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터 장] 미술 컬렉터 보다는 '비행기 덕후' 더 어울려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7화>
‘한국예술 전파’ 민간 외교관 체스터 장 박사
(2)하늘을 나는 조종사의 꿈을 꾸다
여의도 출발 앵커리지 등 경유
30여 시간 비행해 LA에 도착
처음 탄 항공회사 15년 후 취업
어릴 때 탔던 비행기에 빠져 비행기 조종법을 배웠다가 항공사에 취직하게 됐다. 비행기 조종사로 살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계속 공부해 조종사 검사관과 훈련관 자격증을 비롯해 비행 엔지니어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단발 및 복수 엔진 항공기 자격증뿐만 아니라 헬리콥터, 글라이더, 기구 조종 자격증도 땄다. 이런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인정받아 한국에서 처음으로 대한항공이 북미노선을 취항할 때 미국 노선을 배치하고 조종사를 훈련하는 일을 맡게 됐다. 또 연방항공청(FAA)에서 서부 태평양지역을 관리하는 총국장에 임명돼 미국 정부를 위해 전 세계를 다니며 일할 기회도 갖게 됐다. 한 해의 절반 이상을 호텔에서 생활해야 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건 하늘과 비행기가 내 곁에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30시간여 만에 LA에 도착
비행기를 처음 탄 건 8살 때였다. 1948년 12월 하순 아버지(장지환)는 외교관으로 임명돼 어머니와 나, 두 동생을 데리고 부임지인 LA로 출발했다. 그때는 여의도에 비행장이 있던 시절이었다. 허허벌판에 세워진 노스웨스트 항공기가 어마어마한 크기로 나를 압도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트랩을 올라간 설렘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당시 한국에서 미국행 항공편은 노스웨스트가 유일했다. 지금은 한국에서 LA에 오려면 11시간 정도가 걸리지만, 그땐 여의도 비행장에서 출발하면 도쿄를 거쳐 알래스카 앵커리지에 도착해 하루를 머물렀다. 중간 급유 때문이었다. 앵커리지에서 출발해 시애틀에 도착하면 비행기를 갈아타고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 LA로 왔다. 비행시간만 꼬박 30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이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도쿄까지는 잘 도착했지만 두 번째 도착지인 앵커리지는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었다. 기장은 앵커리지에서 120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셰미아 섬(Shemya Island)에 착륙했다. 이곳에는 미 공군기지가 있다. 미 공군은 1943년부터 이 섬에 레이더, 기상 관측소, 항공기 연료 보급소를 만들어 공군 기지로 사용했는데 지금도 고성능 레이더 시설이 운용 중이다. 노스웨스트 항공은 1956년 미국 정부로부터 이 섬을 임대해 북태평양 노선의 주유소로 썼다. 자체 공항을 운영하는 최초의 항공사가 된 것이다.
처음 탄 노스웨스트 항공사 취직
가족들은 긴 비행시간을 굉장히 힘들어했다. 비행기 소음과 멀미 등으로 고생한 동생들은 어머니 옆에서 주로 잠을 잤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비행시간을 조종실에 앉아서 조종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조종실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가도 제지당하거나 비행기 안에 탑승하고 있는 보안요원에 체포될 수 있지만, 그때는 조종실 문을 열어놓고 다녔다. 비행기에 탑승한 유일한 어린아이들이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스튜어디스들은 나와 동생들을 굉장히 귀여워했다. 특히 내가 조종실에 관심을 갖고 계속 쳐다보자 나를 데리고 조종실로 데려갔다. 백인 기장들은 영어도 못 알아듣는 나를 옆자리에 앉게 하더니 이것저것 보여주고 설명했다. 조종석에 앉은 내 눈앞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펼쳐졌다. 새로운 세계였다. 비행기 조종사에 대한 꿈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새 집 이웃은 다이빙 선수 새미 리
셰미아 섬에서 우리가 하룻밤을 보내는 사이 노스웨스트는 공군기지에 부탁해 연료를 주유했다.
비행기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해 다시 앵커리지로 돌아갔다. 앵커리지의 날씨는 너무 추웠다. 우리 가족은 ‘캡틴 쿡크’라는 호텔에서 하루를 머물렀는데 아버지는 장거리 여행으로 지친 가족들을 데리고 나가 햄버거를 사줬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나중에 알래스카에서 3년 동안 근무했을 때 아버지가 사준 그 햄버거집을 찾아봤지만 없어졌는지 찾지 못했다.
LA공항 주변은 황량했다. 활주로에서 트랩을 타고 내려오자 아버지를 마중 나온 한인들이 서 있었다. 차를 타고 가는데 거리에 길게 자란 팜트리가 빼곡했다. 우리는 임시로 모텔에서 1주일 정도 지내다가 USC 인근 맥클린턴 애비뉴에 있는 주택으로 들어갔다. 우리 이웃은 올림픽 영웅으로 불리는 새미 리 가족이 사는 집이었다. 부모님이 일정으로 늦게 귀가하실 때면 나와 형제들은 새미 집에서 놀았다. 새미는 주말에는 USC 인근 제퍼슨과 버몬트에 있는 YMCA 수영장에 가서 연습하곤 했다. 새미 누나 메리는 우리가 오면 땅콩이 들어간 쿠키를 구워서 주곤 했는데 그 고소한 쿠키냄새가 지금도 나는 것 같다.
조종석을 탄 기회는 또 있었다. 한국을 두 번째로 떠날 때였다. 아버지는 외교관 임기가 끝나자 가족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내내 미국에서의 삶을 그리워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나는 다시 미국 행을 택했다. 그때도 나는 항공기 조종실에 탈 수 있었는데 어릴 때와 달리 이때는 기장들로부터 비행기 조종법을 제대로 배웠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기회를 갖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15년 뒤 나는 노스웨스트 항공사에 채용됐다. 생애 처음 탄 비행기 회사에, 그것도 어릴 때 동경했던 조종사들의 업무를 조사하는 인스펙터가 된 것이다. 나보다 나이나 경력이 많은 이들의 업무를 조사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 그들은 나를 존중하고 지시를 잘 따랐다.
장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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