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터 장] 비행사들의 꿈 '라이트 형제 마스터 파일럿' 영예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7화>
(16·끝) 에필로그- 끝이 아닌 시작
'한국예술 전파' 민간 외교관 체스터 장 박사
당당한 미술품 기증위해
옥스퍼드대에 진품 의뢰
여든 넘어 수십 년째 만남
경기 동문 우정 잊지 못해
2015년 초 신장암 수술을 받고 6개월간 병원 신세를 지고 있을 때였다. 입원해 있던 병실에 연방항공청(FAA) 지역 사무소 대표가 찾아왔다. 그들은 내게 나무 액자에 담긴 상장을 전달했다. 비행사라면 누구나 꿈을 꾸는 ‘라이트 형제 마스터 파일럿 상(Wright Brother Master Pilot Award)’. 뿐만 아니라 그들은 내게 ‘라이트 형제 마스터 파일럿 명예의 전당’ 항공 안전부문에 헌액됐다는 소식도 전하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 상을 받으려면 미국 시민권자로 항공분야에서 50년 이상 근무해야 하고 평생 사고나 어떤 위반사항이 없어야 한다. 국가에 크게 기여한 사람을 선정해 주는 상인 만큼 추천 절차부터 심사까지 까다롭다. 이 상을 받은 사람들은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 세계 최초로 수평 비행으로 음속을 넘은 조종사 척 예거(비행 부문), 미 공군의 영웅으로 알려진 조종사 밥 후버(항공영웅 부문) 등 전설적인 비행사들뿐이다. 그 속에 내 이름이 포함된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무엇보다 아시안으로는 최초로 FAA 소속 항공 조사관으로 근무를 시작한 후 총 46년간 전세계를 다니며 FAA의 주요 항공 업무를 지휘했던 나의 노력을 국가가 인정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국방부로 발령받아 한국에 주둔하는 미 8군에 배치돼 항공자문관으로 근무한 시간, 마이크 맨스필드 주일 대사 시절 일본에서 동북아와 동남아 전역을 커버하는 항공자문관으로 일한 시간,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FAA 총괄 책임자로 일한 시간이 스치듯 지나갔다. 1992년 걸프 전쟁이 발발했을 때 데저트 스톰(Desert Storm) 작전에 파견된 항공모함 SS 케네디호 항공전투 자문관으로 현장을 누빈 기억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라이트 형제 마스터 파일럿 상’을 받은 지 7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 내 경력을 깬 한인이 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지금도 아쉬운 현실이다. 언젠가 한인 파일럿 수상자들의 이름 속에 내 이름을 찾게 되는 시대가 오길 바랄 뿐이다.
수술에서 회복한 후 다시 동북아와 동남아시아 전역을 커버하는 FAA 남서태평양 항공자문관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체력이 달라졌음을 확 느꼈다. 아쉽지만 은퇴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은퇴 후에는 본격적으로 소장품 정리를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틈틈이 소장품의 가치와 진품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특히 도자기의 경우 제작 시대를 확인할 수 있는 과학실험을 꾸준히 의뢰해왔다. 그 이유는 동남아시아 예술품들의 위조기술이 무척 정교해졌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국제 미술품 시장에 나와 있는 중국 작품들의 20%가량을 가짜로 추정할 정도였다. 또 다른 이유는 당당한 기증을 위해서였다.
내가 택한 검증 방법은 소위 ‘열 루미네이슨(thermoluminescence)’ 연대 측정법이다. 특정 도자기가 처음 만들어지거나 구워진 이후 노출된 방사능의 양을 측정하는 이 방식은 도자기에서 지름 3mm, 길이 4mm의 알갱이를 유약이 칠해지지 않은 바닥 2곳에서 채취해 열을 가한다. 채취 과정에서 도자기에 흠집이 날 경우 예술품의 가치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만 나는 거액을 들여 추진했다.
검증은 영국 옥스퍼드대학 부설 옥스퍼드 진품감정소에 맡겼다. 연구소 앞에는 진품 의뢰를 위해 소장품을 갖고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사람이 꽤 있다. 가짜라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모른 채 사는 게 편할 것이다. 알맹이들은 고온 처리되면서 옅은 파란색 빛을 발산한다. 방사능에 오래 노출된 도자기일수록 그 빛이 강하다. 연구소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쳐다볼 때마다 나는 내 결정이 옳다고 되뇌었다.
수십 년 우정 친구들 “고마워”
은퇴 후 매주 화요일은 특별한 일정으로 지내고 있다. 경기 54회 동문과 LA 한인타운에 있는 용수산 레스토랑에 모여 함께 점심을 먹는다. 지난 주에도 오전부터 아내(완다)의 지시에 따라 옷을 차려입고 외출했다. 화요점심의 역사는 40년이 넘는다. 내가 199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파견 근무를 마치고 LA로 돌아올 때 친구들은 이미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모임을 시작한 건 양억석이라는 친구다. 억석이는 김교영, 지금 회장으로 모임을 이끄는 박찬호와 셋이서 당시 LA에 막 개업한 용수산 레스토랑에 모여서 출발을 알렸다. 마침 이곳의 대표(케네스 김)도 경기고 출신이라 이래저래 이곳을 장소로 정하게 됐는데 수십 년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제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곳이 됐다. 화요점심 모임은 소문이 나면서 한동안 50명이 넘는 친구들이 매주 모일 만큼 성장했다. 지금은 오렌지카운티 인근에 거주하는 친구들은 팔로스버디스 지역에서 따로 모여 용수산에는 LA에 거주하는 20명 남짓의 친구들만 정기적으로 나온다.
내 삶에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가족, 비행과 예술품 기부 활동, 그리고 이 경기고 친구들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을 몸소 겪으면서 공부한 세대다. 피난을 갔다가 복학했거나 군대에 갔다 와서 입학이나 졸업이 늦은 친구들도 꽤 된다. 그러다 보니 2~3살 나이 차가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다. 화요일만 되면 우리는 그저 어릴 때 함께 수업을 듣고 다가올 미래를 고민하면서 교실 안 연탄난로 위에 올려놓아 푹 끓어버린 도시락 속의 김치와 멸치볶음 반찬을 나눠 먹던 까까머리 소년들이 된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고 늘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떠나고 있다. 나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나는 다음 주 화요일에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용수산에서 친구들과 점심을 먹을 것이다.
끝이 아닌 시작
LA카운티미술관(LACMA)의 스티브 리틀 박사는 10월부터 한국문화 전시위원회를 결성한다고 넌지시 알려줬다. 5년, 10년 안에 진행할 전시 내용과 스케줄을 짜고 홍보하는 업무를 논의하는 모임이 될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 전시회를 모두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만족한다. 내가 이곳에 남긴 나의 이야기와 미 곳곳에 기증한 한국 예술 작품들의 이야기가 LA중앙일보와 LACMA를 통해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장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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