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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장] 더듬대던 영어 한국선 '술술'…경기중 '합격'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7화>
'한국예술 전파' 민간 외교관 체스터 장 박사
(6) 화물선에 실려 한국으로 돌아가다

한국 예술 알리는 '민간 외교관'   

매일 끼니 걱정하며 또다시 생존싸움
미군 통역관 제의 맡고 자존감 회복
 
박상옥 선생님 덕분에 미술 알게돼
이중섭씨 그림 볼 수 있는 기회도 
 
경기중학교 54회 졸업식 사진? 1953년 부산에서 촬영했다. 원 안에 있는 학생이 체스터 장 박사. [체스터 장 박사 제공]

경기중학교 54회 졸업식 사진? 1953년 부산에서 촬영했다. 원 안에 있는 학생이 체스터 장 박사. [체스터 장 박사 제공]

US프레지던트 해운회사의 캘리포니아 베어호 화물선이 시애틀 항구를 출발했다. 배는 칠흑같이 어둡고 깊은 바다로 빠르게 나아갔다. 시애틀 도시의 불빛은 점점 멀어졌다.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가는 이 화물선에 탑승한 유일한 승객이었다. 이민국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우리 가족을 추방했다. 이민국 요원들은 배가 출발할 때까지 우리를 감시했다. 3주간의 항해 기간은 자유 그 자체였다. 미국인 선장과도 친해졌다. 한국에서 근무할 때 선박 업무를 담당했던 아버지는 선장을 따라 엔진룸에 들어가 디젤 엔진에 대해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국인들은 미국에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너희 가족은 왜 한국으로 돌아가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에게 차마 추방됐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부산항은 화물선, 미국 군함, 한국 군함으로 꽉 찼다. 베어호는 부산에 도착해 나흘간 대기한 끝에 항구에 들어올 수 있었다. 부두와 시내 거리는 피난민들로 넘쳤다. 당장 갈 곳이 없던 우리 가족은 피난민 임시수용소에서 지내다 어렵게 연결된 외삼촌 집으로 옮겼다. 우리 가족과 외삼촌 가족까지 15명이 한집에서 살았지만 불평은 사치였다. 당장 오늘 먹을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한국에 맞닥뜨린 생존 문제는 미국에서의 경험과는 달랐다. 미국에서는 비록 농장 수용소에서 일하긴 했지만 내일이 보장돼 있었다. 삼시 세끼를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었고 잠도 편하게 잤다. 반면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는 다음날을 기약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야 했다.
 
“내가 이제 캔자스에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해.” 나는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주인공 도로시가 말하던 대사를 혼잣말하면서 한국에서의 생활을 견뎠다.
 
한국전쟁 당시 강원도 속초 부근의 미군 비행장에 서 있는 P-51 머스탱. 기록에 따르면 F-51 머스탱은 산악지역이 많은 한반도에서 근접전이 벌어질 때 저속으로 비행해 대지 공격을 가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전쟁기념관 홈페이지]

한국전쟁 당시 강원도 속초 부근의 미군 비행장에 서 있는 P-51 머스탱. 기록에 따르면 F-51 머스탱은 산악지역이 많은 한반도에서 근접전이 벌어질 때 저속으로 비행해 대지 공격을 가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전쟁기념관 홈페이지]



잃어버린 삼촌을 찾다
 
부산은 전쟁통에 헤어진 가족들을 찾는 피난민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아버지도 부산에 도착하고 2~3개월을 수소문한 끝에 동생(장성환)이 한국 공군에 입대했고 사천 공군기지에서 전투기를 조종하고 있다는 걸 찾아냈다. 우리 가족은 무작정 사천 공군기지를 찾아갔다. 외삼촌 집에서 고작 3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지만 도로 곳곳이 진흙 구덩이인 데다가 버스도 고물이라 온종일 걸렸다.
 
초소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니 군복을 입은 성환 삼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동생을 상봉했다는 감격에 한참을 말하지 못하셨다. 삼촌도 다른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격정을 누르고 있었다.
 
삼촌은 우리를 막사로 안내하고 어떻게 공군 조종사가 됐는지 들려줬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취미로 글라이더 제작 일에 관여했던 삼촌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 사령부의 건설 하청업자로 주택과 상가 건물의 보수 및 재건공사를 맡았다고 했다. 그러다 한국전이 일어났고 삼촌은 글라이더 비행 및 제작 경험을 내세워 한국 공군에 자원입대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P-51 머스탱 프로펠러 전투기 10대를 인수해 올 첫 조종사 10명 중 한 명으로 발탁됐다고 했다.  
 
미군의 P-51 머스탱은 2차 세계대전에서 최고 성능을 인정받은 전방위 전투기였다. 당시 에이스 조종사이자 세계 최초로 수평 비행으로 음속을 넘은 위대한 전투기 조종사였던 척 예거도 바로 이 전투기를 조종했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이들은 겨우 4일간 P-51 머스탱 조종훈련을 받고 전투에 투입됐다고 했다. 첫 한 달간 전투에서 4명이나 전사했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경험이 많은 북한군 조종사들이 모는 미그 15기에 격추당한 것이다. 슬프지만 예상했던 사태다. 나는 고작 나흘 동안 배운 P-51 머스탱 조종기술로 북한군과의 공중전을 멋지게 이긴 삼촌이 존경스러웠다.
 
박상옥 선생님을 만나다
 
부산에서도 학업은 계속됐다. 하지만 미국에서 나를 줄곧 괴롭혔던 열등의식에 더는 시달리지 않게 됐다. 오히려 그 반대 상황이 왔다. 약간의 영어 구사 능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당시 사천 공군기지는 한국파병 연합군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통역사들이 절실했다. 통역사들이 귀하다 보니 나보다 엉터리 영어를 구사해도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나도 미군으로부터 통역사 제안을 받았다. 학업 때문에 거절했지만, 왠지 어깨가 으쓱했다.  
 
부산에 도착한 지 두 달 만에 경기중학교에 입학한 것도 영어 덕분이었다. 경기중학교는 피난 온 학생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쳤는데 그때도 입학하기 위해선 영어시험을 치러야 했다. 시험은 너무 쉬웠다. 학교 친구들은 내 영어 실력을 부러워했다.  
 
학교 교실은 20여개의 올리브색 천막이 전부였다. 비가 올 때면 천막 안은 수증기와 그로 인해 생긴 물기로 칠판 글씨를 읽기도 힘들었지만 매일 학교 가는 시간을 기다렸을 만큼 좋아했다. 그건 중학교 2학년 때와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박상옥 미술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저명한 현대 미술가인 박 선생님은 한국에서 소 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씨와 동문이었는데 이중섭 화가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준 지인이기도 하다. 박 선생님 덕분에 나는 이중섭씨의 그림을 일찌감치 대할 수 있었다. 그때도 가난했던 이중섭 화가는 돈이 없어서 물감과 캔버스를 사지 못해서 미군이 사용하던 트럭 엔진오일이나 불에 타 남은 동물 뼈를 물감 삼아 숯 삼아 그림을 그리곤 했다.  
 
박 선생님은 삼촌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아마도 나를 잘 좀 지도해달라고 부탁받았던 것 같다. 박 선생님은 주말마다 나를 불러 함께 다니며 삶에 필요한 걸 많이 가르쳐주셨다. 시골에 가서 멧돼지를 잡아먹기도 했고 부산 자갈치 시장에 함께 가기도 했는데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미국에서 살며 받았던 마음의 상처들은 자연스럽게 아물어갔다.  
 
또 박 선생님은 미술 전시회가 열리면 미술에 관심 있는 반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나도 미술을 좋아했기에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한국의 미술작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듣고 배웠다. 그 시간은 내가 성인이 된 후 꾸준히 한국 예술품에 관해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됐다.  
 
내 생애에서 ‘생존’이라는 것을 빼고 다른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또 그때부터 진지하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앞으로 지향하는 길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이분의 영향력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도 가끔 경기 중고 친구들과 만나면 박 선생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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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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