 폐허가 되어 물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이렇듯 인도 불교는 이미 8~9세기에 가서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13세기경에는 인도에서는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직접적인 이유는 7세기경 힌두교가 부흥하면서 불교를 박해하였고 불교는 이에 적절한 대응을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교를 억누르는 한 편 부처님을 힌두 신 비시누의 한 나툼으로 둔갑시키는 등 정신적인 기반을 비틀더니 불교를 아예 한 입에 삼켜 힌두교의 한 귀퉁이로 삼고 말았다. 두 번째의 결정타는 이슬람이다. 11세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이들의 침공으로 불교 사원이나 경전은 죄다 불타 버렸고 승려들은 이웃나라나 남인도 등지로 흩어졌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다는 아니다. 본질적이면서 더 큰 내적 이유는 그 당시 불교가 어느새 일반 서민에게서는 멀어진 전문 승려만을 위한 종교로 변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태에서 몇 차례 강한 외부 충격으로 종교의 머리가 무너지자 아랫도리마저 움직이지를 않아 그 자리에서 당하고 말았다. 상층부를 업고 뛰어 위난을 피한 후 때를 보아 다시 싹을 틔우고 북을 줄 풀뿌리 민중을 길러 놓지 못한 것이다. 한국 불교 미국 불교 다 마찬가지다. 이는 결국 민중의 바다 재가 불자들의 두터운 흙살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다면 조만간 되풀이 될 수 있는 이야기요 우리 운명의 반면교사에 다름 아니다.

2010-07-13

[생활 속에서] 역사속 예수에 대한 믿음

한국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나이지리아와 2-2로 비긴 후 16강에 진출했다. 한국은 이어 16강에서 우루과이에 1-2로 패해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에 대한 언론과 팬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어떤 이는 '저렇게 훌륭한 팀을 데리고 8강 4강에도 못 나간 것이 부끄럽다'고 하고 어떤 이는 '허정무 감독이 잘했다'고 평가한다. 어떤 이는 '공차기에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한 가지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수많은 의견이 쏟아져 나온다. 시간이 흐르면 좀 더 객관적인 평가가 나올 것이다. 한국이 향후 20년 동안 월드컵 16강에 진출하지 못한다면 2010년의 원정 16강 진출은 대단한 일로 여겨질 것이다. 한국이 향후 20년 동안 매대회마다 16강에 진출하면 2010년의 업적은 폄하될 것이다. 역사의 기록은 이렇게 객관적인 것 같으면서도 주관적이다. 상황에 따라 판단은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16강 진출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 성서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흥미롭다. 신약성경의 초반에 나오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며 작성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세 책을 공관복음(synoptic gospels)이라고 한다. 표현은 다를지라도 관점은 같다는 뜻이다. 4복음서 중의 하나인 요한복음은 앞선 복음서에 비해 몇 십 년 후에 작성된 것이다. 그러니 좀 더 객관적이고 좀 더 평가적인 내용이 가미된다. 앞선 3복음서가 역사에 대한 기록이라면 요한복음은 역사 기록을 놓고 평가를 하면서 설교를 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설교에는 첨삭이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어떻게 같은 역사를 두고 4복음서마다 내용이 다르냐"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에 그 말을 들으면 그럴 듯하게 들리고 성경은 조작된 책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사역'에 흠을 잡을 수 있는 내용은 없다. 왜냐하면 수백만 수천만 명이 그 장면을 목도했고 그 기록이 영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도 영상으로 남겨지지 않았을 뿐이지 수백 수천 명의 증인이 있었고 이를 제자들과 사도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기록을 해두었음을 볼 때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다. 만약 2080년쯤에 어떤 이가 "나는 한국이 70년 전에 16강에 진출한 것을 절대 믿을 수 없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헛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된다. 역사적인 예수를 믿는 것보다 믿지 않는 게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는 너무나 많다. 예수님의 활동을 다양한 각도로 남겨둔 이유가 분명히 있었고 그것은 역사 기록으로도 증명되었지만 이를 믿고 싶지 않은 그 강력한 믿음이 우리 안에 남겨져 있다. 아마도 누군가 내 삶을 간섭하고 좌지우지하는 게 싫어서 일 것이다. 인간의 그릇된 자립심은 아담에서부터 시작했으니 그 역사는 길고도 길다.

2010-07-06

[변화] 하나님의 무리한 요구

하나님은 때로 인간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신다. 아브라함에게는 식솔들을 데리고 정든 고향을 떠나 앞으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100세에 얻은 귀여운 자식을 죽여서 재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노아에게는 수십년 동안 청명한 맑은 하늘아래서 홍수를 대비해 방주를 짓게 하셨다. 80살이 되어 사람 보다는 양떼를 이끌기에 더 익숙해진 할아버지 모세에게 25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무리한 요구를 하신다. 범사에 감사하란다. 어떻게 다 망했는데 감사가 나오는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란다. 어떻게 찢어 죽여도 시원치않은데 용서 하고 사랑하라는 것인가? 부모를 공경하란다. 어떻게 나에게 상처만 준 부모를 공경하라는가? 그러나 무리한 요구를 하신 하나님은 항상 전제도 붙여주셨다. 그러한 무리한 요구 가운데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우리가 당면하고있는 그 무리한 숙제 가운데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리한 요구를 하실 때는 인간에게는 간증의 기회가 생기는 때이다. 하나님의 요구가 크면 클수록 우리의 간증의 강도 역시 커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 알찌어다!' 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직접 문제와 맞서기 때문이다. 순종만 하면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하나님의 무리한 요구에 직면해 있는가? 하나님의 무리한 요구에 대한 순종은 믿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종의 자세가 필요하다. 종이 하루 종일 수고하고 애썼다한들 주인은 결코 종의 밥상을 차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의 밥상을 차려야하는 신세가 종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이땅에서는 아버지의 일을 하는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말아야한다. 종은 무조건 순종해야한다. 종에게 의견이 있을 수 없고 종에게 재산이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이 우리의 완벽한 모델이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해 이땅에 종의 모습으로 와서 끝까지 인간을 섬기되 인간의 발을 씻겼고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돌아가셨다. 작은 예수인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 신분이지만 종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요구늘 순종하며 세상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2010-07-06

[사목의 향기] 봉사하며 함께 사는 행복함

신나는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긴 씨름(?)의 시간이요 학생들에게는 힘든 학기를 보내면서 기다리던 달콤한 휴식의 시간이다. 하지만 그런 꿈도 잠시 학생들은 지난 학기에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과외 공부나 썸머 스쿨 프로그램을 신청하여 더운 여름을 학업으로 날리고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나름대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서 알찬 방학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성 골롬반 청소년 선교회(St. Columban Youth Charity Association)의 지도신부를 맡고 있다. SCYC는 9학년부터 12학년까지의 가톨릭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이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비영리 단체이다. 회원들은 매월 무료급식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또 여름/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다른 지역에 봉사활동을 떠난다. 지난 6월20일에 이미 30여명의 학생 회원들이 텍사스의 산 안토니오에 봉사활동을 다녀왔고 8월에는 텍사스의 엘파소와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즈 지역에서 약 40명의 회원들이 봉사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봉사활동을 떠나기 위해서 경비가 많이 들지만 이를 위해서 매년 회원들은 바쁜 학교생활을 소화하면서 부모들과 함께 골프대회와 바자회 땅콩 판매 등 여러 가지 행사를 통해서 기금을 마련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실천하러 여행을 떠난다. 즉 '이웃을 위한 봉사 활동'이다. 이번 경험을 통하여 '사회봉사 활동 점수를 따겠다.' 는 기특한 목적을 둔 청소년 회원들도 있겠지만 누구든지 이번 고생을 통하여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행복함을 느끼는 가치 있고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40) 사실 우리 자녀들은 주위의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웃에게 봉사할 여유가 그렇게 많지 않다. 어쩌면 그런 이웃을 만나볼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맞벌이 부모와 함께 살면서 집 학교 학원을 오가고 컴퓨터와 게임에 하루를 보내며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위하여 희생하시는 부모님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열심히 산다. 그 기대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녀들에게는 피곤하고 부담스러운 기대이다. 왜냐하면 내가 인생에서의 성공은 바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 이라고 말하지만 부모들을 비롯하여 일반적인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란 바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성공이 반드시 행복한 삶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시즌 동안 축구와 관련된 용품이 많이 팔리고 지난 동계 올림픽과 김연아 스텔라 선수 이후에 피겨 스케이트 용품이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또한 지금도 많은 청소년용 골프 용품들이 팔리고 있다. 왜일까? 정말로 우리가 축구를 피겨 스케이트를 골프를 사랑해서일까? 심지어 서점에서는 책 가운데서 '성공'을 주제로 한 책들이 많이 팔려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인지 시집 수필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흔하지 않는 옛말이 되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성공한 삶' 을 살고 싶을 것이다. 나 또한 SCYC 청소년 회원들이 다양한 방면에서 성공하기를 바란다. 친구들과 살벌이 경쟁만 하기보다는 오히려 아픈 다리 서로 기대고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면서 함께 성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공동된 번영을 위해서 성공하라고 말하고 싶다. 태양이 뜨겁다. 여름 방학동안 특별한 계획이 없는 부모들은 시간을 내어서 자녀들과 함께 주위의 가난한 지역과 이웃을 방문하여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라고 제안하고 싶다. 그것이 비싼 비행기 표를 들여서 세상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것보다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훨씬 큰 거름이 될 것이고 훗날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에 사랑과 평화의 도구가 될 것이다.

2010-07-06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잘난 사람 보면 화나고 속상합니다

Q: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사람이나 자기 것 잘 챙기는 사람을 만나면 화가 나면서도 '나는 저렇게 못한다'하는 무기력한 마음이 많이 듭니다. 또 남편이 바깥생활 충실히 잘하고 사진이나 골프 같은 취미생활도 열심히 하며 바쁜 것을 보면 제가 피해를 입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이 자꾸 생깁니다. 제가 여섯 살 때 새 어머니가 들어오셨는데 새 어머니는 저에게 잘해주셨지만 저는 남동생과 자꾸 비교하면서 피해본다는 생각이나 원망하는 마음이 많이 쌓였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 좋겠습니다." A: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기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러하고 남편뿐 아니라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라는 것 속에도 이기심이 작용합니다. 그것이 중생입니다. 이러한 실상을 알아버리면 다환 사람이 이기적인 것에 대해서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 또한 이기적인 존재임이 사실인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 무지 때문에 자꾸 다른 사람만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간 내어 골프 치고 사진 찍으러 다니는 것은 남편의 취미생활입니다. 직장 생활하느라 힘든 남편의 입장에서는 일주일에 하루 이틀쯤 집에서 푹 쉬고 취미생활도 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며 아내 입장에서는 아이들 키우느라 외출 한 번 못하고 집안에만 묶여 있었으니 주말에 남편이 아이도 좀 봐주고 바깥 구경도 시켜주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각자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면 부부 사이에는 갈등이 증폭됩니다. 그러니 남편이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그냥 놓아두세요. 아이 돌보느라 힘들고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한다고 불평할 것 없습니다. 남편은 아이를 보지 않는 대신 5일 동안 직장에 다니지 않습니까. 남편은 직장 다니느라 낮에 와서 법문 들을 수 없지만 주부들은 이렇게 법문도 들으러 다니고 아이들 학교에 간 후에는 자기 나름대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으니 다 각자가 놓인 처지에서 장단점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건전한 생활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본적으로는 마음속의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을 치유해야 하는데 그것은 수행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질문자는 지금까지 피해의식을 안고 살아왔다고 했는데 실제로 자신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 어머니 밑에서 자란 것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것이 있습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누군가는 아이를 돌봐야 했고 새 어머니는 시집와 그것을 도와준 것밖에 무슨 피해를 주었나요? 새 어머니 입장에서는 아이 있는 집에 시집와서 고생만 실컷 한 셈입니다. 또 아버지 입장에서는 아직 젊은 나이였으니 부인이 필요하고 자식을 키워야 하니 아이 엄마가 필요해서 재혼한 것뿐입니다. 그 과정에 누구도 피해를 끼치려고 의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 나름의 필요에 따라 제각기 살아온 것입니다. '저 사람은 새 어머니다 친어머니가 있었다면 이렇게 하지 않을 텐데 다른 애들은 엄마가 훨씬 잘 해주더라'하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욕심일 뿐이고 그렇게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불만이 생기게 되지만 그런 경우에도 남과 나를 비교함으로써 내 스스로 피해를 만든 것이지 실제로 누군가 나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니지요. 이렇듯 피해를 준 사람이 없는데도 피해의식은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피해의식은 가상의 것이며 환상에 속합니다. 열등의식이든 우월의식이든 비굴이든 교만이든 피해의식이든 아니든 이런 것들은 다 환영에 속하는 것이며 모두 내 마음이 지은 바입니다. 우리는 지금 환영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피해의식이란 다만 내 카르마 내 업식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일 뿐이지 나는 어떤 피해를 입은 바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새 어머니가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가를 생각하고 부모에 대해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010-07-06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축구·음식·명상 '덧셈의 법칙'

# 풍경 1 : 1970년대 영화배우였던 문숙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요가와 명상 건강식을 하는 수행자가 돼 있더군요. 인터뷰도중 그가 말했습니다. "음식을 먹는 건 결국 다른 생명체의 기운을 먹는 거다." 그래서 슬펐다고 합니다. 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육식이 아니라 채식을 하더라도 마찬가지죠. 풀도 생명이고 나무도 생명입니다. 풀도 얼굴이 있고 나무도 숨결이 있죠. 결국 살기 위해서 잡아먹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절망스러웠다고 합니다. 나의 생각과 상관없이 세상은 이미 약육강식의 생존논리로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명상을 하면서 보는 눈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누가 누구를 먹는 게 아니더군요. 누가 누구에게 먹히는 게 아니었어요. 세상은 먹고 먹히는 과정을 통해 하나가 될 뿐이었죠. 나와 상대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공존하는 것이더군요. 그걸 통해 내가 그가 되고 그가 내가 될 뿐이죠." 그 말끝에 문숙 씨는 티베트의 '조장'(鳥葬.사람이 죽으면 새의 먹이로 주는 장례법) 풍습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곳 사람은 죽고 나서 몸을 독수리의 먹이로 줍니다. 자신과 독수리가 하나가 되는 거죠. 그렇게 자연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건 참 페어(Fair.공평)한 거예요." # 풍경 2 :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한창입니다. 최강의 팀들이 일찌감치 좌초하기도 하고 약체로 알려졌던 팀들이 선전하기도 하죠. 사람들은 그걸 두고 '이변'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변이 없습니다. '이치'만 있을 뿐이죠. '현문우답'은 그들의 좌초 그들의 승리 그 밑바탕에 깔린 이치를 훑어봅니다. 축구는 11명이 뛰죠. 그러나 슛을 날릴 때는 딱 한 명이 쏩니다. 그런데 그 슛을 유심히 들여다보세요. 슛마다 무게가 다릅니다. 어떤 슛의 무게는 1인분 어떤 슛은 2.3인분 또 어떤 슛의 무게는 11인분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어떤 선수는 혼자서 뛰고 어떤 선수는 열이 하나처럼 뛰기 때문입니다. '현문우답'은 그걸 두고 '불이(不二)의 조직력'이라고 불러봅니다. 결국 에너지의 덧셈입니다. 에너지가 더해진 슛의 위력은 파괴적이죠. 반면 덧셈이 빠진 슛은 힘이 없죠. 프랑스팀을 보세요. 선수들 각자의 개인기는 뛰어났지만 팀 내 불화로 인해 에너지의 덧셈을 이뤄내진 못했죠. 당연한 얘기라고요? 맞습니다. 그러나 지지고 볶는 우리의 일상을 얘기할 때는 다릅니다. 누구도 그걸 "당연한 얘기"라고 말하지 않죠. 왜냐고요?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우리는 '덧셈의 공식'을 망각하기 때문이죠. 나의 에너지와 상대의 에너지 그 사이에 '+'가 끼어들 수 있음을 까맣게 잊어 먹고 말죠. 그래서 단독 드리블을 고집합니다. 이쪽 골문에서 하프 라인을 지나 저쪽 골문까지 혼자서 허덕대며 공을 몰죠. 그리고 투덜거리죠. 힘들다고 외롭다고 두렵다고 말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거(居)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사람들은 겁을 먹죠. 상대가 내 안에 거할 때 나의 에너지가 줄어들까 내가 상대 안에 거할 때 나의 에너지가 훼손될까 두려움에 떨죠. 그러나 '거함의 순간'은 나를 허물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티베트의 조장(鳥葬)도 마찬가지죠. 나를 허물 때 그게 비로소 '자연을 향한 거함의 순간'이 되는 겁니다. 축구도 음식도 명상도 마찬가지죠. 나의 집착을 허물면 허물수록 에너지가 불어납니다. 한 방의 슛에 11명의 에너지가 담기는 거죠. 그걸 누가 막겠어요?

201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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